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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율법과 나 (로마서 2:17-2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07 조회수1,793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율법과 나

(로마서 2:17-29)

17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고 18 하느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배워서 사리를 분별할 줄도 알고 19 눈먼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20 그리고 그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21 그런 사람이 남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또 남더러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자신은 도둑질을 합니까? 22 남더러는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간음을 합니까? 또 우상을 미워한다고 하면서 그 신전의 물건은 왜 훔쳐냅니까? 23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왜 율법을 범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서의 말씀대로 '당신들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25 할례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할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할례받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아 주실 것이 아닙니까? 27 실제로 할례를 받지 않고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오히려 할례를 받고 기록된 율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심판할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유다인의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29 오히려 유다인의 속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유다인이 되며 할례도 법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자기발전,과 자기성숙과, 자아실현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자기부인과, 자기삭제라는 다소 불편한 목적지로 우리를 밀고 내려가요. 그게 그리스도교의 정도(正道)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여전히 자기자랑과 자기증명, 교회자랑과 교회증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거죠. 사도 바울로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사도는, 로마서 116절과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라는 로마서의 대주제를 제시한 뒤에, 18절에서부터, 왜 인간은 예수님이 이루신 ()’로만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로마서 118절부터 3장 끝까지에서, 왜 인간은 예수의 의로만 살 수밖에 없는 가를 지적하는 내용이 나오는 거지, 여러분이 이렇게 표피적으로 읽어서, ‘, 그러니까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하라는 거구나이렇게 가면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로마서 3장까지 장황(張皇)하게 이어지는 내용인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 측에서 생산해 내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을 만족하게 해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은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아무리 선해 보이고 근사해 보여도, 다 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들이 내어놓은 행위를 근거로, 남을 외모로 판단하고, 심지어 율법 지킴이나 양심(良心)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자신들의 치부(恥部)를 가리는 데에만 급급하더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얼핏 보면, 유대인들과 그들이 붙들고 있는, 할례(割禮)로 대표되는 율법 지킴에 대한 경고(警告)의 말씀처럼 보이죠? ‘유대인들아, 너희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로만 하지 말고, 잘 지켜라! , 가르치는 놈이, 그 가르치는 내용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뭘 가르치느냐?’ 이런 말씀 같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이 부분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부분이 돼요. 우리는 유대인 아니니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이 역사에 편만하게 흩뿌려진 보편적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모든 내용이, 우리 교회에게 적용이 되어야 돼요.

그런 점에서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올바로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요한묵시록 어느 시점 이후에는, 자기들에게 필요 없는 책이 되거든요. 따라서 모든 내용이, 우리 교회에게 적용이 되어야 돼요. 오늘 본문도 단순히, 민족적 유대인의 행위만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나를 찾아내야 되는 거고, 그 속에 있는 나에게 동의(同意)가 되면, 그 나에게 던져지고 있는 하느님의 교훈(敎訓)을 겸허(謙虛)히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율법은 보편적 아담 무리들의 대표로 택해진, 기능적(민족적) 이스라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그 기능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느님의 리트머스 시험지였고, 양심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리트머스 시험지였어요. 그 둘은 같은 기능을 하는 거라 그랬죠? 그런데 그 율법과 양심이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에덴동산의 선악과처럼, 인간들의 마음에 가서 확 닿자마자, 죄인이라는 색으로 금방 반응을 나타냈다는 말예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망하고, 이방인들은 양심으로 망한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지 않으면, 다 망한다! 인간들은 그 무엇을 가지고도, 전부, 자기 자신의 그 하느님처럼의 위상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더라는 거요. 뭘 가지고도! 율법과 양심까지 사용해서, 하느님처럼 위상을 지키려고 하더라는 거죠.

바울로는 오늘 본문 17절부터, 그러한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율법과 그 율법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할례를 갖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민족적 유대인을 떠올릴 게 아니라, 우리 안의 율법주의! 우리 안의 유대주의! 우리안의 인본주의를 찢어내는 하느님의 메스를 받아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의 유대인은 오늘날의 우리라니까요. ‘!’ 먼저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교훈의 대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17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고

교훈의 대상이 누구? 유대인이라 칭하는 자기, 어느 한 사람이 아녜요. 유대인 전체! 스스로 자랑스럽게 유대인이라 칭하는 자기!’ 바울로는 이스라엘 전체를, ‘자기라는 단어로 축약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그 자기, 우리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 우리 안의 유대주의와, 인본주의인 거요. 어떤 특정한 직분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유대인 전체! 보편적 아담 무리! 모두를 이야기 하는 거요.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는 그 어구가, 요한묵시록에도 등장하는데, 가 볼까요?

(요한묵시록 2:9) 9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 네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유대인이라 자칭하는 자, 자칭 유대인이 나오죠, 똑같은 거예요.

 

(요한묵시록 3:9) 9 사탄의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자칭 유다인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나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으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보다시피, 유대인이라 칭하는 !’ 자칭 유대인은, 사탄의 무리, 사탄의 세력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나는 아니네.’ 아뇨. 내 안에 있는 마귀를 가리키는 거예요. 사탄! 마귀는, 우리 안에 하느님을 대적 하고, 나를 왕 삼아 살려고 하는 그런 모든 욕구들이 총 합해져서, 마귀의 세력이라고 하는 거지,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렇다고 마귀가 실존적으로 없느냐? 있어요. 있는데, 그건 나를 설명하기 위한 하느님의 작품인 것이지, 전부 거기에다가, 책임 전가를 시키려 하면 안 돼요. 일은 저희들이 다 저질러 놓고, 전부 마귀가 했다고. 이게 김기동의 귀신론 아닙니까, 이게?

이렇게 율법과 양심으로,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고 쌓아서, 다른 이들에게 나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인본주의 속의 !’ 이게 바로 자칭 유대인이요, 사탄의 무리란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이런 요한묵시록의 내용들이 다, 교회에게 던지는 메시지란 말예요. 교회야, 너희 안에 있는 바로 그거! 교회가 역사 속에서, 여전히 갖고 있는 그거!’ 왜냐하면 요한묵시록의 일곱 교회는, 이 역사 속의 교회잖아요, ? ‘에스페티사필라(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이아).’ 일곱 교회? 역사 속 교회가, 역사 속에서 여전히 품고 있는 어떤 거. 그 마귀적 성향! 이걸 사탄의 무리라 그래요. 유대인, 자칭 유대인이라 한다 말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안에 여전히 혼재(混在)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評價)하는지 보세요. 유대인의 무리! 자칭 유대인이!

(로마서 2:17-20) 17 자기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율법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고 18 하느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배워서 사리를 분별할 줄도 알고 19 눈먼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20 그리고 그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유대인 전체가 다! 바로 우리!’가요. 이 자칭 유대인들의 특징은, 우선 내가 교회다!’라는 자신감이 있어요. ‘난 구원의 확신(確信)이 있어!’ 요 사람들이 있죠? ‘내가 교회야, 내가 아니면 누가 교회야?’ 요거. 특징이에요. 사탄의 무리의 특징! ‘나야말로 유대인이고, 난 자격이 있는 자야!’ 이게 이스라엘의 선민사상(選民思想)이었잖아요? 성도는, 신앙생활의 연륜(年輪)이 붙을수록, ‘,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란 고백을 할 수 있을지언정, ‘나 정도는 되어야 구원 받을 자격이 있지!’라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거요.

그런데 사탄의 무리는 자신감(自信感)이 넘쳐요. 눈에 보이는 자신의 가시적 행위(行爲)를 갈고 닦아서,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존재로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이게 유대주의였어요, 바리새인들이었잖아요. 구원은, 영생은, 외모를 근거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은혜로만 주어지는 건데, 기특한 자기의 외모에, 자기가 반한 거예요. 그래서 자칭 유대인이에요.

17절을 보면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기까지 해요. 좋은 거예요. 율법을 의지하고 자기 자랑하지 않아요. 하느님도 자랑하고, 하느님의 뜻도 안다고 하고, 율법을 잘 공부했기 때문에,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 잘 분간할 줄 안다고 확신을 해요. 자신의 지식과 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좋은 것 같죠, 요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라 말입니다. 분명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뭔가가 있어요. 이 사람들에게! 그런데 그게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게, 문제예요. 그런 이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의 행사를 지적하고 가르치려는 선생이요, 훈도 역할을 하려 한다는 거예요. 바울로는 그것을 지적하는 거예요. 그게 19절과 20절입니다.

19 눈먼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20 그리고 그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자기는 율법도 알고, 선악분별 능력도 뛰어난, 성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소경의 길잡이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으로 살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자기가 외모로 판단하기에, 아직 어리석어 보이는 이들의 교사가 되려 한다는 거예요. 나에게 이 성숙과 능력이 사유되었다고 믿는 거예요. 요 때부터가 위험한 거예요. 우리가 지난번에 찾아 봤죠? 요렇게 높아진 자들을 하느님은 미워한다.’ 그래요.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사도 바울로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다!’라고 이야기 했는데, 사탄의 무리는, 자기의 됨됨이나 지식 정도를, 자신이 사유해서,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착각하더라는 거요. 그게 선생이지 뭐예요? 사도는 21절부터,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인본주의자들의 실체를 확 까발려버립니다.

21 그런 사람이 남을 가르치면서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또 남더러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자신은 도둑질을 합니까? 22 남더러는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간음을 합니까? 또 우상을 미워한다고 하면서 그 신전의 물건은 왜 훔쳐냅니까? 23 율법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왜 율법을 범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서의 말씀대로 '당신들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자신들의 선함과 잘남과 유식함을 자랑하던, 유대주의를 향해서, ‘, 이 도둑놈들아, 이 음란한 놈들아!’라고 일갈을 하는 거요. 이 대목도, 마치 말만하지 말고 지켜 행하라. 너는 가르치면서 네가 안 지키니?’ 이런 말 같이 보이잖아요? 지금 이 힐난의 대상이 누구였어요? 유대인이라 칭하는 !’ 유대인 전체예요. 그러면 유대인 전체가 도둑놈이란 말예요? 유대인 전체가 간음했단 말예요? 이건 보편적 인간 전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바로 그런 자들이라는 거예요.

사도는 지금, 그러한 죄의 세목들을 지적하는 게 아녜요. 로마서 213절에 율법을 듣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어요? 지금 예수님의 만이 너희들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 사도 바울로가, 또 다시 인간들의 율법 지킴, 행함을 강조할 리는 없잖아요?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가 위해 주어졌다, 그러죠? 사도 바울로가 반복해서! 그럼 율법을 올바로 행하는 게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라고 낮아지는 거, 겸손해 지는 거. 이게 율법을 행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갖고 지켜서, ‘나 잘했죠?’ 하고 올라가니까, 사도가, ‘네가 지금 율법을 지키는 거야?’라고 반어법(反語法)으로 일갈을 한 거란 말이죠? 그럼 여기서도 똑같은 내용이 지금 이어져야 되잖아요? 똑같은 내러티브니까요. 그런 내러티브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내용도, ‘너희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지 말고, 너희가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진짜 선생이다라는 내용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유대인 전체를 선생으로 만들려고 하는 꼴이 되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 전체를 힐난하는 내용이니까. 사도는 지금 겉으로 드러난, 자칭 유대인들의 모습을 죽 나열한 뒤에, 그들의 진짜 속을 극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왜 너희들에게도, 예수의 의()가 필요한지 아니?’를 묻고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목숨 걸어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둑질이나 간음, 심지어 신성모독을 함부로 했겠어요? 이건 유대인 전체에게 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런데 사도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신성모독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근거로 판단이 되는 게 아니라, 자아 숭배라는 죄 속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다 도둑놈이고, 간음한 자며, 신성모독자라는 걸, 지적하는 거예요.

 

성경은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지 않아도, 도둑질했다 그러죠? 남의 것 탐내는 것 도둑질이에요. 훔치지 않았어도 도둑질이라고 그래요, 성경이. 우리 게 아닌데, 이 전체가 하느님 건데, 이걸 내 소유 삼아 사는 모두가, 다 도둑질하는 거예요. 다 하느님 거거든요, 이거! 간음! 하느님만을 사랑해야 하는 신부가, 이 땅에 내려와서, 하느님 말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 간음이죠. 그 전체를 신성모독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너희들의 본질이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서, 너희들이 무슨 선생이요 훈도가 되겠다고 그러냐?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고보도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엄중히 경고를 한 거예요.

(야고보서 3:1) 1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건 선생 된 사람이 말만 번드르르하게 잘하고,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그런 말이 아녜요. 스스로 선생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한 경고(警告)의 말씀인 거예요. 예수님께서도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238절 보세요.

(마태복음 23:8-15) 8 그러나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 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9 또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말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1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 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14(없음) 1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겨우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개종시킨 다음에는 그 사람을 너희보다 갑절이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자칭 유대인! 유대주의! 그 유대주의에 빠져서, ‘난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선생 자격도 있고, 인격이나, 인품도 남들보다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이가, 열심히 전도해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게 되면, 당사자도 지옥가고, 가르침을 입은 사람도 지옥에 간다는 말이에요. 선생이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이, 열심이 없었어요? 아뇨. 여기 그러잖아요? 산과 바다를 두루 다닌다고! 생업, 가족 다 팽개치고, 산과 바다 두루 다녀 전도한다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뭘 전해요? 천국을 전해요. 그런데 그들이 전하는 천국은 닫힌 천국이에요. 못 들어가는 천국! 인간이 노력하여, 인간이 쟁취한, 인간이 주인인 그 천국은,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천국백성이 되기의 근거가 되면, 인간은 반드시 그 천국을, 자기 방식대로 추측을 해내게 되어 있어요. 내가 거기에 뭔가 기여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천국이 와야 돼요. 내가 기여했으니까.

하느님의 ()’에 의해서 전적인 은혜(恩惠)로 구원을 얻은 이들은,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천국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을 수가 있어요. 거기가 자기 마음에 안 들어도 돼요. 지금 여러분, 하느님나라를 살고 있죠? 거룩한 나라라면서요, 마음에 드세요? 그거 연습하는 거예요. 하느님나라는, 여러분이 마음에 안 들어도 감사(感謝)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되는 거요. 그런데 그거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거 배우는 거예요 인간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자기가 자신의 천국 백성 되기에, 조금이라도 기여(寄與)를 했다는 생각이 들면, 꼭 인간의 수준에서의 천국을 그리고, 요구하게 돼요.

 

(창세기 13:9-10) 9 네 앞에 얼마든지 땅이 있으니, 따로 나가서 살림을 차려라.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 10 롯이 멀리 요르단 분지를 다 둘러보니, 소알에 이르기까지 마치 야훼의 동산같이, 에집트의 땅같이 물이 넉넉하였다. 그것은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의 모습이었다.

롯에게요!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면서, 거기를 야훼의 동산이라고 부르고, 애굽이라고 불러요.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이미 애굽을 다녀온 뒤입니다. 그는 그 애굽의 엄청남과 화려함에 놀랬어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를 보니까, 애굽 땅과 같이 멋지고 아름다웠어요. 이 창세기를 모세가 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모세는 애굽을 갔다 온 사람입니다. 거기에 왕자로 40년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를 애굽이라고 하고 있다고요. 지금. 모세가 왕자로 지내면서 바라본 애굽도, 소돔과 고모라 같았어요.

그러나 그 땅은 사람들이 보기에 힘의 땅이요, 물질의 땅이었지만, 세상의 땅이요, 마귀의 땅이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가 멸망당할, 소돔과 고모라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을 역사의 중심으로 놓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러한 인간들 눈높이 수준의 땅을, 야훼의 땅, 천국으로 기대하더라는 거요. 그러나 그들이 붙드는 천국은, 그 소돔과 고모라가 탈 때 같이 타게 돼 있어요. 그들도 같이 타요. 그걸 지옥이라 그래요. 그들이 선생이 되고 싶어 하는, 유대주의자들이라는 거예요. ? 나는 지금 뭘 하고 있거든요. 사도는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선생의 자격을 부여하고 싶어 하는, 자칭 유대인들을, 전부 율법을 범한 자로 낙인을 찍어버려요.

25 할례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할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기노마의 완료형이에요. 이거! 너는 무할례자다!’란 뜻이에요. 어떻게 사도가 모든 유대인들을 다 이렇게, 율법을 범한 자로 매도해 버릴 수가 있는 거죠? 그게 이 역사를 통과해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실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속에는 여러분과 저도 들어 있어요. 도둑놈! 간음한 자! 신성 모독자! 이게 우리란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했고, 지금도 범하고 있고, 앞으로도 범할 수밖에 없음에도, 하느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에 의해 구원을 받은 거예요. 사도는 지금 그러한 구원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에 기특해 보이는 열심들을, 전부 낱낱이 까발려 보이는 거예요. 실체가 뭔지를.

사도는 하느님의 ()’에 의한 구원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의 열심은, 오히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다라고까지 이야기를 하죠. 이들의 율법지킴과 양심을 따라 사는 그 삶이, 하느님을 오히려 모독하는 거래요. ? 그걸로 자기의 가치와 영광을 챙겨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는 할례를 예로 들어서, 진짜 율법의 의미를 설명해주죠? 본문 28, 29절을 보세요.

28 그러므로 유다인의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29 오히려 유다인의 속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유다인이 되며 할례도 법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칭찬을 받습니다.

사람에게서 칭찬 받는 건 뭔가 잘못된 거란 말예요. 여기에서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말은, 자칭 유대인! 그리니까 율법이나 제사나 선행 등의 행위로, 자신들을 치장(治粧)해서, 외모 상으로는,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인본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표면적 유대인은 진짜 유대인, 다른 말로, 하느님의 진짜 백성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이 표면적으로 지켜낸 율법은, 진짜 율법의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하느님이 원하셨던 진짜 율법의 행위는, ‘주님, 저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제게 주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이었잖아요?

그러한 자기부인에서 나오는 그 사랑의 방향 바꾸기!, 나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랑의 방향 바꾸기! 이게 진정으로 원하셨던 율법의 행위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게 아닙니까? 사도는 그걸 28절 말미에서, 표면적 육신의 할례! 표면적 율법 지킴은 할례가 아니다. 율법 지킨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왜 율법의 상징으로, 그 율법의 표상(表象)으로, 할례를 들고 있느냐 하면, 율법이라는 건, 할례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졌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할례라는 의식 속에, 진짜 율법 지킴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갈라디아서 5:3-4) 3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다시 강조합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4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은총에서 벗어났습니다.

여기서 끊어지고잘라내다라는 거거든요. 할례로 고추 끝을 잘라내고, ‘이게 진짜 선민(選民)이다!’라고 하는 놈은, 예수에게서 잘라진다는 뜻이에요. 할례(割禮)는 율법이고, 율법이 할례예요. 그런데 바울로가 율법! 즉 할례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이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로가 율법을 대표하는 할례를 예로 들어서, 율법 지킴으로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려 하는 유대인들, 아니 우리 안에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를 폭격(爆擊)해 버리는 거요.

 

이스라엘은 난지 8일 만에 남자 아기의 고추 끝을 자르는 할례 의식이, 자기들의 선민 됨을, 확고히, 확실히 해주는 것으로 여겼어요. 그래서 유대인 이외의 다른 타민족들을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그러죠? 그러나 할례는, 하느님의 창세전 언약(言約)의 성취(成就)에 관한 모형(模型)이었던 거지, 하나의 설명용 그림! 그 자체가 무슨 효력(效力)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란 말예요. 그리고 실제로,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도 아녜요. 당시 고대 근동의 모든 민족이, 다 할례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 보편적 할례라는 의식을 갖고, 하느님이 기능적 이스라엘에게 뭔가 설명해 주시는 거지, 이스라엘은 그걸 착각(錯覺)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느님이 우리에게만 주신 거라고! 그 할례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이 어디죠? 창세기 17장입니다.

(창세기 17:10-13) 10 너희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라. 이것이 너와 네 후손과 나 사이에 세운 내 계약으로서 너희가 지켜야 할 일이다. 11 너희는 포경을 베어(쪼개다)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다. 12 대대로 너희 모든 남자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네 후손이 아닌, 네 집에서 난 씨종이나 외국인에게서 돈 주고 산 종이라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13 네 집에서 난 씨종이나 돈 주고 산 종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내 계약이 영원한 계약으로서 너희 몸에 새겨질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죠? 창세기 15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어요? 쪼갠 고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다른 말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이런 뜻이에요, 그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생육과 번성은,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는 것을 이미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언약의 주체로서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죠? 그 그림을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그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하느님의 의지(意志)의 그림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16! 바로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아버려요. 하느님은요, 그 엘리에셀, 아브라함의 종도 아니라고 하시면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거고, 네 후사로 말미암아,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그 언약서에 인주가 마르기도 전에, 금방 또 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낳아버린 거예요. 어쨌든 하느님의 언약이, 인간의 실수로 흠()이 난 거예요. 율법주의가, 인본주의가, 하느님의 은혜를 공격하는 형국인 거예요, 지금.

하느님은 은혜로 자기의 언약을 성취하겠다고 하셨는데, 인간의 인본주의! ‘내 힘으로도 할 수 있다니까요하고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그 하느님의 은혜의 언약! 복음을 공격하는 그림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되었든 그렇게 해서, 그 하느님의 언약이 깨어졌잖아요? 흠이 가버렸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하느님이 15장에서 언약하신 대로, 쪼개져야 되요. 이게 할례(割禮)예요. 쪼개져야 된다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런데 혼자 지나가셨기 때문에, 혼자 쪼개지셔야 돼요. 처음도 은혜고, 끝도 은혜예요. 다 은혜란 말입니다. 인간의 무력함과 패역함으로, 하느님이 해를 입으셔야 하는, 그래야 그들이 존재가 되는, 십자가가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17장에서 할례 행하라!’는 그 할례가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쪼개짐이 이제 등장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의 그 제물쪼개다라는 어구는, 히브리어 바타르란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쪼개다, 라는 단어를 어근으로 한 단어예요. ‘바라.’ 그런데 그 바라라는 단어를 같은 어근으로 갖는 단어가 또 있는데, 그게 베리트, 언약이에요. 바라하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거. 바라크, 이 또 똑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라 말입니다. 그리고 그 칼로 자르다, 칼로 쪼개다라는 그 단어, ‘바타르의 동의어는, 히브리어 무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할례예요. 그러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 어떤 존재의 쪼개짐에 의해서 발생되어, 주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다 종합해보면, 하느님은 애초부터, 당신의 쪼개지심! 이게 바타르예요. 즉 십자가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의 생육과 번성! 교회잖아요, 그게? 생육과 번성을 이루시기로, 창세전 언약을 하셨어요. 이게 베리트예요. 히브리서 9 유언은 그 유언한 자가 죽어야에서의 그 유언이 언약이란 단어예요.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죽은 흙에 불과한 피조물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절대,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어요. 쉽게 말해서, 죽은 흙에, 하느님의 피가 부어져서 반죽이 되어야, 사람이라는 존재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은혜라 부른단 말입니다.

하느님은 결국 십자가 위에서 쪼개지셨고, ‘바타르!’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 백성들에게, ‘바라크, 이 부어지게 된 거예요. 그 전체가 언약! 베리트란 말입니다. 다 같은 어근의 단어란 말이에요. 이 전체 복음의 이야기를, 몸의 흔적으로 새기는 것, 이걸 할례라 그러는 거예요. 내가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하신 일이, 내 안에, ‘너는 그게 다 네 거가 되었다는 증거를 이미 가졌다라고 주는 게, 할례란 말이에요. 나의 출생을 위해서, 하느님이 피를 흘리고 쪼개졌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거, 이게 바로 할례의 참 의미예요. 그러면 나의 육적 자아는, 부정이 되고 삭제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거네!’ 그걸 죽는 거라 그래요. 그게 바로 세례(洗禮)로 연결이 되어서, 내가 물에 빠져 죽는 거예요. 물에 빠져 죽는 다는 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더럽고 추악하게 살던 모든 걸, 이제 아무것도 안 하게 될 수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걸 할 수밖에 없는 죽은 자란 걸 인정하라는 게, 죽는 거요.

그러니까 복음을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이해(理解)하게 되면, 여러분은 복음이, 악몽(惡夢)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복음이에요? 악담(惡談)이지. 그 단어는 신약에서도 찾아 낼 수 있어요.

(마르코복음 9:43-44) 43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45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여기서 찍어 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아포콥토, ‘자르다, 베어버리다란 뜻의 제사용어예요. 그러니까 원래 할례, 베어내기, 찍어버리는 거이건 누구에게 행해져야 되는 거요? ‘, ‘!’ 그런데 그 할례가 누구에게 행해진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찍어 버렸단 말입니다. 쪼개버린 거예요. 그래서 내 손과 발이 이렇게 멀쩡한 거예요. 아니면 여기 우린 몸통만 동동 굴러다녀야 돼요, 여기서. (하하하하) 그건 뭐 죄를 안 짓나? 아예 갈아서 없애버려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할례는, 율법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은혜의 행사를 바라보고 붙들라는 의미로 주셨던 거지, 할례를 행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아서, 자신들의 가치 향상과, 자아 확장에, 자기발전에, 사용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양심을 가지고서도!

 

바울로는 율법과 할례가, 다른 말로, 인간들이 구축하는 인간들의 외모(外貌),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외모라는 거예요, 외모가, 하느님나라 백성이 되기에, 전혀 무관한 것임을 반복하여 강조해요.

(로마서 3:30)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로마서 4:13)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할례나 율법지킴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도구요 방법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 길은 오직, 믿음이라는 길뿐인 거예요. 오히려 율법지킴이나 할례 행함은, 그 인간들의 행위! 행함이라는 건, 인간들의 자기자랑! 자아실현! 자아확장의 더러운 욕망(慾望)의 표출(表出)이더라는 거요.

(갈라디아서 6:11-15) 11 보십시오. 내가 직접 여러분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써 보냅니다. 12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박해를 면하려고 그러는 것뿐입니다. 13 실상 하례를 받은 사람들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다만 여러분에게 외형적인 할례를 시켰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15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유대주의자들의 할례 행함이나 율법지킴은, 오히려 육체의 모양을 내거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한 위장(僞裝)에 불과하더라는 거요. 그래서 성경이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라고 하는 거요.

(신명기 10:16-17) 16 그러므로 너희가 받을 할례는 마음의 껍질을 벗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고집을 세우지 않도록 하여라. 17 세상에 신도 많고 주도 많지만 너희 하느님 야훼야말로 신이시요 주이시다. 크고 힘있으시며 지엄하신 신이시요 뇌물을 받고 낯을 보아 주시는 일이 없는 신이시다.

(예레미야 9:25) 25 에집트, 유다, 에돔, 암몬, 모압 사람들과, 구레나룻을 깎고 사막에서 사는 종족들이 모두 벌을 받으리라. 이 모든 민족들은 이스라엘 온 가문과 함께 마음에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받는 건가? 이리로 가면 안 돼요. (하하하하) 그건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어떻게 해야 이걸 찢지?’ 어디 있어요, 마음이? 여기 있어요? 요기 있어요?

(예레미야 4:4) 4 유다 국민들아, 예루살렘 시민들아, 할례를 받아 나에게 몸을 바쳐라. 마음에 수술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사악한 행실을 보고 화를 내어 불처럼 너희를 태우리니, 그 불을 꺼 줄 사람이 없으리라.

(골로사이서 2:11) 11 여러분은 세속적인 육체를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형식이 아닌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그 할례를 믿고, 내 육은, 어떤 방법으로도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가 없구나! 이 육적 자아를 벗는 걸, ‘마음의 할례를 받는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렇게 마음 가죽이 베어져서, 새 마음을 갖게 된 이들은, 육적 몸이 벗어지게 되는, 다른 말로, 육적 자아가 죽게 되는 과정을 통과하게 된다는 그런 뜻예요. 절대로 자기 자랑이나 자기성취, 자아실현으로 안 가게 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너희가 어떻게 선생 되려고 하고, 훈도(訓導)가 되려고 하냐? 이 말을 하는 거요. 사도 바울로가요!

(필리피서 3:2-3) 2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들을 조심하십시오. 형식적인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조심하십시오.

3 영적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세속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의지하여, ‘! 우리가 할례당이다.’하는 그들이 누구예요? 사도 바울로가 라 하잖아요? ‘!’ 사도가 라고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하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할례라는 게, 인간의 생식기가 잘라진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의 근원을 자른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에요. 그렇게 인간의 자연적 생식기 능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후손이 생긴다면 그게 누구 작품이냐고요? 하느님의 은혜의 작품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할례 받은 자로서 서는 거예요. 마른 장작이었잖아요? 아흔아홉 살, 불가능(不可能)한 거요. 그래서 이사악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거요.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후손(後孫)이니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그러죠?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을 낳은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이라는 하느님의 백성(百姓)! 어떻게 낳았어요? 로마서 4! 하느님의 은혜로! 마찬가지로 이사악도 할례를 받자마자, 바로 그 다음 장에서, 모리아 산에 올라가 쪼개지는 거요. 이사악이!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아브라함이, 살아나는 그림을 보여 주는 거예요. 모리아 산은 시온 산이죠? 시온 산에 예루살렘 있고, 예루살렘에 골고다 있습니다. 그 골고다로 자신이 달려 죽을 나무를 매고 올라가신 분이 예수! 예수의 할례를, 모리아 산에서 이사악이 한 번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건, 골고다에서 쪼개지신 예수의 ()’만을 전적으로 의지(依持)해서, 자신의 육체를 신뢰(信賴)하지 않고, 육적 몸을 부인하게 되는, 성도의 삶 속에서, 그러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란 말이죠.

야곱? 마찬가지죠. 환도 뼈가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이란 뜻이에요, 원래 뜻이!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 씨가 뭐죠, 구약성경에서? ‘제라!’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후손을, 자손을 여럿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죠?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요. 이게 예수의 할례 이야기란 말입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그들에게 언약이 성취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언약이! 그러한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홍해! 저주의 물을 쪼개고, 이게 쪼개단 말이에요. 같이. 쪼개고 건너가서 사는 거요. !

여러분, 불교나 유교나, 노자나 장자, 심지어 힌두교까지도, 모두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걸 목표로 해요. 그건 모든 종교의 목표 지점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육체에 대한 신뢰를 차압당하고, 육적 자아를 부인 당하는 것을 목적지로 하여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서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존재임을 중명하고 자랑하려고 하는 시도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역사를 관통(貫通)하여 흐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건 폐기된 구약이라고요.

(신명기 30:1-6) 1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축복과 저주를 담은 이 말이 그대로 다 이루어져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를 모든 민족들 가운데 흩으셨다고 하자. 그러나 거기에서라도 제 정신이 들어 2 너희 하느님 야훼께 돌아 와서 너희와 너희 자손이 마음을 모아 기울이고 있는 정성을 다 쏟아 오늘 내가 지시하는 말을 그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3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너희를 불쌍히 보시고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오게 해 주실 것이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 쫓겨 갔던 너희를 만백성 가운데서 다시 모아 들이시리라. 4 너희가 비록 하늘과 땅이 맞닿는 데까지 흩어져 갔더라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너희를 거기에서 모아 데려 오실 것이다. 5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를 너희 선조들이 차지했던 땅으로 데려 오시어 그 땅을 다시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선조들보다 더 잘 되게 해 주시고 더 불어나게 해 주실 것이다. 6 그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마음과 너희 후손의 마음의 껍질을 벗겨 할례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며 복된 삶을 누리게 해 주시고

어떻게 하면? 네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다 지켜 순종(順從)하면, 마음에 할례를 준다. 그러면 그 할례 받으면, 이제 다 지키게 된다 이거예요? 못 지켰어요. 못 지키면 마음에 할례를 못 받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보고 수시로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런데 에제키엘서 36장에, 새 언약으로 가면, 그 조건이 다 없어져요. 그리고 마음에 할례가 행해집니다. 가볼까요?

(에제키엘 36:25-27)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조금 전 신명기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야 할례를 베풀어서 생명을 얻게 하겠다. 그러셨는데, 여기서는 조건이 없어요. ‘그냥 내가 물로 씻고, 성령 부어서, 너희들 마음에 할례를 주고, 그냥 내 규례를 잘 지키는 자로 여겨버리겠다.’ 이게 새 언약이란 말입니다.

여기에 연결 되는 에피소드가, ‘이 새 언약이 어떻게 성취 되는 지 볼래?’하고 37장에서, 골짜기로 올라가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었어요? 마른 뼈! 먼지 풀풀 나는 마른 뼈! 거기에 생기가 부어지니까, 그들이 살아난 거요. 마른 뼈들이 나 좀 살려 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안 그랬다니까요. 마른 뼈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뼈들아, 나에게 잘 보여 봐! 살려줄게!’ 뼈는 그걸 못 듣는 다니까요. 일단 살려 놓는 거예요. 살려 놓고,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알아?’라고 가르쳐 주는 게, 인생이며 역사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화론(聖化論), 살려 놓고, ‘너희들이 열심히 노력 안 해서, 하느님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면, 다시 마른 뼈로 만들어 버릴 거야!’ 이렇게 가르치는 거 아닙니까? 이거 우리 얘기 아닌가요?.

(에제키엘 37:11-14) 11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 뼈들은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다. 뼈는 마르고, 희망은 사라져 끝장이 났다고 넋두리하던 것들이다. 12 이제 너는 이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13 내가 이렇게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14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 넣어 살려 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야훼가 하는 말이다.''

고국 땅이 어디예요? 약속의 땅! 여러분이 구원 받고, 하늘의 백성으로서, 이 역사를 살아가는 이 형국이에요. 여기서 뭘 알게 되요? ‘하느님이 하셨구나!’를 배우는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라 그러죠. 에페소서 21절에서! 그게 마른 뼈예요. 그 죽었던 자들이 어떻게 해서 살아나요?

(이사야 53:5)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다는 뜻이잖아요? 찔리고 죽었단 말입니다. 상했단 말입니다. 할례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죄와 허물! 그게 사망의 근거였잖아요? 그게 예수의 할례로 없어지고, 살아나는 거! 그러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어깨 춤 덩실 추면서, 예수님 찬양! 하느님 찬송! 하고 가면 되는 거예요. 당연히 그러한 깨달음에서 성령께서 맺으시는 겸손과, 사랑의 열매가, 맺히는 거구요.

롯을 보세요. 롯은 이 세상의 아담 무리들의 대표적 특징을 다 보여준 사람이에요. 그는, 이 세상의 힘과 화려함과 강함을 원했어요. 오죽 하면 성문에 앉아 있었을까요? 그건 성에서 대빵이거든요. 재판을 하는 사람이에요. 소돔과 고모라의 대장이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쾌락을 원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가서 잘 산 거예요.

심지어 딸들하고 근친상간을 해서, 모압과 암몬!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들을 낳아 버렸죠? 잠들었었다고요? 천만에요. 부부관계가 남자가 술 먹고 기절해 있는데 됩니까? 정신이 있었던 거예요. 의지가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야 애를 낳아요. 롯은 개차반이었다니까요. 그렇게! 그런데 베드로후서 2장에 가면 그 롯을 의인(義人)이라고 해요. 성경에! 어떻게 그 롯이 의인이 된 거예요, 하느님 앞에서?

 

(창세기 19:29) 29 그 분지에 있는 도시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그 도시를 뒤엎으시면서도 롯을 파멸에서 건져 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중보자(仲保者)가 서 있었던 거예요. 롯은 그냥 인데,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때문에, 롯을 그냥 의인(義人)삼아 주신 거예요. 중보자 예수! 이 롯을 멸하러 갈 때, 아브라함이 계속 기도하죠? 50명이면요? 40명이면요? 30명이면요? 20명이면요? 10명이면요? 이게 예수의 기도예요. 제 이야기가 아녜요.

(이사야 53:12) 12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누가? 이사야서 53장의 예수가요! 여러분은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의 중보사역! 그 기도로 말미암아, 거저 산 거지, 그래서 그걸 찬양하고 칭찬하고 자랑하는 자가 는 것이지, 여러분을 계발하여, 그리고 이 세상을 정화하여, 여기를 깨끗하고 평등하게 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그런 역할로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마치 그런 것을 해야 되는, 그런 집단으로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그 교회, 어딘가요?)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죄를 짊어 지셔서, 우리가 의인(義人)이 된 거요. 거기서 우리 육의 존재성과 주체성과 자율성은, 폭격당하여, 부수어지는 거요. ‘없음이 되는 거요. 삭제가 되는 거요. ‘아니구나! 아니었구나!’

그래서 에제키엘서에서도, 그렇게 새 언약, 그 다음에 마른 뼈가 살아나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곡과 마곡의 전쟁이 기록 되어 있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곡과 마곡의 전쟁이? 곡과 마곡의 전쟁은, 새 언약 하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역사 속에서 겪게 될 영적전쟁의 양상(樣相), 형태(形態)에 관한 거예요. 먼 훗날 있을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란 말이에요. 요한묵시록을 전부 그 세대주의자들의 그 요한묵시록으로 배워서 말이죠! 그러면 에제키엘서 하고 요한묵시록의 전쟁들이 연결이 하나도 안 돼요.

(에제키엘 38:1-2)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너 사람아, 너는 마곡 땅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메섹과 두발의 맹주인 곡에게 그를 쳐서 이르는 나의 말을 전하여라.

이거 요한묵시록 20장에 나오는 그 얘기죠? 곡과 마곡의 전쟁이잖아요? 그게 에제키엘서 38장에서 나온다 말예요. 그러면 이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요한묵시록의 그 전쟁들이 다 풀리는 거예요. 이 전쟁이 요한묵시록에서 아마겟돈 전쟁! 16장에서!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전쟁! 19장에서! 그리고 곡과 마곡의 전쟁! 20장에서! 그렇게 반복하여 다른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 요한묵시록의 전쟁의 이야기는, 전부 에제키엘서 38장 이하에 그려지고 있는 내용을 다 인용해서 묘사하죠? ‘고기를 뜯어 먹어라, 뭐 해라.’ 다 에제키엘서 38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누가 주도하는지 보세요. 마귀가 사람들을 모아서 침공해 들어오는 거 아녜요.

(에제키엘 38:15-16) 15 너는 북녘 끝, 네가 자리잡고 있던 고장을 떠나 연합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갈 것이다. 대군이 떼지어 모두 말을 타고 쳐들어 갈 것이다. 16 구름이 땅을 뒤덮듯이 너는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쳐들어 갈 것이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나는 너를 내 땅으로 쳐들어 가게 할 것이다. 곡아, 내가 뭇 민족에게 나를 알리기 위하여 너에게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 보이리라.

하느님께서 곡을 불러 오셔서, 당신 백성들을 치게 하시죠. 그 전쟁을 하느님이 일으키는 거라 말입니다. 이걸 무협지처럼, 무슨 독수리 오형제 이야기처럼, 저기 외계 나쁜 놈들이, 마귀와 함께 우주 구석에서 몰려 있다가, 마지막 날, 하느님의 백성들을 다 치러오는 그런 이야기로 이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아니, 에덴에서부터 일어난 그 전쟁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뱀에서부터 시작했던 그 전쟁! 그 전쟁을 하느님 일으키셨다니까요. , 하느님 보낸 거란 말입니다. 당신의 교회에게, 아담에게 뭘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런 거란 말입니다.

 

, 이 모습이 바로, ‘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 핍박에, 성도가 어떻게 되죠? 핍박 받다가 져요. 십자가에 달려 죽어요. 그래서 두 증인이, 요한묵시록에서 죽는 거예요. 바벨론 길 가에서! 한 마디로 곡에게 진다 말이에요. 하느님이 가서 패라고 보냈기 때문에, 져요.

그 전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면, 사도 바울로가! 또 다른 법이, 나의 속사람을, ‘를 자꾸 그 법 아래로 끌고 가는데, 내가 못 이기겠다고 그러죠? 거기에서 어떤 탄식이 나와요? ‘오호라, 난 곤고한 사람이구나. 난 사망의 몸 맞구나!’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죠? 이게 산상수훈의 애통이요, 자비로히 여김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요, ‘때문에 핍박 받는 자잖아요? 그에게 결국,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게, 뭐라 그랬어요? ‘내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하노라!’로 연결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의 의()! 예수의 십자가만 오롯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걸 승리(勝利)라 그래요. 성경이! 그걸 이긴다라 그래요. 여러분이 꾹 참고 이를 악물어서, ‘하느님, 잘 참았죠?’ 이게 승리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로 내려가서, 예수의 를 붙드는 자가 승리라 말입니다. 야곱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환도 뼈를 부수고, 죽는 날까지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만 의지하여 살게 만드는 이거! 이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잘 보세요. 이 어디에서 와요? 북방에서 온다고 그러죠? 그 북방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자폰인데, 성경 안에 그 단어가 몇 개 안 나와요. 그런데 그 단어가 쓰인 곳을 제가 찾아드릴게요.

(이사야 14:12-13) 12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서 넘어지다니! 13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이게 지금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한 그 말이죠? ‘내가 하느님처럼 될 거야! 높아질 거야!’ 거기를, 하느님의 자리를, 북극 집회의 산, 요게 자폰이에요. 거기에서 곡이 온다니까요. 인간들이 자기 자리를, 하느님의 자리를 침공해서 앉죠? 고 자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고걸 마귀(魔鬼)’라 그래요. 자기의 자리를 떠나서 하느님의 자리를 침공한 아담들을, 마귀라 하는 거요. 거기서 곡이 오는 거예요.

(시편 48:1-2) 1 하느님의 거룩한 산, 그 도성에서 그지없이 찬미받으실 분, 크시고 크시어라 야훼여, 2 아름다운 봉우리, 온 세상의 즐거움, 시온산은 북녘 끝, 대왕의 도성이니,

하느님이 있는 그 자리! 그러나 인간이 탈취(奪取)해 버린 그 자리에서, 하느님이 어떤 존재들을 끌어 내려서, 그 하느님의 자리를 너무너무 좋아하는 유대주의, 인본주의, 이 자들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을 공격(攻擊)하게 하는데, 당신의 백성들이 못 이긴다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지금도 내가 하느님이 되어 살고 싶구나!’ 이게, 곡에게 내가 지는 거예요. ‘나는 지금도 하느님이 되어 살고 싶구나!’ 그렇잖아요, 지금도? 나는 나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잖아요? 하느님이 그 전쟁을 일으켜서, 곡에게 지게 하는 거예요.

아마겟돈! ‘므깃도의 산이란 뜻이라 그랬죠? ‘할마겟돈의 헬라어 음역(音譯)이라 그랬어요. 깃도에서 이스라엘 왕 요시야가 죽었다고요. 요시야! 이스라엘 왕 요시야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자. 그가 죽은 그곳이 바로, ‘승리(勝利)의 장소라는 거예요.

성도가, 곡의 전쟁(戰爭)! 아마겟돈 전쟁! 거짓 예언자와의 전쟁에서, ‘나는 죽은 자 맞네요. 하느님, 내 힘으로 절대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낼 수 없고, 그 의()에 도달할 수 없네요.’라고, 내가 삭제되고 부정당할 때, 그걸 승리라 그래요. 그래서 야곱이 졌을 때,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승리(勝利)’라고 만들어 준 거예요. 죽을 때까지 떨떠름하게 가는데, 그걸 승리라고 불러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복음이라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거 배우고 가시면 되는 거예요.

새 언약에 의한 구원이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이겨내고 발전시켜내는 게 아니라, ‘자폰!’ 하느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정체(正體), 곡에 의해서 폭로(暴露)가 되고, 거기에서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이 밝히 드러나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느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되는, 자기부인, 육체의 불신, 육체의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 오는 거요. 그래서 새 언약, 죽은 뼈가 살아나는 거, 곡과 마곡의 전쟁이 죽 연결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한 번에 일어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 아마겟돈 전쟁은, 여러분이 언젠가 치를 전쟁이 아니라, 지금 치르고 있고, 마지막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감히 누가 선생의 자리에 앉으며, 누가 감히 훈도의 자리에 앉겠습니까? 그게 구원(救援)인데! 내가 나를 자랑해요? 내가 교회를 자랑해요? 무슨 교회? 어떤 교회요? 이게 교회입니까? 여기는 예배당(성당)이고, 교회는, 하느님의 묵시와 연결이 되어 있는 자들을 교회라 그래요.

 

하느님의 교회는 하느님이 세우신 거고, 하느님만 자랑이 되는 곳이어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그런 선생의 자리, 훈도의 자리에서 그러한 역할을 맡기신다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그 역할을 잘 수행하시면 돼요.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할례로 구원을 얻은 면목 없는 죄인들이에요. 그 한없는 은혜 앞에서,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며, 더 많이 죽으면 돼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절대 못 들어간다고 그랬어요.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건, 부모가 도와 줄 게 있기 때문이에요. 무언가 어눌할 때, 귀엽고 예쁘죠. 애기가, 무슨 세계 경제동향이나, (하하) 트럼프의 정치성향, (하하하) 이슬람 수니파의 계보! 이런 걸 우리에게 얘기하면, 여러분 걔가 귀여워요? 사랑스럽습니까? 아기에게 배우세요. 부모 의존성(依存性)!’ 그래야 우리 아버지가 기저귀 갈아 주시면서, 또 자비와 은혜의 젖을 물리시면서, 행복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 자리로 내려가면 돼요. 대단한 사람 되려고 하지 마세요. 아기 되면 돼요.

 

 

오늘 태풍 '하이선'으로 나라가 온통 난리네요. 피해 없기를 기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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