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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성도(聖徒)의 본무(本務)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7 조회수1,536 추천수0 반대(1)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07.

성도(聖徒)의 본무(本務)

 

신랑과 한 몸이어야 하는 신랑과 신부가, 신부가 신량에게서 떨어져 나가, 내 개별적 자아를 구축하고, 바벨탑도 쌓고, 선악과도 먹고, 이게 다 간음이며, 이혼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 간음과 이혼은, 전부 이런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지, 뭐 여기에 간음한 사람, 뭐 이혼한 사람은 성당(교회)에 절대 오면 안 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예요. 그렇다고 해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이렇게 나와서 함께 미사(예배)하는 것과, 집에서 아무리 동영상이나 동영상 할아버지를 틀어놓고 미사(예배)를 드려도 달라요. 그리고 이해의 정도가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여러분! 될 수 있으면, 약속 같은 건 다른 날로 미루시고 많이들 성당(교회)오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한 몸으로 지어진 신랑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개별적 자아를 챙기는 행위가, 바로 영적 간음이며, 영적 이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한 몸을 지켜야 되는 거죠? 그게 로마서 5장 말미에 한 사람이야기인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창조주는 한 분! 하느님이시고, 모든 피조물은, 느님에 의해 창조된 거다. 이게 성경과 역사가 증명해내어야 하는, 유일한 진리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성경 전체와 역사 전체를 창세기 11절을 설명하는 거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창세기 1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선악과 따먹고,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창조주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말고, 너희들의 그 처음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하느님께만 찬양하는 자가 되어라! 그렇게 살아라! 이게 바로 성도가 인생과 역사 속에서 반드시 자각하고 확증하고 가야하는 내용인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자신의 처음 자리를, 올바로 인식한 질그릇 안에, 보배이신, 보물이신, 하느님의 그 영광이 충만하게 담기는, 그런 형국이 하느님나라이며, 하느님 백성인 거고, 우리보고 거룩한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하느님 백성인 거고,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니까. 성전인 거예요. 다 똑같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묵시록으로 가서, 완성된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나라인 그 교회! 역사 속 그 성도! 우리가. 그래서 바오로가 교회들에게라고 하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교회란 말예요. 건물이 교회 아니잖아요? 역사 속 성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부터 확인을 하고, 연역적 해설 방법으로, 그 보좌와 제단의 현실! 설명해 볼게요.

(요한묵시록 21:22-23) 22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장면은,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는, 하느님의 신부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즉 교회! 묵시(默示) 속에 완료가 되어 있는 천상의 교회를 모형 하는 거죠? 묵시록은 천상의 교회와, 이 지상의 교회가 계속 맞물려서 가잖아요? 여기는 다 망하고, 여기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보좌 앞에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없다, 그 안에 있는 성전은, 하느님이시고, 어린양이신 분이래요. 하느님이시며 어린양이신 분. 그 성전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비치는데, 그 영광을 뿜어내는 등(), 역시 어린양이래요. 이게 바로 하느님나라예요. 그러니까 천상의 교회는, 피조물의 영광이나, 가치나 자랑이, 다 부정이 되고, 하느님의 영광이, 어린양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나라 안 가득, 충만하게 채워지는 그런 성전인 거예요.

이렇게 묵시 속, 천상의 성전은, 어린양이 주인이고, 어린양에 의해 완료가 되며, 어린양이라는 정체성! 그 하느님나라라는 정체성 자체가, 어린양이에요. 제물이에요. 타인을 위해 내가 죽는 거예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하느님의 성전이 처소란 말예요! 그런데 그 성전은,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헐림, 부서짐을 통과하여,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지는 과정을 겪어내야 돼요.

(요한복음 2:19-21)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참 성전이신 예수가, 티끌들의 그 성전 입성을 위해서, 먼저 헐리죠. 옛 성전이 되어서 헐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어라!’ 실제로 옛 성전도 헐리지만, 예수님이라는 성전도 헐리죠? 예수님이 옛 성전이 되어서 먼저 헐리고, 다시 새 성전으로 부활하는 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티끌들에게 예수라는 성전이 헐려서, 그 안에서 물과 피가 흘러, 그 티끌들과 이겨져서, 존재가 되는 거요. 티끌은, 성령, 생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그냥 네페쉬예요. 살아 있는 게 아녜요. 그건요. 움직이고 생각한다고 해도! 짐승들이 그래요. 거기에 생기가 부어져야 살아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생기를 루와흐, 성령이라고도 하고, 성령을 요한복음에서, 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물이 부어지지 않으면, 티끌은 그냥 티끌이에요. 먼지예요. ‘더스트, 아파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그 성전이 헐리고, 거기서 물과 피가 흘러, 티끌들과 이겨져야, 그들이 성전으로 조물이 되는 거예요. 이게 하느님나라가 만들어지는, 창조의 메커니즘이에요.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 거요. ‘없음들의 존재됨은,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바로 그 참 성전이신 어린양 예수의, 그 역사 속 삶을. 그 성전이신 예수님의 역사 속 삶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하여 살아야 돼요. ? 우리가 성전이기 때문에 그래요.

(고린도전서 3:16-17) 16 여러분은 자신의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7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선언이에요. 명령이 아니라! ‘너희는 거룩하다, ‘거룩해져라가 아니죠.

(히브리서 3:4-6) 4 어느 집이든지 그 집(성전)을 지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을 지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5 모세는 한갓 종으로서 하느님의 온 집안(성막) 일에 충실했으며 하느님께서 장차 말씀하시려는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6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온 집안 일을 다스리는 데 충실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 우리는 하느님의 집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전이에요. 우리가 하느님의 집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집으로 이 땅에 오신, 성령을 담고, 하느님이 시키는 것만 하셨던 그 예수! 참 성전이신 예수가, 헐려서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낸 것처럼, 여러분이 헐림으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택해진 아들 중에 어떤 이들이 또 살아나는 거! 이걸 전도라고 하고,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고지론이니 뭐니, 이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거죠. 높은데 올라가서, 너희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하느님을 자랑하라! 이건 복음과 정 반대되는 이야기란 말예요. 그런데 오늘날 여기에 선동이 되어서, 전부 거기에 광분하다 보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요. 한국교회가! 서로 경쟁하면서 교회 안에서 싸움이나 하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내가 고지에 올라가겠다는 거죠? 내가! 천만의 말씀! 교회는, 순교자(殉敎者)의 피를 타고 여기까지 온 거지, 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여기까지 이렇게 유지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헐려야 할 성전이며, 새로 지어지게 될 성전이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 분도 역시, 성도들처럼,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서, 성령이 시키는 일만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했다, 그러죠 본인이 직접! 하느님만 담은 거예요. 내 존재는 부정됐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부정됐다니까요. 존재 자체를 하느님이 몰수해 가셨어요. 성자 하느님의 존재를! 그래서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끌려가신 거예요. 참 성전이요. 그런데 그 예수 안의 성령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세요. 이게 성령 받은 성전인 여러분의 인생이어야 돼요. 여러분의 이 역사 인식! 그 하느님나라 인식이 그렇게 바뀐다는 뜻이에요.

옛 성전이 죽고,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새 성전으로의 탄생을, 예수님께서 먼저 경험해내신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의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의 현현(顯顯)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바로 하늘 존재의 속성(屬性)이에요. 그것 자체가!

라는 존재를 비워서, ‘를 살려내고, 채워내는 게, 하느님의 속성이에요. 그게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이거든요. 그래서 하늘 존재는, 모두 그렇게 살게 돼요.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 왕이면, 전부 왕관 쓰고 있으면, 누가 신하고 누가 백성이냐고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나 이외의 모든 존재들이, 자기를 비워서 나를 섬겨주는 곳이, 하느님나라기 때문에 다 왕인 거예요. 거기에 불행과 눈물과 슬픔과 고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이라고 하는 거요.

사실은 이 땅에서 만을 위해 사는 게, 내가 잘 사는 것 같고, 유익인 것 같지만, 그래서 지옥인 거예요. 그걸 뒤집어 엎어버리는 게, 역창조(逆創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는 반드시 망()해야 되는 거요. 그런데 여기서,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영향력을 미치라니요 네? 대통령이 신자인데, 무슨 영향력을 미쳤습니까? 지금요!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를 더 욕하고 있잖아요? 이런 말하면 안 되는데, (하하하하) 서울까지 와서 서울이라는 걸 깜빡하고. 미국이면 나 못 잡으러 올까봐. (하하하하)

, 그렇게 라는 존재를 비워서, ‘를 살려내고 채워내는, 하느님의 그 속성을, 십자가가 보여준 거고, 그 십자가라는 하늘 존재의 속성을,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모형처럼, 그냥 살다 가신 거예요. ‘가 부인되고, ‘가 살아나는데, 그 모든 걸 감싸 안고 주관하고 운전하시는 분이, 하느님 아버지잖아요? 이게 십자가였잖아요? 우리의 힘으로는 때려죽여도, 그 삶을 못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내가 너의 삶에 주인이 되어서, 네 삶을 주관하겠다고 하는데, 선악과 따먹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겠다고 한 걸, 죄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건 아니다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역사란 말예요. 다른 거 없어요.

그래서 묵시 속에는, 이미 보좌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제단에 제물로 바쳐지는, 경험을 하시는 거고, 그런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면서요. 우리가! 하늘 왕들이 예수 안에서 왕이 된다 말예요. 여러분이요! 하늘 왕들이,, 이 세상에서, 보좌에 앉은 하늘 왕들이 이 세상에서, 제단에서, 어떻게 죽어야 되는지를 우리는, 체휼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이 모양인 거예요. 하느님이 마치 나만, 미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잘 가는 거예요. 그러한 하늘 백성들의 속성과, 지나야 할 역사 속 과정인 그 보좌와 제단의 이중적 현실은, 성경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었어요.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짚어드릴게요.

하느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을, 하느님나라, 성전. 하느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이에요. 그러면 최초의 성전은 어딜까요? 아무 것도 없었던, 창세전의 성전, 하느님 자신이에요. 아무 것도 없었던 곳에, 하느님만 계시는데, 하느님의 영광은 그 안에 있어요. 성전은 하느님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영광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관입되어 들어온 걸, 천지창조라 그래요. 하느님이 영광이 들어와서 창조를 시작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하늘 성전의 모형으로 이 역사와 공간을 창조하신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다, 우리가 알기 쉽게, 작은 성전을 하늘의 양식대로 짓게 하신 거고. 그래서 최초의 성육신은 십자가가 아니라, 천지창조 때 이미 일어난 거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하느님의 영광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주 안으로, 제한적인 것 안으로, 뚫고 들어와 버렸다니까요.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시간을 여시고, 이제 창조를 시작하시죠? 그리고는 그 모형으로서의 성전을, ‘보시고,’ 다른 말로 척량하고예요. 보시고, 그 감리를 한 다음에, 감리 후기를, 뭐라 그래요? ‘좋았더라!’ 하느님의 영광이 하느님의 성전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혼돈과 공허는, 아예 내용도 없고 스트럭쳐도 없는 거. 혼돈과 공허 위에, 하느님이 말씀만으로, 성전이 창조가 되고, 하느님이 보시고, 감리하시고, 척량하시고, ‘좋다!’라고 하는 거요.

그러니까 성전은, 하느님 홀로 완성하신 성전이어야, 감리에서 합격하는 거요. ‘좋다!’ 이렇게 되는 거요. 안 그러면, 그 안에 하느나님의 영광이 안 들어가죠? 이게 에제키엘서란 말예요. 옛 성전은 다 때려 부셔버리고, 하느님이 치수 주고, 양식 주고, 그대로 만들어라 하고, 척량까지 하신 다음에, 영광이 동에서 들어가는 거요. 저주의 자리! 카인이 쫓겨난 자리!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자리! 이스라엘이 쫓겨난 자리! 저주의 자리가 동쪽, 동쪽으로 가서! 서쪽에 지성소가 있단 말예요. 서쪽으로 들어가! 그래서 성전의 문이 다 동쪽으로 나 있는 거예요. 동편 문이란 말예요. 에덴의 문도 동쪽으로 나있단 말이죠. 그렇게 야훼의 영광이, 하느님의 그 치수대로 지어진 성전으로, 거기로만 돌아와요. 그런데 그 성전이 누구다? 우리다! 우리가 성전이기 때문에 그 은혜로 지어진 그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 맞아. 은혜로 지어지지 않으면, 여기에 하느님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곳이 구나.’ 이걸 알고 가는 게,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여기서 훌륭한 인격, 훌륭한 성품, 이걸로 변화되어져 가는 게,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완료된 이 성전이, 왜 하느님의 은혜로만, 왜 창조의 능력으로만, 우리 성전이 지어져야 되는 지를, 하나하나 깨달아 알아가는 걸, 지어져 간다라고 하는 거요. 그게 진짜 성화라니까요. 여러분이 변화되어져 가는 게 아니라! ‘, 우리 남편은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그건 나이 들고 힘 빠지면 다 그렇게 변해요. (하하하) 그러니까 그런 변화는, 타 종교인들이 절대 못하는 것이어야, 하느님이 준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런 변화는 타 종교인들이 더 잘 한다 말예요.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성도라는 사람들의 성화를 그렇게만 정의를 하나고요? 이 바보들이 말예요. 불교인들이 더 잘 하는 걸! 그걸 생티피케이션(Sanctification)이라 그래요? 하느님을 알아가는 거요. 은혜를 알아가는 거요.

,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시간을 여시고, 창조를 하시는데,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감리 후기. 결과가 딱 떨어지자마자, 칠 일째 안식! ‘싸바스(Saabath)’ 존재가 제 자리에 있는 거요. 제자리에 앉아서, 각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내는 상태!’ 이게 안식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하느님의 자리에서, 하느님 대우를 받는 게, 하느님의 안식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자기가 지어진 목적! 찬송이잖아요? 에베소서 1. 하느님을 찬송하는 게 안식이에요. 우리의 안식! 그리고 고 상태를 ()’라고 하는 거요. 그 관계를! ‘, 짜다크.’ 요게 깨진 게, ‘불의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 째날 인식으로 딱 끝나는 거죠? 역사는 그렇게 없음에서, ‘있음을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원래 없음이었던 피조물의 정체를 확증함과 동시에, 경험케 하는, 그런 모델하우스에 불과한 거예요. 모델하우스는, 실제 건물이 지어지면 헐리는 거예요. 그래서 혼돈과 공허뿐인 없음의 자리에, 하느님의 영광이 관입이 되어 창조가 일어나는 거고. 뭐가 있으면 안 돼요. 재료가 있으면 안 돼요. 없어야 돼요. 그 창조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그런 감리평가를 받게 되는 거고. 하느님의 창조의 말씀, 능력으로만 지어졌으니까, ‘좋다, 토브되는 거요.

그렇게 하느님 홀로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은,’ 은혜의 나라에, 하느님이 안식으로 하시는, 바로 그 모습으로, 천지 창조가 그려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도 또한, 모형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나라에 가면, 해도 없는 거예요. 일차적으로, 옛 하늘과 옛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사라져요. 다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성전 척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느님의 성전 척량 현장! 감리 현장! 이렇게 명명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내가 내 식으로 지은 그 성전에만, 내 영광을 둘 거라는, 그러한 하느님의 의지가 확증되는 장이 바로, 역사란 말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멋있게 지어봐라 내가 그 안에 들어가나.’

역사의 인생들은 독자적인 건축자들이 되어서, 열심히 자기들의 성전을 짓고 있고, 하느님은 홀로, 은혜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성전을 창조해내세요. 그리고는 역사 내내, 인간들의 그 인공적 성전을 부정하고 부수세요. 선악과 먹은 선악지식 체계에서 나온 성전이니까. 요걸 부수고 부정하셔야 돼요. 그리고는 결국, 그들의 바벨탑을 멸망으로 종결내시고, 하느님의 성전만 오롯이 남기는 거예요.

건축자들은 아들이라는 모퉁이 돌을 받아들이지 않고, 열심히 밖으로 집어 던지죠. ? ‘우리도 할 수 있다.’예요. 선악과 먹은 아담들이니까! 할 수 있다! ‘왜 우리에게 저 모퉁이 돌이 필요해? 왜 저 돌을 기준으로 해서만 살아야 돼? , 저거 던져! 우리도 할 수 있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에요. 누구? 예수. 그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하나님 홀로 지으시는 게 하나님의 교회라. 그걸 여러분이 배워가는 거예요.

우매한 이간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역사를 감지해내지 못 해요. 인간들이 만들어낸 모든 성전이, 다 하느님의 척량에 미달이에요. 불합격입니다. 하느님의 척량 앞에서는, 그 아무리 멋져 보이는 도덕, 윤리, 율법, 선행, 구제, 종교행위 등등의 건축 재료도, 다 불량재료예요. 은혜만이 진짜 재료예요.

그러한 불량재료들로 지어진 인간의 성전은, 하느님의 감리 후에, 파괴되어야 하는 불량 건축물일 뿐입니다. 다리를 만들어 놓고 감리를 했더니, 곧 무너질 다리예요. 그건 부셔야 되는 거요. 그게 모래 위에 지은 집인 거예요.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에요. ‘와디위에 지은 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죠. 우기가 되면, 그리로 빗물이 흐르거든요. 그게 모래예요. 와디라는 단어가! 평소에는, 건기 때는 그리로 마차가 다니거든요. 왜냐하면 물이 흐르던 곳이라 길이 나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 단단하니 여기에다 집을 지을까? 그런데 비가 오면, 창수가 나면(장마), 물이 그리로만 흘러서 홀라당 날아가는 거예요. 겉으로 보기엔 멋지지만 재료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 참 좋다!’라는 그런 평을 들을 수 있는 성전은, 하느님께서 홀로 지으신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라는 재료로 지은 하느님의 성전뿐인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송! 영광! 이것으로 감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이 역사라는 인간이 만든 성전은, 파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와 인생이, 바로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성전인 거예요. 그 안에는 여러분의 몸도 들어가 있어요. 그걸 사도 바오로가 옛 사람이라고 하죠. 그거예요.

그렇게 성도는 묵시 속에, 은혜로 완료되어 있는 보좌의 현실을, 언약으로 체휼하게 됨과 동시에 제단에서 죽어야 하는 역사 속의, 그 제물의 현실을 이 시간 속에서 경험하면서, 그 하늘 백성의 탄생 원리를 자각하고 인지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마지막 고백이,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나는 없는 자입니다!’ 이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어놓은 모든 역사 속 성전 짓기의 수고와 열심, 부정당하는 그런 축복! 그런 축복 속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거요. 교회에서 열심히 일을 해 놨더니, 공은 딴 사람에게 돌아가! 복 받는 거예요. 여러분! 그걸 여러분이 챙겨 가지면, 여러분은 독배를 마시는 거와 똑같아! 인간은 쇠하고 하느님의 열심만이 흥하는, 그런 삶이 축복받는 삶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그게 성취돼요. 그건 약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반드시 여러분은 허물어지게 되어 있어요.

에제키엘서 40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운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며, 성전 척량하시는 장면이 나와요.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지 25년 되는 날이에요. 그리고 성전 척량의 숫자가 전부, 2525의 배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확정되어 변개될 수 없는 약속을, 이건 반드시 그 때에 이루어질 거야하고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그 절반의 숫자로 표기해요. 그러니까 25, 50년 때 이루어질 어떤 약속을 확증하는 숫자죠? 그런데 성전이 25로 도배가 되어 있단 말이죠. 척량해 봤더니. 50 하면 생각나는 게 희년입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그 다음 해에, 모든 노예들이 다 풀려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자유의 해! 희년! 고게 안식이고, 고개 하느님나라예요. 그게 하느님의 성전이에요. 그러나 노예와 빚진 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희년을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그냥 법으로 정해진 때가 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았든 풀려나는 거예요. 나쁜 종, 좋은 종, 많이 빚진 자, 적게 빚진 자 다 풀려나는 게 하느님나라란 말예요. 그들의 어떤 스펙을 보고, 차등 있게 그 나라를 주고, 누리게 해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희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거예요. 그건 내가 반드시 이루어낸다. 그게 성전이다. 그래서 25년째에 약속을 주시는 거요. 환상으로!

그리고는 요게 요한묵시록 21장에서 완료가 되죠?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한 번 척량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뭐 성전의 치수대로 만들려고 애쓰는 거 보면 참,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여기 저기 치수 다 달라요. 그걸 그대로 만들어서 어떻게 하려고요.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옛날 모세의 성전에다 갖다 놓아도. 뭔지 못 알아먹어요. 여러분이 유럽에 여행을 가서, 무슨 유적 같은 거 볼 때, ‘야 경치 좋다.’ 이러고 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거기에 대해 정확히 알고 간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은 다르잖아요, 그죠? 치수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알고 있는 우리에게나 감동적인 거지. ‘, 25가 그런 거야. 열둘이 그런 거야.’ 이렇게. ‘오십이 그런 거야.’

그렇게 성전 건축에 치수는, 반드시 희년! 오십!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의 반, 25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에제키엘서의 성전은 25, 50, 100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에 완성된 성전은, 마치, 지성소처럼, 정육면체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디를 재어도, 똑같은 은혜여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뭐가 보태지면 안 돼! 비뚤어지게 된다고요. 지성소가 왜 정육면체인지 아세요? 다 척량해서 은혜여야 해요. 하느님나라니까. 거기가, 은혜의 보좌! 성전은 똑같은 은혜로 지어져야 정육면체인 거예요. 그 은혜의 성전 건축! 희년을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성전은 아들에 의해서만 지어져야 되는 거요.

(루가복음 4:16-21)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17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18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21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61장의 내용이죠? 주님의 은혜의 해가 희년!’ 그 희년을 내가 완성하러 왔다, 그러죠. 내가 왔으니, 그건 이루어진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거요. 지금!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에제키엘서에 그 성전 척량 숫자가 전부 2550인 거예요. 희년! 아들이 완성하시는 희년! 그건 반드시 이루어진다. 예루살렘아! 헌 성전이 무너진 곳에, 새 성전이, 이 새 예루살렘이 성자 예수에 의해서 반드시 서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에제키엘서란 말예요.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이 거하게 될 새 성전인 교회는, 예수가 홀로 시작하셔서, 홀로 완성해내시는 성전이기에, 요한묵시록의 성전은, 열둘, 열둘, 열둘, 열둘의 제곱, 백사십사(144), , , 이렇게 가는 거요. 제곱은 항상 완성도의 깊이를, 정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의 세제곱 천은, 더욱 더 깊고 완벽한 완성이에요. 십이의 제곱, 백사십사는 반드시 완성될 것! 그리고 이미 완료된 것, 이런 걸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반드시 완성되어질 것! 그리고 이미 완성되어져 있는 거란 뜻이에요. 그래서 십사만 사천이지, 그 만큼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녜요. 여러분!

그런데 그 은혜라는, 양식과 치수, 모양대로 지어지지 않은, 인간의 성전에는, 절대 하느님의 영광이 들어가시지 않아요. 그래서 에제키엘서에 보면, 율법의 성전! 옛 성전! 예루살렘의, 그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리는 거예요. 율법의 세계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거할 수가 없어요. 떠나가야 돼요. ? 은혜가 거할 곳이 없으니까!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하와, 선악과 따먹고 내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겠다가 율법이죠? 요건 선한 거, 조건 악한 거. 그러니까 요건 해야 되고, 조건 안 해야 되고. 요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리는 거예요. 아담과 하와에게서!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는 그런 이야기란 말입니다.

(시편 132:13-14) 13 야훼, 시온을 택하시어 여기에 계시기로 정하시며 이르시기를, 14 '이 곳은 영원히 나의 안식처, 여기가 좋으니 나 여기 살리라.

여기에서 시온이 바로 야훼의 영광이 거할 성전인 교회를 가리키는 거죠.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우리들이 이른 곳이 시온! 장자들의 총회! 교회! 다 같은 말인 거예요. 시온! 시온을 택해서 내 영광을 영원히 거기에다 둘 거야. 이게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흘러넘치려면, 내 것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남아 있으면 안 돼요. 하느님의 영광이 완벽하게 들어가야, 하늘 백성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거처를 삼다라고 번역이 된, 모샤브란 단어가 보좌에 앉다라는 단어고, 14절에 그 쉴 곳,이 단어가 안식이라는 뜻이에요. 창세기에 그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회는 하느님의 보좌이며, 거처이며, 안식인 거예요. 당신의 것을 비워내시면서, 백성들에게 생명과 복을, 생수처럼 부으시는, 그 천상의 십자가! 거기가 하느님나라죠, 하느님나라는 피조물은 완전히 없음이에요. ‘먼지인데, 하느님의 생명력이, 계속 이렇게 부어져서 하느님이 비워지는 거잖아요? 그걸 인간들의 제한적 이성에게 던지는 말로, ‘손해라고 하는 거예요. 비워지는 거예요. 하느님은 손해 볼 수 없는 분이지만, 없음인 자들에게, 하느님의 생명력이 폭포수처럼, 생수로 부어져서, 없음인 자들이 살아나는 데가, 하느님나라, 그걸 십자가가 모형으로 보여 준 거라니까요. 예수라는 하느님에게 물과 피가 계속 부어져서, 죽어야할 이 티끌들이, 하느님을 죽인 원수들이, 살아나는 게 하느님나라라는 걸, 십자가가 모형으로 보여준 거란 말예요. 그게 하느님나라의 삶의 원리이며, 하느님나라의 존재들의 존재양식인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될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성도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안식처!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그 척량 자가 딱 들이닥칠 때 하느님의 영광이 들어올 수 있어요? 은혜로 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은혜를 가르치는데에 실패한 거예요. 사람들의 기를 살려주려 하다보니까. 그리고 교회의 몸집을 키우려고 하다보니까. 은혜를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의 자존심만 높여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을 감동시키려고 애를 쓰다보니까, 다 울고는 가는데,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감동은 받는데, 복음에 의해 감동받은 게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심리학적, 기술에 의해 감동받아요.

창세기로 가서 하느님의 척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죠.

(창세기 1:31) 31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게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보시니,’ ‘보다가 척량이에요. 여섯째 날까지의 모든 창조가, ‘없음의 자리에서, 아무 것도 없었어요. 혼돈과 공허예요. 말씀으로 창조되니까, 하느님이 그걸 보고 척량한 거죠. 봤단 말예요. 척량하고 좋다!’ 안식으로 끝난다 말예요.

에제키엘서에 가면, 하느님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치수와 식양대로 지어진 새 성전을, 에제키엘에게 보이시면서, 인자야! 인자야!’라고 부르죠? 예수의 모형이에요. 보이시면서, 이걸 전하라 그래요. 이걸 본 걸 전하라 그래요.

(에제키엘 40:1-4) 1 우리 수도가 함락된지 십사년, 우리가 포로된 지 이십오년에 접어들던 해 정월 십일이었다. 바로 그 날 야훼께서 손수 나를 잡으시어 수도로 데리고 가셨다. 2 이상 가운데 하느님께서 나를 고국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시어 매우 높은 산에 내려 놓으셨다. 그 산 위에는 남쪽으로 한 성만큼한 건물이 서 있었다. 3 내가 그리로 이끌려 들어 가는데, 놋쇠같이 빛나는 사람 하나가 손에 노끈과 막대기를 들고 대문에서 있다가 4 나에게 말하였다. '너 사람아, 잘 보고 잘 들어서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모두 명심하여라. 보여 줄 것이 있어 너를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니, 잘 보아 두었다가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그것을 모두 알려야 한다.'

보다, 보다, 보다 이게 라아.’ 창세기의 보시기에, 척량 다 같은 단어예요. 보고, 척량하고. 이걸 그대로 전해라. 이걸 전도라 그래요. 너희들은 마른 뼈! 먼지 풀풀 나는 골짜기의 마른 뼈였는데, 하느님이 말씀으로 생기를 부어, 군대가 된 거지, 너희들이 뭐가 괜찮은 티끌이어서가 아냐. 그걸 전해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여기 와서 이렇게 어려운 것 듣고 있다고 괜찮아서, 여러분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하셨기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내 자인식은 그냥 그렇게 없음의 자리여야 돼요. 그렇게 하느님이 보신 그 은혜의 성전을, 성도가 같이 보는 거예요. 그게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 이게 은혜의 성전이구나! 그래서 나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고 고백하고 간 사도 바오로, 그 사람이 진짜인 거구나!.’ 요걸 이해하는 거. 그리고 그걸 전하는 거요. , 여러분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지금 여러분의 자의식이 그래요?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맞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느님께 부르짖습니까? ‘그래도 나는 걔보다는 나으니까 이정도지이러고 계세요?

(출애굽기 39:42-43) 42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일을 이루어 야훼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대로 하였다. 43 모세가 이 모든 제품을 검사해 보았다. 모든 것이 야훼께서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된 것을 확인하고 모세는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모세는 누구의 모형이다? 인 모지즈(in Moses), 모세 안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의 모형이잖아요? 나와 같은 예언자의 모형이니까. 보고, 맞네. 은혜로 지어졌네. 그러니까 거기에 복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전의 척량이 내용이, 이십오, 오십, 희년, 열둘, 백사십사, ‘아들이라 말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성전은, 아들에 의해 지어진 아들의 성전! 그리고 그 안에 무조건적이며 불가항력적으로 끌어당겨진 은혜의 아들들! 양자들! 그게 하느님나라, 성전의 실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십오, 오십, 열둘, 백사십사, , 이렇게 막 나오는 거죠. 그거 잊어버려도 돼요. 은혜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래서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로 끊임없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그 그리스도교 속에서, 참 복음, 즉 은혜의 복음을 알아들은 사람이,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기가 사는 게 아니라, 그 동안 내가 내어놓고 쌓았던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래서 여기가 통곡의 현장이 되는 거지. 요새는 울고도 자랑하더라고요. ‘너는 왜? 눈물이 안 나오디? (하하하) 나만 감동받았나봐. 오늘.’ 그러니까 설교라는 건, 그렇게 하느님이 홀로 완성하신, 은혜의 성전 안으로 우리를 함몰시키는 것이어야지, 듣는 사람들의 귀가 더욱 더 살아나는 그런 설교여서는 안 돼요. 여러분이 나가면서 그래 한 번 싸워볼 거야!’ 이러면 안 돼요.

뭐하고 싸울 건데요? 하느님이 철장을 들고 백마 타고 공격하는 대상은 라니까요. 내 안의 그 마귀적 속성! 엉뚱한데 가서 자꾸 싸우니까! 그 진짜 싸우려면, 저 이단 종파, 이런데 가서 목숨 걸고 싸워보세요. 박옥수, 이런 데나, 통일교나,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 이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이단. 이단들에게는 찍 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왜 우리 역사에 들어와서, 지랄들을 떠느냐고? 거기 가서 먼저 싸우고 오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앞장서서 가겠다는데, 왜 우리보고 뭐라고 그러느냐고? 말을, (하하하) 언어를 순화하려고 했는데 성질이 안 죽어요. 인간은 이렇게 불가능한 거예요.

(에제키엘 43:10) 10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라. 이스라엘이 제 스스로 얼마나 부끄러운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되거든, 성전의 모양을 도면으로 그려 설명해 주어라.

저희들 꼬라지를 볼 수 있게. 이거 보여줘 봐라. 반드시 이걸 올바른 눈으로 보는 자들은 자기들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를 이야기하는 거요. 이게 복음이에요. 여러분!

본론은 지금부터예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치수로, 하느님의 樣式으로, 새로 완성하신 새 성전을 척량하시는데, 하느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지성소가 있는 그 성전과, 번제단이 정확하게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거예요. 보좌가 있는 지성소와, 제물이 도륙당해 죽는 번제단이,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니까요. 번제단이 성전의 축소판이에요.

(에제키엘 40:47) 47 그가 안마당을 재니, 길이도 백 척, 나비도 백 척으로 네모져 있었다. 그리고 제단은 성전 본관 앞에 있었다.

제단과 전이, 서로 마주 보면서, 성전을 완성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에요. 여기에서 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이라는 단어로도 쓰이는 단어예요. ! ! 같은 단어예요. 역대하 6장에 나오는데, 에제키엘서 43장에 보면 번제단을 척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번제단이 3층으로 되어 있어요. 번제단도! 성전도 바깥 뜰, 안 뜰, 성전 건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번제단, 아래 층, 위 층, 번제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전은, 동쪽으로부터 계단으로 이어져서, 지성소까지 연결이 되는데, 번제단에도 똑같이, 그러한 계단이 나 있어요. 그 층계는, 지성소에서 출발해서, 바깥으로 내려가는 형국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번제단의 층계도,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에요. 그 층계는, 인간들이 만들던 바벨탑의 모습을 정반대로 그려놓은 거예요. 바벨탑은 층계입니다. 그거요. 바벨탑이 층계라고요. 바벨탑의 층계는 땅에 뿌리를 두고, 여기서부터 위로 쌓아 올라가는 거요. 누가? 인간이! 이걸 인본주의라 그래요.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그 층계 아니고, 사닥다리 말씀하시죠? 요한복음 2장에서 내 위로 사닥다리가 내려오고(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내 위로, 땅에 안 닿아요. 그리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층계예요. 그게! 이게 성전의 층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층계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이 땅에서 신을 찾아가겠다가 다른 종교고, 하늘에서 계단이 내려와 우리를 찾아온 것이, 그리스도교인 거예요. 그래서 성전과 번제단의 그 층계가, 전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으로 만들어져 있는 거란 말입니다. 층계의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예요. 그래서 예수 위로 층계가 나 있는 거예요.

번제단 위에서 제물의 피가 흐르죠? 당연하죠. 죽으니까! 제물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의 피가 흐르고, 보좌가 있는 지성소에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피가, 흥건하게 뿌려져야 돼요. 똑같죠? 그 피는,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느님의 생명력이죠 물론 모형이에요. 히브리서에 나오죠? 어떻게 죽은 짐승의 피가 사람을 살리니? 죄를 용서하니? 그건 모형이다 그러잖아요? 번제단에 뿌려지는 피도 죄를 사하는 모형으로서의 제물의 피고, 지성소에 뿌려지는, 그건 민족 전체의 죄를 대속하는 거니까, 역시 죽어야 할 수 밖에 없는 자를 살려내는, 생명수로서의 피란 말예요. 그 새 성전에서 흐르게 되는 그 피! 그래서 죽어야 할 자들이 소성하여 살아나는 그 피를, 에제키엘이 어떻게 묘사하는지 한 번 보세요.

(에제키엘 47:1-10, 12) 1 나는 다시 그분에게 이끌리어 성전 정문으로 가 보았다. 그 성전(새 성전)정면은 동쪽을 향해 나 있었는데, 그 성전 동쪽 문턱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 물은 제단 남쪽으로 해서 성전 오른쪽 벽에서 뻗은 선을 타고 흘러 내려 갔다. 2 나는 그분에게 이끌리어 북문을 나가 바깥 길로 해서 바깥 동문께로 돌아 가 보았다. 물이 그 대문 오른쪽에서 솟아 나는 것이 보였다. 3 그분이 측량줄을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발목에 찼다. 4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무릎에 찼다.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건너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허리에 찼다. 5 그분이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척 되는 곳에 이르러 보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이나 치면 건널까, 걸어서는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 있었다. 6 '너 사람아, 보지 않았느냐?' 하고 말하며 그분은 나를 강가로 도로 데리고 갔다. 7 되돌아 와 보니 강을 끼고 양쪽에 나무가 무성한 것이 보였다. 8 그분이 말씀하셨다. '이 물은 동쪽으로 가다가 메마른 벌판으로 흘러 내려 사해로 들어 간다. 이 물이 짠 사해로 들어 가면 사해의 물마저 단물이 된다. 9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온갖 생물들이 번창하며 살 수 있다. 어디로 흘러 들어 가든지 모든 물은 단물이 되기 때문에 고기가 득실거리게 된다. 이 강이 흘러 들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생명이 넘친다. 10 이 강의 물고기 종류는 지중해의 그것만큼이나 많아서 엔게디에서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그 언덕에는 어부들이 그물을 쳐 놓고 늘어서 있으리라. 12 이 강가 양쪽 언덕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며 잎이 시드는 일이 없다. 그 물이 성소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에, 다달이 새 과일이 나와서 열매가 끊어지는 일이 없다. 그 열매는 양식이 되고 그 잎은 약이 된다.

하느님의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와서, 모든 만물을 소성(蘇醒)시켜,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질병도 없는, 그 나라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성전이! 그 물이! 묵시록에 똑같은 내용이 나와요.

(요한묵시록 22:1-2) 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똑같은 내용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생명수가 어디서 흘러나와요? 에제키엘서에서는 보좌에서 흘러나왔어요. 성전 문지방에서! 여기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와,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내는 거예요. 보좌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열두 가지 실과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백성들, 아들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이 요구하는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우리가 맺어야 할 유일한 열매는, 우리 각자의 아들 되기인 거지, 다른 종교인들도 다 추구하는 선한 일 하기, 도덕 윤리 잘 지키기, 이런 거 아녜요. 그런 것들도 열심히 하세요. 하시는데, 진짜 열매 맺기가 무언지 아시란 말이에요. 진짜 얼매는 이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참 성전에서 쏟아지는 생명수를 가리켜서 뭐라 그래요? 너희들이 이 생명수 마셔야 사는데, 이 생명수가 뭔지 알아? 요한복음 7장에서! ‘성령이라 그러잖아요?

(요한복음 7:37-39) 37 그 명절의 고비가 되는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 나올 것이다.' 39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 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 물이 어디서 쏟아졌어요? 이 성령이? 십자가에서!

(요한복음 19:34) 34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

죽어야 할 죄인을 살리는 피! 만물을 소성(蘇醒)케 하는 물! 이것이 예수의 허리에서 나와요. 그래서 아기가 탄생하는, 창조의 자리에, 여자들이 물과 피를 흘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 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러니까 성령은, 물은, 그 피는,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거죠. 그런데 묵시록은 그 십자가를, ‘보좌라고 한다 말예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한단 말예요.

하느님의 보좌는, 하느님의 것이 비워지면서, 먼지인 자들이 살아나는 게, 하느님의 보좌라 그랬잖아요? 그게 하느님나라라 그랬잖아요? 그게 뭐예요. 십자가요! 십자가는,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屬性)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보좌를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이요! 그런데 여러분은 보좌에 앉아 있다, 그러죠? 큰일 난 거죠?

(요한묵시록 3:21) 21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옥좌에 앉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에베소서 2:4-6) 4 그러나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 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

과거 시제예요. 앉아 있어요. 여러분은요! 그러면 하늘 보좌(寶座)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그 하늘 왕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라는 보좌를 통과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함께 보좌에 앉아 있는 여러분은, 그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반드시!

그래서 하느님의 보좌인 그 성전의 축소판을, 번제단이 그대로 모형으로, 그려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은, 전부 예수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요. 그 성전 안의 수많은 기구들 중, 왜 번제단이냐 말예요? 하필이면. 거기에서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이에요. 우리 같은 거 안 만들어도 돼요. 그냥 괜히 우리의 이 이성으로, 그러면 하느님 심심하지 않을까? 여러분 안 심심해요. 완전하신 분이 왜 심심해요?

여러분.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거예요. (아멘!) 그런데 그 하느님의 영광이 뭐라고요? 십자가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십자가만 배우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번제단! 이스라엘! 하나님의 교회를 같은 단어로 표현해요. 번제단이라는 그 단어가 아리엘이란 단어거든요? 히브리어로. 그걸 예루살렘을 부를 때도 써요.

(이사야 29:1-2) 1 !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 아리엘아. 다윗이 진을 치고 공격하던 아리엘아!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축일들이 한 바퀴 돌아가면 2 내가 너, 아리엘을 포위하고 치리니 애곡하고 통곡하는 소리가 사무치리라. 나는 너를 아리엘처럼 치리라.

앞의 것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들을 이야기하는 거고, 뒤에는 번제단! 내가 너를 번제단에서 반드시 모가지를 잘라서 내 신부 삼고 말거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우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아리엘아, 아리엘아! 너희들은 그래서 죽어야 되는 거야. 어디서? 내 안에서! 그런데 안 죽겠다고 계속 도망만 다니니, 어떻게 하면 좋니?’ 번제단! 교회! 예루살렘! 같은 말이에요. 예루살렘이 순결하고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번제단이 점 없고 흠 없는 예수라는 제물로 깨끗하져야 되는 거요. 그 안에서 구원받은 여러분이 거기에서 하느님께 드려진단 말예요.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거룩한 산제물이 되라 그러는지 아세요? ‘하느님은 너희들을 제물 삼아서 반드시 죽일 건데, 그 때 당황하지 마!’ 이 뜻이에요. 그게 제물이에요. 여러분은 보좌에 앉아 있기 때문에, 그 삽자가라는 보좌를, 이 세상에서 반드시 살아내야 돼요. 거기 앉아야 돼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앉히겠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는 하기 싫으니까,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묵시 속에서 완료된 현실을 하나하나 살아가는 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 불량재료를! 아무리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나아지고, 나아지고, 나아지고 죽는 순간에, 뭐 인간들이 보기에는 거의 완벽한 재료가 됐다 그래도, 그거는 불쏘시개로도 못 써요. 하느님의 집에서는! 은혜로만 지어져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성전으로 이미 창조되어 있는, 은혜의 능력으로 창조되어 있는 여러분의 실존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걸 ! 그런 거구나.’ 지어져간다 그러는 거예요. 거처(居處)가 되어져 간다고 하는 거요. 뭐 거처가 되어져가요? 이미 성령이 들어와 있다며. 성령이 보내신 사신(使臣)이에요? 성령이 들어와 있다니까요. 그러면 성전이고, 하느님의 거처란 말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현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거. 그렇게 한 사람의 행함! 한 사람의 순종(順從)!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나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거 고백하는 거. 이게 성도의 본무(本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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