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십자가 현양 축일에.....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4 조회수2,042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네요. 매일미사 책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합니다. 고통, 시련을 상징하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나 고통은 싫어합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앞전에 우리의 신앙의 사각지대가 있는지 없는지 한번 점검해봐야 한다고 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이 내용을 타 교구 한 밴드에 올렸습니다. 그러니 한 형제님께서 회개할 수 있는 시간임을 깨우쳐 주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제가 그래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저 같은 나이롱 신자도 지금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기운이 빠지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치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도망갔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처럼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에 한 넋두리라고 했습니다. 저도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을 간 모습과 지금의 모습과 왜 비슷한 모습의 양상을 가진다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지 한번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도망을 간 이유는 자신에게 예수님을 따랐다는 이유로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을 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진정 바이러스 때문에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를 피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분명 이해를 하시고 또 그렇게 원하실 겁니다. 근데 분명 하나 잘 생각해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만약 나중에 단순히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잘 아는 지켜야 하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구실로 하느님께서는 추궁을 하시지 않으실 거라고 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서는 다 드러나겠지만 굳이 심판대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양심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 속에 하느님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도 없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또 자신을 부인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들었지만 제자와 아들이라는 이름은 듣고 싶지만 정작 그런 신분이 되려고 할 때 가져야 하는 조건은 따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일까를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편안함을 추구하고 위험을 회피하려는 기본 속성이 있습니다. 위험은 절대 피해야 합니다. 위험이 자신의 편안함과 나태함을 피하기 위한 핑계의 수단이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이걸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지금의 현실을 빙자해서 자신을 합리화시킨 핑계가 단순히 핑계로만 끝난다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장기화가 된다면 자신의 영혼에 치명상을 입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누구를 탓할 수가 없습니다. 다 자신의 탓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인간은 원래 근본 속성에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의 속성에 접어드는 건 아주 쉽습니다. 또 한번 이런 속성에 젖어들면 알코올 중독처럼 죄성에 중독되어도 중독된지도 모르게 됩니다. 이게 마치 자신의 영혼에 독버섯이 번지는 것처럼 번지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작은 사소한 문제처럼 생각될 수가 있지만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도 사실 고백을 하자면 이걸 제 자신이 합리화하려고 할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굳이 피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교회나 지금 국가적인 방침도 그렇고 하니 또 무엇보다도 나는 더더욱 지금 수도원에 피정을 가야 하니 조심해야 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한 적은 있었지만 이 생각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정말 현실적으로는 맞을 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현실을 부정하게 이용을 한다면 기본적으로 신앙인의 양심에 반하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번처럼 철저하게 교회의 미사 전면 중단이라는 방침이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얼마든지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하고 교회 봉사자의 지시에 잘 따르며 방역수칙을 철저히 준수하게 된다면 최소한 미사만이라도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는 미사 참례를 철저히 준수하자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이 시점에 어떤 식으로 정신 무장을 새롭게 해야 하는가를 한번 생각해본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지금 미사 참례를 걱정하는 문제보다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로 인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신앙을 맹신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실패를 해서 재기에 성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을 여기에 비유하는 건 조금은 적절하지 않을 수가 있지만 신앙은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냉담을 오랫동안 하다가 냉담을 풀고 다시 신앙을 시작한 분과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민감한 부분이라 자세하게는 말씀을 할 수가 없지만 하나만 말씀을 드린다면 오랜 시간 냉담을 풀고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어딘가 모르는 그 공허함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이분도 냉담을 하면서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어려운 시기만 조금 넘기면 그때 성당 나가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다시 열심히 시작하면 될거야.”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생각이 어찌된 일인지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해결된 후에 나가려고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뭔가 중요한 계기가 있어서 그때 지금 하느님께 나가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은 이제 끝장이다라는 절박한 느낌이 들어서 그제서야 성당을 찾은 것입니다.

 

그때 그분이 느낀 것이 지금이라도 불러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지만 자신이 냉담한 기간이 가져다주는 공허함은 항상 자신의 마음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분의 체험담을 통해서 예전에 느낀 게 있습니다. 바로 세상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신앙도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간접적으로 느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잘은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땐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저는 개신교 다닐 때부터도 그랬지만 왠만하면 마귀라는 이런 단어를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한번 사용한다면 신앙생활에서 마귀에게 조금의 허점이라도 노출되지 않아야 자신의 신앙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 십자가 현양은 정말 위대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처한 현실에서 최대한 우리가 질 수 있는 십자가는 우리의 힘으로 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어야 할지와 또 자신이 진 지금의 십자가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어떻게 현양될지를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유익한 시간이 될 거라고 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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