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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聖徒의 信仰生活(로마 5:18-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6 조회수1,640 추천수0 반대(1)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06.

聖徒信仰生活

(로마 5:18-21)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 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21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정몽주선생의 단심가(丹心歌) 입니다.

차신사료사료(此身思了思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갱사(一百番更死)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위진토(白骨爲塵土) (백골이 진토로 되어) 혼백유무야(魂魄有無也) (넋이라도 있고 없고)

향주일편단심(鄕主一片丹心) (임 향한 일편단심을) 영유개리여(寧有改理歟) (어찌 고치겠는가?)

저는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우리 성도가 해야 할 궁극적 고백이 바로, 이 단심가와 같은 결연한 고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 어떤 악한 세력이,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口), 먹음직한 당근을 제시해 오면서, 간곡한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하여가죠? 하여가를 불러댄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요동(搖動)치 않고,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고백할, 임 향한 일편단심을 어떻게 바꾸겠느냐는, 이 일편단심을 고백하는 그러한 용사가 되는 게, 신앙인의 본무(本務), 의무(義務)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몽주선생님의 단심가를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제 안에서 임 향한 일편단심의 그 단심가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가가 더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겉으로는 멋지게, 일편단심의 그 단심가를 불러대면서, 제 안에서 용솟음쳐 올라오는 하여가를 감추기에 급급했었죠. 그게 신앙 좋은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지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일 수가 있어도, 저 자신은 속일 수가 없잖아요? 저는 그러한 유약한 모습이, 저 스스로에게 폭로가 될 때마다, 견딜 수없이 부끄러웠고, 절망감에 낙담(落膽)을 하곤 했어요. 그리고 그걸 더 감추기 위해, 더 경건(敬虔)한 척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에 귀가 열리고, 그 은혜(恩惠)의 복음이 이해되어지면서, 저는 참 많이 위로를 받았어요. 자유로워졌습니다.

단심가는, 그 임 향한 그 일편단심의 그 성도가,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고백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기 백성에게 불러주시는 사랑의 노래라는 걸 깨닫게 된 거예요. ‘이 몸이 죽고 죽어 골 백 번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반드시 사랑하고, 반드시 구원해내고 말거야!’ 이 단심가는, 예수가 우리에게 불러주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아멘!)그게 바로 복음이죠.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히 내 안에서 단심가를 부르면서, 나를 이끌고 계시는 그 동안에, 이 육적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그 하느님의 열심을 방해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에요. 솔직해지자고요. 그래서 성도는 자기 안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단심가와 하여가 사이에서, 올바른 자아인식을 하게 되는 거고, 하느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 항복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끊임없이 하여가로, 타협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육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게 되는, 그런 죽음의 과정과, 그래서 예수님이 홀로 완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가 다 이루었다.’ 그게 십자가잖아요? 그 승리의 현실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구원의 현재성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단심가와, 성도의 하여가에 관한 내용인 거예요. 아니 성경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예요. 사실은! 우리는 구원을 얻는 순간, 구원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다 알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실천을 쌓아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갓 신앙생활에 입문한 그 기초! 견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몸에 피가 펄펄 끓어서, 십자가도 질 기세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만, 복음을 점점 이해하게 되고, 오도(悟道), 그 도()! ! 복음! 말씀! 진리의 깊은 단계인 오도의 길로 들어가게 되면, 그게 얼마나 무모(無謀)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몸으로 체득하게 돼요. 그리고는 약할 때 강함이 되시는 방식으로 아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느님의 아들 만들기 프로젝트를 이해하게 되는 걸, 신앙생활이라 하는 거요.

우리는 구원을 얻는 어는 순간부터, 자기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 그 은혜의 선물이 어떤 것인지를, 차근차근 배워가는 거예요. 언제까지요? 죽는 날까지요! 여러분의 인생 동안에 그게 완성이 안 돼요.

성도의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하는 가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누구이신 가를 아는데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왜 하느님은 나, 그 성전은, 하느님이 창조하셔야만 하는지를, 마음 깊이 깨달아 알고 가는 게, 신앙생활의 올바른 목적지란 말예요. 왜곡된 개혁주의 말고, 진짜 개혁주의는, 바로 그렇게 하느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세상이 드러내는,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오직 복음! 오직 믿음! 이게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라는 걸 드러내는 게 개혁주의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왜곡된 개혁주의는 어떻게 돼 있어요? 그렇게 믿음을 가진 !’ 은혜 받은 !’ 이걸 자랑하는 걸, 개혁주의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저는 고걸 지적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드러나는 것이지, 우리가 드러나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 그렇게 많은 성전 척량의 이야기와, 성전의 치수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전은 고린도전서에서. ‘!’ 척량을 해서,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게 지어진 곳이 한 군데라도 발견이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그리로 안 들어갔어요. 에제키엘서에서 보면, 하느님이 준 치수 그대로, 그 양식 그대로 새 성전이 만들어지자, 그리로 하느님의 영광이 들어간다 말입니다.

그러면 성전 척량이라는 게 뭐겠어요? 여러분을 어떻게 척량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은혜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거기에다 뭘 보탰는지 그걸 척량해내는 거예요. 아주 자세하게! 고걸 신앙생활이라 그런다니까요. 그래서 오직 은혜로만, 완성된 그 곳에만, 하느님의 영광이 들어간다 말이에요. 그게 유니언 위드 크라이스트(Union with Christ)! 연합이라 그러는 거예요.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묵시록도, 성전 척량으로 끝이 나죠.(묵시록 21). 그러나 하느님의 성전 척량이 끝나고, ‘토브, 보시기에 좋았더라!’여야 돼요. 그런데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으려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없음의 상태잖아요,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으면, ‘(),’ ‘없음이란 말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빛아, 있어라! 땅아, 생겨라!’ 이렇게, 하느님이 창조하시는, 그 창조물을 보시고, 하느님이 토브, 보시니 좋았더라!’의 판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뭐가 있으면, 보시기에 안 좋단 말예요. 묵시록 21장의 성전 척량이 바로 그 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결국, 창세기 1장은, 묵시록 21장의 완료시점인 거예요.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들! 성전이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묵시록 21장의 그 성전 척량에, 나오는 숫자들이 뭐예요? (10), (1,000), 십이(12), 백사십사(144) 이런 거죠? ! 십이는 야곱의 열두 아들, 열두 지파, 열두 사도, ‘아들의 숫자예요. 그래서 묵시록에 가면, 거기에 하느님의 성전, 거룩한 예루살렘에, 열두 사도,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아들이라는 거요. 그 거룩한 성을 신부! 어린 양의 신부라 하잖아요? 교회잖아요? 그걸 성전이라 그래요. 그게 왜 십이, 백사십사. 그러니까 십사만 사천(144,000), 그냥 숫자로 보는 세대주의는 얼치기인 거예요. 여러분! 열둘! 그리고 십! ! 이런 완전수를 사용해서 하느님의 아들은 진짜 하느님의 아들로만 완성된다를 보여주는 게, 성전 척량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게 가 같은 지성소가 되는 거고. ‘이게 하느님나라다.’가 성경인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치수대로 안 지어진 그것은, 가짜 성전이에요. 그래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인생의 육인 거예요. 그게 무너져야, 새 성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완성되는 새 성전이 서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하시는 새 성전으로 완성된 성도는, 성전이죠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죠, 그 육이 죽어야 진짜 성전이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 받은 성전인데, 자꾸 그렇게 남에게 감추고 싶은 일들을 하는 거요. 그리고는 결국 그 예수의 은혜만 붙들게 되는 거! 그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하는 거요. 노력해서 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성전이니까요.

그러므로 승리! 이런 건 우리에게 강요된 의무조항이 아닌 거요. 승리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는 거요. 승리는 여러분에게 이미 주어져 있어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나에게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걸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이 육으로 이겨버리면 안 돼요. 그러면 하느님이 할 게 없어요. 그래서 자꾸 지는 거예요. 그걸 가슴 깊이 깨닫고, 하느님과 그 아들을 찬송하는 게 성도의 본무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 57) 54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이겨라 그래요. 승리를 하느님이 주신다, 그러죠? 승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걸, 알아가는 그걸, 그 과정을, 사도가 이겨라!’라고 하는 거예요. 이미 이긴 이들에게, ‘이겨라!’ ? 하느님이 이겼으므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하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그게 이겨라란 말이에요.

(요한일서 5:4-5) 4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 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성도의 이김이 뭐예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게, 성도의 이김이래요. 그 분이 나에게 생명을 창조하셔서, 선물하셨다는 것을 믿는 게, 성도의 승리라는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우리를 아들로 여겨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품어 안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된 걸, 맏는 거예요. 그걸 승리라 그래요. 하고 싶은 걸, 이 꽉 물고 안 하는 걸, 이김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라는 존재의 무력함이, 역사 속에서 반드시 발각이 되어야 되는 거요. 그런데 그걸 위장하고 감추는데 급급하고 있는 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아니던가요?

이렇게 성도의 신앙여정은, ‘라는 육의 존재가 죽고 부인되며,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승리가 찬송되는, 이중적 본질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이중적인, 하여가와 단심가가 동시에 나타난다니까요. 그렇게 이중적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 성도의, 그 역사 속 존재 안에서, 위대한 하늘 보좌! 승리죠, 그건요? 하늘 보좌와, 죽음의 제단, 내가 죽는 죽음의 제단이 동시에 경험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 속에 그 두 가지가 다 들어 있다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성경은, 여러분이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죠? 완료로. ‘앉히셨다그러잖아요? 그런데 보좌에 앉아 있는데,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마귀 같은 자신의 실체를 들키고 있잖아요? 제단이에요. 그건 도륙되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 거거든요. 하느님 앞에서! 생명은 하느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으라는 거요. 그리고 그 생명을 선물해 주신, 하느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는 자가 되라는 거예요. 쉬운 말로,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돼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라!’예요. 그게 유일한 성도의 본무예요.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게 성도의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성도는 일평생 자신이 내어 놓았던 수고와 열심과 애씀을, 자랑거리로, 상 받을 수 있는 스펙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는, 털림의 자리로 끌려 내려가는 거요.

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자존심 상하시죠? ‘그럼 난 뭐야?’ 뭐긴 뭐예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자예요. 그걸 그리스도교라 그래요. 안 그러면 절에 가셔도 돼요. 거기도 똑같은 얘기 해 주잖아요? 착하게 잘 살자. 마음을 비우자. 청렴결백하자!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게 이런 거라면, 절에 가지 뭐 하러 이런 더운데 앉아있어요? (하하하) 거기는 밥도 주는데. 여기는 밥이 없어요. (하하하)

(골로새서 1:16) 16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마귀도 포함) ,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대요. 마귀들까지도! 하느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수단과 도구란 말예요.

(필립보서 2:10-11)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성도의 목적지예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내가 영광 받는 거 아녜요. 내 구원이 목적지가 아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그 하느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 자꾸 , 그리고 이놈의 교회로, 여기 로컬 쳐치(local church)로 주의가 자꾸 집중이 되는 거요. 요거 어떻게 하면 키울까? 어떻게 하면 復興을 시킬까? 요기에!

오늘 분문을 보면, ‘죄의 왕노릇(군림)’이라는 어구와 은혜의 왕노릇(군림)’이라는 어구가 나와요. 많은 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죄의 왕 노릇(군림)이 끝나면, 은혜의 왕 노릇(군림)이 찾아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래요? 여러분 지금 은혜 입었죠? 그러면 은혜가 군림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가, ‘, 어떻게 내가 원하는 건 이렇게도 안하니? 나는? 어떻게 내 안에 있는 다른 법이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데, 왜 거기에 끌려 다닐까?’하고 고백하잖아요. 그건 하나가 끝나고 하나가 오는, 그런 방식으로 오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디아예요. 그 앞에! 전치사 디아다음에 소유격이 오면, 수단과 방법이라 그랬죠? ‘디아가 있어요. 죽음을 도구로 해서 군림한다고 하는데, 죄가요! 이 세상에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다 죽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어요. 심지어 창세기 5장의 하느님의 라인! 그 라인도 다 죽었더라.’로 끝납니다. 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의 군림하에서, 종노릇 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죽는 거예요. 육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 안에서는, 은혜가 군림 한다, 그래요. 은혜가 군림 하면,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군림 하는 성도도 이 땅에서 죽어요.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성도도 죽습니다. 그러나 다른 게 있어요. 모든 인간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자기계발, 자아확장에 전념하며 살다가, 결국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성도는, 이렇게 육이 죽어야 하느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진짜 생명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죽는 게 달라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은혜가 개입하면 ,고난이 함께 따라오는 거예요. 노아가 은혜를 입자마자, 창세가 6장에 나오죠? ‘노아는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입자마자 산 위에 올라가서 배 만들어야 돼요. 인생을 차압(差押)당하는 거요. 은혜에게! 그래서 은혜가 왕이에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부인되고, 부정되어지는 거예요. 그 왕이 그렇게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노아가 은혜의 군림에 의해 도달한 지점이 어디예요? ‘, 우리는, 우리가 맞을 저주의 비를 맞아 주는 저 방주 안에, 예수 안에, 들어가야 사는 거구나!’ 깨닫는 거예요. 요게 은혜의 군림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은혜가 찾아 왔어요. 은혜가 군림하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에서 황야(荒野)로 끌려가요. 결국 무덤 하나 얻어요. 무덤 하나! 얼마나 그 아브라함이 보잘 것 없는,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것만 풍성하게 폭로(暴露)당하고, 무덤에 앉혀요. 그런데 뭘 알고 갔어요? , 구원은, 내가 언약을 어떻게든 성취(成就)해 내려고, 수고와 열심을 부리는데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야훼이레, 하느님이 준비하시는 제물(祭物)! 어린 양에 의해, 내가 살아나는 것이구나.를 아는 거예요. 은혜가 가입하면!

그래서 그 모리아 산 이후에 아브라함이, ‘, 이게 진짜 구원이구나! 이젠 알았으니까, 나는 믿음의 조상답게 살아야지이렇게 살지 못하고, 그 나이에, 그 연세에 또 후처를 얻어서, 자식들을 또 낳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마엘 낳고, 무지하게 혼났죠? 그 일을 모리아 산을 경험하고도, 또 하더라는 걸 보여주는 거요. 은혜가 그걸 드러낸다니까요. 아브라함이 그럴 거예요. ‘모리아 산으로 끝내면 되지. 하느님 아버지! 뒤의 얘기는 뭐 하러 적어 놓아서.’ (하하하) 여러분의 인생도 그래요. 은혜는 그걸 폭로시켜내는 거예요. 그렇게 성도는 그렇게 육을 변화시키고 성숙시켜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은혜 홀로 왕 노릇해서, 구원을 성취해낸다는 걸. 은혜의 왕 노릇이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은혜가 왕 노릇하여 구원해내는 거지, 내가 거기에 뭘 보태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요렇게. 요걸 배우는 거란 말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종은 왕에게 종속된 자죠? 왕이 사약을 내렸는데, ‘조금 있다 먹을 게요.’ 이거 돼요? 안 되죠? ‘반만 먹을 게요.’ 이게 돼요? 안 돼요. ‘꿀 좀 타 주세요.’ 이게 돼요? 주면 먹어야 돼요. 어떻게? 절하고 먹어야 돼. 이게 죄()라는 왕이 사망(死亡)을 갖고 왕 노릇 하는 거예요. 다 죽어야 돼요. 누구든지!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은혜가 왕 노릇 하면, 은혜에 의해 그가 살아나는 거요. ? 은혜가 사망을 어떻게 했다? ‘이겼다, 먹었다.’ 하잖아요. ‘Death of death in Death of Christ,’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사망을 먹어버린 거예요. 이겨낸 거란 말예요. 그걸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왕 노릇(군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군림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단 말예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로마서 5:21) 21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은혜가 군림해서 어디로 끌고 가요? 영생! ? 아녜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복! 문제해결! 질병치유! 그거 아녜요. 여러분 눈물 흘리게 해주는 거! 그런 거 아녜요. 그냥 울면 다 은혜 받았대. 아뇨. 은혜는 여러분에게 영생(永生)을 선물합니다. 영생이 뭐예요? 오래 사는 거?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거?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아요. 영생은 하느님의 생명(生命)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신적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게 되냐고요? 그 분과 연합이 되어야 되죠? 그래야 돼요.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와야 돼요. 그걸 연합(聯合)이라 한다 말예요.

 

예수님이 영생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그러죠. 아는 것디노스코요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야다거든요. ‘야다란 단어가 어디 나오는지 아세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다,”(창세기 4:1)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는 걸, 안다라 그래요. 히브리 사람들의 안다의 개념이에요. ‘너 나 알어?’ 이게 아녜요. 연합이에요. 부부가 동침하여 연합되어지는 그걸, ‘안다그래요. 그걸 영생이라 한다니까요. 그러면 인간과 하느님이, 연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거 조금 내놓고, 하느님이 갖고 있는 거 조금 내놓고, 합의하여 연합이 되나요? 신과 인간은, 그렇게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내놓아 섞을 수가 없어요. 피조물이 부인되고 부정되어야, 하느님과 연합이 가능해요. 그러면 은혜는 성도를 십자가! 부정! 부인의 자리로 끌고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의 통째로 채우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 안을!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렇게 하느님처럼 되고 싶어서, 인간의 본연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를 자꾸 거부하는 거요. 뭐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심플(simple)? 네 그래서 복음(福音)이에요. 이 똑똑한 인간이 못 받아들여요.

그렇게 하느님과 예수를 아는 거, 하느님과 예수 안으로 연합되어 들어가는 것이, 영생이라면, 은혜는 결국, 성도의 육적 자아를, 죽여 내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지면, 신앙의 자신감이 붙는 게 아니라, 소금 친 푸성귀처럼, 축 처지게 되어 있어요. 힘이 빠지게 되어 있다니까요. 심지어 하느님 제가 진짜 죄인 중에 죄인 맞네요. 나는 교회에 가서 봉사하면서도, 역시 제 가치를 챙기고 내 칭찬을 원하는 그런 인간이네요.’ 요렇게. ? 그 안에 성령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도로 그가 하는지를 그에게 가르쳐주신다니까요. 진짜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어떤 일을 난 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 손을 들면 머쓱해지는 거 아시죠?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못해요. 하느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은 있어요. 리는 안 된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하느님! 언제든지 하느님이 저 지옥 보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를 구원해 주셨다고 합니까? 저는 참 믿겨지지가 않네요.’ 이게 성도의 고백이어야 하지, 구원의 확신이 날로 날로 굳건해 지는 건 뭔가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만나기만하면 물어봐. 헌병이 검문하듯이 구원 언제 받았어?’ 그래서, ‘당신은 아냐고?’ 우린 창세전에 구원받았다면서요? 창세전이라고 대답하세요. 신앙인은 할 말이 점점 많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말이 없어져야 돼요. 할 말이 없어져야 돼요.

그렇게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모두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 그 자리로, 은혜의 군림에 의해 끌려가는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을 본문 18절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보세요.

(로마서 5:18)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파스‘every’입니다. 그러니까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고, 의의 한 행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에, 영생에 이르는 거요. 앞의 모든은 모든 인류고, 뒤의 모든은 영생을 얻은 모든이에요. 그래서 영생이에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생명에 이르게 된 모든 사람이, 무엇에 의해 영생에 이르렀느냐? 이걸 밝히면 되는 거요. 뭐라 그래요? 각자의 행동으로 영생에 이르렀다 그래요? 한 행동으로 영생에 이르렀다 그러잖아요. 오늘 분문이! 한 행동! 누구의 한 행동? 예수의 한 행동! 그걸로 의가, 영생이 우리에게 이르렀다. 이게 초점이라니까요.

그걸 설명하기 위해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인류가 죄로 떨어지는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에 원죄니 뭐니,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왜 아담의 죄가 나에게까지 전가 되어야 돼요? 그런 거 따질 필요 없어요. 예수라는 분의 ()’의 한 행동으로 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이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존재가 죄인으로 떨어지는 걸, 장치로 상정해 놓은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을 오실 분의 표상(表象)이라 하는 거요. 오실 이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거예요. 아담은! 그런데 우리는 자꾸 아담에서 출발을 해서 하느님을 방법과 도구로 사용하여 나의 구원과 나의 복을 챙기려고 하니까, 성경이 엉터리로 얽히는 거예요. 19절을 보면 그게 더욱 더 확실하게 돼요.

(로마서 5:19)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여러분이 열심히 순종해서 의인되는 거 아니고, 한 분의 순종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것이에요. 그가 하느님께 납작 엎드리는 상태! ‘난 아무 것도 아니네요.’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없음의 자리로 가서, 하느님과 연합되는 상태를, 순종(順從)이라 해요. 순종은 항상 완전해야 돼. 여러분이 아흔아홉 가지 순종하다가 하나 어기면 그걸 불순종이라 그래요. 백 개를 통 털어서. 성경이 그러잖아요. 그러면 완벽한 순종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하느님께 함몰(陷沒)되어 들어가야 돼요. 그 앞에서 엎어져버려야 순종이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선물해 줬다는 건 우리를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내었고, 꼭 그렇게 만들어 내실 거란 뜻이란 말예요.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로마서 5장 전체 내용은, 예수의 십자가, 그 은혜의 십자가만이 영생의 근거라는, 그 복음의 핵심을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라는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 다른 말로, 영생 얻는 모든 피조물 측의 자격과 조건을 부정해 버리는 거! 그래서 대표가 필요한 거잖아요? 한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그런 모든 피조물의 자격과 조건을 부정해버리는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이 창세기 1장부터 등장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죄, 율법, 아담, 요 앞에 전부 디아라는 전치사가 들어가 있고, 그 뒤에 명사들이 다 소유격인 거예요. 하느님이 방법과 수단, 도구로 사용하셨다. 사용하셨다!

그렇게 이 역사는, 영생과 하느님나라라는, 성취물 앞에서의 그 피조물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확증하고, 인정케 하는 용도로만 쓰이게 되어 있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이 역사의 결말을 성경이 뭐라 그러죠? ‘멸망(滅亡)’이라고 그래요. 이 역사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죠? His. Story. 그 분이 주관하고 계시는, 그 분이 주관하는 목적을 갖고 주관하실 거 아녜요. 역사와 인생의 목적이 뭐냐 말예요. 인생이 결국 죽잖아요? 멸망이라니까요. 역사도 멸망이에요.

(베드로후서 3:7) 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멸망이에요. 뭔가를 교훈하고 가르치는 그 일이 끝나면, 멸망으로 끝나는 게, 이 역사라 말입니다. ‘역사야! 인생아! 너희들이 한 번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한 번 해봐! 의술도 발전시켜 보고, 문명도 발전시켜 보고, 인터넷, 휴대전화, HD, 이런 거 한 번 다 해 봐! 그리고 그 결과를 나에게 한 번 보여줘!’ 멸망이에요. 그러면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서 한 게 멸망이라면, 이제 너희들이 의지할 건 뭐겠니? 하느님의 은혜! 십자가! 그걸 드러내는 게 역사고, 그 작은 역사를 사는 여러분의 인생이라 말입니다. 하느님을 높이는 거, 나는 하고, 하느님은 하는 거. 이게 우리 인생이에요. 교회는 쇠하고 하느님이 흥하는 거. 그렇게 이 역사와 우주는 멸망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속에서 어떤 이들이 부활, 생명을 선물 받는 거, 구원이라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이 참으로 지독하게 자기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러죠? 그래서 인간을 복제하여 장기를 딱 마련해서, 죽으려고 하면 그걸 홀라당 갖다가 수술을 받고. 영생하고 싶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罪人)인지, 왜 죽어야 하는지 인간들이 몰라요.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주신 게 성경이 율법(律法)!

(로마서 5:20) 20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 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여기서 풍성하게, 플레오마죠‘increase’가 아니라, ‘풀니스(Fullness)!’ 율법은 죄를 더 풍성하게, 더 짓게, 많아지게 하기 위해 줬다는 게 아니라, 죄를 간과하여 보고 있는 너희들에게, 죄가 진짜 무엇인지 실체를 보게 해주기 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는 거예요. 율법이!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에게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었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시로 기도하고, 길거리에서 기름 발라가면서 기도하고, 제사에 열심을 부린다고 거들먹거리다가, 독사의 새끼란 욕을 먹었어요. 요게 다 어떤 형국이에요? 율법에서 요구하는 항목들이에요. 그런데 그걸 열심히 했는데, 하느님이 찾아오시더니, 그 율법의 주인이신 그 분이 오시더니,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욕을 하더라니까. ? 그들이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겠죠? 그러면 율법을 잘 지켰는데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었다는 건, 하느님이 그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었다는 뜻이죠. 하느님은 율법을 통하여, 그들의 진짜 죄가 무엇이지 지적하려고 주셨다고 하는데, 오자마자 율법을 잘 지킨 사람들에게, ‘이 독사들아!’ 그랬단 말예요. ‘마귀들아그랬단 말예요.

그러면 하느님이 밝히려고 했던 죄가 뭐예요? 나는 율법 지킬 수 있어요.’ 요걸 라고 하는 거잖아요? 하느님이! 어렵죠 건강한 교회에서, 우리는 그게 옳다는 신앙인의 신앙생활인 줄 알았잖아요? 그렇게 배웠단 말예요. 그래서 뭐 도덕법은 남아 있고. 십자가가 그렇게 조목조목 나누어서, 요거는 조금 놔두고, 요것만 내가 십자가에서 해결할 게, 그런 십자가입니까? 그렇게 십자가가 불완전해요? 도덕법, 윤리법은 남겨놓고 해결한 거예요?

도대체 이러한 발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끝까지 인간의 자존심을 놓지 않겠다는 그 악마성에서 나온 거예요. 하느님이 율법의 주인이고, 율법이 하느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건, 인간들의 불가능과 무력함을 폭로시켜서, 하느님만 거룩하고, 하느님만 온전한 분이심을 드러낸다는 뜻이에요. 예수만 하느님의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 여자들 월경한 다음에 정결예식 행하고, 하느님은 그런 거해야 돼요? 그게 왜 율법에 나오느냐고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고걸 세목화하여 지켜내려고 하는 게 마귀들이었다, 인간들이었단 말예요. 독사의 새끼들!

그게 아니라, 너희들이 도대체 이 선한 것을 가지고도 어떻게 사는 지를 내가 보여 줄게. 어떻게 살았어요? 그걸 지키더니, 자기 자랑을 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을 증명해 보려고 하는 요걸, 중명하는 거예요. 요걸!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 잘난 것 지켜놓고 반대급부 원하는 거. 그리고 칭찬, 아니면 만족, 요런 거라도 챙기려고 하는 인간들의 죄성(罪性)! 이걸 폭로하는 게 율법이라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죠. 主日 聖守해라, 십일조해라, 선교해라, 선한 일에 힘쓰라. 봉사해라. 성도들에게 명령이 떨어지죠. 설교를 빙자하여, 목자가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 하는 거요.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나죠? 그리고 거기다고 꼭 붙이죠. 그러면 복 받는다. 문제 해결된다. 어두움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되는지 안 되는지 시험해 봐라. 요런 게 꼭 붙어요. 그러한 반대급부를 노리고, 종교행위를 하는 걸, 성경이 죄라고, 그걸 죄라 그래요. 그게 바리새인의 죄였잖아요? 여러분, 정말 우리가 기특한 일을 해내고, 전부 하느님께만 영광으로 돌리나요? 그러면 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도대체가! 우리가 쏟아놓는 건, 다 죄예요. 그 때 성도는 십자가의 필연성을 거기서 또 한 번 붙드는 거예요. ‘그래,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지.’ 이런 이야기를 듣고, ‘, 그러면 이제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마음먹는 사람들은, 왜 아무 것도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동안 몹시 피곤했다는 거죠, 고 일하면서! (하하하하)그러면 그거  자기 영광을 위해서 했다는 거요. 난 이제 더 이상 손해 보기 싫어! ‘아니 아무 것도 안 한 사람이나 내가 똑같다면, 내가 왜 손해 봐?’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요. 그러니까 율법을 주면 요렇게 인간은 죄만 쏟아낸다니까요. 죽으라고 하면서 자기만족 챙기고 아니면, ‘그러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이렇게. 이것도 제 영광 챙겨갖고.

율법이 가입하여, 여러분의 죄를 드러낸다는 얘기가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우리는 그런 선한 명령 앞에서, 여전히 자기만 챙겨 갖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자는 거예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닮아갈 거예요? 남의 장사 집 가서 다 뒤집어엎는 이런 거? 안식일 날 남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예배하는데, 밀 이삭 부셔 먹고 이런 거? 남들 예배하는 데, 안식일 날 창녀들하고 소주 한 잔 하는 거? 뭐요?

신은 우리가 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녜요. 신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지, 롤 모델(role model)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예수가 나에게 선물해주신, 그 삶을 당연히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삶을! 우리는 먼저 그 은혜 앞에 복종하자는 거지, ‘그러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고요? 그런 착한 일, 선한 일은 여러분에게 행복하라고 하느님이 선물해주신 거예요. 해 보세요. 행복해요. 내가 뭐 배터지게 먹는 것보다 자식새끼가, 아니면 다른 어떤 이들이, 나의 도움으로 배부르게 먹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배가 고파도 행복하잖아요? 그게 원래 하늘나라의 삶인데, 조금씩 맛보라고 주는 것이지, 그거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려, 내 앞으로 상 받을 스펙으로 쌓아 가져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선한 일은 우리가 행복하라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해야죠. 하세요. 왜 안 하세요?

그런데 마치 그리스도교의 목적지가 그 것인 양 오도를 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예수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면서, 십자가 은혜에 대해서 요만큼도 모르는 인간들이, 열심히 무슨 선한 일을 쌓아서,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을 공평하고 평화롭게 만들겠다고 하고 앉아 있으니까, 이게 답답한 거요. 거기 예수가 어디에 끼어듭니까? 여러분 안에 진짜 그 예수의 은혜가 있으세요? 자기의 삶에 말씀이, 그 십자가가, 자기부인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란 말이에요. 할 말이 없어져야 돼요.

사도바오로는, 율법 가만히 숨어들어 왔다고 말해요. 율법이 가만히 숨어 들어왔어요? 시내 산 위에서 아주 난리굿을 치면서 들어왔어요. 그런데 바오로가,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가만히 숨어서 들어왔대요. 그 말은, 율법이 표면적으로 인간들에게 요구하던 것 말고, 숨어 있는 다른 뜻이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숨어 들어왔다. 그게 뭐겠어요? ‘너희들은 죄인이야. 열심히 지켜서 하느님을 감동시켜 봐!’ 이게 표면적인 거라면 숨어 있는 의미는 너희들은 죄인이야, 무력한 자야!’ 요런 숨은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거예요.

(로마서 5:13) 13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게 무슨 말로 이해하고 계세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죄가 아니었나요? 율법이 BC 1500년에 모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이전에 BC 1800년경에 세계사시간에 배운 거, 함무라비 법전이 있었잖아요? 바벨론 왕 함무라비가 제정한 법. 그 법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가 있었어요. 함무라비 법전이 그걸 한마디로 줄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게 함무라비 법전이에요. 바벨론의 법이에요.

율법을 하나로 줄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뭐가 달라요? 함무라비 법전이나. 그게 먼저 있었다니까요. 그리고 그걸 어기면, 죽이거나 감옥에 쳐 넣었어요. 뭘 율법이 오기 전에 죄를 죄로 안 여겼어요? 죄로 여겼으니까, 죽이거나, 감옥에 쳐 넣었잖아요?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겠느냐고요?

여러분, 율법이 밝히려고 하는 죄는, 그러한 종류의 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함무라비 법전이 주어진 그 상태에서, 인간들이 죄라고 여기는 것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요것만 신경 쓰면서, 요것만 안하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야, 요러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어서, 죄를 진짜 죄로 보지 못하는 너희들의 눈을 뜨게 해서, 진짜 죄가 뭔지를 보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인간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더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함무라비 법전이 이야기하는 거만 죄로 여기고 있더라는 뜻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드러내고자 하는 죄가 인간들의 하느님 흉내 내기란 말예요. 하느님 흉내 내기! 피조물의 하느님 흉내 내기! 그런데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을 흉내 내겠다는 건, 뭐냐고요, 도대체가? 성도는 그러한 율법 앞에서,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 맞습니다.’를 고백하는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어 있는 거죠. 그러면 그 때, ‘! 나는 이 선한 것 갖고도 죄만 짓는구나. 나는 죄인이 맞구나!’ 율법으로 그렇게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그 자가 붙들 수 있는 게 은혜죠? 그래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더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명쾌하죠? 사도 바오로는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하면서, 율법도 끌어들이고, 이 사람은 천재!.

구원이 바로 그런 거예요. 우리의 처음자리가 어디였음을 확실히 깨닫고, 없음의 자리에서, 혼돈과 공허의 자리에서, 존재로 만들어 주시고, 거기에 생기까지 불어넣어서 영생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는 자가 성도예요. 이게 에페소서잖아요?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야! 찬송이 되게 할 거야. 찬송!’

그렇게 우리를 쫓아오시면서, 열심히, 단심가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열심 앞에 항복하는 자가 되는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영광스러운 보좌의 현실과, 무섭게 도륙당하는 제단의 현실이, 오버랩하여 나타나는 거예요.

(로마서 9:11-16)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자, 달음박질하는 자, 안 된다는 거요. 오직 하느님이 자비를 부으신 자! 그들만이 영생으로, 구원으로 들어가는 거요. 그리고 그 은혜(恩惠)만을 의지하는 자로 완성(完城)해내는 걸, 그리스도교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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