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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묵시22:6-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05 조회수1,918 추천수0 반대(1) 신고

 

(공동번역성서)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묵시22:6-21)

6 그 천사가 또 나에게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다' 하고 말했습니다. 7 그러자 주님께서 ', 내가 곧 가겠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8 이 모든 것을 듣고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나서 나에게 이것들을 보여 준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습니다. 9 그러자 그는 '이러지 말아라. 나도 너나 네 형제인 예언자들이나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경배는 하느님께 드려라' 하고 말했습니다. 10 그는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가 가까왔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12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14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두루마리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 15 개들과 마술장이들과 음란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일삼는 자들은 다 문 밖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16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모든 교회에 이 모든 것을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그의 자손이며 빛나는 샛별이다.' 17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18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실 것입니다. 20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21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 묵시록의 결론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아멘오소서주 예수여!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의 모든 구절 중에 가장 감격스럽게 읽는 대목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주님, 오늘이라도 주님이 부르신다면 기쁘게 가겠습니다.’라는 말이 되지요.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재림을 말하기 도 하지만 내가 주님께 가는 그 날이 주님이 내게 오시는 날이 되는 것이니까요.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이 고백을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혹시 주님 조금만 더 있다가 와 주실래요?’라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 요한 묵시록의 내용들이 결코 곧 될 일’‘데이 게네스따이 엔 타케이라고 기록이 되 어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도 주님께서 내가 곧 오리니에르고마이 타쿠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들이 이러한 구절들을 들어 성경을 공격하지요. ‘속히 된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이루어지냐?’ ‘너희들이 믿는 예수는 곧 온다면서 왜 지금까지 안 오냐?’ 라고 조롱합니다. 베드로 후서 3:3절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자기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자들이 나타나서 여러분을 조롱하며우리를 조롱할 것이라고 하지요? 성경은 참 무서우리만치 정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묵시록이 기록된 것이 AD95년경이니까 그로부터 1925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을 조롱하며, 하느님께 적의를 품고 있는데 이렇게 건재합니다. 주님은 오실 생각도 안 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기서 결코 곧 될 일’ ‘데이 게네스따이 엔 타케이는 시간적인 의식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적인 의식이라는 것은 역사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요 개념이지 하느님의 의식과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없는 곳을 우리가 묵시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묵시 속에서 이 묵시록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라고 번역이 된 타케이타쿠타퀴스라는 형용사에서 파생 된 단어입니다. 헬라어 타퀴스갑자기’ ‘선뜻’ ‘반드시의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번복되거나 취소됨 없이 반드시 이루어 질 일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다시 한 번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고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주님은 반드시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고야 마시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도 바로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22:10) 그는 이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가 가까왔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


다니엘서 826에서는 하느님께서 다니엘에게 이것은 장차 정해진 날에 틀림없이 이루어지겠지만 오래 있다가 될 일이니 비밀에 붙여 두어라.' 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묵시록에서는 정 반대로 '그 때가 가까왔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다니엘서 와 이 요한 묵시록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약속대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이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 이후의 기간을 우리가 말세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그 마지막은 반드시 올 수밖에 없으며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말세인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매일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온 것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성도’ ‘신자’ ‘믿음을 가진 자라고 표현 을 합니다. 그들이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라고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은주님께서 오늘 오신다 해도 저는 기쁘게 주님을 맞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들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오늘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 주님께서 약속하신 일은 결코, 반드시, 속히, 홀연히, 갑자기이루어 질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을 준비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이 이렇게 기록을 하 는 것입니다.

(묵시22:7) ', 내가 곧 가겠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도들은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는 말씀이 아니라 복을 받은 자들,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며 살더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9 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묵시22:9) 그러자 그는 '이러지 말아라. 나도 너나 네 형제인 예언자들이나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경배는 하느님께 드려라' 하고 말했습니다.

천사가 성도를 가리켜서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하지요? 11절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믿음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게 되는지가 나옵니다.

(묵시22: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이 말씀은 하느님께 선택되어 믿음을 소유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은 계속해서 不義하고 더럽게 살게 되지만 하느님께 선택된 자들은 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며 훈련하며 연습하며 성숙한 신자로 지어져 가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일 할 게 없어요. 그래서 본문 12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가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묵시22:12)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이 말씀은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선교 많이 하면 하느님께서 그 분량에 따라 차등 있는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라는 것은 永生’‘救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르면 그 을 위해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 일이 뭘까요?

(요한6:28-29) 28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여러분께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은 하느님의 보내신 이,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의 결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을 향한 분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22:14)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 권세를 얻고 성문으로 그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두루마리를 깨끗이 빠는 사람은 행복하다.


생명의 나무를 차지할(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산다고 나옵니까?

그 두루마기를 빠는 삶을 산다고 하지요?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자신을 깨끗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714절에서 우리 성도는 어린양의 피에 이미 두루마기를 희게 빨아 입은 자들임을 배웠습니다. 성경은 어린양의 피에 두루마기를 빨아 입은 자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빠는 삶, 거룩한 삶을 살게 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또 한 번 못을 박습니다.

(묵시22:15) 개들과 마술장이들과 음란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일삼는 자들은 다 문 밖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힘을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아 이 땅을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믿음을 공고히 하며 두루마기를 빠는 일에 매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선물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알기에 세상을 향해 당신들도 어서 거기서 나와 이리로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사 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7절에 보면 성도들의 삶이 복의 전달자로서의 삶이어야 함이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묵시22:17)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소서!' 하고 외치십시오. 목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마시십시오.

성령과 신부, 즉 교회가 오라하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자들도 오라고 외치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은 이 땅에서 신자다운 삶,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오라고 외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성도는 예수를 믿는 즉시 만사형통, 질병치유, 승승장구하게 된다.’는 내용을 한 구절이라도 보셨습니까? 오히려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고난은 너희를 양육하시고 있는 하느님의 손길이다. 그러니 잘 참아라. 이겨라.’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번영신학이나 성공신학, 기복신앙, 신비주의이런 것들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것들은 여전히 힘을 추구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느님마저도 으로 부리고 싶어 하는 악한 죄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그러한 자들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묵시22:18-19) 18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 둡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실 때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서 주실 것입니다. 19 또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떼어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의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짜들이 나타나서 진리의 복음에다가 불순물을 섞어서 엉터리 복음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이미 우리에게 경고를 하셨습니다.

성경 에 있는 말씀 외에 보태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설교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인간의 살고 죽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설교의 내용에 저의 사견이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이나, 저의 욕심이 첨가되어서 말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될 때가 가끔 있거든요. 다른 것은 몰라도 하느님의 말씀만큼은 불순물이 섞이면 안 되지요. 그런데 정 말 하느님이 보내신 종들은 엉터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께서 전해지는 말씀도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 6절에 보면 하느님을 예언자들의 영의 하느님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묵시22:6) 그 천사가 또 나에게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당신의 천사를 보내셨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과 그들이 전하는 교훈이 하느님의 통제 하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이 보내신 영이 아닌 마귀에게 속한 영도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1요한4:1) 1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많은 거짓 예언자가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귀가 보낸 자들, 거짓 예언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교사로, 사제로, 선교사로, 목사로 이 땅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는 복음에다가 불순물을 집어넣어 세상을 미혹하고 하느님의 자녀들까지 미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에페2:10)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거 보세요.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일이 어떤 일이라고 했습니까? '토브‘’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내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보내신 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 하느님의 일, 믿음은 모두 같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절대 힘을 추구하는 세상의 원리로 살다가 가서는 안 됩니다.


루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심히 많아지자 곡간을 더 크게 만들고 소출을 거기에 쌓아두고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앞프론 타우테라고 부르십니다. ‘앞프론이라는 단어는 어리석다, 자기중심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부자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습니까?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으로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그저 창고에다가 잘 쌓아두고 행복하게 즐기겠다는 데 왜 하느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 자기중심적인 자’‘앞프론 타우테라고 부르실까요? 이 부자의 삶이 우리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 이며 공통적으로 바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의 어리석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소출이 많아졌다고 해서 그 것이 자기에 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것을 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 하느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보면 이런 비유가 나오지요? 어떤 주인이 잔치를 열고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새로 산, 밭에도 가야하고, 새로 산, 소도 시험해 봐야하고, 시집도 가야하고, 장가도 가야합니다그들은 모두 이 땅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들은 잔치를 베푼 주인의 마음이 어떤 것이며 그 잔치가 어떤 잔치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 소유의 밭이나 소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을 시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의 소유나 소출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소산이나 소출과 거리가 먼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너무 바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피해가 오면 그거 팔아 버리십시오. 우리 교우 중에 장사가 제일 잘 되는 주일 날 가게 문을 닫는 사람들이 몇 분계십니다.

주일 날 가게 문을 여니까 성당(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온통 매상 생각밖에 안 나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교회 생활이 소홀해 지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차 없이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따 져 볼 때는 엄청난 손해지요. 그렇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어떤 손해라도 감수하겠다는 그러한 결단이 성도에게는 있어야 하 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이 땅에서 자꾸 죄로 타락한 여러분의 육신을 죽여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15:35-38) 35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6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37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38 몸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어 주시는 것으로 씨앗 하나 하나에 각각 알맞는 몸을 주십니다.

잘 보면 성경이 우리 이 역사 속의 육신을 라고 부릅니다. 가 죽지 않으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의 욕심과 탐욕, 세상을 향한 사랑을 땅에 뿌려서 죽이지 않으면 절대 새로운 몸으로 부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채송화 씨를 땅에 뿌렸을 때 그 씨가 땅에 들어가 죽어야 아름다운 채송화 꽃이 피게 되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 죄 된 육신의 것들을 죽여가고, 포기하고, 놓아 가는 것입니다.

(고전15:42-44)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이 썩을 육신, 욕된 육신을 땅에 심어 죽여 버려야 우리는 새 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옛 백성 60만 명이 다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 땅에서 나의 육신이 죽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순종이라고 부릅니다. 그 순종을 성경은 거룩이 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그 거룩하느님의 영광이라고도 부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성경은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한 문장으로 표현을 하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이게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 은 이빨을 금이빨로 바꿔주는 게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고지론이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청부론이 왜 필요하지요? 여기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그들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왜 못 자국과 창 자국이 남아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 그림은 우리 성도들이 나중에 부활하게 되면 이 땅에서 남은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성도가 반드시 그 십자가의 삶을 통과해야 한다는 상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통 과해야 하는 사람들이지 거들먹거리면서 예수 믿으면 이렇게 만사가 형통 합니다를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주님의 변화산 사건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변화 산으로 제자 셋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변모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12명 모두 안 데려 가시고 세 명만 데려 가셨을까요? 그 것은 변화 산의 주님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변화 산에서 장차 해같이 빛나는 영광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임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 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광은 좋아하면서 십자가는 절대 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변화 산에서 베드로가 변모된 예수님을 보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영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말로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보여 지는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받아 누리려 하던 유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그 엘리야가 벌써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습니다. ‘엘리야 가 왔다니요? 우리가 그토록 선망하던 엘리야가 정말 왔습니까?‘

주님께서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우하였다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세 제자들이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 병거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헤롯에게 붙들려 참수를 당해 죽은 세례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세 제자는 세상적인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영광은 세례요한의 삶, 즉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 산에서 내려왔더니 그 아래에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우리 아이를 좀 고쳐 주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그들이 고치지 못 했습니다하고 고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뭐라고 탄식을 하시는가 하면 ,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십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지요.'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여기서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여러분이 이 내용을 읽으면서 믿음이 적으면 귀신을 쫓아 낼 수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믿음을 키워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 도 발휘하는 참 신자가 되자라고 결심을 했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본 것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변화 산과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느님으로부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내려 온 세 제자는 세례 요한의 삶, 십자가의 삶이 엘리야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능력을 행하고 힘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곡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말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산을 옳길 수 있습니까? 산은 그만두고라도 이 연필이나 한번 옮겨 보실래요? 왜 안 되지요?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들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겨자씨만큼도 안 되는 믿음입니까? 믿음은 구원에 필요한 것이지 산을 옮기는데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성숙해 가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지, 산을 옮기는데 필요한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너희의 힘을 빼고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 분은 산을 옮기실 수도 있고 바다를 말려 버리실 수도 있는 분이니까, 너희는 너희의 힘을 쌓아서 너희를 증명하거나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고 순종해라그게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그 믿음이 있으세요? 그런데 왜 산이 안 옮겨집니까? 우리의 구원에 산이 옮겨지고 바다가 마르는 일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귀신이나 쫓아내고 기적이나 일으키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좇아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마태오복음 17장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소유한 분들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믿음으로 장차 올 하늘나라의 원리로 오늘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는 누차 말씀드린 대로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하느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 다른 말로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분들입니까?

그러한 믿음이 있는 분들이라면 지금 여러분에게 와 계신 주 예수와 함께 미리 그 하늘의 삶을 연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오늘과 너무 차별화 시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여러분 안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여러분이 체감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성경에서 재림은 파루지아인데 그 말의 뜻은 나타나다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셨다가 하셨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재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바로 지금 그 예수가 재림하셨을 때와 똑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라는 고백을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올 한해도 벌써 4분의 3이 다 가고 있네요 코로나19 때문에 많이들 힘드시지요?.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화살처럼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의 인생의 화살이 과녁에 다다르는 날 여러분은 어떤 과녁을 향해 달렸는지가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엉뚱한 과녁을 향해 평생을 달리셨다면 여러분의 그 마지막은 처절한 고통으로 이어지 게 될 것입니다. 과녁을 벗어나다‘’하마르티아입니다. 아무쪼록 남은 기간 올바른 과녁을 확인하고 그 바른 과녁을 향해 올곧게 매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0. 09. 0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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