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순례하면서 한 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03 조회수1,563 추천수0 반대(0) 신고

 

 

어제 수요일 낮 미사를 봉헌하고 도보성지순례를 했습니다. 전날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묘소가 있는 사봉공소까지 도보성지순례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간단하게 배낭을 꾸렸습니다.

 

본당에서 네비로는 약 35킬로미터나 되었지만 중간에 코스가 위험한 부분이 있어서 우회를 해 걸어서 실제는 약 40킬로를 걸었습니다. 10시 반에 출발해서 저녁 7시 반에 도착을 했습니다. 9시간 소요됐습니다. 중간에 김밥 먹는 시간과 잠시 휴식을 하는 시간까지 합해서 거의 40분을 제외하고는 8시간 20분을 논스톱으로 걸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지 않고 좀 더 일찍 출발했더라면 약간 여유를 가지고 걸었을 텐데 원래 네비에 나타난 거리를 가지고 계산했을 때 저녁 7시 아니면 늦어도 8시에 도착을 목표로 했습니다. 전날 마산에 있는 무학산 산행을 약 20킬로미터 정도 했습니다. 오늘은 어제 성지까지 걸으면서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점심을 먹기 전에는 묵주기도만 했습니다. 점심 먹고는 묵상 주제를 정하고 앞으로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시간 동안 어떤 삶을 살다가 하느님 품으로 가야 할지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병원에 2년 동안 투병하실 때 나름 생각을 한 게 있습니다. 병원에 있는 많은 분들을 보면서 느낀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도원에서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영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처음에 보니 하나님이라고 나와서 신부님께 이거 개신교 영상물이 아닙니까?” 여쭤보니 개신교에서 제작했지만 의미가 있어서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때문에 수도원과 부산 병원을 왔다갔다 하면서 기도를 하며 하느님께 매달리는 시기였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날 그 영상을 보고 난 후에 나름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조금 더 세상에서 살고 조금 덜 살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많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묵상을 많이 하며 정립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내년이면 세상 나이로 쉰, 흔히들 지천명이라는 나이입니다. 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라고는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생사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될 수가 없지만 저는 원하는 수명이 있습니다. 나름 건강하게 80까지만 살다가 하느님 품에 가고 싶습니다. 아무리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해도 또한 의학이 발달해서 조금 건강하게 산다고 해도 실제 건강 수명은 인체 나이 80을 넘어가면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이게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저에게 남은 시간은 30년의 시간이 남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살면서도 가장 중요한 철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이 기간 내에 세상을 살면서 보속을 다 하고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 세상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을 겁니다.

 

이런 주제로 묵상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본당에 계셨던 보좌신부님이 저녁미사 때 시간에 대한 개념을 한번 강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은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 개념입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라는 시간은 연대기적인 시간입니다. 그냥 시간 축을 따라 흘러가는 우리가 아는 그런 시간입니다.

 

근데 카이로스 시간은 시간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좀 더 다르게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뜻과 같은 의미가 주어졌을 때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 시간은 정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카이로스 시간은 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의미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100년의 시간을 산다고 해도 100년의 시간은 크로노스 시간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동일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루가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 개념으로 본다면 이 100년의 시간은 영원의 시간에서 볼 때는 찰나의 시간도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살이의 삶을 보는 것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년 수는 다 다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영혼이 살게 되는 영혼의 세계에서 영혼의 삶을 좌우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10년이 되었든, 20년이 되었든 20년이 되었다고 해서 10년이 지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흘러간 시간은 10년이나 20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참 이상합니다. 이런 개념으로 따진다면 앞으로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남은 시간을 따진다면 아주 짧은 시간만 남아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근데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는 흘러간 시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의 개념을 잘 알고 있고 또 이런 개념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영혼의 세계를 잘 준비할 수가 있을 겁니다. 이 짧은 찰나 같은 시간을 잘 보내어 영원무궁한 영원의 세계를 잘 준비하는 사람이 아주 현명한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 우리를 향해 점점 달려오고 있고 우리는 그 시간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또 성경의 가르침을 믿게 된다면 실제로 이 세상을 살면서 하루하루 허투루 살 수가 없을 겁니다. 하루의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에 저희에게 카이로스의 시간을 어떻게 이 세상을 살면서 잘 선용했는지물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 어쩌면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각자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시간이라는 달란트를 주신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이익이 생기는 의미는 세상에서 살 때 카이로스 시간을 잘 선용한 사람과도 흡사 같다고 보여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은 충직한 종이라고 하느님의 칭찬을 받게 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럼 어떤 삶을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일까를 묵상했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을 겁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비록 몸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영혼은 하늘을 사모하고 눈은 하늘을 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거의 50년이라는 세월을 세상에 살면서 수도자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속에 살면서 찌든 죄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름 종교를 떠나서도 최대한 양심껏 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방식과 습관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제 다시 새로 설정을 해야 하는 현실이 사실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신앙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인 것에도 발을 담그고 싶고 하늘나라도 담그고 싶으면 가랑이가 찢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포기를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선택을 하든지 세상을 선택을 하든지 입니다.

 

세상을 선택한다고 해서 하늘나라를 보장받는 데 무리가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역으로 수도자의 삶을 산다고 해서 하늘나라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수도자의 마음으로 산다면 그 사람은 세상 속에서 살아도 수도자처럼 사는 사람이겠지만 몸은 수도원에서 살아도 마음이 세속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겉만 수도자이지 세상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의미를 본다면 합리적인 생각을 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게 현명한 길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래 창조하실 때 육신의 수명이 다 끝나면 육은 원래대로 흙으로 돌아가지만 이 육신은 우리의 영혼을 감싸고 있는 옷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육신의 옷을 벗는 날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벌거벗은 영혼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땐 우리의 영혼의 민낯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의 달란트를 셈하실 것입니다.

 

원래 개인 각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 주셨을 때 저희가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랑을 실천했는지도 응분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보내주셨을 때의 가치 이상으로 발휘하지 못하면 가진 것마저도 앗아가신다는 말씀처럼 그와 같은 현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으려면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하느님 마음에 흡족하실 시간을 보내는 게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다가 가는 것이며 그게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길이라는 것을 묵상해봤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어제 묵상한 게 더 있습니다. 중간에 성지에서 약 2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터미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순간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 왔으면 만족하고 그냥 터미널에서 마산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면서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면서 왔기 때문에 이 정도 하고 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생각을 잠시 했지만 생각을 달리 했습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더 가서 원래 마음먹고 왔던 계획을 완수하는 게 의미가 있을 거다. 물론 상황에 따라 완주를 할 수가 없는 상황도 일어날 수가 있지만 거의 다 와서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그런 모양도 좋지 않고 또한 이런 것을 통해서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완수하는 태도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성지까지 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지에 도착한 후에 다시 되돌아오면서 중간에 되돌아가지 않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되돌아갔다면 아쉬움이 많이 남았을 겁니다. 터미널에서 막차 버스를 타고 마산에 오면서 제가 낮에 지나온 길을 봤습니다. 제가 걸어온 그 길 위에서의 모습이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신앙의 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버스 위에서 역방향으로 가면서 보는 게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신앙여정을 나중에 면밀히 이런 식으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다 보시게 될 거라는 묵상을 했습니다. 이런 묵상을 하니 살아 있는 동안 비록 나약한 인간인지라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다가 하느님 품에 가야 나중에 세상에서 살면서 얼마나 수고 많았느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지 않을까 묵상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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