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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국의 월계관을 향해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06 조회수1,570 추천수2 반대(0) 신고

 

92일 수요일 본당에서 오전 미사 후에 전날 꾸린 배낭을 메고 진주 국도변 가까이 있는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 순교자 묘소가 있는 성지까지 도보순례를 했다. 네비로 보니 본당에서 3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지만 마지막에 도로 사정으로 약간 우회를 해서 걸었기 때문에 약 40킬로미터를 걸었던 같다.

 

중간에 진동 마을에서 간단히 김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출발해서 걸었다. 두 시간 정도는 묵주기도만 하고 걸었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순교에 대해 묵상을 하며 걸었다. 10시 반 쯤에 성당에서 출발해서 저녁 7시 반에 성지에 도착을 했었다.

 

9시간 소요됐다. 김밥 먹는 시간과 잠시 20분 휴식을 취한 걸 제외하곤 순전히 논스톱으로 걷기만 했다. 원래는 50분 걷고 10분 쉬는 방식으로 걸으려고 했지만 계산상 그렇게 걸었다가는 한밤중에 도착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자신의 저질 체력으로 그렇게 걸었다는 것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10킬로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는 다리가 많이 아팠던 건 사실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거의 활동반경이 협소해서 평소 걷지를 않았고 최근에 조금 시간을 내어 걸어서 그런지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걸은 이유는 순교성월이라는 명분은 거창한 거고 솔직히 인내하는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오후에 가면서 순교를 묵상하는데 도움이 된 사례가 있다.

 

얼마 전에 마산에 있는 무학산 산행을 했다. 산행을 하면서 만난 한 어르신과 이야기를 조금 하게 되었다. 그때 그분과의 이야기에서 뭔가 중요한 교훈을 하나 배웠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름 터득한 삶의 지혜이며 교훈이었지만 나로서는 그게 신앙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신앙에 접목하니 중요한 걸 하나 배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지금 나에겐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사실 그분과 이야기를 하게 된 계기는 나는 하산을 하는 중에 그분이 올라오시는 중이였었다. 인사를 하다가 어찌 이야기를 하게 되었었다. 그분의 연세가 일흔 다섯이라고 하셨다. 실제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날 그분과 나눈 이야기 중에 중요한 부분만 이야기를 한다면 그분이 그 연세에 그 정도의 건강을 유지한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 달에는 지리산을 종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때를 위해서 지금 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의 친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동행을 권유를 해도 여건상 또 체력적으로 가능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신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체력과 건강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고 했다.

 

그분이 환갑의 나이였을 때 주변의 사람들을 봤을 때 또는 연로한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한 게 하나 있었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자연히 면역력이 떨어지고 신체에 노화가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데 그 당시 그분 주위분들 중에서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보니 삶의 의욕이 상실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한 인간의 삶에서 생로병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건 두렵지는 않지만 삶의 의욕이 상실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사람이 천수를 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이 떨어진 상태로 목숨만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그때부터 생각한 나름의 철학이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는 데까지 육체의 건강도 건강이지만 정신이 온전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병으로 죽겠지만 그 병고의 고통은 얼마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그 기간은 단축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건강도 그냥 단순히 무턱대고 건강 관리를 한다고 해서 건강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나름 건강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데 오히려 건강 상태가 좋아지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도리어 건강이 안 좋아지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생각한 게 건강도 지키려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여 나름 기본적인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분이 나름 공부를 하면서 그때 깨달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건강도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이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많이 하면 좋은 줄 알고 자주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도리어 건강을 망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등산은 과격한 운동과도 같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 상태에 맞게 적절한 휴식과 잘 조화가 되어야 건강한 몸으로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처음부터 산 정상을 향해 등산을 한 게 아니였고 2년 정도는 3분의 1 정도까지만 꾸준히 산을 올랐다고 하셨다. 이걸 거의 2년 동안 꾸준히 매일 하신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 정도 올라가려면 구태여 등산을 하지 말고 그냥 평지를 걷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그분의 철학은 좀 달랐었다. 그때 그분은 그런 시간을 계획한 것은 나중에 산 정상을 잘 오르기 위해서 철저히 자신의 몸을 단련시킨 기간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한 성취욕 때문에 마음은 뿌듯함을 느꼈을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자세와 방법으로 산을 올랐기 때문에 자신이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 2년 동안 그런 훈련을 하면서 또 신체에 대한 나름 체계적인 공부와 병행을 했고 그 기간 동안에 철저히 몸에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자세로 걸어야 하고 하는 게 두뇌 회로가 기억을 할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등산을 하여도 그냥 몸이 자동으로 그걸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런 훈련을 하는 데에는 상당히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날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에서 훈련이 말씀이 아주 와 닿았었다.

 

달리 표현을 하면 기본기일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예전에 배드민턴 하시는 분이 레슨을 받는데 한번 문의를 했었던 적이 있다. 그냥 공 보고 치면 되지 뭐 특별한 국가대표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레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사실 그분은 나이가 있어서 그렇게 물었었다. 자기도 처음엔 그런 생각이었는데 그냥 동호회 회원들과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생각에 변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자기 눈으로 확인을 했고 경험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자기가 봐도 레슨을 받지 않는 사람은 폼이 개폼이라고 했다. 단순히 폼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또 부상도 상대적으로 많이 입는 걸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산행 중에 만난 어르신과 나눈 대화에서 훈련이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을 신앙에 접목하면서 묵상을 하며 성지까지 걸었었다.

 

지금 나는 성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단순히 걷기만 걷는다면 굳이 성지를 향해 갈 필요가 있겠는가? 성지를 향해 가면서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묵상을 하며 걸어야 내 자신의 신앙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냥 요즘 걷기 열풍이 불어서 단순히 건강상으로 걷는다면 별 유익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을 했다. 나름 묵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전에 신앙의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는 순교를 했었다. 사람에게는 목숨이라는 건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있는 게 아니다. 배교를 하면 얼마든지 살 수가 있는데 그분들은 어찌 해서 담담하게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할 수가 있었을까? 그건 한순간의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마지막에 순교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들이라고 해서 실제로 목숨이 두렵지 않았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건 바로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목숨을 버리는 훈련 즉 순교를 끊임없이 훈련을 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교의 시간에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칠 수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걸 묵상을 했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시대는 피 흘림의 순교를 요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렇다면 피 흘리지 않고 순교하는 신앙을 한번 생각해봤다. 신앙생활은 어쩌면 매일 매일 순교의 생활이 신앙생활인지도 모를 일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게 순교의 길이다고 생각한다. 그저 성당만 다닌다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이고 또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시늉이라도 흉내를 내야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나름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이 세상 모든 성인도 어느 날 갑자기 성인이 된 게 아닐 것이다.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면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고 짓이기는 생활을 수도 없이 넘어지면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달리고 달려서 끝내는 성인이라는 반열에 오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였다. 배신한 제자들도 있었고 위기에 처한 스승을 보면서도 심지어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랬던 그들이 최후에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순교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하며 천국의 월계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라고 해서 그런 길을 가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천국의 월계관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길을 뒤따르면서 일어나는 갖은 수고와 고난을 이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의 보증수표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본들 영원히 빛날 천국의 월계관을 쓰는 영화에 비할 수가 있을까? 설령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한들 그 영화는 다 사라지는 영화일 것이다. 천국의 월계관은 오로지 하늘만을 소망하고 달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일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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