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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0.0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5 조회수1,88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 1,6-12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복음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지난 7월, 몸에서 약간의
이상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랫배에 계속 통증이 있고,
아침저녁으로 다리가 붓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에게 제 상태를 말하니,
“나도 피곤하면 그럴 때가 있더라.”
라면서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또 다른 신부는 자신은 어디가
아프다면서 저의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합니다.
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병원에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에게
제 증세를 이야기하면서 물었더니,
곧바로 응급실로 오라는 것입니다.
제가 꾀병 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서 빨리 검사하자는 것이었지요.
이 말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신부들의 말에는
 서운함과 거리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신부는 저를 믿어준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위로는 믿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말해주는 것도,
저를 진단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의 어려움, 아픔을
믿어주면서 이를 해소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이며 힘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두 날개,
곧 이 두 계명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아는 것은
거룩한 육화의 신비를 아는 것이며,
이는 곧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바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강도를 만나 초주검 상태가 된 이를
보고서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다.
 이들은 자기 입장을 내세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 성전에서 정화예식을
마치고 깨끗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피 흘리는 초주검 상태의 모습은 분명히
부정한 상태라서 자기도 부정하게
될까 봐 피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에
 강도가 많았기에 낯선 사람의 모습에
 의심하고 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제와 레위인과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고 여관에 가서
돌봐줍니다. 그를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주님께서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로 믿음을
가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인간적으로 교류한다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모서리가
점점 닮아가는 일이다.
(권미선)

뒷담화

누군가 제게 화를 내면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어쩌면 그 사람이

제게 그럴 수가 있죠?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직접 말하지,

왜 뒷담화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뒷담화를 했다는 것,

그것도 부정적인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다는

불만이고 이에 따른 ‘화’였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말이

‘뒷담화’라고 하지 않습니까?

래서 뒷담화를 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 뒷담화입니다.

그러나 이 뒷담화가 돌고 돌아 듣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듣게 되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몇 번에 걸쳐서 전달된 말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졌을 때에는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예전에 어느 스님이 ‘뒷담화도

하나의 매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의를 차리는

매너 때문에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지

못하고 뒤에서 하는 것이랍니다.

이렇게라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뒷담화가 좋지는 않지만,

이를 막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100%의 지지란 있을 수 없다고 하지요.

그렇기에 뒷담화 생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은

이 뒷담화를 하지 않는 데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진짜

사랑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서울대교구 성지, 노고단 성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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