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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물세례 불세례 (루가 3:16-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4 조회수1,759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04.

 

물세례 불세례

(루가복음 3:16-20)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18 그 밖에도 요한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하면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19 그런데 영주 헤로데는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처로 맞아 들인 일과 그 밖의 온갖 잘못을 들어 자기를 책망했다고 하여 20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헤로데는 악한 일 한 가지를 더하게 되었다.

 

 이런 게 바로 말씀! 소리의 역할로 세상 앞에 선 세례자요한의 모습이었어요. 역할이었단 말예요. 그들의 치부를 감추려고 하는 세상 왕에게, 그 말씀이 맞아 죽는 걸, 그려내고 있는 거죠. 자기의 육적 목숨을 챙기기 위해서, 이 육적 자아, 육의 자기 가치 수호를 챙기기 위해, 진짜 생명인 말씀을 죽여 버리는 거요. 광야의 외치는 소리를! 자기를 찾아간 소리를 죽여 버리는 거요. 이게 역사의 실체란 말입니다. 이게 세상이란 말이에요.

이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 아니 여전히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인 거죠.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우리의 부끄러움과, 우리의 어두움을 가리기 위해, 오늘도 예수를 죽이잖아요? 아니 내가 언제 예수를 죽였어?’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말씀이,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욕망 앞에서 부정되고, 무시(無視)당하고 조롱(嘲弄)당할 때, 예수가 죽는 거예요. 말씀으로 오신 예수가! 그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는 것 자체가 예수를 죽이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성도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가치 없음과, 불가능함과, 부정함을, 계속해서 폭로시켜 드러내는 거예요. ? 그걸 수호하고 붙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이, 예수가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가 위해서는, 우리를 죽여내야 되는 거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이러는 거예요. 오병이어의 사건은, 바로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요한의 이야기가, 세상 왕의 왕궁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광야에서 일어난, 애굽의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이, 광야에서 이렇게 풀어지는 것처럼! 애굽의 왕실에서 살던 모세 안에서, 애굽의 왕자로 살고 싶어 하던 이 존재들이,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현실이 무엇인지를 광야에서, 그려내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헤로데의 왕실의 이야기가, 광야에서 설명되는 거란 말예요. 요걸 잘 이해해야 돼요, 여러분! 그건 엄밀히 말해서 둘 다, 헤로데의 왕실의 이야기와 광야의 오병이어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서, 둘 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전자가 육적 아담의 본질을 폭로해내는 그림이라면, 우리가 지금 그렇잖아요? 구원받기 전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우리도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요. 그리고 그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남들에게 폭로만 되지 않는다면, 들키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가 우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헤로데의 왕실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또 광야에서 일어나는 그 오병이어의 사건 또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전자가, 육적 아담의 본질을 폭로해내는 그림이라면, 이 후자, 광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복음의 현실! 이걸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에레모스 광야, 세례자요한이 이 헤로데, 왕실에 의해, 이 세상의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참수 당한 세례자요한이 살던, 말씀을, 소리를 외치던 곳이 광야였죠? 이 왕실의 이야기를 한 다음에, 거기에서 잡혀 죽은 세례자요한이, 말을 외치던 광야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란 말예요. 왕에 의해 참수당한 하느님의 백성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 에레모스, 광야에 세례자요한이 섰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세요. 세례자요한이 모형하고 있던 원형인 예수가 그 광야에 서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오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태복음 14:12-13) 12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1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빈들,광야)으로 가셨다. 그러나 여러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육로로 따라 왔다.

여기에서 배가 고파서 오병이어가 나오고, 그걸로 많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한의 죽음과, 이 오병이어 사건이 항상 붙어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말씀을 외치던, 그 광야에 서서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이 싱크로율이 너무 똑같죠, 외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세례자요한이, 왕궁에서 떡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아서 사는 자들의, 역사 속 행태예요. 말씀을 죽여 버린단 말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 중, 어떤 이들을, 우리는 모두 왕궁에서, 왕 되고 싶어 하는 아담 후손들이잖아요? 선악과 입에 문 자들, 다 왕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잖아요? 선악과 먹은 건 왜 먹었어요?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왕 되기 위해 먹은 거잖아요? 역사 속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헤로데 왕궁의 왕실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 그게 일차적으로 우리의 욕망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에서 지금 어떤 자들을 광야, 빈들로 끌어내는 거예요. 애굽의 그 많은 존재들 중에, 약속 안에 있던 어떤 자들만 광야로 끌어낸 거와 똑같은 그림인 거예요. 예수님이 광야로 끌어내는 그림이에요. 지금 왕실에서 끌어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그들을 광야로 끌어내어, 세례자요한, 왕에게 잡혀 죽은 세례자요한이, 광야에서 말을 외치다가, 말씀으로 살다가 세상에게 잡혀 죽었잖아요. 그 광야에 있는 그들을, 그들의 삶을 도구로 사용하여, 뭔가 말씀을 하시겠다는 거요. 너희도 분명히 세상에게 맞아 죽어 참수(斬首)당해 죽을 텐데, 내가 너희들을 광야로 끌어내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세상 왕에게 말을 하다가, 말이 되어 살다가 죽었단 말이에요. 광야(曠野)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살다가 죽은 것처럼! 나도 너희들의 삶 속에서 그려낼 건데, 그게 어떤 삶인지 보자 말이에요.

세례자요한은 아주 극단적인 예가 되어서 참수되어 죽었지만, 그 참수되어 죽는 게, 어떤 식으로 죽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게, 오병이어의 사건이란 말입니다. 광야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어떤 수확물(收穫物)도 얻어 낼 수 없는 그런 곳이죠.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경작(耕作)을 할 수 없는데니까. 이게 바로 세상 왕 되기 놀이에 심취해 있는 인생들의, 실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 왕들이, 자기들이 주체가 되어서, 역사를 사용하여 뭔가를 계속 만들어 내고 발전시키고, 번영(繁榮)시키고 있는데, 결국은 빈들인 거예요. 헛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아무것도 없는 거라는 거예요.

성도는 그 사실을 인지(認知)하게 된다는 거요. 그래서 그들만 광야에 나와서 배가 고픈 거예요. 역사는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해 놓고, 그걸 먹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실 그 실체를 확 벗겨 보니까, 다 굶어 죽고 있는 거예요. 무엇에? 말씀에 굶어 죽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그 상태로 헛것을 건축하고 있는 게, 여기서 폭로(暴露)가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래요. ‘너희들이 이 역사 속에서, 광야!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여기를 헤로데의 왕궁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사실 광야잖아요? 그래서 광야 교회라고 하잖아요?) 너희들이 광야 속에서, 너희들이 전부 합심하여 생산해 낸 걸 다 갖고 와봐!’ 그래서 남자만 오천 명인데, 어린 아이, 노인네, 여자 다 합치면 수만 명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는 걸 전부 모아서, 예수님 앞에 딱 갖고 왔는데, ‘보리떡 다섯 개하고 물고기 두 마리!’

 

산상수훈에서 다섯과 둘과 하나에 대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모세의 오경과, 그것이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동안에,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줄어들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완료가 되어 영생! 구원! 믿음!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게 한 달란트란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다섯 개, 두 개 오병이어가 그들에게서 나왔어요. 다 모았더니 그거 두 개! 그런데 보리떡은 간음한 여자, 부정한 자들이 제사를 지낼 때, ‘하느님 제가 이 부정한 떡입니다. (이게 짐승의 먹이였잖아요?) 제가 짐승의 먹이만도 못한, 그런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보리떡이었어요. 돌에 맞아 죽어야할 자들이, 내놓던 제물이란 말이에요.

인간들이 열심히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안에서, 뭔가를 해서, 예수님이 빈들에서, ‘내놔 봐!’ 그랬더니 보리떡 다섯 개. 이어(二魚)! 물고기는 뭐라 그랬어요? 난태생, 알을 낳다, 증대(增大), 다산(多産)을 의미하는 거라 그랬죠? 그래서 그 알로 난 거는, 히브리 사람들은 전부 다 부정한 것이라고 여겼단 말예요. (그래서 알에서 나는 모든 건 다 부정한 거라 그랬어요.) 그런데 포유류도 역시, 알에서 나는 거예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알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알이 양수가 터져서 나오는 거란 말예요.

그 알에서 나는 모든 부정한 것은, 다시 한 번 닭이 알을 품어 부화를 시키는 것처럼 거듭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들을 날개, 닭 날개 아래, 품으려고 한 게 몇 번이냐? , 너를 구원하러 왔는데 왜 안 오느냐? 이 난태생들아! 이 물고기들아!’ 그러니까 지금, 물고기, 보리떡 이건 다 부정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는 뭔가 하겠다고 해서 갖고 왔는데, 이거 오병이어, 부정한 거예요. 그런데 그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다섯 달란트 남기고, 두 달란트, 남겼죠? 착하고 충성된 종! 예수가 남긴 거요. 성취(成就)한 거란 말예요. 그런데 인간이 그걸, 역사가 그걸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건 오병이어가 되는 거예요. 그걸 하느님께, 예수님께 드렸단 말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먹여버려요. 보리떡이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떡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제키엘 4:12-15) 12 보리과자를 굽듯이 빵을 굽는데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인분으로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구워 먹어라. (나는 똥 같은 인간입니다.’) 13 그리고 내 말을 전하여라.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 가운데로 쫓아 보내실 것이며 너희는 거기에서 이렇게 부정한 빵을 먹게 되리라.'' 14 그러나 나는 이렇게 아뢰었다. '! 주 야훼여, 저는 아직까지 부정을 타 본 일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절로 죽은 짐승이나 찢긴 짐승을 먹은 적이 없습니다. 부정한 살코기를 입에 넣어 본 적도 없습니다.' (왜 나를 그렇게 취급하세요?’) 15 그분은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 쇠똥을 피워 빵을 구워라.'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소똥은, 짐승의 똥은, 사람의 똥보다 더 부정한 거였어요.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서 , 이 똥에다가 보리떡 구워먹을 놈들아!’ 그랬더니, ‘나는 율법을 잘 지켰는데, 왜 나를 그렇게 취급하세요?’ 그랬더니, 하느님이 뭐라 하세요? ‘, 소똥에 보리떡 구워먹을 놈들아!’ 그러니까 한 마디로 뭐라 그러는 거예요? ‘, 이 똥 덩어리들아!’ 이러는 거예요. 너희들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나에게 뭘 자꾸 갖고 오는데 그게 다 똥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역사와 인생이 열심히 구축(構築)하고 있는 건, 인분(人糞)이에요. 쇠똥이에요. 똥은 영양분이 빠져 나간, 모양은 있는데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헛것이란 뜻이에요. 헛것. 그 오병이어를 그 광야에 모인 하느님의 백성들이 턱하니 내놓은 거예요. 예수님 앞에. ‘이거면 돼요?’라고. 이게 역사의 실체라는 거요. 여러분, 그걸로는 못 먹어요. 다 죽는 거예요.

역사는 자기들이 생산해낸 걸 의지하여 절대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그대로 부풀려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먹여버려요. 이 부정한 오병이어를 먹여버려요. 여러분 이게 심판이에요. 자기가 싼 걸 자기가 쳐 먹는 게 심판이에요, 그건 사라질 거거든요. 그걸 먹여서 같이 멸망시켜 버리는 게 심판이라 말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를 단순히 자기가 갖고 있는, 보잘 것 없는 거라도 내 놓으면, 하느님이 크게 튀겨주니까 바쳐라. 이건 코메디도 아닌 거예요. 농담도 아녜요. 이거는요! 그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무시무시한 이야기인 거예요. 이거 너희들이 내놓은 거 이거, 이걸로는, 이 하느님의 백성들이 절대 요기를 할 수 없다. 예요.

그리고는 그걸 그대로 먹여버리는 건 너희들은 이거 먹고 다 죽어야 된다. 다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가, 그들이 먹어야 할, 그 보리떡, 똥에 구운 보리떡, 부정한, 난태생의 물고기! 그걸 다 먹어버리고, 보리떡과 물고기가 되셔서 죽으시고, 그 오병이어! 율법! 모세 오경과 두 가지로 줄어든 그 율법! 이걸 성취하셔서, 그들에게 성령으로 먹이는 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게 성취되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이제 우리에게도 넘어 오잖아요. 그 둘은 예수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다 완료하셨지만, 그 하나가 우리에게 넘어오면, 육을 가진 우리는 이게 감당이 안 돼. 그래서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고 있는데, 나 혼자 이 예수 이야기를 하려니까, 감추고 싶고, 숨기고 싶고! 그러나 하나님은 못 감추게 하신다는 거죠. ‘너희는 세상의 빛이므로, 되박 아래 두어봐라! 하느님이 홀랑 벗겨버리세요. 그게 세상의 빛이다예요. 그 말은 다른 말로, 반드시 너희들은 세상에게 빛으로 들키게 하여 죽이게 만들겠다, 꺼버리게 만들겠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가 세상에 의해 꺼진 것처럼. 그거 무서운 말이라 말입니다. 말라기에서는 그걸 어떻게 얘기하는지 보세요.

(말라기 2:3) 3 너희 팔을 자르고, 너희가 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을 똥째 너희 얼굴에 끼얹고 내 앞에서 들어 내어 버릴테니, 두고 보아라 (예수가 그 똥을 먹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자가, 이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고 나를 구축하기 위해, 애를 쓴 게, 다섯 남편을 취한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나의 안전과, 나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택해요. 선악과를 반드시 물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거 네 산랑 아니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 혼인 신고 안 했잖아? 이런 말이 아니라, 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 말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은 율법주의 아래의 모든 아담들은 반드시 모세 오경, 율법을 붙들어요. 내 신랑으로! 그런데 율법이 신랑이 될 수 없어요. 예수! 은혜가 신랑이 되어야 된다 말이에요. 그 은혜의 신랑이 왔어요. 와서, 너는 그 다섯 남편으로는 절대 혼인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신랑인데, 나도 아직 십자가 안 졌어요. 그래서 그 하나도 지금 있는 하나도, 나도 네 신랑은 아직 아니라는 거예요. 죽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두 달란트 성취해야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되고, 그 때 진짜 하나가 오는 거예요. 아들이 오는 거예요. 신랑이 오는 거예요. 성령이 오는 거예요. 믿음이 오는 거예요. 구원이 오는 거예요. 영생이 오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편! 지금 있는 이 하나, 두 계명을 완료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이 하나! 그 하나가, 결국 죽어야 네가 사는 거지, 이 다섯 남편, 한 남편, 아무 것도 네 남편 아니야! 라는 건 그 여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거요. 그의 열심과 추구 자체를 다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넌 죄인이다예요. 그러니 너는 은혜를 받아야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튀어 나가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저 남자가 내가 죄인인 걸 말해 줬다는 거예요.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고 내가 죄인임을 폭로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하늘의 성도는 이 역사라는 세상에 내려와서 자기의 유익과, 보람과 쾌락과 명성만을 위해, 존재를 구축해가는 세상 왕들과는 반대로, 그 삶이 바로 저주 받을 아담들의 삶이며, 회개해야 할 삶임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그런 소리로서의 삶!’ ‘말씀으로서의 삶을 광야에서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참수되는 삶입니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건 부정한 보리떡과 물고기뿐입니다. 우리는 이거 먹고 멸망 받아, 그 저주의, 희생의 절기의 떡 먹고,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는 자가 맞는데, 예수께서 그걸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생기, 성령! 르와흐! 콧김을 주셔서 우리를 생령으로 만들어내신 게, 구원입니다 를 증명해내는 거요. 이게 참수되는 거요. 내가. 자아가 죽는 거니까. 부정되는 거니까! ‘은혜로만 존재하는 자가 나입니다를 증명해 내는 게!

그래서 세례자요한도 나는 하고 그가 하는 거예요. 나는 죽고, 그의 능력과, 그의 은혜와 자비가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게, 광야의 말씀의 삶이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 여러분 안에 들어가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예수를 그려내는 거예요.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안 죽어도, 괜찮을 만큼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를 증명하는 게 여러분의 인생이 아니라! 나는 그 예수가 없었으면, 그 오병이어, 똥에 구운 보리떡, 물고기 먹고 그냥 죽어야 할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거 다 가져가시고. 예수님이 그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뭐라 그래요? ‘내가 빵떡이다.’ 그러잖아요? ‘내가 떡이다.’

너희들이 지금 먹는 그 걸로는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내가 빵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이 연결이 되는 거라 말입니다. 내가 빵떡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먹이통에 오는 거요. 이 짐승들, 보리떡 먹고 다 죽어야 되는 짐승들의 먹이! 성령으로 그들에게 먹이 주기 위해 오신 거요. 그래서 구유에 오시는 거예요. 짐승의 구유에!

따라서 우리는 이 광야 인생을 살면서 나를 포함한 세상의 불가능함과 부정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폭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이 바로, 자기 전 존재와 역사 전체를 부정해버리는, 이 역사를 부정한다는 건, 이 역사의 한 부속품인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참수(斬首)란 말예요. 그게! 내 머리가 잘리고, 예수라는 머리가 척 붙는 거예요. 여기에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내가 아녜요. 개별적 자아인 내가 아니란 말예요. 교회의 실체가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것으로 심판 안 받는 거예요. 꼭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막 살아야지꼭 마귀새끼들이 그런다니까요. 아니 예수가 머리가 되어서 내 삶을 사는데 막 살아야지 이 이야기가 나오느냐고요?

그렇게 세례자요한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전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 돼요. 헤로데의 왕가는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 우리 밖에 존재하는 저주받을 어떤 무리가 아닌 거예요. ‘라는 말예요. 그게! 내 안에 그 하느님처럼의 욕구가 바로 헤로데 왕가인 거고, 그것을 생명의 말씀이 죽여 내는 거!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헤로데 왕가의 이야기와 광야의 이야기가, 우리 삶에 동시에 같이 일어난다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인생과 역사 내내, 더러운 보리떡과 물고기, 똥을 쏟아내고, 예수님이 계속해서 그 부정한 것들을 먹어치우시고,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우리를 먹여내시는 거예요. 어떻게? 말씀으로!

그러니까 이렇게 성경 안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지 않는 모든 성경 해석은, 우리를 또다시 율법으로 끌고 가게 되어 있어요. 성경이,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끄는 몽학선생이 되는 게 아니라, 저주(詛呪)의 율법으로 이끄는, 소경된 몽학선생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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