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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8 조회수1,640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08..

(공동번역성서)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케리그마라는 건, 공적인 사자(使者), 어떤 확정된 소식을, 공중 앞에서 외쳐 선포(宣布)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내용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에서 나온 단어인데요. 그 단어가 그리스도교 용어로 쓰이게 되면, 복음(福音)을 아름다운 소식!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이나, 그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의미하는 단어가 돼요. 그게 케리그마입니다.

그 단어는, 믿는 자들의 생활과 사상(思想)에 대해서 교훈(敎訓)을 던지는, ‘디다케와는 완전히 구분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케리그마디다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 가장 선명하고 짧게 기록해 놓은 곳이, 고린도전서 153절 이하죠? 이건 뭐 그리스도교 역사 내내, 신학자들이 다 동의한 그런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3-8) 3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4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5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 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도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 뒤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삭동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케리그마예요. 복음의 내용이란 말입니다. 먼저 사도 바오로가, 복음을 누군가로부터 받았다 그러죠. 내가 받은 걸 전해 준다. 그러잖아요? 다마스코 道上에서 예수님에게 받았어요. 여러분, 복음은 예수에게서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케리그마의 내용은 성경대로! 즉 창세전 언약대로! 하느님의 계획대로! 그리스도깨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묻히셨다가, 완전한 죽음이죠? 매장이나 화장이나 수장이나 이건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거니까. ‘묻히셨다가 언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제자들에게 보이셨다.’까지가 케리그마예요.

 

여기에서 나타나셨다고 번역이 된 헬라어 옵데, 옵타노마이의 직석법 과거 수동태예요. 그 단어는, ‘단순히 보다, 우연히 보다이런 의미가 아니라, 연구를 목적으로 현저한 어떤 목적을, 현저하게 목적화 되어 있는 것을, 응시하는 거예요. ‘, 요게 뭐지?’ 요렇게! 그렇게 보이셨다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진 게 아니라! 이게 뭐지?’ 이렇게. 주님은 교회에게 그렇게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에게만 나타나죠? 자기를 때려 죽인, 로마 군병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헤롯에게 나타나서, 나 같으면 그러겠어요. 제일 먼저 거기 가서, ‘나다. 나 살았다.’ 아주 혼비백산하게 만들 텐데. 거기엔 안 가고요. 제자들, 교회에게만 나타나세요. 고게 응시예요. 교회에게만, 목적물로 자기를 제시하고, 깨달아 가게 하신단 말예요. 그래서 옵타노마이가 거기서 쓰인 거예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 거기까지가 복음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셨다.’까지만, 그게 케리그마라면 그건 관념으로 흐를 수 있죠? 그거 지적동의 하는 거 어렵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관념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우리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물로 제사하신 후에, 당신만을 응시하게 만드는 것까지가 게리그마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 거예요. 그건 삶이며, 생명이며, 실제인 거예요. 관념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선택된 성도는, 육이 되기 위해 지어진 세상과, 확연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돼요. 주님께서 옵타노마이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로마서 64절이, 우리 성도의 구원의 목적을, ‘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란 말로 표현해 놓은 거란 말예요. 물론 그 행함은, 그 믿음으로 결과 되게 하는 행함이라 그랬어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성도 각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현저한 목표물로 제시하시고, 당신만을 응시하게 하시는, ‘옵타노마이!’

그 은혜의 동행이, 나타나셔서, 응시하게 하시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타나셔서,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잖아요? 나타나셔서 끝까지 같이 있는 거란 말예요. 그걸 동행이라고 해요. 그 동행!

그 동행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게 뭐겠어요? 나타나서 예수님만 응시하게 하는 옵타노마이의 목적이 나만 봐!’예요. ‘나만 봐! 예수만 의지해!’인 것입니다. 우리 신랑인 예수께서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목적지가 달라요. 예수님은, ‘나 없이, 신랑 없이 정말 되니?’ 이거 확인하기 위해 동행하시는 거예요. 목적지가 달라요.


우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와 동행(同行)하시는 건, 당신의 약속이었어요.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장가들리라.’ 그랬잖아요. ‘영원히 함께, 이혼(離婚)하지 않으리라. 장가들리라.’ 이런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생경한 하느님나라로 옮겨졌다 그랬어요. 신랑의 나라로 옮겨진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신랑과 동행을 하면서, 천국살이를 시작하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고는, ‘그 나라를 살라!’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이 세상 나라가 너무 익숙해요. 그래서 천국살이가 참 낯설고 어색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이 하게 돼요. 천국살이의 그 매뉴얼이 성경으로 주어져 있는데, 잘 안 돼요. 그렇다고 신랑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아요. 동행은 하시는데, 어떨 땐 그 분이 날 버리고 딴 곳으로 가신 것처럼, 신랑의 부재(不在)와 침묵(沈默) 속으로 밀어 넣으시기도 하세요. 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그 실수와 실패를, 신부가 다 경험해내야 돼요. 부끄럽습니다. 창피합니다. 어떨 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해요. 그런데 안 도와 주세요. 신랑이!

그러한 역사 속 천국살이를 통해서, 신랑이 목적하는 바가 뭐일 것 같으세요? 천국 신부다운 성숙과 자라남일까요? ‘신랑 없이도 혼자서도 잘 해요의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변화입니까? 그렇게 자라나지 못하면 신랑이 화가 나서, 우리를 버리기도 하나요? 알미니언 주의자들처럼! 아닙니다. 리 신랑은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검둥이 노예 술람미였을 때, 창녀 고멜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신랑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던 거예요. ‘죄인들! 검둥이 술람미에게 장가들러 왔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성숙과 자라남, 신부다움이 목적이었다면, 고멜이나, 술람미나, 잉태하지 못하는 여자! 사라, 라헬, 리브가, 마리아, 이런 여자는 쳐다보지도 마셨어야 돼요. 그들이 전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 있습니다. 빵 부스러기 같은 은혜를 구하던, 개 같은 이방인 여자는, 거들떠보시면 안 되죠. 그 여자는 내가 개입니다.’라고 했단 말예요. 그 여자는! 개하고 결혼하고 싶은 분 있어요? 열두 해 부정한 하혈만 하던 그런 여자를 신부로 맞으면 안 돼요. 남자는 그 부정한 여자를 만지면 안 되기 때문에! 신랑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런 여자를 만나기 위해, 우물가로 달려가시면 안 됩니다. 간음하다 걸려서 개망신 당하고 있던 그런 여자를 품어주시면 안 되죠. 일곱 귀신 들렸던 창녀와도 상대하시면 안 돼요. 죽었던 야이로의 딸! 열두 살이었습니다. 열두 살은 결혼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처음 신랑으로 예수를 맞는 자는, 죽어 있던 자란 뜻이 야이로의 이야기예요. 야이로의 딸 이야기! 그러면 죽은 자를 신부로 맞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자들을 신부로 부르셨어요. 그런 자들을 위해, 주님이 죽었단 말입니다. 그들을 품고 죽으신 주님이, 사흘 만에 그들을 품고 살아나셨어요. 그리고는 이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응시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과 통섭(統攝)하세요. 그 통섭의 목적을 올바로 이해하자는 거예요. 사귐과 소통의 통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랑이 신부를 통섭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 나 없이 살 수 있어? 안 되지?인 거예요. 신부는 신랑의 통섭 속에서, ‘난 신랑 없으면 무용지물(無用之物)이구나. 먼지에 불과한 존재구나. 적어도 신랑의 나라에서!’ 이거 배우고 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역사 속 천국살이의 목적이에요. 신랑 없이 독립적 존재로 만들기 위한 통섭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혹자(或者)들은 성도의 성숙을 그러한 것으로 이야기한다니까요. 신랑 없이도, 괜찮은 존재로 자라나는 걸, 성화(聖化)라 그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짜 성화는, ‘나는 진짜 내 신랑 없으면, 먼지구나.’를 아는 걸, 성화라 그래요. 그걸 확실히 깨닫는 걸! 그게 신앙 좋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광야를 거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 야훼의 사자가 항상 동행(同行)하죠? 항상 동행해요. 신랑이 동행하는 거예요. 야훼의 사자는,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항상 이스라엘과 동행해요. 그리고 그들이 야훼의 사자와 동행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요. 그런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도, 야훼의 사자가 서 있어요.

그런데 스테파노는 그 40년 광야살이를,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광야교회를 거룩한 나라! 하느님나라!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광야살이는 교회살이에요. 하느님나라살이인데, 묵시(默示) 속에 완료되어 있는 하느님나라를, 역사 속에서 사는 것일 뿐이에요. 그런데 나타나는 양상(樣相)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광야교회에서 이스라엘이 다 죽었어요. 1세대가. 60만 명, 장정 60만 명이 죽었다는 건. 1세대가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20살에서 60살까지, 무기를 들 수 있는 남자가 죽었다는 건, 가정의 대표(代表), 가정의 대표는. 전체의 대표라는 뜻이에요.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는 민수기에서, 또 다시 세는데, 60만 명, 2세대가 똑 같은 죄를 저질렀는데, 은혜로, 여호수아! 예수라는 이름이에요. 그게! 앞세워서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은혜로! 그거 설명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광야교회를 그대로 가나안이 보여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그러죠. 가나안도, 여기가 실제 본향이 아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도 이스라엘은 죽어야죠. 그래서 아시리아, 바벨론에게 망하는 거예요. 성전이! 이스라엘이라는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파괴되는 거예요 광야에서의 장정 60만의 죽음과 동일한 형국이죠.

약속의 땅! 즉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이 짐승에게 맞아 죽는 거요. 큰 성 바벨론에서 두 증인이 맞아 죽는 것처럼. 그렇게 맞아 죽는 거예요. 죽여서 살리는 거예요. 저는 신랑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게 죽음이에요. 존재의 죽음. 아담의 죽임이라니까요. ‘난 선악과 먹고 선악의 주체가 될 거예요.’ 이게 살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들 측면에서! 그런데 난 신랑 없으면 존재도 아니네요.’ 죽음이에요. 죽여서 살리는 거예요. 그 죽음이 곧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 속 아들의 나라를, 신랑의 통섭 속에서 경험하며, 신랑의 피 뒤로, 십자가 뒤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거예요. 라는 애굽 속에서, ‘가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신랑의 희생의 피를 통해서만, 과월절이에요. 패스오버(Passover)! 신랑의 피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인정해 가는 그 과정이, 신앙생활이란 말예요. 그 과정 전체와 그 과정의 결과를 바라크, 이라고 하고, 그 복의 내용과, 그 복을 전하는 일을 케리그마,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굳 뉴스(Good News).

따라서 그 복음! 아름다운 소식! 그 굳 뉴스에 합당한 이들은, 십자가 복음에만, 신랑에게만, 복음 자체가 예수니까! 목을 매게 돼는 자리! 그 자리로 서서히 옮겨지게 되는 거요. 그래서 그 복음, 케리그마에 합당한 자! 복 받은 자들의 그 역사 속 현실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던 거예요.

(마태복음 5:3)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말을 하시죠. 고게 1, 2절에 나와요. 산상수훈에 첫 번째, 두 번째 입을 열어그러잖아요. 그러면 눈을 열어 말을 합니까? 귀를 열어 말을 합니까? 입을 열어 말을 하는데, 왜 굳이 입이라는 말을 쓸까요?

인간의 입에서는, 더럽고 추악한 것만 나온다, 그러죠. 마태복음 15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게 더러워요. 선한 게 하나도 안 나와요. 예수님의 입에서는, ()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바로 그 앞에, 산상수훈에서 복이다! 복이다! 복이다! 이렇게 시작되잖아요. 믿는 자여! 라고 시작되거든요. 산상수훈 전체가 헬라어로 보면!

예수님에게서 막 복이 쏟아져 나오는데, 고 복이 쏟아져 나오는 고 입! 고 그림이 그려지기 전에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빵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래요. 마태복음 4장에서. 그리고는 그 입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구의 입이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입이라는 거죠. 그 복! ‘바라크는 하느님의 능력! 하느님의 생명력을 , 바라크라고 해요. 복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들을 살리는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거죠.

내가 지금 너희를 살리는 말을 해 주겠다는 거예요. 마카리오이! 복이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당신의 신부들을 이제 살리는 말씀. 첫 번째 복이 쏟아지는데, 그 신부들을 살리는 신랑의 첫 번째 복의 말이, ‘마음이 가난한 것이에요. 그 어절을 조금 풀어서 번역해 보면 이러합니다. 복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예요.

 

복이다. ?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거기에 행간에 뭐가 빠져 있어요. 여기에서 가난하다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프토코인데요. 그것은 절대적 가난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필요가 아니라, 이거 없으면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목숨 걸고 붙들게 되는 걸, “프토코라 그래요. 그 단어를 일부러 하느님이 쓰신단 말입니다. 이사야서 611절 보세요. 무엇에 대해 가난한 것인지 예수님이 이걸 인용해다 쓰시는 거예요.

(이사야 61:1) 1 주 야훼의 영을 내려 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여기에 가난한(억눌린) 자가 나오죠. ‘프토코예요. 이걸 헬라어로 바꾸면! 성령에 의해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은,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다.’예요. 돈이 없고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진다는 그런 뜻이 아녜요. 여기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가난한 자는, ‘아름다운 소식!’ 굳뉴스(Good News)! 복음! 말씀! 그거 없으면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아름다운 소식은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전해져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아름다운 소식! 그 복음의 말! 말씀을 예수님이 입을 열어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이렇게도 표현하세요.

(요한복음 6:63)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조금 아까는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랬는데, 여기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다 그래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세요. 3단 논법만 알면 다 이해하는 거니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無益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죠?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그러고, 여기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다. 그래요. 그리고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 말이 영이고 생명이다. 그런단 말예요. 그래서 여기에는 프뉴마, 성령이 중성으로 쓰여요. 헬라어에서는, 단어들의 남성, 여성, 중성. 이 성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중성으로 쓰여요. 원래 프뉴마는 남성으로 쓰여야 되는데, 중성으로 쓰세요. ? 성령은 인격자로 여기서는 표현하지 않고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중성 단어를 쓴단 말예요.

그런데 우리 신부들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 말씀, 성령 이건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다른 표현일 뿐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한 처음(太初)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씀이라고도 얘기하고, ‘그리스도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이야기하잖아요. 같은 거란 말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가 있다 하기도 하고, 우리 안에 성령(聖神)이 계시다 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 그렇게 복음! 아름다운 소식! 말씀에 가난하다는 건, ‘나는 예수, 신랑 없으면 죽어요.’라는 말이란 말예요. 그렇게 가난한 자가, 복 있는 자고, 그가 하느님나라를 사는 거예요. 신랑의 나라에 가서 한 달 살아보니까, ‘신랑 없으면 난 여기서 바보구나. 티끌이구나.’ 이거 깨닫는 거! 이거 잊지 마세요. 그거예요.

그게 역사 속 천국을 사는 자들의 역사 속 현실인 거예요. 이 역사 속 천국! 약속의 땅! 아직 실체가 오지 않았으니까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을 모형 하는 곳!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가나안에서 사는 자들은, 자신의 실존인식을, ‘신랑이 없으면, 난 먼지입니다. 신랑과 관계없는 한 난 죄인 중에 죄인일 뿐입니다.’로 갖게 되는 자들인 거란 말이에요. 그건 아담의 죽음이며, 아담의 자아 상실이죠. ‘내가 왕이야, 내가 하느님처럼 됐어. 내가 선악과 먹었거든.’ 여기에서 난 신랑 없으면 먼지예요.’는 아담의 죽음이란 말예요. 선악과 입에 문 아담의 죽음. 이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그걸 십자가 지는 삶!’이라 한다 말예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생명이 그렇게 쓰러져 갈수록, 영의 나라에서는, 사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죽음과 부활은 동시에 일어나는 거란 말예요. 어디서? 역사 속 하느님나라에서!

이 중에 예수 믿고 난 후에 왜 이렇게 삶이 이래? 아 죽을 거 같아.’ 그런 분들 많죠? 대부분 그럴 거예요. 살아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케리그마의 내용이 죽음과 부활, 나타나심까지인 거예요. 동시(同時)에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시간적 순서를 가지고 우리에게 경험이 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인 거예요.

(로마6,5)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연합)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이미 못 박혀 죽었다, 성경이 과거완료로 표시하잖아요. ‘못 박혀 죽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어요. 쉽게 말해서, 묵시 속에서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역사 속에서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중이잖아요? 지금?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살았어요. 부활(復活)했어요. 그런데 여전히 죽은 자의 행실을 내놓고 있죠. 우리는요! 그런데 살아나요. 부활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구원의 현재시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걸!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첫 번째 부활과 두 번째 부활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거예요.

 

첫 번째 부활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묵시 속에 창조된 하느님 백성의 실존을 가리키는 거요. 부활 되어 있어요. 아니 살아 있어요. 부활이란 말은, 창조란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살아남. 이건 없음에서 살아나는 걸 창조라고 하죠? 죽음에서 살아난 걸 부활이라 하잖아요? 창조라는 말이에요.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죄! 죽음! 부활! 이런 개념들이 동원되는 거란 말예요. 두 번째 부활은, 하느님 신부들의 역사 속 부활 과정을 함의(含意)한 개념(槪念)으로서의, 부활을 말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는 거예요. 신앙은 관념(觀念)이 아닙니다. 여러분, 실제(實際)라는 말예요. 그렇게 서서히 죽으며,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가 결국에, 육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죽으면, 완전히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죽음으로 가고 있는 그 길을, 희망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분들이란 말예요. 그것으로 기뻐하는 거예요. 성도는요!

렇게 서서히 죽으면서, 서서히 살아나던 성도는, 완전히 죽어서, 두 번째 부활로 살아나요. 그 전체 과정을 깨달아 알아가고 살아내는 걸, 양육(養育)이라 그래요. 그 단어가 長成分量까지 자라남養育이에요. 어디까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자기를 부인하셨단 말이에요. 거기로 자라나는 걸,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남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 닮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생각들 하란 말예요. 어떻게 인간이, 유한이 무한을 닮을 수가 있어요. 이미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하느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그 창조의 과정을 몸으로 살아내며, ‘!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산 존재가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먼저 없음의 자리에서 출발을 하는 거란 말예요. 마귀의 자리에서 먼저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과정이, 역사와 인생이 구축한, 옛 하늘과 옛 땅! 옛 흙! 같은 말이거든요. 옛 흙은 뭐예요? ‘!’ ‘육적 나가 죽는 과정과 동반된다 말예요. 따라서 성도의 인생은 십자가와 부활이 동시에 일어나는, 신비한 장소가 되는 거예요. 죽는 게 사는 거다.란 말이란 말입니다.


신부는, ‘없음의 존재로 신랑의 갈비뼈 속에 함몰되어 있을 때에, 독자적인 이 독립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오히려 사람인 거예요. 거기서 빠져나오면서, 그 때부터 죄가 생긴다니까요. 잘 이해해야 돼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을 때,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연합되어 한 몸으로 있을 때 사람이에요. 떨어져서는 사람도 아녜요. 이건요! 상징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신부, 여자가, 여자는 항상 부정(不淨)함의 상징이란 말예요. 성경에서! 여자가 신랑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아들화 되었을 때, 이걸 하느님나라의 아들들이라고,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자로 가면 안 돼요. 여러분은요! 혼인잔치를 연다는 건, 천국에서, 혼인잔치는 뭐예요. 연합이란 말예요. 하나 되는 거요. 아들이 되는 거요. 가서. 그래서 우리를 아들이라 하는 거예요. 딸이라고 하지 않고! 신랑화 되는 거라니까요. 여러분이 예수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걸 모두 하느님이 홀로 이루세요.

없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하느님 거란 말예요. 본받아라는 이 휨휘토스라는 단어는 연합(聯合)의 의미예요. 예수 안에서 연합되어 죽고 살아나는 거. 우리들의 개체의 독립성이 완전히 차압(差押)당해 버리는, 부정당해 버리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로마서 5장과 6장에는 딱 두 사람만 등장해요. 한 사람 안에서, 한 사람 안에서, 두 사람 밖에 없어요. 하느님 눈에는 두 사람 밖에 없다니까요. 그걸 대표(代表)의 원리(原理)’라고 하는데 성경은! 한 사람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안에서 살아요. 그게 복음이라 말입니다. 교회의 개별적 자아가 모두 부정되고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도 한 사람만 해요.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머지는 거기에 붙은 자라 그래요. ‘붙은 자!’ 여러분이 살아나는 게 아니라니깐요. 하느님이 거기에 붙여 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 말은 하느님 앞에서 존재라는 건, 그 둘 안에서만 유효(有效)하단 뜻이에요. 첫 번째 한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없음들은, 그야말로 없음즉 흙의 자리에서, 영원히 죽은 자 노릇을 하는 거고, 죽은 자, 없음의 자리가 흙이었잖아요? 그래서 그걸 지옥(地獄)이라 하는 거예요. 그들이 그냥 그 상태로 갇혀 있는 상태! 하느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들 혼자 독자적인 존재로 서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란 말예요.

 

두 번째 한 사람에 들어 있는 그 없음들은, 어린 양이라는 신랑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의 지체라는 말 자체가, 지체의 독립성을 파괴하는 개념이란 말이에요.

여러분의 허락을 안 받고 손가락이 함부로 외출했다 들어오는 경우 있어요? 없어요. 이 지체의 독립성은 이미 몸에게 차압당한 상태란 말예요. 그걸 지체라 그래요. 천국에는 예수라는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안에 신부가 갈비뼈로 함몰되어 들어가야 사람이 되는 거요. 그래서 교회를 예수의 지체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 자체가 개별적 몸통을 소유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역사 속에서 개별적 자아를 몰수(沒收)당하고, 독립성을 파괴당하는 삶을 통과하게 되는 거요.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가 살게 되는 유일한 길이란 말입니다. 죽어야 사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사는 거예요. 진심에서!

예수님이 내가 길()이다.’ 그랬어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有一한 길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떻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 내가 길이다.’ 그러더니, 그 길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니까요. 없어져 버린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길, 세상, 인간 측에서의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는 모든 길을, 완전히 닫아 버린 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길 이외에는, 그 어떤 길도 없다는 것을 확증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길이다.’ 그러더니 길이 없어져 버린 거예요.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오늘 여러분은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고 가야 돼요.

성경이 신랑과 신부를 한 몸이라고 부르는 건, 신랑이신 하느님과, 신부인 성도의 연합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상징적으로 에둘러 한 표현이라 그랬어요. 그렇게 천국의 존재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하느님에게만 의존하며, 하느님만 찬송하는 존재여야 돼요. 그러한 연합의 상태, 하나가 되게 하는 상태! 고걸 성취해 내는 힘을 뭐라고 해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하나가 되는 상태를 성취해 내는 힘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둘을, 분리되어 있던 둘을 분리되어 있던 한 쪽은 죽은 건데, 이 둘이 하나가 되어 산자가 되는 이러한 연합을 이루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힘, 능력은, 창조주만 갖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이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 말은, ‘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님 내 놔!’라는 그 말이죠. 사랑하라, 네 안에 계신 예수 내놔!’사랑하라예요. 그 안에 있는 예수를 내놓으면서 나를 주장하지 않는 게, 예수를 내놓는 거잖아요? 예수 때문에 내가 산자가 된 거니까. 그 예수 안에서, 나도 없음이 되고, 상대방도 없음이 되어,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니까. 이 역사 속에서는 불가능한 거지만. 고걸 사랑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하나가 될 수 있거든요. 예수가 아니면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조금 바꾸어서 생각해보자고요. 그렇게 하나였던 하느님과 아담이, 아담 측에서의 독립선언으로 말미암아 둘이 되었어요. 그렇게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分離), 곧 사람과 사람의 분리로 나타나죠? 아담의 독립선언은, 나를 하느님으로 올려놓으려는 시도이므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필연적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거요. 아담들 각자가, 다 하느님이 되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분리가 일어나는 거고, 카인과 아벨의 분리가 일어나는 거요. 하느님과 아담이 분리가 되자, 이웃과의 분리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분리의 상태를, ‘이혼(離婚)’이라고 하고, ‘간음(姦淫)’이라고 한다 그랬습니다. ? 남편에게서 떨어져 나가서 다른 걸 사랑하는 거니까. ‘를 사랑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분리가 사랑, 연합의 반대말이니까. 살인이에요. 죽이는 거예요. 그걸 살인이라 그래요.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하느님을 살해(殺害)한다는 말과 바꿔 쓸 수 있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게 살인(殺人)이라고 말했는지 아시겠죠? 사랑이 살리는 건데, 사랑하지 않는 건 죽음의 상태를 놔두는 거니까, 살인이란 말예요. 이해가 안 가면 여러번 읽으세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성경을, 복음을 너무 신파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랑! 애틋한 사랑! 결혼하기 전에 그렇게 100m 전방에서 전화만 하면, 슬라이딩해서 받던 분들이, 지금 어떻게 됐어요? 그런 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카인과 아벨의 분리가, 살인이라는 열매를 맺는 그림은, 괜히 들어가 있는 게 아녜요. 하느님을 죽인 거란 말입니다. 그게!

그러한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 하실 유일한 말씀이 뭐겠어요? 하느님과 분리되고, 또 수평적으로 이웃과도 분리 되어 있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무슨 말을 해야 살아나겠어요? 다시 하나 되라!’ 이게 사랑해라잖아요? 그래서 준 게 율법이요. 예수님이 율법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하나 된다. 그런데, 내가 없음이 되어야,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된다 말예요. 신부가 신랑 안으로 함몰(陷沒)되어 들어가야 하나가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죽어라는 뜻이에요. 내가 반드시 너 죽이겠다는 뜻이에요. 이 역사 속에서!

인간 세상 속에서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와 한 생명으로 연합되어 있던 상태에서, 어머니의 물과 피를 타고 밖으로 탈출하여,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탄생(誕生)이라고 부르지만, 하느님나라의 창조의 메카니즘은 그것과 정반대예요. 하느님나라에서는 그렇게 한 몸으로 있다가 독립적 존재로 밖으로 터져 나오는 걸, ‘()’라 그래요. 그걸 악()이라고 해요. 그래서 율법에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속죄제를 드리게 되어 있어요. 아니 애 낳느라고 반 죽다가 살아났는데, 또 가서 제사도 지내야 돼. 성전에도 못 가요. 남자 근처에도 못 가요. 밖으로도 못 나가요. 부정한 여자가 돼요. 여자가 애를 낳으면! 죄를 하나 더 낳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라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 하나에서 분리(分離)되어 나오는 거! 여자는 아담의 자손을 낳으면 안 돼요. 예수! 아들을 낳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부정(不淨)한 여자가 되는 거요.

 

하느님나라의 창조의 메카니즘은, 거꾸로, 신랑의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물과 피를 마시고, 그 뚫린 옆구리를 통과하여, 신랑의 심장으로 다시 복귀(復歸)하는 거! 갈비뼈 자리로 다시 복귀하는 거요. 그걸 창조라 그래요. 여러분! 그렇게 복귀가 되어야,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이 세상 모든 독립적 개별적 자아들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하는 거예요. 죽은 거예요, 그게! 예수 안 믿는 게 그래서 죽은 거예요.

러한 사랑의 상태, 연합의 상태로의 복귀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 게, 십계명(十誡命)이에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성문화(成文化)하여, 두 돌 판에 나누어 적어 주세요. ‘선악과 따 먹고 집 떠난 자들아! 신랑 품 떠난, 간음한 창녀들아! 신랑에게 돌아오라!’ 이게 십계명이에요. 이게! 사랑하라! 하느님을! 신랑을 사랑하라, 돌아와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을 명령하셨다는 건, 당시 아담들의 세상에 사랑이 없었단 뜻이죠. 그건,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부들에게 보내는 연서(戀書)이기도 해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와!’ 그러나 그건 곧, 이 온 세상의 사망증명서이기도 한 거예요. 율법이! 다 죽었단 뜻이에요. 그래서 사랑해! 돌아와야 되잖아!’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죽었던 그들이 난 하느님 사랑해요.’ 그러고 있었다니까요. 아니 피로써 맹세해요. ‘나 사랑한다니까요.’ 혈서 쓴 거예요. 가짜로!

그런데 그들에게 하느님이, 너희들이 진짜 날 사랑한다고? ‘천만에!’라는 일갈을 담아서, 십계명에 적어주신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하느님의 연사가 그들에게 도착할 즈음에 그들은, 엉뚱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사랑해! 사랑해!’ 그러고 있었어요. ‘사랑해! 사랑해!’ 인간 측에서는 절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낼 수 없음이, 폭로된 거예요. 거기에 심판이 일어나죠. 하느님의 연서가 파괴돼요. 찢어 발겨진다고요. 거기서 3,000명이 죽습니다. 그때가 이스라엘이 과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나온 후 50일 째 되는 때요.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게, 과월절 뒤 50일 째 되는 날이 오순절이에요. 그 때 3,000명이 율법에 의해 죽는 거요. ‘너희들은 사랑 못하는 사람들이야! 이렇게 사랑 못하면 죽어! 신랑과 연합되지 않으면 죽은 거야 그게.’ 3,000명이 죽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인 신약의 오순절! 거기도 산이죠? 예루살렘이 시온 산 위에 있어요. 거기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역시 똑같은 말씀이 내려와요. 아까 말은, 영이라 그랬죠? 성령이 오세요. 불의 혀 같은 말, 불의 혀처럼 말이, 성령이 내려옵니다. 말씀이 내려오시는데, 그 때 율법으로 죽었던 3,000명이, 다시 반석인 베드로의 에 의해 살아올라오는 거요. 십자가가 그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리겠다는 거요. ‘나는 이 법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죽여서 살리겠다.’는 거요.

그들이 ! 구원은, 법을 지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일어나는 거구나!’ ‘우리가 법을 지켜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가 뭐예요? 율법주의의 죽음이에요. 바리새인들의 죽음이에요. 그게 아니라, 십자가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거구나!가 부활이란 말예요. 이게 교회에 동시에 일에 일어나는 거란 말예요.

 

마찬가지에요. 구약과 신약 성경은, 우리 성도 안에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성당(예배당)에 와서 말씀을 듣게 되면, 처음에는 그 말씀이, 법으로 들려요. 그래서 자기들의 피를 쏟아가며, 피를 발라가며, 그 법을 지키려고 애 쓰게 되죠? 하느님도 사랑하려고 하고, 이웃도 사랑하려고 해요. 거기서 보람도 얻고 행복도 찾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을 종교인이라 그래요. 모든 자연인이 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그건 모든 자연인이 다 추구하는 거예요!

사랑을 곡해한 거죠. 사랑은 연합의 언어라 그랬어요. ‘살리는 힘이라 그랬어요. 연합은 한 쪽에서 그를 품어 안아야 되지, 양쪽에서 조금씩 내 놓아서 되는 거 아니라 그랬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연합은! 그러니까 살려내는 힘이란 말예요. 하느님 측에서 나오는 창조의 능력이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인간 측에서 내가 그걸 하느님에게 내놓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인 거예요. 그건요.

성도만 그 율법에 의해 폭격을 당해서, ‘난 죽었다 깨어나도 내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내 이웃을 살려낼 수 있는,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못 되는 구나!’ 이리로 내려가는 거요. ‘내 피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는 걸, 폭로 당하게 된다 말입니다. 거기에서, 나에 대한 신뢰와 의존이, 조금씩 무너져가게 되는 거요. 그때 진짜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거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이웃의 사랑!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요. 거기에서!

하느님은 예수의 피만 기뻐하시며, 거기에만 생명을 부으신다는 게, 선명해 질수록, ‘는 죽어가게 되는 거요. ‘는 죽어가게 되는 거요. 그렇게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 가죠. 고게 사랑이에요. 그렇게 내가 죽어지고, 자기 사랑에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내려 갈 때, 진짜 내 이웃, 내 가족들을 사랑하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배우자도 감동하여, 밥 먹다 우는 거요. ‘잠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거예요. (하하하) 누구라고 얘기는 안 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예수와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되어가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하나 안으로 연합이 가능한 거요. 내가 살아 있으면, 절대 예수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신부들, 이 역사 속에서, 서서히 죽여가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예수를 모퉁이 돌로, 참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고,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고 하는 거예요. 이미 하나! 사랑하게 만드셨다니까요. 아니 우리를 사랑이 되게 하셨어요. 그리고 그걸 깨달아 가게 하는 거요.


(에페소서 2:13-22) 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와졌습니다.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15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8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다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고, 이미 성전이에요. 그런데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하고, 역사 속에서, 성전이 되어가야 돼요. 무슨 말예요? 그 현실을 깨달아 아는 그 과정을 겪게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한 사람 안에서, 한 사람으로 완료가 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한 사람을 지키는 과정을, 통과하기도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십자가요, 자기 부인이요, 죽음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아픈 거예요. 그 토록 사랑하고 의존하던, ‘에게서 떠나는 과정이, 아프단 말입니다. 쉽지 않아요.

성경은 그걸 애통(슬픔)이라 그래요. 성령 안에서 말씀을 받은 이들은 반드시 그 애통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신 거요. 살리는 말이에요. 그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구약의 산에서 내려온 법이 삼천 명을 죽였습니다. 거기서도 애통이 있었어요. 모세의 애통이었어요. 하느님!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예수의 모형이에요. 자기 부인이에요. 이게 애통이에요. 나를 죽이세요. 저들을 살리세요.’ 그랬더니 심판이 멈췄어요. 용서가 내려왔습니다. 애통에 의해!

 

신약의 산에서 그 애통이 말씀으로 내려와요. ‘애통(슬퍼)하는 자 복이다!’라고 하더니, ‘그들이 위로를 받는다.’ 말씀하신단 말예요. 거기에서 애통이라고 번역이 된 펜둔테스, 히브리어 페싸흐를 그대로 끌어다가 쓴 단어예요. 그 단어가 과월절의 과월이라는 단어예요. 애통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단어는 고통과 고난의 의미로도 쓰이지만, ‘넘어가다, 패스오버(passover), 뛰어넘다, 절룩거리다, 절룩거리게 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말이에요.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그 과월절만이, 우리의 애굽 탈출의 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는, 자기부인이죠? 내 힘으로 나온 게 아니구나. 이게 자기부인이잖아요? 과월절 어린 양의 피의 은혜로 난 나온 거구나. 그래서 그걸 내가 부인되는 거니까. 그걸 애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애통! ‘그 자가 진짜 복 받은 자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란 말예요. 그래서 거기에 펜둔테스라는 단어가 쓰인 거예요. 과월절!

그런데 그 애통이라는 단어는 다리를 절다, 절룩거리다.’라는 뜻이에요. 절룩거리는 사람하면 이스라엘! 야곱! 이스라엘은 교회!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과월이에요. ‘페사흐란 말예요. 절룩거리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는 하느님까지도 이겨먹으려고 하는 거! 40일 단식기도해서 안 들어주면, 50일까지 굶어버릴 거야. 내가 하느님을 이겨 버리겠다는 거죠? 인간의 욕망의 이 끈질김! 그걸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못 고쳐요. 그건 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환도 뼈(생식기)가 대신 가격을 당해요. 환도 뼈는 남자의 씨가 담긴 그릇이란 뜻이에요. 정확히 번역하면! 남자의 씨, ‘제라,’ 여인의 후손, 예수라는 이야기예요. 예수가 그 대신에 맞아 가격 당하여, 죽어, 그가 살아나는 걸, 이스라엘, 승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평생 지팡이가 없으면 서지도 못하는, 절룩거리는 자! 신랑만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것. 이게 애통! 은혜! 예수! 이스라엘을 설명하는 그림들이란 말예요. ! 그게 여러분의 인생에 그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 신랑이 아니면 나는 먼지구나!’ 절룩거리면서 가는 인생을 평생 살게 되는 거요.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게 쉽겠습니까? 어려워요.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거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죠. 거기서 위로(慰勞)’라는 단어가 파라클레오라는 단어인데요. 파라크레토스보혜사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위로를 받는 다는 건,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편안(便安)하게 해주고, 격려(激勵)해주고, 이런 의미도 있지만, 성령이 심기게 되다.’란 뜻도 있는 거요. 성령이 심긴 자들은 어떻게 된다? 애통(哀痛)하게 된다! 신랑만 의지하여 절룩거리며 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걸, ‘복이다!’라고 얘기하는 거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게 우리를 살리는 야훼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니까요. 입을 열어서! 누가? 하느님이!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血統)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바로, 그 화려한 다윗 왕국의 왕이 되고 싶어 하죠?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 다윗 왕국을 기다렸잖아요? 그런데 엉뚱한, 이상한 거지 같은 게 하나 오더니, ‘여기 내 나라이따위 얘기 하니까 죽여 버리는 거 아닙니까? 입만 열만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자손이여! 그랬잖아요? 이스라엘은 지금도 그 다윗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서, 시온으로 돌아가자 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후손이 오더니 죽어버렸다니까요. 인간들이 원하는 그 다윗을, 예수가 와서 죽여 버린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14, 14, 14대죠? 14가 무슨 수? 다윗! David! 달렙, 바우, 달렙이 4, 6, 4이기 때문에, 14란 말예요. David, 다윗! 다욋과 아브라함의 족보라 그래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도 아니고.

헬라 원어를 보면, 그러니까 너희들이 좋아하는 다윗 족보 여기 있다. 그리고 14, 14, 14 다윗, 다윗! 다윗! 그러더니, 그 족보에서 다윗을 빼버려요. 솔로몬의 아버지를 우리야로 넣어버린단 말예요. 의도적으로 가운데를 15대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다윗을 쏙 빼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욕구, 마귀예요. 이걸 죽여 버리고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그 왕을 다윗 왕 되고 싶어 하는 우리를 다 품어 안고 죽어버리고, ‘아버지 바라기아버지만 의지하는 그 이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아담의 삭제(削除)! 죄인의 삭제! 우리는 이 땅에서 삭제되어 가는 거예요.

 

무슨 이름을 남겨요 성경 어디에 너희들 이름 남겨라 그랬어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남기면 안 돼요. 죽어요. 신성모독 이름 달고 가면 죽어요. 예수라는 이름 달고 가야 되잖아요? 묵시록에 보면! 그건 네 이름 뺏겠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느님의 군사가 되라는 건 무슨 소리냐고요? 도대체가! 그렇게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는 하느님의 군사가 되리라!’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내 지혜, 내 뜻, 내 능력 의지하여 하느님나라 건설하겠다는 자들이 어떻게 할까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는 하느님의 군사가 될 거야!’

그래서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삭제되어 가는 게 맞아요. 하느님, 예수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하느님나라 사는 사람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가 아닌 겁니다. 우리는 한 사람! 예수 안에서 죽고, 한 사람! 예수 안에서 산, 은혜의 신부들이에요. 그 아들만 꼭 붙드세요. 그래야 여러분은 아들과 혼인하는 것이고, 아들로 완성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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