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9.14.“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4 조회수2,055 추천수3 반대(0) 신고

요한 3, 13-17(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고 해서 십자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인간적인 십자가가 참으로 많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이러한 십자가들을 우리는 더러는 피하거나 극복하면서, 견디거나 뛰어넘으면서, 해결하거나 타협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무관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완전한 패배요, 그야말로 치욕이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신명기 21,23) 라고 성서에 기록 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스캔들이요,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그야말로 하느님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막말이요 미친 소리였습니다. 곧 당시의 그들이 갖고 있었던 하느님관(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하느님의 대한 개념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면서 자신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부동의 원동자였고, 플라톤 계통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순수한 이데아’, 곧 영적, 초월적 차원에만 해당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육체와 그로 인한 물질적 불완전에서 비롯된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정서가 있을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도 없는 스스로 충만한 자족적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수난을 받고 죽은 것이다.)과 집단의 힘 있는 수호신이나 제정일치의 황제숭배로 여기고 있었던 고대의 종교상식과 당시의 보편적 가치와 공공질서를 깡그리 뒤집어 버리고 파괴하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파격적인 범죄요 패륜이요 반역이었으며, 동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뽈리까르뽀의 [순교록]에는 순교를 목전에 둔 뽈리까프뽀 주교와 몇몇 신자들을 향해 군중들이 이 무신론자들을 죽여라!”라고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초기 그리스도신자들의 죄목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수난과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충격적인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 모습이 단죄 받는 십자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자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는가?”(유스티노의 [프리폰과의 대화])를 묻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껏 모든 이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도전이며,

                   그러한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통념을 뒤집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복음서 중의 복음서혹은 소복음서라고 불리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고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우아함도 냉철함도 현명함도 지혜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하느님다움을 잃어버린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사랑에 빠지셔서 현명함을 상실하신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하느님이 사랑에 빠진 까닭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그분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당신의 숨으심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당신의 감추심, 당신의 죽음으로 당신이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야말로,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어두운 밝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 사심입니다. 무력함이지만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요, 패배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승리입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지면서도 진정 쳐부수는 승리의 깃발이요 영광의 월계관입니다. 참으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그리스도의 현양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