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둥병자들아 너희를 비추는 거울을 똑똑히 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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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09-12 | 조회수3,68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이 글은 편가르기가 아닙니다. 올바른 신앙을 배우는 길임을 보시기 바라며~~
(공동번역성서) 문둥병자들아 너희를 비추는 거울을 똑똑히 보라 (로마서 3:21-31)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이신 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어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 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왜 국에다 밥 말았어? 싫단 말이야! 싫단 말이야! 이제부터 나한테 물어보고, 국에 말아줘! 꼭 그래야 돼!’ 이게 다입니다. 이 동요의 곡은, 백창호 선생님이 붙였지만, 가사는, ‘조민정’이라는 초등학생이 쓴 동시예요. 아이의 진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그런 동시죠? ‘왜 엄마 마음대로 국에다 밥 말아서 주냐?’예요. 나는 맨 밥 먹고 싶은데….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과의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집착이 되고, 심지어 폭력이 되는 겁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 가를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해 주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 그거 굉장히 기특한 것 같죠? 상대방은, 그 사람의 사랑 표현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체감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쏟아 내 놓고는, 거기에 반응을 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서,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내 사랑을 몰라주느냐?’하며 삐치는 사람을, 우리도 심심찮게 주변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저는 날 사랑해 준다고 열심히 하는데, 그게 영 불편하고 마뜩치 않은,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해 봤죠? 그 때 기분이 어떻던가요? 그냥 나 좀 가만히 놔 둬! 그런 마음이, 정말 가슴 한 가득 차오르죠? 15년간 밀폐된 공간에 갇혀서, 군만두만 먹다가 나온, 올드보이 최민식에게, 그 사람의 사정도 모르고,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군만두를 어디서 사다가, ‘야, 내가 이걸 어떻게 구해 왔는지 알아? 이거 먹어!’하고 내밀었을 때, 그 최민식이, ‘나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거든?’ 하고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이걸 어떻게 구해 왔는데, 네가 이걸 거절해?’하면서 삐치는 거와 똑 같은 거죠. 이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엉뚱한 걸 내놓으면서, 이게 내 사랑의 징표(徵標)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 그러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니까 하고 엉뚱한 징표들을 자꾸 내놓는 거죠. 그 때마다 하느님은 단호하게 ‘싫단 말이야. 누가 국에 밥 말아 달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성경에 나옵니다. (아모스 5:21-23) 21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22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23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그런 거 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미웠니?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느라고 얼마나 미웠어? 아니 나는 너희들에게 그런 거 하라고, 이 땅에 보낸 게 아니라, 날 좀 사랑하라고 보낸 거야!’ 그 말씀 하시는 겁니다. (이사야 1:11) 11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수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왜 자꾸 그런 거 내놔? 누가 국에다 밥 말아 달래? 날 사랑하라니까!’
(말라기 1:10) 10 너희는 내 제단에 공연히 불을 피운다. 그러지 못하도록 아예 문을 닫아 걸었으면 좋겠구나, 너희가 하는 짓이 나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이게 다 뭡니까? 하느님의 ‘싫단 말이야’의 외침이에요. ‘싫어! 누가 국에다 밥 말아 달래? 싫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당신의 백성을 삼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거였어요. 신명기로 가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결국 그 율법이, 무엇을 목적으로 했던 것인지를, 명확하게 밝혀 주십니다. (신명기 6:1, 4-9) 1 이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해 주신 계명에 딸린 규정이요 법령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너희가 건너 가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도록 너희를 가르치라고 하셨다. 4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 5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7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8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9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보시다시피 이스라엘에게 율법(律法)이 가입한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偶像)이 아닌, 또 다른 신인, ‘나’가 아닌, 진짜 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한 거였단 말이에요. 하느님께서 율법을,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해서, 자녀들에게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길을 행할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내용을 이렇게 부연(敷衍)해 주세요.
(신명기 6:10-14)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로써 너에게 주겠다고 하신 그 땅에 너희를 이끌어 들이실 때가 되었다. 거기에는 너희가 세우지 않은 크고 아름다운 성읍들이 있고, 11 너희가 채우지 않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찬 집들이 있고 너희가 파지 않은 우물이 있고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원과 올리브밭이 있다. 너희는 그것을 마음껏 먹게 되리라. 12 그리 되더라도 너희는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너희를 이끌어 내신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지 않도록 하여라. 13 너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맹세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여라. 14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섬기는 신들 가운데서 어떤 신이든지 그 신(나)을 따라 가면 안 된다. 율법의 이야기에서,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은혜(恩惠)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죠? 성경을 좀 잘 읽으세요. 하느님께서 홀로 준비하신 성읍! 하느님께서 홀로 마련하신 집! 하느님께서 홀로 채우신 가재도구! 하느님께서 심으신 올리브나무! 이걸 보고 경험(經驗)하면서, 그것을 거저 주신 하느님을 경외(敬畏)하고, 섬기고, 사랑하라! 요게 목적이에요. 율법의 목적! 그러니까 율법은, 곧 어디로 향하는 징검다리라는 거예요? 우리의 무력함과, 하느님의 전적인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징검다리란 말예요. 율법이라는 건!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율법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꾸 그 율법을 지켜서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니까, 지키지도 못하면서, 하느님께서 구약을 통해 ‘싫단 말이야!’를 계속 반복하여 외치고 계시는 거예요. ‘싫다니까, 왜 자꾸 국에다 밥 말아 갖고 와? 싫어!’ 그러는 거예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계속 국에다 밥을 말아서 오니까, 밥상을 급기야 확 뒤집어 엎어버렸죠. 그게 뭐죠? 십자가예요. 밥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국에다가 밥 좀 그만 말아 와!’ 그리고선 확 뒤집어 엎어버렸어! 그런데 그 후로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자존심을 챙기고, 자기들의 그 사랑을 증명(證明)하느라, 상대방은 원치도 않는 그 사랑을 증명하느라, 열심히 국에다 밥을 말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도!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로마서 3장 본문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싫단 말이야!’라는 일갈을, 신약의 용어로 풀어 놓은 거예요. 율법은, ‘의’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해서, 하느님께서 다른 ‘의’를 준비했다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거저 받는 ‘의(義)’예요. 그래서 바울로가 오늘 본문 마지막에, 믿음은 율법을 폐(廢)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율법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징검다리라는 걸 알고, 예수의 ‘의(義)’만 꼭 붙들게 되는 거, 이게 율법을 세우는 거란 말이에요. 이것이! 율법의 진의를 올바로 드러내는 것! 이게 율법을 굳게 세우는 거!
이렇게 말씀이신 하느님이 죄인 앞에 나타나게 되면, 인간은, ‘저는 죄인(罪人)입니다. 저는 부정(不淨)한 자입니다. 저는 죽은 흙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자기 배제의 고백이, 제일 먼저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건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거예요.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나를 무시하고 나를 배제해 버리면, 그건 못 참는 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걸 요구하세요. 다시 한 번 이사야가, 말씀이신 하느님을 만났을 때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 한 번 보고 가자고요. 잘 보세요. (이사야 6:5-7) 5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 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말씀이신 하느님이, 이사야 앞에 나타나자, 이사야가 입술을 가리고, ‘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해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입’이라는 건, 그 안에 있는 것이 흘러나오는 유일한 통로라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입이 부정하다고 하는 건, ‘내 전체가 부정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마태복음 15:18) 18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이게 유대인(Jew)들의 입이 갖는 개념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사야는, 대예언자인 아모스의 아들이고, 왕족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예언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신 하느님을 뵙자마자, ‘나는 부정(不淨)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말씀이 그 앞에 나타나자, ‘어, 이게 뭐야, 우리 아버지도 예언자, 나도 예언자, 그리고 나 여태까지 잘 살았는데, 나 부정한 자네, 나 지옥에 가 마땅한 자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예요. ‘나 지옥 가야 되는 자네!’ 이걸 그 즉시 말씀 앞에서 자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정(淨)하게 되는데, 부정한 게, 갑자기 정결케 되는데, 어떻게 되죠? 율법을 지키나요? 노력했나요? 아뇨. 하느님이 숯을 집어다가 입술을 지지는 거예요. 끝! 이걸 구원이라 해요. 구속사! 즉 역사는 바로 구원의 즉각적 현실을 그려내는 캔버스인 거예요.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被造物)입니다. 그렇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건, 거듭났다는 거고, 그 거듭났다는 건, ‘아노뗀’이란 말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건 ‘하늘로부터 나다’란 뜻이란 말이죠? 하늘의 것은, 하늘에서 완성이 되어 내려오는 거지, 땅에 것을 조합하거나, 땅에 것을 계발하고 성숙시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녜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래서 거듭난 자고, 그래서 하늘로부터 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구약의 여러 곳에서 확인하셨던 것처럼, 이 역사와 천지만물은, 하느님의 성전을 원형(元型)으로 하여 세워진, 모델하우스 같은 거예요. 이 모델하우스는, 하늘의 원형이 내려오면, 그 즉시 철거(撤去)가 되어야 할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 옛 것들 중에, 인간의 육신(肉身)도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새 몸으로 바꿔주는 거예요. 부활할 때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옛 육신을 성숙시키고 계발 시키는 걸,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왜 새 것이 필요한가를 배우는 걸, 목적으로 한 거란 말입니다. 왜 새 것이 필요한가?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의 말씀이 창조를 하죠. 그 창조는 즉각성이 있어요.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즉시 생겨나야 된다 말입니다. 그 말은 곧 완료(完了)를 의미해요. 창조는 완료예요. 창세전에 하느님나라와 하느님 백성은, 그렇게 완료 상태로 창조가 됐단 말이에요. 그래서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했을 때, 그 천이 천(天)이 복수예요. ‘하늘들!’ 거기에 하느님나라가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 8:30)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자, ‘영화(靈化)까지 이미 완료가 됐다.’입니다. 영화까지 완료가 됐죠? 과거완료잖아요? 영화의 단계까지 이미 묵시 속에서 완료가 되었다고 바울이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이 역사 속에, 시간차를 두고 잠시 왔다가 가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컨베이어 벨트 위로 건빵이 죽 지나가요. 죽 흘러갑니다. 이게 역사예요. 흘러가요. 흐름이 있죠? 그런데 그 옆에 긴 꼬챙이를 쥔 불량과자 제거반이 서 있어요. 그 사람은 한 곳에 다리를 고정하고 서서, 그 건빵들의 흐름을 한 눈으로 봐요. 그리고는 불량 건빵들을, 하나하나 기가 막히게 집어냅니다. 그러므로 완료가 돼요. 건빵이 완료가 되는 거요! 그 컨베이어 벨트 위의 건빵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지나죠. 각자 다른 자리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옆에 불량 건빵 제거반은, 그 모든 걸 한 눈에 보는 거예요. 그렇게 완료의 상태에서 뿌리를 박고, 고정되어 있는 걸, ‘묵시(默示)의 세계’라 그래요.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 위로 흐르는 불량 건빵, 우량 건빵들의 세상을, 역사(歷史)라고 하는 거예요. 완제품은 그 뿌리를 박고, 고정되어 있는 묵시에 의해, 완성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그 묵시에서 내려다보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거예요. 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 흘러가는 거죠. 그래서 이 역사는, 역사 속에 있는 우리가 바라볼 땐 시간과 순서가 있지만, 묵시 속에서 바라볼 땐, 하나란 말이에요. 그들은 한 컨베이어 벨트 위를 흐르고 있는 건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는 평등(平等)한 나라예요. 평등은,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쟁취(爭取)하는 게 아녜요.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한 번 보세요. 제가 영등포 구치소에 있을 때, 사상범들은 따로 모아 놓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의 엄마가 오셨는데, 칠순이 넘었어요. 그런데 상록수를 부르는데 3절까지 다 불렀어요. 마지막 가사가 뭐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다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때 뭘 이긴다고 한 거지? 뭘 이기는 거야? 뭘 이기겠다는 거야? 나도 너처럼 잘 살고 싶다는 거예요. 약자가 강자를 질투하는 거예요. 그건 진짜 평등(平等)이 아녜요. 그것 자체가 죄예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아니 솔직히 발품만 조금만 팔면, 삼시 세대 따뜻한 밥 다 먹을 수 있어요. 무료급식소에서! 진짜 굶어 죽을까봐 투쟁하는 거예요? 아녜요. 나도 너처럼 품나게 살고 싶은데, 왜 너만 그렇게 살아? 이거다 말이에요. 평등은 그게 평등 아녜요. 여러분! 하느님이 완료해 놨기 때문에, 너나 나나,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 죽은 흙이었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다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 하느님의 은혜의 자손이므로, 평등하다. 이게 평등이에요. 그래서 변화 산에,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엘리야가 모세보다 600년에서 700년 뒤의 사람이지만, ‘아이고 형님, 아니 할아버지 오셨어요?’이러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엘리야에게, ‘새까만 게 어디서 같이’ 이러지 않았다니까요. 하나란 말입니다. 묵시 속에서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이게 완료란 말이에요.
여러분, 완제품은, 그 뿌리를 박고 고정 되어 있는 묵시에 의해 완성이 되는 거예요. 천국에서는, 시간이 없다 그로죠.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그러잖아요? 그걸 ‘영원(永遠)’이라 그래요. 그런데 육을 가진 존재들이 활동을 하며 살아요. 여러분 거기서 몸을 갖고 삽니다. 존재들이 활동하는데, 어찌 흐름이 없어요? 흐름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의미로 ‘시간이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냐 하면, 천국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는 창조의 세계이지, 거기에 있는 존재들이 뭘 성숙(成熟)시키고 계발(啓發)하고 발전시켜, 완성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흐름이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요. 창조라는 건, 말씀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완료예요. 그게 ‘시간이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육을 가진 우리가, 움직이며 사는 곳은, 흐름이 있잖아요? 천국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단번에 창조(創造)가 되는 곳이지, 그곳에 사는 존재들의 노력으로 열심과 성숙되거나, 발전되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시간이 없다’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평을 하시고, 칠 일째에 안식(安息)을 하신 건, 이건 물론 모형이에요. 하느님의 창조에, 피조물이 도울 일이 전혀 없다는 걸 보여 준 거예요. 하느님이 안식에 들어가는데, 육 일 동안 창조한 그 창조물들이 뭐 도와 줬느냐고요? 이 안식이 ‘하느님나라’잖아요?
묵시의 세계는, 창조의 세계예요. 창조의 세계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완성이 되는 세계를 말해요. 인간이 도울 일이 전혀 없는, 완벽(完璧)한 하느님의 작품이 바로, 묵시의 세계인 거예요. 모든 게, 하느님의 창조사역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건, 창세기 1장 2절에서 본 것처럼, 모든 게, 안식으로 향하는 모든 게, 하느님의 그 창조사역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건, 그 창조사역 앞에서의 모든 게 다, 부정(不淨)한 자, 죽은 자, 혼돈(混沌), 공허(空虛)로 폭로되고 확증(確證)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창조하실 때, 거기에는 혼돈과 공허, 이건 ‘없음’이잖아요? 스트럭처(structure)도 없고, 컨텐츠(contents)도 없는 거니까. 그게 죽은 흙이란 말이에요. 죽은 흙! 창조 앞에서는 그 창조의 말씀 이외의 모든 존재가, ‘없음’으로 드러나야, 이 분의 창조가 드러나는 거예요. 영광으로! 그게 하느님나라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여러분들은, 그 말씀이신 하느님 앞에서, 이 성경 말씀 앞에서, ‘아! 저는 죄인이 맞네요. 부정한 자 맞네요. 제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 이 고백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이사야처럼! 먼저! 그리고는 그 죽은 흙이, 어떻게 산 생명이 됐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배우는 거예요. 그리고 또한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송하는 거! 그 분의 영광을 자랑하는 거! 이게 성도의 본무이며, 교회의 본무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창조의 말씀 앞에서도, 우리의 가능성과 업적과, 공로와 자격을 챙기려고 하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국민교육헌장에서 배우며, 외우고 자란 이 한국 사람은 더해요. 여러분이 무슨 사명을 갖고 태어났어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습니까? 인간의 사명은 하나 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그려내는 캔버스로 사는 거예요. 성경은 그러한 창조의 말씀 앞에서, 죽은 흙의 상태를, ‘부정(不淨)하다!’ 그래요. 그걸 ‘부정하다!’ 그래요. 죄를 지어서 부정하다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앞에서 존재인 척 하는 게 죄(罪)고, 그게 부정이에요. 바로 그러한 구원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저주받은 부정한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문둥병자들’이었어요. 성경은 한 치의 오차가 없어요. 전부 예수와 하느님나라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문둥병자들은, 여러분이 지금 이사야의 모습을 통해서 보셨던 것처럼, 항상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면서 다녀야 했던 이들이었어요. (레위기 13:45-46) 45 악성 피부병 환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고 윗수염을 가리우 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이 있는 동안은 그는 부정을 벗지 못한다. 부정하니만큼, 그는 진지 밖에서 자리잡고 따로 살아야 한다. 문둥병 환자는 늘 윗입술을 가리고, ‘난 부정한 사람입니다. 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는 자아비판을 하며, 살아야 했어요. 그걸 입으로 큰 소리로 외쳐야 돼요. 그리고 진(陳) 안으로도 못 들어갔어요. 그건 도저히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인정될 수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 문둥병환자들이, 인간의 실체를 그려내는 캔버스로 쓰이는 거예요. 지금요! 무슨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문둥병환자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모든 존재의 처음 자리예요. 그렇게 문둥병자들은, 늘 진 밖에 머물러야 했어요. 못 들어가요. 진 안으로! 이스라엘의 진 밖은, 다른 말로 ‘광야(廣野)’라고 불러요.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진 밖을 광야라고 불렀어요. 진 안은, 진 안이에요. 이스라엘이에요. 진 밖이 광야란 말입니다. 문둥병환자들은, 그렇게 광야에서 머물며, 외인(外人)으로, 이방인(異邦人)으로 살아야 했던, 죽은 자들이었어요.
성도는, 자기 앞에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씀 속에서, 말씀이신 예수를 발견하게 되고, 성경에 그 많은 증인들과 똑같이, 죽은 자처럼 되어서,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저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말씀 속에서 예수를 본, 진짜 성도들의 올바른 반응(反應)이에요. 말씀을 그냥 계명(誡命)으로 본 자들은 그 고백이 안 나오고, ‘지키자’로 나오는 거예요. 지키자! 그래서 신약의 율법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게 구약의 출애굽과 비교하면, 신약의 시나이산이라 그랬죠? 제가 설명해 드렸잖아요? 그 시나이산! 신약의 시나이산에서 떨어지는 신약을 율법! 산상수훈이 끝나자마자 등장하는 게 누구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누구 만나요? 바로 문둥병환자를 만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8: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자 많은 군중이 뒤따랐다. 2 그 때에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절하며 '주님,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3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그렇게 해 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대뜸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 준 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산상수훈(山上垂訓)은, 교회가 지켜 내어야할 행동강령(行動綱領)이나, 윤리규범이 아녜요. 만약에 그렇다면, 간디가 최고 우수한 기독교인이에요. 그는 지키며 살았으니까! 인간이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을 홀로 온전히 지켜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드러내기 위한 몽학선생으로 주어진 거예요. 그게 산상수훈이에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강설하시면서, ‘지키려면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라!’ 하신 거예요. ‘지키려면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은, 다 行하며, 가르치고,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그들보다 더 나아야 된대요. 여기에 ‘더 낫다’라는 건, ‘better’가 아니라 그랬습니다. ‘다른’ 의(義)! ‘다른 종류의’ 의(義)! 지금 로마서 3장에, 이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예수님이 먼저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산상수훈 말미(末尾)에서 율법을 전부 열심히 지켰던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확 도장을 찍어 버리고, 문둥병자 이야기가 거기서 나온다 말이에요. ‘나는 지금 이 산상수훈의 이야기를 너희 입에서, ‘제가 문둥병자 맞습니다.’ 죽어 가는데, 통증을 못 느끼는 거예요. 내가 죄인임을 모르는 게, 문둥병자란 말입니다. 내가 지금 너희 입에서 그 고백을 드러내려고, 산상수훈을 얘기했더니, 너희들이 지금 뭐 지켰다고 갖고 와?” 이게 마태복음 7잘 말미에,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자 노릇하고, 뭐 했고, 뭐 했고, …’ 이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 그래요. 율법을 말씀하신 분이, ‘불법을 행하는 자!’ 그걸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하고, 다시 설명하는 게, 문둥병자의 등장인 거예요. ‘내가 산상수훈을 이야기한 건, 바로 이 이야기였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산에서 내려오면서 문둥병자가 앞에 덜렁 나타나는 거예요. 제자들 앞에! (마태복음 7:13-15)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14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15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거짓 예언자가 뭘 가르치느냐 하면, 넓은 길로 들어가게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넓은 길은 뭐고, 좁은 길은 뭐예요? 고생 진탕하는 게 좁은 길인가요? 거기로 들어가는 게 좁은 문입니까? 그렇다면 고생하는 성도들은 다,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는 거요? 아뇨. 인간들이 고생을 하더라도, 끝내 들어가려고 하는 문과 길이 무엇인 줄 아세요? 인간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길이에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그 길을 가는 거요. 몸에 휘발유도 뿌리는 거예요. 좁은 문, 좁은 길로 간다니까요. 이게 바로 넓은 문이에요. 넓은 길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자존심과 주체성, 존재성이 완전히 묵살이 되는 은혜의 문! 거기는 아무도 안 들어가려 해요. ‘나는 뭐야?’ 이렇게 되는 거요. 그게 좁은 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한 다음에, 거짓 예언자들이 분명히 너희에게 넓은 길을 제시할 거야. 인간들의 자존심 막 살려줄 거야. ‘착하게 사세요. 헌금 많이 하세요!’ 해서, 너희들을 다른 이들보다 굉장히 훌륭한 자인 것처럼 가르칠 건데, 그거 조심해! 그런 다음에 ‘이거 했어요, 저거 했어요.’하는 사람들을 확 거기다가 기록해 놓고, ‘요놈들이 불법을 행한 자다!’ 그러는 거예요. (마태복음 7:21-23)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모른다.’ 그래요. 그건, 성도가 이 땅에서 알고가야 하는 게, 행하고 가야 하는 건, 예수를 알고 가는 건데, 이들은 뭘 해 갖고 와서, ‘내가 당신을 사랑했잖아요?’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대답하느냐 하면, ‘나는 너 몰라’라고 대답한다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 예수를 아냐고요? 이것, 저것 한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솔직히 집에서, 하루에 성경 5분 이상 읽는 사람! 이 중에 다섯 명도 안 돼요. 그런데 무슨 예수를 알아요? 마태 25장으로 가면, 거기에 영벌에 들어갈 염소들과, 영생에 들어갈 양들이 나오는데, 염소들은, 전부 뭔가 했다 그러고, 양들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내가 언제 그거 했죠?’ 이렇게 나온단 말이에요. 성도는, 뭘 해도, 하느님이 내 안에서 행하게 하신 것이라는 그 은혜에 꼭 붙들려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뭘 했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거고, 성도 아닌 가짜들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내가 쟤랑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돼요? 나는 상 좀 더 받아야 되는 거 아녜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에요.
그렇게 산상수훈! 즉 신약의 시나이 산에서 내려진 새로운 율법은, 예수라는 ‘의(義)’를 붙들게 하기 위한, 인간의 처음자리 폭로(暴露)용으로 주어진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산상수훈의 진의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할, 올바른 반응이 어떤 거야 돼요? ‘하느님, 제가 부정(不淨)한 자! 맞습니다. 제가 죽은 흙! 맞습니다. 저에게 하느님의 은혜(恩惠)와 자비가 필요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돼요. ‘야, 우리 가서 다 눈깔 뽑자!’ 이게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눈이 범죄 하면 눈깔 뽑아라 그랬으니까, 그걸 듣고, ‘야, 우리 가서 눈깔 뽑자!’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 거예요. ‘하느님, 은혜와 자비를 내려 주세요!’로 가야죠? 그게 ‘나는 문둥병자입니다.’ 이 고백입니다. ‘내가 부정한 자 맞습니다.’ 입술을 가리고! 문둥병자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내려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가서, 무엇이라 합니까? ‘저 좀 고쳐 주세요.’ 그러나요? 아뇨. ‘원하시면!’ 그 말은 ‘저는 고쳐달라고 이야기할, 자격도 없는 자입니다.’를 아는 거예요. 이게,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어야 된다니까요. ‘내가 창세전에 선택된 자라면, 주님이 나를 원하신다면, 아버지가 당신께 주신 이가, 내가 맞는다면, 그러면 주님! 당신은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가 문둥병자의 고백입니다. ‘고쳐주세요!’가 아녜요. 무슨 면목으로 고쳐주세요 그래요? 그런데 뭔가 성숙을 이뤄냈고, 변화를 이루어냈다고 우기는 사람은, 절대 이 고백을 못해요. 내가 뭔가 지금 했거든요. 그런데 왜 ‘원하시면’이에요? ‘하느님, 나 이만큼 했으니까 완전하게 다 구원해달라고는 못하겠어요. 그러나 조금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이 있는 어떤 걸, 나에게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이사야가 말씀이신 하느님을 뵙자마자, 입술을 가리면서, ‘주여, 저는 부정한 자입니다. 저는 지옥가도 마땅한, 그런 죽은 자입니다. 이게 ‘화로다 아! 망하게 되었구나!’잖아요?’ 이렇게 고백한 것처럼, 신약의 율법, 산상수훈이 떨어지자, 그 앞에 똑같이 문둥병자가 나타나서, 똑같이 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면 저는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문둥병은, 살이 썩어 들어가고, 세포가 죽어 가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몸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병이에요. 痛点이 무뎌져서, 아프지가 않은 거예요. 이게 바로 자신들이, 죽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현실(現實)을 올바르게 판단(判斷)하지 못하는, 역사 속 인간들의 본 모습이에요. 자신들이, 자기들이 죄인인 걸 몰라요. 아니, 죄가 뭔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죄는 반드시 사망에 의해 먹히게되어 있는데, 그렇게 먹히고 있는데, 그걸 모르는 걸 문둥병자라 그래요. 주님께서 그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그냥 고쳐주세요. ‘너 가서 율법 200개만 지키고 와!’ 이게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은혜와 자비를 부어서, 깨끗하게 완료시켜 버려요. ‘너 가서 죄 더 지으면, 다시 문둥병환자 만들어 버릴 거야.’ 아녜요. 그냥 끝이에요. 그게! 예수님이 그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해 주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 그러죠? (마태복음 8:4) 4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정해 준 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거 레위기의 말씀, 율법을, 그대로 행하게 하시는 건데, 여기에도 의미가 있어요. 여기에 ‘증명’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말트리온’은, 증거라는 뜻도 있지만, 이 단어가 성전 안에 있은 십계명이에요. ‘말트리온’이! 계명(誡命)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은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자신의 부정함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면, 주님의 은혜로 자신이 정결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그 믿음의 고백을 한 문둥병자를, 값없이 고쳐 주시고, 율법주의의 본산인 성전, 그리고 그 안의 제사장에게 보내서, ‘이게 율법(律法)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들이 율법과 제사에 의해서, 정결하게 되는데, 그 앞으로 은혜로, 그냥 깨끗하게 해버린 문둥병자, 정결한 자를 보내서, ‘이게 율법이다’라고 이야기하라 보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율법의 진의(眞意)라는 이야기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십계명의 제 일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게 제목이에요. 십계명의 제목! 그러니까 계명이라는 건,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된 그 인간! 그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신이 아냐, 내가 신이야!’를 가르쳐 주는 게, 율법이에요. 그게 말씀이란 말예요. 선악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되어 버린, 너희 자신을 신으로 삼는 삶은 죽은 자의 삶이라는 걸 알게 하기 위함임을 함축하고 있는 거예요. 그 첫 번째 계명이! 그러니까 하느님 이외의 모든 존재의 처음 자리 확인에 관한 것이, 십계명이란 말예요. ‘누가 하느님이냐?’ 이거 밝혀 보자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내가 하느님 맞아!’ 그걸 지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만일 너희가 하느님이 맞는다면, 너희 힘으로 율법 지켜서, 부정함의 자리를 벗어나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1,500년 동안 율법을 줬어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에게! 그런데 1,500년 동안, 그들이 율법을 붙들고 한 게 뭐냐 하면, ‘못 지키네!’ 그래서 예수가 온 거란 말입니다. ‘못 지키네!’ 이걸 드러내버리고 만 거예요. 유대인이 못 지켰으면, 아무도 뭇 지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이, 지금도, 율법을 받았던 유대인이, 지금도, 우수한 민족으로 남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들이 못 지키면 아무도 못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주님은, 그 문둥병 환자를 성전의 제사장에게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율법의 집단라고 할 수 있는 성전과, 그 안의 제사장을 신약의 율법! 야고보서의 말을 빌리면,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 그러죠? 야고보가! 그 신약의 율법, 예수! 은혜! 그 은혜로 폭격(爆擊)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옳아!’ 그러고 헬렐레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어떤 자를 고쳐서, 그들 앞에 딱 놓으심으로, 그들을 폭격해 버리는 거예요. 이거 아니라고! 죄를 용서(死)하고, 죄인을 부정(不淨)에서 건질 수 있는 진짜 제사장은, 예수님! 당신이라는 걸 웅변(雄辯)하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서예요. 대제사장 예수가 너희를 정결(淨潔)케 하지, 성전 안의 제사장이 너희를 정결케 하지 못해. 이거요. 문둥병자! 부정한 자들은, 율법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정하게 된다는 걸, 그림으로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레위기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 문둥병자들은, 어디에 머물러야 한다고 그랬죠? 진(陣) 밖에! 진 밖이 어디요? ‘에레모스!’ 광야(廣野)!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라는 광야, 묵시(默示)와 비교하면 여기가 광야(廣野)예요. 이 광야, 우리의 인생이라는 이 광야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가야 할 게 뭐겠어요? ‘아! 내가 문둥병자 맞구나. 죄인 중에 괴수가 맞구나. 그래서 나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구나.’를 알고 가야 하는 거예요. 진(陣) 안! 진짜 하느님나라에 내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못 가는데, ‘그 예수가 나를 단번에 깨끗하게 해 주셔야,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거구나!’ 요거 알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명기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광야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명기하고 있는 거요. (신명기 8:2-3)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보세요. 너희들은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 못 지키는지, 그거 알게 하기 위해, 광야를 살게 한 대요. 그런데 하느님은 ‘봐! 너희들 못 지키지? See?’ 이거 보여주려 했는데, ‘지켰는데요.’ 이러고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성경 전체가 어긋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보혈의 공로로, 이미, 어린 양의 보혈의 공로로, 출애굽한 후에, 왜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왜 광야를 40년 동안 살아야 됐죠?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더니,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 다른 이들이, 하느님이 분명히 주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붙들지 않고, 인간들의 가능성과 자격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 앞에서는 메뚜기 같은 존재인데,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약속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를 산거죠? 인간은, 하느님의 약속을 붙들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지, 너희들의 자격이나, 너희들의 힘 의지하여, 하느님의 약속에 너희들이 뭔가를 기여하겠다고 하면, 너희들은 이 광야에서 죽어! 이거 보여주려는 거란 말이에요. 그거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40년 살게 했다 그랬잖아요? 하느님이! 그러면 여러분의 광야는,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주어진 거냐고요? 아! 하느님의 언약! 하느님의 약속(約束)! 묶을 약(約), 묶을 속(束). 신랑에 꽁꽁 묶여진, 창세전 언약으로 꽁꽁 묶여진, 하느님 언약에 의해, 은혜로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거구나! 이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성도의 광야(廣野)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신명기 가지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다!’ 빵은 뭐예요? 우리가 먹어서, 에너지 삼아, 우리의 힘을 발휘하여, 뭔가 하려고 하는 걸, 빵이라 하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건, ‘말씀을 지켜서 산다는 게 아니라, 말씀이신 하느님이, 끌고 가는 대로, 그려내는 대로,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그려지는 게, 성도의 인생 맞다가 말씀으로 산다.’예요.
여러분, 말씀을 지킨다는 건, 말씀대로 산다는 건 말씀대로 지키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창조의 말씀이, 그려내는 구속사(救贖史)가 있어요. 그 말씀이 묵시(默示)를 완료(完了)한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 말씀이, 이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과, 우리 인간들의 처음 자리, 그 실체를 그려내려고 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자꾸 뭐로 위장(僞裝)하여 그 그림을, 방해한단 말입니다.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하느님의 말씀대로 끌려가며 사는 걸,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뭐 사람은, 밥만 먹어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을 읽어야 된다고, 읽어 놓고 또 자랑하죠 그거? 그게 빵으로 사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1500년 역사가,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를 증명(證明)해냈어요.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건, 말씀이신 예수가, 당신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갈 때, 그 흔적(痕迹)을 ‘삶으로 그려낸다.’가 ‘말씀대로 산다.’예요. 말씀은, 여러분에게 장악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여러분을 장악한다 말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지킨다는 건, 말씀을 내가 해석하고 포착하고 장악하여, 내가 지키는 거죠? 말씀은 여러분에게 포착되지도, 장악되지도 않아요. 하느님이기 때문에! 창조란 말이에요. 말씀이 여러분을 해석하고 장악하여, 말씀이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을 성경이, 자꾸 ‘하느님’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르코복음에도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소가 광야(廣野)라고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마르코복음 1:35, 40-41, 45) 35 다음 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40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41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45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 여기 외딴 곳으로 번역이 된 이 단어가, ‘에레모스, 광야(廣野)’예요. 광야로 나가세요. 그랬더니, 그 외딴 곳으로, 진 밖으로, 예수를 쫓겠다는 이들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구속사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계시면서, 저주받은 광야에서, 그렇게 저주받아 죽어야 할 문둥병자를 고쳐서, 성전의 지성소로 보내죠? 물론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의 지성소는, 예수가 앉아야 할 자린데, 예수가 광야로 나오고, 그들을 고쳐서 성전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못 들어가는 자들인데, 원래! 그들을 그리로 들여보내는 거예요.
광야는, 문둥병자들이 사는 진 밖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광야에서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을, 하늘의 보좌로 밀어 올리시고, 당신이 친히, 그들의 광야를 사시는 거예요. 그래서 진 안으로 못 들어가는 거예요. 마태복음의 문둥병자 치유사건을, 마태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세요 (마태복음 8:17)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문둥병자가 되고, 예수님의 그 형상을, 문둥병자에게 입혔다는 거예요. 보다시피, 우리의 문둥병은, 우리가 치료를 잘 받고 연고도 잘 바르고 해서 나은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친히 가져가시고, 우리를 거저 정결케 해주심으로, 낫게 된 거예요. 그러한 현실을 레위기의 아사셀 염소를 통하여, 우리에게 먼저 또 보여 주셨단 말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대속죄일 (7월10일)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안수로 전가 받아서, 이스라엘의 죄를 그 염소에게 모두 전가 시켜요. 그리고는 광야로 쫓아버리고, 더 이상 안 보일 때, 죽여 버리는 거예요. (레위기 16:21-22) 21 아론은 그 살려 둔 염소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온갖 잘못과 일부러 거역한 온갖 죄악을 고백하고는 그 모든 죄를 그 염소 머리에 씌우고 대기하고 있던 사람을 시켜 그 염소를 빈들로 내보내야 한다. 22 그 염소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염소를 빈들(광야)로 보낸 다음 거기서 죽는 거예요. 광야에서! 진 밖에서! 진 밖으로 몰아내는 거죠. 그럼 지금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하느님나라에 들어갔어요. 그럼 예수님은 어디 계세요? 광야에 계세요.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죠? 세상 끝 날까지. 다른 곳에서는, 내가 협조자 성령을 보낸다. 그래놓고, ‘내가 내려가겠다.’ 그래요. 또! 그래서 바울로가 고린도서에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거요. 예수님은 지금 광야, 우리의 인생 속에 들어와 계시다니까요. (요한복음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이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예수가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 그게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성령!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세요. 광야에 함께 계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 광야를 살면서, 이스라엘이 그랬잖아요? 구원받았어요. 어린 양의 보혈로! 그런데 광야에서 왜 어린 양의 보혈로, 내가 너희들을 전쟁을 시켜도 시킬 수 도 있는데, 한 300만 정도 되니까, 해 볼만 했단 말입니다. 전쟁을 조금만이라도 시킬 수 있었는데, 왜 은혜로만 구했는 줄 알아? 이걸 40년 동안 가르친 거예요. 그려낸 거예요. 광야에서. 그러니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이고 역사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배워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죄(罪)가 무엇인지, 의(義)가 무엇인지, 심판(審判)이 무엇인지를, 그림으로 그려서 가르쳐 주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요. 그러니까 ‘나는 쟤보다는 예수님의 보혈이, 한 두 바가지는 덜 와도 괜찮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이걸 증명하는 게 신앙생활을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피로 확 덮지 않으면, 저는 광야에서 죽어야 할 문둥병자가 맞습니다.’를 고백하고 가는 거란 말이에요. 아! 이걸 알아듣고 ‘아멘!’하는 분들, 복 있을지어다.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목자들도 못 알아들어요. 사제들도 못 알아들어요.
(히브리서 13:12-13) 12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 우리도 어디로 가자? 성문 밖, 진 밖으로 우리도 가야 되는 거요. 가서 뭐 지고 가라고 그래요? 고난! 능욕! 십자가 지고 가래요. 어디로? 예수께 가라고 그래요. 문둥병자를 고치신 그 복음서의 사건이, 히브리서에서 또 그대로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보고 그 진 밖, 광야로 가서, 그 분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를 배우라는 거예요. 그게 어려분의 진 밖 삶, 광야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인 거란 말예요. 십자가를 지고 나가라! 그건 나라는 존재가 부정되고, 부인되는 거요, 광야는 그러한 문둥병자에 불과한 우리가 폭로되는 곳이고, 하느님의 은혜의 필요성이 확증되는 곳이지, 우리 인간의 가능성과 성숙과 변화가 입증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영문 밖, 세상에서, 문둥병자에 불과한 이 저주받은, 죽은 흙에 부어진, 그 하느님의 생기, ‘루와흐,’ 성령! 그리스도의 영! 그 하느님의 생명력! ‘바라크’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절절하게 깨닫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는 걸, 먼저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준비물부터 챙기고 있는 거예요. 국에다 밥 말아서, 이거 하느님께 갖고 가면, 하느님이 기뻐하실 거야! 이렇게. 그거 다 토했다니까요. 그거! 흡입하다가.
우리는, 신랑이 진짜 원하는 거, 그게 무엇인지를 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알고 가야 돼요. 신랑은, 진심으로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하는데, 자신이 누구이며, 신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는데, 신랑이 왜 필요해요? 그런 자들이 엉뚱한 사랑의 징표(徵標)들만을 열심히 만들어 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걸 소중하게 자기 것으로 챙겨갖고 있는 거예요. 고 놈들이 나중에 심판대 앞에 가서, 요것, 조것 내놓으면서, 이것도 했고요, 저것도 했고요, 요럴 자들이라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나 너 몰라!’라고 이야기 한다니까요. ‘네가 날 안다면, 우리가 아는 사이라면, 너는 지금 이걸 갖고 오면 안 돼. 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와야지, 왜 이걸 갖고 왔어? 그러니까 너랑 나랑은 모르는 거야!’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모르는 자라고. 그렇게 자기 것을 챙겨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복음이 아녜요. 아사직전의 굶주린 사람에게, 빵 한 쪽은 생명입니다. 그거 없으면 죽으니까. 그러나 배가 부른 사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거예요. 복음은, ‘나는 이제 이 물 한 방울 안마시면, 목이 셀로판지처럼 붙어서 죽습니다.’라는 겁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게 그거거든요. ‘그런 내가 예수의,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살겠습니까?’라는 절박함이 있는 자, ‘나는 문둥병자 맞습니다.’라는 그들에게만,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들에게만 생명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이 광야에서 내어 놓은 걸 준비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생명처럼 붙들 수 있는, 빈 그릇이 되어 가는 거리니깐요. 그 와중에 세상이 합의한, 불교인들도 추구하고 있는 착한 삶이 나올 수 있고, 성숙(成熟)한 사람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안 나올 수도 있어요. 아니 그러면,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술만 마시다가, 아주 그냥 개차반으로 싸움박질 하다가 죽은 사람은, 다 지옥가야 되요? 그건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네? 그 사람들 다 지옥 간 거 맞아요? 은혜로 덮어야 천국 갈 거 아닙니까? 그 와중에도 착한 일 몇 개 했다니까요? 아니요. 하나만 어겨도 죄가, 아흔아홉 개의 선을 먹어버린다니까요. 이게 야고보서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꼭 그래도 옛날에 착한 일 몇 개 했기 때문에 천국(天國)에 갔을 거라고, 자기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은혜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걸!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들, 내가 한 선행! 내가 한 헌금! 내가 한 봉사! 너무 귀하고 가치 있어 보이죠? 그걸 누가 감히 부정하거나 폄하하면,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목이라고 조르고 싶지 않아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걸 부정하면. 그런데 그게 바로 죄의 종들에게서 나오는, 자기 의(義)인 거예요. 행위가 나쁘다는 게 아녜요. 하세요. 그게 나의 의(義)로 쌓일 때, 그건 마귀의 작품이 되는 거예요. 하세요. 하는데, 그 모든 게 은혜의 산물이라는 게, 깨달아 질 때까지, 먼저, 하느님의 은혜와 우리 존재의 실체를, 분명하게 보아야 돼요. 안 그러면, 죽어라고 준비해 간, 그 가치 있는 행위들이, 전부 죄의 종으로 산, ‘노예 문서’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죄의 종으로 산 자들은, 자기의 ‘의’를 쌓기 때문에, 그거 갖고 가면, ‘야, 죄의 종으로 살다 왔구나, 노비문서 잘 갖고 왔다. 밖으로 나가서 영원히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할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귀하게 갖고 간 선행이! 구제가! 봉사가!
바리사이들이, 율법과 제사! 도덕과 윤리를 목숨 걸이 지킨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하느님으로부터 ‘독사의 새끼’라는 저주만 받았어요. 그러면 바리사이들에게 그렇게 도덕과 윤리를 지키게 하고, 율법과 제사를 지키게 한, 존재가 누굴까요? 마귀예요. 여러분 마귀가 이 세상에서 조폭처럼, 막 도덕과 윤리도 지키지 말고, 더럽게 살게 만드는 게 마귀인 줄 아세요? 천만의 말씀! 사탄교는 그 반대를 가르칩니다. 마귀는, 여러분이, 여러분도 기특하게 여길 만큼, 자기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만한 일들을 하게 해 줘요. 부추겨 줘요. 그리고는 ‘나는 이런 사람이야!’를 끝까지 붙들게 만드는 게, 마귀예요. 이게 바리사이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대해 달라고 우기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들이 마귀 새끼예요. 오히려 하느님은요 그가 교묘히 감추어 두고 있는, 그 죄인 됨의 상태를, 젓가락으로 확 휘저어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봐!’라고 보게 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에요. 그래야 예수를 붙들 거 아닙니까? 죄를 짓게 한다는 게 아니라, 워낙 죄인인데, 아닌 척하고 있으니까, 미끼를 던져준다니까요. 아니 왜 다윗이 일어났는데, 그 시간에 밧세바가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있냐고요? 그 여자가 5분만 빨리 들어갔어도, 다윗은, 자기가 굉장히 괜찮은 존재로 알고 그냥 갔을 거라고요. 그러면 큰 일 나는 거예요. 다윗은 그 일로 다윗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건 무슨 의미일까요?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 요 이야기를 우리가 곡해해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자범죄(自犯罪)들을 또 짓게 되는데, 십자가는, 우리의 원죄를 속한 거고, 이 땅에서 우리가 자범죄 지은 것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고걸 씻어야 된다고 알고 있잖아요? 이게 가톨릭의 교리예요. 여러분이 지은 죄를, 이 땅에서 여러분이 회개하고 노력하여 계속 씻어가야 하는 거라면, 예수님이 거기서 제자의 발을 씻기면 안 돼요. 제자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야 되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IQ 50만 넘으면 아는 거 아녜요? 성경이 그걸 요구하는 거라면, 예수님이 끝까지 제자들의 발을 그렇게 씻기시면 안 돼요. ‘이제는 너희들이 해야 할 거 아냐?’ 이렇게 나와야 된다니까요. 그 발을 씻기시는 에피소드 바로 앞에, 어떤 구절이 있는지 먼저 보세요. 성경은 문맥을 통해서 봐야 한다 그랬죠? (요한복음 12:46-47)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왜 이런 말이 여기 들어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발 씻기는 사건 바로 앞에, ‘너희들이 말씀 안 지켜도, 난 절대 심판 안 해, 나 너희들을 구원하러 온 거야.’ 이 말씀하시는 거요. 지금. 앞뒤가 안 맞잖아요. ‘지켜, 안 지키면 죽일 거야. 발 빡빡 닦고 와!’ 그래야 되는데. ‘너희들 안 지켜도, 난 너희들 심판 안 한다.’ 그리고는 무슨 이야기로 끌고 가느냐 하면, 13장 1절 보세요. (요한복음 13:1) 1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끝까지 사랑한다는 건, ‘내가 십자가에서 너희들 한 번 사랑했는데, 너희들 발 안 닦고, 더럽게 그렇게 이 세상에 살다 오면, 나 중도에 너희들 버릴 거야!’ 이건 끝까지 사랑하는 것 아녜요. 끝까지 사랑한다는 건, ‘내가 십자가에서 구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이 어떻게 판정을 내리든, 나는 끝까지 그놈! 내 나라 데리고 들어갈 거야!’ 이게 끝까지 사랑이에요. 그래 놓고 발을 닦는 거예요. (히브리서 6:10)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지금까지 성도들에게 봉사해 왔고 아직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보여 준 선행과 사랑을 결코 있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미 섬겼죠? 원수를 섬겼잖아요? 그래놓고, 뭘 안 잊었다고 그러느냐 하면, 지금도 너희들을 섬겨야 한다는 걸, 하느님이 안 잊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지금 종으로 우리를 섬긴다는 뜻이에요. 이게 지금 예수님의 종의 모습으로,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이건 히브리 종들도 안 하던 거예요. 그런데 종의 모습으로 내려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단 말입니다. 너희들이 이미 목욕을 했다는 건, 십자가의 섬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의 발을 또 씻기고 있다는 건, 예수님이 이 역사 속에서, 그들을 섬기면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거예요. (필립보서 2:6-8)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게,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이미 섬김’이에요. 종이 됐어요. 섬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제도 섬김’이란 게 있단 말이에요. 그게 이 광야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은, 이 광야라는 역사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섬기고 계시는 건가?
(요한복음 13:4-10) 4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5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6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그는 '주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께서는 '너는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8 베드로가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하고 사양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하셨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 그러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0 예수께서는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그만이다. 너희도 그처럼 깨끗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12장 말미에서,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시작된다고 그랬죠? 예수님은 당신의 말을 듣고 지키든, 안 지키든, 그런 것에 상관없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은혜의 복음이 선포(宣布)되죠. 그리고 13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그 제목 밑으로, 붙어 있는 에피소드가, 이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요량이라면, 몸도 다 씻어 달라는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은 너희는 이미 목욕을 하여 깨끗하게 된 자라고 그래요. 이게 홍해를 건넌, 출애굽한, 이스라엘이란 말이에요. 깨끗해졌어요. 그런데 발을 왜 씻느냐고요? 그건,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짓는 죄를, 깨끗하게 회개 하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절대 내 나라에 못 들어 온다가 아니라, 광야 40년 동안에, 우리 성도는, ‘도대체 왜 하느님이 나를 목욕을 씻겨 줘야 나는 깨끗해질 수 있는 자인가’를 예수님이 그 발 씻김의 사역을 통해서, ‘아,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이렇게 씻겨줘야 했던 자구나!’ 이걸 배우는 거예요. 이게 발 씻김의 인생! 광야의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광야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목욕시켜줬다는 걸, 예수님의 발 씻김의 섬김을 통하여 배우는 곳이라는 거지, ‘이 땅에서 발 빡빡 닦고 와!’ 이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서로 발을 닦아 주라는 말은 뭐예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발을 닦아주고, 목욕을 시켜줘서, 정한 진(陣) 밖으로 들어가는 자가 되었다는 걸, 인생 속에서, 예수님이 캔버스로 사용하여, 그려내야 되기 때문에, 서로에게 그걸 보여주는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이게 발을 닦아주는 거예요. 우리가 누굴 닦아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목욕 씻겨줬다는 걸, 여러분이 ‘반드시’ 삶으로 살아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문둥병자로 폭로(暴露)가 돼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그걸 인정해야 돼요. 말씀이, 여러분을 그렇게 비추는 거울이란 말입니다. 화들짝 놀라 그걸 깨버리려고 하지 마시고, 똑똑히 보라는 거예요. 말씀에 비추어진 문둥병자인 나를, 똑똑히 보라는 거예요.
요 섬김의 이야기는, 이미 출애굽기에, 율법에서 예고가 되었던 거예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을 보면요, 종이 주인의 집에 들어가 6년을 일하잖아요? 그러면 7년 째 자유롭게 풀려나게 되어 있어요. 자 6년, 7년째 뭐가 생각나세요? 하느님의 창조가 생각나죠? 6년을 열심히 일한 종이, 7년 째 자유롭게 풀려날 수 있는데, 이게 안식(安息)이에요. 완성입니다. 여섯은, 하느님의 일하심의 숫자고, 칠이 안식이에요. 완성의 숫자인데, 그래서 종이, 아까 우리가 필립보서에서 봤잖아요? 종으로 오신 예수께서, 여섯 째날 금요일날 죽죠? 그리고 칠 일째, 안식을 완성하시는 분으로 오시는 거요. 그래서 금요일 날 죽으시는 거예요. 여섯째 날! 자 종이 6년 동안 일을 완성해 새 창조를 완성하시는 거요. 십자가로 가시면 되는데, 주인이 신부를 줬네. 그 율법에 보면, 이 종이 나가도 되는데, 신부를 데리고 나가려면, 못 나가요. 그 신부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그냥 그 주인과 이 신부를 섬기겠다고 고백하고, 몸에 못으로 뚫린 흔적을 가져야 돼요. 그리고는 그 신부와 영원한 종으로 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요. 하느님의 아들이에요. 이제, 일곱 째날 하늘로 가시면 되는데, 하느님이 신부를 줬네. 교회! 이 걸 두고 가지 못하는 거예요. 사랑하니까. 그래서 부활하신 그 분이 손과 옆구리에 못 자국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건,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 얻은 흉터는 다 갖고 가나보다가 아니라, 예수가 그렇게 종이 되었다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우리 때문에! 그 하느님이 무소부재, 편재를 포기하고, 육신을 입고, 우리랑 살기로 결단하신 거예요. 하느님임을 포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종이 되어버린 거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신부와, 우리와 함께 이 광야에서 우리를 섬기고 있는 거지, 우리가 그 신랑의 발을 닦고 있는 게 아니란 말예요. 이걸 몰라요. 이걸! 그 신랑은 알아서 잘 하는 분이에요. 우리가 괜히 발 닦아 준다고 가서 문지르면, 애들이 와서 비누칠, 손장난 해놓고 헹구지도 않고, ‘아빠, 발 닦았어!’ 하면 기분이 어때요? 또 닦아야 되잖아요, 내가! 우리 신랑은 그걸 원하는 게 아녜요. ‘손 대지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하느님이야. 내가 너 닦아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가는 게, 우리 인생이란 말예요. 그걸 하나하나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 신랑이 하신 일이, 찬송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어요. 감사해서 죽겠는 거죠. 그래서 에페소서 1장에서, 성도의 존재 목적을 한 마디로 그냥 ‘찬송’이라 한 거예요. ‘찬송, 끝!’ ‘찬송, 끝!’ 그래도 계속 국에다가 밥 말아서 갖고 갈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면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삶은, 삽시다. 이왕이면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잘 사세요. 뭐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있으면, 다른 종교인들이 100불 내면, 여러분은 200불 내세요. 내가 언제 그런 걸 하지 말라 그랬어요? 불교인들이 가서, 홈리스(homeless)들에게 빵을 나눠주면, 여러분은 돈까스 나눠주세요. 확, 그냥! 더 좋은 거 하나도 안 하면서, 왜 그런 거 안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그건 교회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인간이면 하는 거니까, 하시라고요.
여러분 말씀은, 반드시 여러분을 문둥병자로 폭로시켜 낼 거예요. 말씀은 거울입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갈 때, 제일 많이 가져 간 게, 거울이었어요. 아프리카엔 거울이 없으니까. 추장이나 추장 사모들이, 그것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해서, 선교사님들이 하나씩 주잖아요? 바로 깨버렸대요. 시커먼 괴물이 들어 있거든요. 그 안에! 말씀이 그런 역할을 한다니까요. 여러분 앞에 여러분의 실체를 확 보여줘버려요. ‘문둥병자!’ 이렇게. 그때 엉뚱한 것으로 가리려고 하지 마세요. ‘문둥병자들아, 너희를 비추는 거울을 똑똑히 보라.’ 이게 말씀 앞에 선 성도예요. 똑똑히 보고, ‘아! 주님만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거구나.’ 아니면, 화로다, 망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래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지옥이 뭐예요? 땅에 갇힌 게 지옥이에요. 지옥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 흙이 바로 나예요. 내 안에 갇혀서, 나만을 위해 살고, 나를 위한 구원! 나를 위한 천국! 나를 위한 하느님! 여전히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게 지옥이에요. 여러분이 그걸 모르면, 여러분은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 아녜요. 그게 부수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교는 그게 부수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이걸 못 알아듣고, 그래도 ‘나는 인간의 자존심을 챙길래요?.’ 저는 앞으로도, 여러분을 부수고 폭격하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어요. 아플 거고, 더러울 겁니다. 계속 내 모습이 비춰질 거니까. 그 때 보세요. 피하지 마세요. ‘고지전’이란 영화를 보면, 그 중대장이, 자기 부하가 하나 죽으니까, 모르핀을 맞으려고! 슬픈 일이 있으면, 이 사람은 견디질 못하고, 항상 모르핀으로 그걸 해결을 했어요. 마약으로! 또 신하균이 또 모르핀을 맞으려 하자, 중대장의 손을 잡으며 ‘아프면 우세요.’ 그랬어요. ‘아프면 그냥 우세요. 자꾸 그 아픈 걸 가리려고 하고 모면하려고 하면, 중대장님 당신 죽어요. 그냥 아프면, 우세요.’
여러분 여러분의 실체가 폭로되어 아파요? 우세요. 자꾸 뭐 딴 걸로 가리려고 하지 마세요. 뭐가 대단해요, 우리가? 뭐가 대단하게 착해요? 전 요즘 기사들을 보면, 무슨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서, 낙도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멕시코의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던 어떤 대학교수가, 나중에 보니까 마약을 파는 갱단의 두목이었대요. 그 사람이 자기가 마약 파는 갱단의 두목이라는 걸 감추기 위해 이걸 했을 것 같으세요? 아뇨. 인간들은 그렇게 해서 자기 자존심을 챙기려고 해요. 그런데 진짜 실체를 한 번 보란 말이에요. 몇 가지 깨끗한 거 해놓고 우리가 진짜 더러운 짓 저지르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는 알잖아요. 그렇게 착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근사근하고, 집에 들어가서는 마누라 두들겨 패는 인간들 얼마나 많은 줄 아세요? 그래놓고 고거는 싹 가려버리죠? 뭐 어떤 게 착한 사람이냐고요? 뭐가 악이냐고요, 도대체? 죄(罪)는 그 모든 선(善)을 한 번에 먹는, 위력이 있다니까요. 그러면 ‘난 아니구나.’하면 돼요. ‘하느님, 은혜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죄악 속에서 뒹굴고 사는 게 더럽고 고통스럽네요. 하느님, 정말 하느님의 백성답게 한번 좀 살면서, 기쁨과 평안 좀 누리게 해 주세요.’ 그러면 기도하세요. 그러면! 왜 성도들의 삶이 이렇게 치열하지가 않아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여러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세요. 하느님을 이해하시고, 하느님을 아시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따로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나요? 어쩜 성경 전체는 비유들 이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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