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9월 11일[(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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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9-11 | 조회수1,711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9월 11일 금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말씀입니다. 9,16-19.22ㄴ-27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되지는 않습니다.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84(83),3.4.5-6.12(◎ 2)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복음입니다. 6,39-42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깨닫지 못하느냐? 보지 못하면서,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들보를 빼내어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영성체송 시편 42(41),2-3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오늘의 묵상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설렘과 동시에 재림에 대한 갖가지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은 대개 두 가지 삶의 자세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제대로 살아야 예수님께서 얼른 오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누구보다 잘 살고자 애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달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안 오시니 신앙생활이 점점 나태해지고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고 제 삶에 대한 각성 없이 흘러가듯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으른 이들이 아니라,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열심한 만큼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로 나태하고 게으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그 비난은 공동체의 친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남의 눈의 티 (본디 그리스 말은 ‘잔가지’를 가리킵니다.) 를 빼내겠다는 호기가, 자잘한 잘못을 확대 해석하여 형제와 이웃을 마치 악마를 보듯 함부로 대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는 것은, 잘못에 대한 훈계나 비난이 아닙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예의 없음’이나, 보수의 이름으로 인습이나 관행을 무작정 옹호하는 ‘어리석음’을 찬찬히 되짚어 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형제고, 형제여야 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자꾸만 어두운 구덩이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에 대한 인정 없이 제 목소리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이의 ‘정의로움’은 참 애처롭고 서글픈 것이지요. 그냥 말없이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손, 그것이 그렇게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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