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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모든 것이 하나이다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09 조회수1,634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09.

 <야~ 긴데 이걸 읽어봐야 하나? >

모든 것이 하나이다

 

논어 술이편에 보면, 술이불작( 述而不作)이란 말이 나와요. 진리를 말하되 네 말로 창작하지 마라!’ 이런 뜻이에요. 진리만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진리는 하느님입니다.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들을 귀가 없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말하면, 짜증을 내요. 왜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 진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냐는 거죠. 나의 인격! 나의 행위! 나의 가치! 나의 성숙! 나의 변화! 이런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건 보이니까! 그래서 진리만을 전해야 하는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인간들의 구미에 맞는 창작에 돌입하죠. 왜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엉뚱한 스승을 모신다. 그러잖아요? 사도 바오로가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예화나, 웃기는 이야기나, 이슈가 되는 사건들이나, 감동적인 간증! 또 두 주먹 불끈 쥐게 만드는 선동적인 연설 등등! 진리와는 상관없는 얘기들을 나열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거요. 사람들은 그러한 창작열의에 감동합니다. 박수를 보내요. 눈물을 흘리면서 결단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러한 감동과 박수와 결단은,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건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거예요. 불교 설법을 들어도 두 주먹 불끈 쥐는 결단이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 이 세상에 눈 두지 말자! 불교인들도 다 하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정작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은, 진리 이외에 다른 말에 관심이 없어요. 뉴스를 봐도 나오고, 도덕책을 봐도 나오고, 교양영화에도 나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심지어, 불쾌해 합니다. 이런 귀한 시간을 그런 잡다한 세상 이야기 듣는 것으로, 때우는 것이 못내 아쉬워요. 진리를 알고 나서, TV나 신문을 나도 안 보는데, 사제가 자꾸 그 얘기를 해 주면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설교를 하다보면, 회중이 정확히 두 부류로 갈라지는 걸 볼 수 있어요. 분명히 진리이신 예수를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 반응이 나와요. 예수의 이야기도, ‘나의 유익에, 내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 달라는 사람들과, ‘그냥 예수 이야기로 나는 됐습니다.’라는, 두 부류로 갈라져요. 왜 그런 분리가 생기는가 하면, 한 쪽은 아직도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 ‘의 상태로 보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 쪽은, 이미 예수와 하나가 되어서, 그 존재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것은요! 이건 사활을 걸만큼 중요한 사안이에요.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여전히 종교인으로 머무느냐, 성도로 변화하느냐 이건, 이 문제에 달린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우리라는 말을 자주 쓰죠? 사도 바오로도 우리라는 말을 자주 써요. 우리라는 말 자체가, 그 안에 있는 자들이 전부, ‘여야 돼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지금도 의 자리에 두고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와 연합 상태가 아닌 거예요. 중요한 얘기예요. 여러분 잘 들어 보세요.

사도 바오로가 집요하게 우리와 예수를 함께 묶어버리죠? 예수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가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살아났다는 거예요. 여러분 첫 번째 부활에 참예하셨죠? 예수 안에서 예수로 살아난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 앞에 산 자가 되었다라고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산 자가 됐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건데, 요한복음에서 하늘 생명은 오직 예수 안에 만 있다 그래요. 그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요. 그 밖은 다 죽음이에요. 사망이에요.

그러니까 그 예수의 생명을, 우리가 지금 공유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어떤 존재의 지체가 된 거예요. 그러면 그도 바로, 그리스도로 살아난 거예요. 그 그리스도란 말 자체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데, 여러분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죠? 성령의 기름! 그게 그리스도란 뜻이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됐다니까요. 지금.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가 됐어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인! 그게 하느님에 대하여 살아난 자들의 현실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희다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이 땅에서 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진리가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가 진리라 그랬으니까! 내가 진리가 되어서, 진리를 전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일을 우리가 하게 되는 거요이건.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와 가 연합이 되어서 새로운 가 된 거예요. 그 안에는 예수와 내가 같이 들어 있어요. 이걸 세 번째 성전이라 그래요. 너희들이 이 성전 헐어라! 두 번째 성전!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그건 세 번째란 뜻이라 그랬죠? 그래서 사흘 걸려야 되는 거예요. 세 번째 성전으로 일으키리라 말했단 말예요. 그게 예수와 연합된 란 말예요. 그게요. 그리스도인!

이제는 예수와 내가 의 상태로 존재하면 안 돼요. 그게 이혼(離婚)이죠. 나와 너로 존재하면! 여자가 신랑의 갈비뼈 안에 함몰되어 있을 때 사람인데, 여기서 빠져나가 독립적 존재가 되면, 그게 이혼이요, 간음이라 그랬잖아요?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누림의 단초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잘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을 섬기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를 여전히 의 자리에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 섬김의 대상으로만 삼는 이들이 태반이에요. 자유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도 여전히, 나와 아무 상관이 없죠? 나와 상관없는 예수가 진 십자가예요. 그건! 그래서 패션 오브 더 크롸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란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우는 거예요. 사순절 고난 주간을 이렇게 그냥 힘들게 보내는 거예요. 그게 내 일이 아니거든요. 내 밖의 어떤 존재가 한 일이고, 나는 그걸 그냥 안타까움의 대상으로 보고 앉아 있는 거예요. 거기가 자기가 죽은 자리라는 걸 안 믿는 거예요. 아니 못 믿는 거예요. 눈과 귀가 안 열려서! 그들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는 예수만의 십자가예요. 내 십자가 아녜요. 그래서 십자가가 슬프고, 무섭고, 그런 거예요.


십자가는, ‘스타우로스언약이라는 말이라 그랬죠? 그게 기둥이라는 말예요. 다른 말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작품! 창세전 언약의 결과물이니까,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거예요. 그 말은, 예수님은 당신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손수 죽여 버린 거예요. 이미. 그 안에 우리 성도가 들어 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죽여야, 진짜 생명이 온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준 거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가 들어 있다는 걸,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다면, 결국 그 안에 나 있으니까. 나를 섬기는 거예요.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그 안에 나 있다면서! 그 분을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나를 섬기는 거란 말예요. 그게!   하느님으로서의 예수가 아닌, 인간 세상에 와서 어떤 일을 행하고 돌아간,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일을 행한 이라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그 오해된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성경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내 밖의 책이 되죠? ? 나와 상관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에 관한 책이니까. 그러면 내 책이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이 성경을, 생명책이라고도 해요. 생명을 주는 책이거든요. 이것이! 그러면 이게 나와 상관이 없는 섬김의 대상인 예수의 이야기이면, 나는 그 책에 錄名되지 않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전체를 로 읽어야 돼요. 우리의 이야기! 교회의 이야기예요. 그렇게 진리는, 나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로, 즉시 살려내는 힘이 있어요. 그걸 부활(復活)이라 그래요. 죽음과 부활은, 따로 떨어져 시간을 두고, 차례차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죽음이 곧 부활이에요. 살아나는 거예요. 죽는 게 살아나는 거요. 하느님 앞에서의 그 존재의 죽음! 그 처음 자리로의 회귀죠? ? 모든 것이 없음’, 죽음의 상태였거든요. 그래야 거기서 창조가 일어나는데, 이것들이 살아 있는 척 하니까, 창조가 드러나지 않는 거예요. 영광을 못 받는 거예요. 이 창조의 능력이! 죽음과 부활은 하나예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이에요. 육신이 죽으면, 묵시 속에서 즉시 사는 것처럼. 여러분 무덤 안에서 잠자고 기다리는 것 아녜요. 시간 밖으로 나가자마자, 거긴 시간과 상관이 없는 영원이기 때문에, 거긴 기다림이 없어요. 따라서 죽으면 사는 거예요. 여러분은요!

이 역사 속에서도 진리에 의해 죽은 사람은, 그 즉시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산거예요. 성도의 무덤이 곧 천국 문이에요. 하느님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무덤을 열고 들어갔더니. 그 안에 천사들이 있었죠? 천국은 무덤 문 밖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평생 하느님에게 끌려다니다가, 결국 무덤 하나 건지고 죽었잖아요? 얼마나 불쌍해 보여요. 아뇨, 천국 문 열고 간 거예요. 그게 다예요. 성도는! 거기에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은 누구? 믿음의 조상이니까! 성도들이 다 그 무덤에 묻히는 거예요. ? 천국 들어가려고. 그게 교회라니까요. 제가 예를 하나들어 드릴게요.

창세기 21장으로 가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사악이 주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율법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 그 은혜의 아들을 희롱하는 그림이 나오죠? 은혜는, 항상 율법에게 희롱 당하게 되어 있다는, 그런 역사 속 성도들의 현실을 잘 그려놓은 거예요. 복음은 항상, 율법에게 조롱의 대상이 돼요. 겉으로 보기에는, 이 율법주의자들이 훨씬 멋있어 보여요.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에.

 

, 그리고는 율법인 이스마엘이, 하느님에 의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죠? ‘쫓아내라그래요. 결국에는 율법이 은혜에 의해 축출이 되는 거요. 그런데, 바로 그 밑에 붙어 있는 이야기가 좀 어색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아브라함과 이방인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는 그 다음 장이 아브라함이 약속의 후손 이사악의 심장에 칼을 꽂는 모리아 산의 사건이 이어진단 말예요. 도대체 이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여기에 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 그리고 거기를 브엘세바(창세21,31)라고 이름 짓잖아요? 그게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광야의 우물은, 생명과 관계된 아주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광야의 물! 광야의 우물! 이건 종종 하느님의 말씀으로 비유가 되는 거예요. 그죠?

 

레마로고스의 개념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 드렸습니다. 레마는, 어떻게 말로 설명하거나 그려낼 수 없는, 그 진리 자체! 그걸 이야기한다면, 로고스는, 그걸 성문화 하여 담은 그릇에 비유해 드렸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레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고스! 표피적으로 받아 들여 법으로 읽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서 레마의 동사형인 레오, 말하다라는 표피적 뜻도 있지만, 그것은 흐르다라는 뜻이에요. ‘레마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거예요. 그래서 은혜의 비! 왜 은혜의 비라고 하냐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흐르는 물, 진리의 말씀에 씻겨지지 않으면 부정한 자다 그러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부정한 건 어디에 씻으라. 그래요? 물에 씻으라. 그러는데, 무슨 물? 흐르는 물에 씻으라. 그래요. 그게 레오예요. 레마요. 말씀에 씻지 않으면 다 부정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거고,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서 씻는 거예요. 요르단이란 말이, ‘흐르다란 뜻이에요. 아래의 물! 이 바다는,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지만, 위의 물! 아래로 흘러내리는 위의 물! 창세기 두 번째 날 위의 물이 아래로 갈라졌잖아요? 위의 물은 하느님의 말씀, 그 진리를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아래의 물은, 정확하게 위의 물을 흉내 내는 물이에요. 그러나 그 물! 아래 바다는 다시 있지 않은 상태로 이제 멸해지죠? 묵시록에 가면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21,1) 그리고 유리바다만 천상에 남아 있어요. 유리로 된 바다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만 남는 거예요. ! 요한묵시록에서 물을 뿜어서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는 장면이, 바로 아래의 물! 비 진리! 엉터리 말씀! 이런 걸로 여자를 죽이려하는 마귀의 행사를 가리키는 거란 말예요. 아래의 물!

아모스서를 보면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그 말은 이 세상에 말씀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들이 각 교회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인터넷만 들어가면 수만 편이 나와요. 설교가! 정작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수(生水)가 없더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엉터리 말의 홍수는, 곧 기근(飢饉)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그게! 거기에 다 떠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엘리야 때 기근이 일어납니다. 얼마 동안? 삼년 반! 삼년 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에요. 로고스로 오신 예수! 그 분이 말씀을 홍수처럼 쏟아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기근이에요. 그것이요! 그런데 그 분이 가신 다음에 성령의 비가 내리자,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나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엘리야 이야기는 거기서 3년 반 있다가, 비가 오는 거예요.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 그게 그런 말이었구나.’라고 알았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성경에!

성령이 생수처럼 단비로 내려지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이해하더라는 거예요. 이해하고 나자,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인 베드로가, 교회가, 그 말을 받아 뿌리니까 첫 번째 시내 산에서 죽었던 삼천 명이 살아올라오는 거예요. 삼천 명(사도2,41)! 오순절 날! 따라서 성령, 생수, , 말씀 등은, 같은 걸 가리키는 거예요. 그것이 진리예요.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그러잖아요? 요한복음에. 내 말씀, 진리의 말이 성령이요. 그게 생명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 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은혜의 비, 성령, 말씀을 내려 주신 사건이었음을, 엘리야의 이야기가 힌트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들이,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 말은, 위에서 흘려 보내준 물이 없는 자가, 곧 귀신이라는 말예요. 그 귀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프뉴마 다이모니온이거든요. ‘프뉴마가 뭐예요? 성령이에요. 그런데 영이 뭐라 그랬죠? , 말씀. 다이모니온은 악한 말. 이걸 귀신이라고 번역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귀신들린 건 그냥 뭐 거품 물고 쓰러지고, 이건 아니고, 이건 정신병원에 보내면 돼요. 귀신들린 건, 악한 말을 악한 말인지 모르고, 그냥 받아 담고 있는 게 귀신 들린 거예요 디몬포제션(Demon Possession), 말씀의 모양은 가지고 있는데, 아래의 말의 수준에서, 이해되어지는 율법의 말! 이게 귀신들린 거예요. 그건 성경이 그냥 소리라 그래요. ‘에코!’ 에코는 뭐냐 하면 앵무새의 말! 의미 없는 말! 앵무새가 막 따라한다고 그 뜻을 알고 얘기해요? 몰라요. 그런 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성경이 귀신이라 그래요. 프뉴마 다이모니언!’ 그런데 이제 이 땅에 성경이 오셨어요. 우리는 이 광야 교회에서, 말씀의 비를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거요. 지금이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이고, 더하면 몇? 3년 반, 마흔두 달의 기간이고, 1260일의 기간이고, 3년 반의 기간인 거예요. 요한묵시록에 그렇게 나누어 나오지만, 다 똑같은 거예요. 말씀이 떨어지는데, 그 말씀이 다 곡해가 되어서, 기근인 상태! 그런데 그 중에 레마로 알아듣는 이들이 있어요. 그래서 엘리야의 기근의 이야기 중간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거요. 그 과부는 밀가루 한 붐을 가진 완전히 텅 비어진, 털린 여자예요. 이제 그 밀가루 한 줌 먹으면 죽어요. 자기는 이거 먹고 죽음으로 들어 가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죽는 구나 이제 내 존재라는 게 이거구나!’라고 알고 있는데, 거기에 하느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랬더니 그 기근의 와중에, 그녀의 집에만 음식이 차고 넘치죠? 기름과 밀가루가! 흉년과 풍년이 극명하게 대조가 되고 있는 거예요. 세상 모두가 흉년, 기근인데, 어떤 집에만 풍년이 일어나요.

(열왕기상 17:14) 14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가 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릴 때까지 뒤주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병에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제, 마지막에, 완료된 하느님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제는 은혜로 가득 차게 되는 하느님나라가 오기 전에도, 이미 그렇게 말씀으로, 은혜의 비로 살아나는 이가 있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인에게 마지막 갖고 있던 밀가루 뺏겨야 돼요. 하느님에게! 그건 죽음이에요. ‘이거 먹고 나면, 나 죽습니다.’했는데, 고걸 뺏으면 어떻게 해요? 그게 죽이는 거예요. 네가 죽어야 풍년이 온다.’는 뜻이에요. 엘리야가 무슨 밀가루 떡에 환장을 해서 고걸 빼앗아 먹은 게 아니라는 거요. 죽음인 거예요. 죽음!

성도는 예수의 의해 살아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의 생명의 근거는 다 뺏겨야 되는 거예요. 이게 너 살려주는 거 아니야!’를 가르쳐주기 위해, 밀가루 그 한 줌을 빼앗아 버린다니까요. 그래서 그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요. 십자가죠. 그 진리의 현실을 그 여자가 정확히 깨달아 알게 돼요.

(열왕기상 17:24) 24 그러자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십니다. 어른께서 전하신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 알았읍니다.'

이 이야기가 진리의 말씀의 이야기란 말예요. 이건요! ‘, 이게, 이 모든 게,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게, 이 상황, 이 그림이 다. 요게 진리의 말씀! 복음! 요게 십자가군요!’ 알았다는 거요. 이 여자가! 이렇게 위의 물, 은혜의 비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켜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막 한 가운데서, 고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언약의 우물이니까 살리는 물이란 말예요. 그건! 물론 상징적인 거예요.

그리고는 거기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짓는데, 브엘세바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일곱 우물이에요. ‘세바가 칠이니까. 그런데 잘 보시면, 그 이야기 속에 우물이 하나 밖에 안 나와요. 일곱 개 우물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하는 게 아니라, 우물 하나 밖에 없어요.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바를 칠로 해석하면 안 돼요. 아라비아 숫자가 없던 때였다니까요. 세바라는 단어의 칠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건, 훨씬 다음이란 말예요.

따라서 우리는, ‘브엘세바를 일곱 우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돼요. 거기서 일곱이라고 번역이 된 세바, ‘약속, 언약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칠을 언약의 수! 안식의 수! 진리의 수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의역을 하면, 언약의 말씀! 진리의 말씀! 언약의 우물! 진리의 우물을 상징하는 개념인 거예요. 하느님께서 창세기 1장 창조사건 때, 몇 번 말씀을 하세요? 일곱 번 말씀하시죠? ‘진리라는 뜻이에요. 언약의 말씀이에요. 창조사건은 언약의 성취란 말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교회를 완성하시면서, ‘가상 칠언일곱 번 말하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하느님의 은혜로, 일곱 날 돌고, 무너지는 거예요. 나아만이 일곱 번 흐르는 물에 들어가서, 언약으로 문둥병이 낫는 거란 말예요. 여섯 번 들어가면 안 낫게 해줘요? 그런 말 아니란 말예요. 묵시록에도 칠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죠? 다 언약의 숫자인 거예요. 안식의 숫자란 말예요.

아브라함이 그 우물을 두고 언약을 한 그 장소를, ‘브엘세바라고 이름 지었다는 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그 이스마엘, 그리고 그게 은혜와 율법이잖아요?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그 은혜와 그 율법 사건을 통과하고 나니까, ! 진리가 무엇인지, 하느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를 그리기 위해 거기에 브엘세바,’ 언약의 개념이 들어가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 약속의 후손을 약속하실 때, 일곱 번 하세요. 세어 보시면. 언약의 말이란 말예요. 진리는, 하느님께서 우물을 파, 하늘로부터 흘려주는 거지, 인간이 그 물을 창작하거나, 추론해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게 악한말, 프뉴마 다이모니온이에요. 그리고 그러한 말을 그렇게, 하느님이 주신 말을 곡해를 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는 걸, ‘하느님의 말을 빼앗았다.’ 그러는 거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너 왜 우리 우물 빼앗아 가니?’라는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은 정작 내가 언제 뺏아 갔어? 난 금시 초문이야!’ 그래요.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 믿는 줄 알고 있어요. 하느님의 말을 도둑질해가는 건데. 그런데 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다라고 우기고 있는 거요. 그게 우물, 하늘로부터 흘려주는 언약의 말을 빼앗는 건데.

그 때 아브라함이 일곱 어린 양을, 언약의 장소에 등장 시켜요. 일곱은 세바, 언약이라 그랬죠? 그럼 일곱 어린 양은 뭐예요? 언약의 어린 양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라고 말을 해요. 하느님의 우물, 진리의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어린 양으로만, 증거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라고 하고는, 어린 양, 언약의 양을 거기다 갖다 들이대는 거란 말입니다. 거기에서 우물을 도둑질 했던 아비멜렉에게, 어떤 언약이 주어져요?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죠? 하느님의 말을 도둑질한 자가,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랬을 때, 언약의 어린 양을 증거로 하여, ‘, 너 안 버려!’ 이게 복음의 이야기란 말예요. 괜히 그 이야기가 거기에 들어간 게 아니라! 그게 브엘세바의 아비멜렉 이야기예요. 창세기 21장이 어떻게 끝나는 건지 보세요.

(창세기 21:33)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그 곳에서 영원하신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여기서 부르다라고 변역이 된 카라, ‘받아들이다, 초청하다는 뜻이고, 이름이라고 번역이 된 , , , 야벳의 그 셈 이름이에요. , 말씀!’ 함이 어둠이거든요. ! 말씀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33절은, ‘아브라함이 영생이라는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초청했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무방한 거예요. 율법과 은혜의 사건! 이사악과 이스마엘의 사건을 통과하여, 진리를 비로소 그가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브라함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말로, 21장이 끝나요.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여러분?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계속 베텔로 몰아가요. ‘베텔에서 나가지 마!’ 베텔이 뭐예요? 베들레헴이 떡 집이듯이, 베텔은 하느님의 집이에요. 아래에 있는 하느님의 집, 옛 성전, 율법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진리를 알고, 진리가 되자, 영생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 약속의 후손은 이렇게 오는 거고,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 알게 되자, 그가 진리가 되었으므로, 그가 있는 곳이 베텔이 되는 거요. 그래서 블레셋에서 머물게 놔둬 버리는 거요. 베텔에서 드디어 자유롭게 풀려나는 거요. 옛 성전에서! 그게 아브라함의 죽임이에요. 사실은!

이스마엘이라는 큰 아들, 율법에게 묶여 있다가, 은혜의 아들, 약속의 후손, 예수를 모형하는 이사악에 의해 살아나는 거예요. 그건 이스마엘 아래에 갇혀 있던 아브라함의 죽음이자, 아들 안에서 살아나는 아브라함의 부활인 거란 말예요. 그것이!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하갈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율법과 종으로 이야기하고, 사라와 이사악의 이야기를 자유 하는 자유자! 자유로 설명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린 양을 핵심으로 한 언약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진리를 알고 죽었다는 말인데, 그가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죽는 이야기를, 22장에서 이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사악이기도 하지만, 예수이기도 하죠? 창세기 315절에서 약속된, 언약된 후손이니까. 그 이삭은 예수의 모형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를 낳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마른 장작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들이 이사악을 낳아요. 약속의 후손을 낳는데, 예수!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가면 여자, 교회가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아들, 예수를 낳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구의 모형, 믿음의 조상이니까! 우리의 모형! 예수는 누구의 아들? 여러분의 아들이라니까요.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속으로 (생각하시겠죠?)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면서요?

그러면 그 예수는 누구의 아들이에요? 여러분의 아들, 교회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22장에서,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죽여라 그런다니까요. 잘 키워서 네가 사용해 먹어라! 그러지 않아요. 죽여라! 그래요.

여러분, 죽음이라는 말, 히브리어 죽음이 무트 타 무트 무트 그걸 파자하면 진리, 이루었다, 완성이란 뜻이에요. 진리가 이루어지면 죽음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이게 죽음이란 단어예요. 그리고 죽으시는 거예요. ‘무트, 다 이루었다.’ 진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죽으시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그게 곧 사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하시는 거요. 그게 영생이란 말예요.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래서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이어지는 거예요. 아들을 죽이는 거예요. 아들 안에서 아브라함이 죽는 게 복음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고 통곡할 게 아니라, ‘! 거기서 그 분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거구나! 아니 내가 끌고 가서 죽여야 되는 거구나.무슨 말인지 조금 있으면 이해할 거예요. 그걸 알아야지! 나와 상관없는 어떤 이가 죽은 걸 보고 슬퍼하는 게 아니란 말예요.

, 여러분, 아브라함은 이제 모리아 산에서, 하느님의 그 언약 성취의 조력자로 나서려했던 자신의 모든 열심을, 다 내려놔요. 그 전까지는? 하느님이 약속의 후손을 주신다고 했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씨를 가진 자기가 살아야 되니까! 마누라까지 팔아먹고 정말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건 하느님을 도우려고 한 거예요. 사람이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 이제는 이 아들이 죽으면 언약의 후손! 약속의 후손이 없어져버리잖아요?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어떻게 많아지냐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를 죽인다고 하는 건, ‘이건 내가 도울 일이 아니구나!’ 바로 그 전 장에서, ‘그건 은혜로 완료되는 것이구나!’를 알자, 그 약속의 후손을 죽이는 거예요. 서슴없이 내가 섬기던 예수가 나와 함께 죽고, 내가 그 안에서 살아나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성당(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섬김의 대상으로만 놓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거예요. 그들은 반드시 역사 속 가 내놓아야 하는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어요. 예수가 내 밖에 섬김의 대상으로 존재하면, 그들은 그 행위에 묶일 수밖에 없다니까요. 내가 섬김의 대상에게 뭔가 내놓아야 돼요. ‘섬김이라고 하잖아요? 율법으로 오신 예수! 죄인의 대표로 오신 예수는, 내가 죽여야 하는 존재지, 내가 섬기는 대상이 아니란 말예요. 조금 어렵지만, 인내심을 갖고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 모세가 하느님께, ‘누가 너를 보냈느냐? 라고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가 누가 보냈다고 해야 돼요?’ 그랬을 때 하느님이 뭐라 그랬죠? ’. ‘I am who I am.’ 이것은 나야, .’ 그랬어요. 나라고 자주 말씀하시죠? 에고 에이미그건 예요. 그런데 모세 당시에는 라는 단어나 개념이 없었어요. 굳이 나를 가리킬 땐, ‘이 사람이라고 썼단 말예요. ‘라는 단어가 없었다니까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갑자기 라는 단어로, 모세의 상식을 치고 들어오시는 거요. 모세가 그랬겠죠. ‘가 뭐야? ‘!’ 지금 하느님은 새로운 를 제시하시는 거예요. 그 상태에서 모세가,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갖고, 말씀을 담은 그릇으로, 애굽으로 갔어요. 하느님의 말을 전하러! 진리의 말씀을 담고, 진리로 간 거예요. 모세는!

그들이 물었습니다. , 누가 보내서 왔어?’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겠어요? !’ 그랬단 말예요. (하하하) 그런데 그 가 누구였어요? 하느님이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그랬어요? 네가 하느님이냐?’ 이런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출될 게 뻔한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가고 싶었겠느냐고? 거길! 그런데 하느님은 기어코 라는 이름을 주어서, 모세를 보내요.

잘 보세요. 라는 건,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그 연합의 상태를 진짜 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에게 붙들려서, 하느님의 말씀! 진리로 채워진 상태가 진짜 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은 이후의 성도는, 하느님과 연합한 상태의, 새로운 란 말이에요. 성도는.

따라서 예수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그 속으로, ‘예수라는, ‘그리스도라는 속으로 끌어들인 찬송의 대상이란 말예요. 찬송은 누림이라니까요. 그건 자유란 말예요. 찬송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찬송! 자유! 얽어매는 것이 없는 상태! 반면에 섬김이라는 건, 행위를 요구하게 되고, 짐이 되며, 부담스럽고 무서워요. 그 섬김의 대상! 종교행위의 대상이 되는 그 예수를 죽여라!가 모리아산 22장의 이야기란 말예요.

 

(요한복음 16:16)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앞의 는 십자가 이전의 예수예요. 그 예수는 죽어요. 아니 죽어야 돼요. 그래서 레마로 인식하지 못하게 놔두시고, 그들이 직접 그 예수를 죽이게 놔두시는 거예요. 는 죽어야 돼요.

왜 예수님께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하는 베드로에게, ‘넌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마태복음 26장이나 마르코복음 14장에 나오잖아요? 예수님 세상 사람들 다 버려도 저는 주님 버리지 않습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이 네가 오늘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거야.’ 그래요, 그게 디포넌트 동사인데, 중간 디포거든요! 그게 재귀적 의미예요. 강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란 뜻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아녜요. 저는 목숨 걸고 지킬거예요.’ 하고 또 다시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 전에 예수님이 분명히, 그 말을 한 베드로에게, 이 사탄아!’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끝까지 사탄의 노릇을 하는 거예요. 마귀! 그게 악한 말이에요. 오해된 말이라니까요. ‘나는 예수님을 섬길 거예요. 예수님을 붙들 거예요. 죽으면 안 돼요.’라고 하는 데, 예수님은 반드시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해야 돼. 그래야 살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베드로가 한 번 부인했는데, 또 다시 이를 만들어서 또 부인하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부인하게끔 만드시는 거예요. 상황을. 그래야 교회의 기초인 얘가 살아나야 되거든요. 반석,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했기 때문에, 얘는 그 예수를 부인하고 부정해야, 옛 성전에서 재판받고 있는 율법인 예수를 부정해야, 섬김의 그 대상인 그 예수를 부정해야, 죽여야, 살아나기 때문에, 하느님이 굳이 베드로를 그리로 끌고 들어가는 거예요. 성전 안으로. 아무도 못 들어가는데!

그리고는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하자, 그를 바라보시는 거예요. 그래, 내 새끼 그래야 네가 사는 거야!’ 여러분 이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렇게 십자가 이전의 예수인, 나는 죽어야 돼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타나는 또 다른 가 있잖아요? 그 때는 본다 그러죠? 성령이 내려오시기 때문에! 이제 예수 안에서 내가 살았고, 예수와 내가 한 지체로 연합이 되었다는 걸, 말씀이, 진리의 영이 나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가 보이는 거예요. ‘레마! 이게 그 이야기예요. 조금 있으면 나 죽을 거니까 못 볼 거고, 조금 있으면 나 도로 살아날 거다.’ 이 말이 아니라니까요. ! ! 여러분 안에 지금 함께 있는 가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요한복음 8:31-40) 31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32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데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따졌다.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35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수 있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에게 자유를 준다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37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너희에게 내 말을 받아 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일러 준 대로 하고 있다.' (진리는 말을 하지만, 마귀 새끼들은 로고스를 듣고 행한다니까요.) 39 그들은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며 예수께 대들었다. 예수께서 '만일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대로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아브라함이 뭐 했는지 봤잖아요? 아들 안에서 죽었다니까요. 그 약속의 후손으로 온 아들을 죽였다고요. 아브라함이! 그 일이 십자가에서 완료되어 일어났다는 것을 안 것이, 그 아들을 죽인 거란 말예요. 창세기 22장이 그 이야기잖아요. 모리아산 이야기!

자 이렇게, 주님은 여기에서 말하다행하다,’ ‘호라오, 랄레오, 또 포이에요이런 단어들을 대조하여 사용하고 계세요. 여기에서 나는 본 것을 말하다에서 보다, 호라오, 진리를 깨닫는 거예요. 눈으로 보는 거라기보다는, 진리로 깨닫는 거! 진리로 깨닫는 자는 진리를 말하다.

랄레오전파하다예요. 당연히 진리가 된 자는 이게 향기가 되어서, 향기를 막는다고, 이게 막히지 않잖아요? ‘전파, 랄레오.’ 진리의 전파자가 되고,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그러죠? 여기에서. 너희 아비 누구? 마귀! 마귀의 말! ‘다이모니온악한 말은 행하느니라.’

그 마귀가 행하게 하는 그 포이에오는 창조하다란 뜻도 있어요. 마귀의 말은, 인간을 창조주의 자리로 부추겨 올린다는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처럼의 자리, 산악과의 자리로 밀어 올린다는 거요. 그게 마귀의 행사(行事)예요. 그런 자들은 진리를 말하는 예수를, 죽이려고 하죠?라는 육을 품고 있는, 그 율법의 예수를 죽여야, 로 살아날 수 있는 건데, 를 죽이지 못하면, 절대로 야훼이레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40절이,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거 죽였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는 그걸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뭐예요? 그렇게 해서 가 되는, 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죽이려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도륙사건이라 그랬잖아요? 그게 살인하지 말라!’의 진의라 그랬잖아요? 아브라함은 육적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 안에 나를 도륙하는 행위 안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21장에서, 진리와 연합된 가 되어서 율법을 타고 앉은 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는 말예요. 그게 사는 거예요.

 

여러분 개는, 개다워야 되는 거고. 소는, 소다워야 되는 거예요. 개가 개처럼 산다고 감옥에 보냅니까? 여러분 개가 전봇대에다 오줌 쌌다고 , 너 임마, 도덕과 윤리가 있지. 어떻게 이렇게 길가의 전봇대에다 함부로 소변을 보고 그러니? 적어도 다리는 올리지 말아야지 그건 굉장히 음란한 행위란다.’ 이렇게 가르쳐야 돼요? 개에게? 개가 개답지 못하고, 옷 챙겨 입고 구두 신고 주인의 밥상에 앉아 겸상을 하면, ‘공포영화, 호러무비(horror movie)’ 되는 거예요.

소를 남의 배추 밭에 묶어 놓고 오면, 그 소가 배추 잎 안 뜯어 먹을까요? 소이기 때문에 뜯어 먹어요. 그런데 그 소에게, ‘너 어떻게 남의 것을 그렇게 함부로 먹니?’ 소니까 먹는 다니까요. 그거 뜯어 먹었다고 감옥에 보낼까요? 지옥 보내요? 개나 소보고 사람다워지라고 하는 거! 그것과, 사람에게 , 사람처럼 살지 말고, 없음처럼 살지 말고 신처럼 살아라, 율법 지켜라!’라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거예요.

율법은 단순히, 그 표피적 세목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 생명의 이야기란 말예요. 그건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느님만이 창조할 수 있는, 창조주의 창조능력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이 연합의 언어로 예수님이 그 율법을 설명해 준 거란 말예요.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그걸 지키라고 하는 건, 인간에게 신을 흉내 내라는 거 아녜요? 그게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 따먹은 아담 되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게 뱀의 소리라니까요. 아이 답답해.

 

여러분 하느님의 선과 악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선악구조로 정의해 놓은 선과 악과 많이 달라요. 하느님이 다말에게, ‘, 시아버지에게 창녀로 변장하고 가서 시아버지와 자라. 그리고 애도 낳아.’ 이거는 여러분 정말 무슨 19금 삼류 영화소재로도 못 쓰는 거예요. 이거는요! 그런데 그걸 ()’라 그래요. 하느님이!

아말렉에게 가서 애기까지, 씨를 다 말려, 다 죽여 버려. 살인교사인데. 성경은 그걸 이라고 해요. 여러분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개념은, 그 분 자체가 분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유독 인간만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판단을 하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마음은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내용물을 살펴보면 선, 악이에요. 딱 요렇게 반으로 나눠져 있어요. 그래서 할까 말까? 맞나, 틀리나? 이걸로 항상 선택하잖아요, 여러분도? 이게 선악과 먹은 마음이라니까요. 그래서 항상 그걸 규명해야 돼. 사람들은. 둘이기 때문에!

그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 걸, 죄와 악이라 그래요. 그래서 호세아도, 두 마음을 품은 게 죄라 그러잖아요? 야고보도 그러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잖아요? 그게 선·악이라는 그 선악구조 속에서의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인간들의 마음에 생래적으로 담겨 있는 그 선, 악이라는 마음! 그게 죄예요. 악이에요. 그렇다면 선악과라는 게 뭔가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2:9) 9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자칼, 신랑,’ 여기엔 이쉬, 잇솨’. 남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자칼, 네케바다른 단어를 써요. 그 남자와 여자를,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들 때, 그 때는 신랑, 남편, 신부, 아내 요런 뜻이거든요. 그 사람, 즉 남자 자칼, 신랑 안에 신부, 함몰되어 사람이 된, 그건 하나예요. 하나! 그래서 사람이란 단어를 단수로 쓴다 말예요.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는데, ‘사람그래요. 단수로 써요. 하나라니까요.

고 사람에게 에덴동산을 주세요. 그리고는 거기다 나무를 하나 심으세요. ‘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라고 했을 때 그 나무가 단수예요. 한 나무라니까요. ‘나무들이 아니란 말예요. 한 나무!

그런데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면, 보기에 좋고 하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이기도 해요. 맛있는 열매라는 건, 먹어야 선이 되는 나무! 먹어야 생명이 되는 나무! 이런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거죠. 뭐죠? 한 나무가, 두 나무처럼 묘사가 되고 있는 거예요. 지금요. 그런데 그 나무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나무가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나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이,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되기도 하지만, 생명의 말씀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말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혼인 서약서이기도 한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게 이혼증서가 된다니깐요.

(고린도후서 2:15-17) 15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지만 16 멸망당할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되고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향기의 구실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17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파는 잡상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하느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진리가 전해지는 거요. 뭘 섞지 않고 진리를 전했어요. 말씀을 전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죽이는 말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살리는 말이 되더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는 선악과 열매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나무 열매가 되더라! 라고 이야기한다 말예요.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이거는 먹고, 이거는 먹지 마!’라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에 의해, 어떤 놈은 살아나는데, 어떤 놈은 죽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생명나무 열매는, 성소에서 흐르는, 넘쳐나는 물에 의해, 나중에 맺혀요.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죠? 고걸 먹어야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생명나무 열매란 말예요. 그리고 예언서나 구약에 보면, 열매가 익을 때 따 먹어라 그러죠?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그 한 나무에 선악과 열매는 분명히 있었어요.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으니까. 생명나무 열매는 없었어요! 안 보였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인간은 보이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이 땅에서 율법으로 말씀으로 보는 거요. 생명나무 열매는 안 보였어요. 없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열렸다니까요.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그 선악과 열매는 절대 따먹지 말라 그러시고, 아직 열리지도 않은 생명나무열매는 반드시 먹어라 그래요. 그러면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예요.

(창세기 2:16-17)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16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아칼먹다라는 단어가, 절대형으로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반드시 먹어라 예요. ‘먹어라! 먹어라!’ 절대형으로 두 번 반복해서 나와요. 그리고 여기에 무엇이든지라고 번역이 된 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을 해야 한다라는 의미이지, ‘여러 가지 종류라는 뜻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요.

앞에서 나무가 단수, 하나로 나왔는데, 무슨 각종 나무냐고요? ‘반드시 먹어라!’예요. 생명을 주는 열매는 반드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 그런데 생명을 주는 열매는 아직 익지도 않았어요. 첫 열매가 익어서 추수될 때까지는 아무도 못 먹어요. 그렇다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매는 선악과 열매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보기에도 아름답네요. 당연히 먹습니다. 그건 여러분에게 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리고 어디에 숨어요? 나무는 하나 밖에 없다 그랬어요. 나무 뒤에 숨었어요. 선악과 뒤에 숨어요. 인간은,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반드시 율법 뒤로 숨어요. 반드시!

하느님이 거기로 찾아가셔서, 창세기 315절부터 얘야 그 선악과가 뭔지 아니?’라고 가르쳐 주시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 이게 선악과예요? 이게 죄예요?’ 라고 알게 되면, 이게 바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선 반드시 선악과 열매를 먹어야 되는 거요.

의인은 다른 게 아녜요.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 아는 걸, ‘()’라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고, 그 선악과가, 인간을 어떠한 존재로 만드는지를 알고 예수와 함께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와 연합된 나! 그 아들을 죽여 버리고, 하느님이 살리는 아들로 창조되는 거란 말예요. 따라서 생명나무 열매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에서는, 때려 죽여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바꿔 말해서, 여러분이 죄를 모르면, 절대 생명이 뭔지, 의가 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죄라는 행위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것들을 통해 진짜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가, ‘우리가 야훼를 알자! 힘써 야훼를 알자!’라고 하는 거예요. 알아야 생명인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하느님의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거요. 그래야 생명(生命)이에요. 그걸 아는 거요. 그걸 알게 되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거라니까요. 그게! 여러분 그걸 알았죠? 그러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거예요. 그거 언제 먹나 기다리지 마세요. 그게 산거라니까요. 그저 그리스도교를 관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안 돼요. 표피적 문자로만 알려고 하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아무 것도 모르는 거예요. 도대체 그놈의 선악과는 왜 만들어서, 그리고 그 놈은 왜 따먹어서. 처음에는 그 놈이 아니었죠. 따라서 여러분은 반드시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구원을 받은 사람도 죄 아래에 놔두시는 거예요. 그게 옳다는 게 아녜요. 그걸 통하여, 선악과가 뭔지, 죄가 뭔지를 알게 해 주세요. 그 때 여러분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생명의 열매라는 건, 진리의 말씀인 거예요. 그걸 알면, 생명의 열매를 먹은 거란 말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법으로 보고, 사람다움을 성취하는 도구로 보게 되면, 그는 선악과를 먹고, ‘무트 타 무트의 세계! ‘정녕 죽으리라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자인 거고! 그 말씀을 법으로 따먹고서는, 모든 인간은 육을 입고 오기 때문에! 처음엔 다 법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던지면, 누구도!

그렇게, ‘이건 절대 먹으면 안 된 다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 허락하신 거구나.’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 그걸 믿음이라고,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증거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나무 열매는 안 보였다니깐요. 뭐 얘기를 하면서도 이걸 이해하라고 하는 건지, 교회를 나가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귀 있는 이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하느님에게 있어서,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하나였단 말예요. 그것처럼, 성도에게 있어서도,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 나무는 하나인 거예요. 반드시 먹어야 하는 생명나무 열매는 선악과를 통과해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란 말예요. 그 때 진짜 생명의 삶을 살 수가 있다니까요.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그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은 자에게, ‘이제 진리가 됐으니까. 아 이거구나. 이게 자유구나. 이게 복음이구나!’ 했을 때, 그에게서 그 진리의 말! 이게 열매라는 단어와 똑 같은 단어예요. 말이 나오겠죠? 이게 성도가 맺는 열매예요. 그것이! 뭐 도덕의 열매, 윤리의 열매, 선행의 열매, 이게 아니라! 그 진리의 말이 나와 누가 듣고, ‘오 그거야? 그게 복음이야? 우리는 죽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은혜로 산거야!’하고 누군가가 살아날 때, 내 입에서 생명나무 열매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열매가 열려 그에게 전해지는 거예요. 그걸 전도라고 하는 거요.

예수님께서 그 열매로 그가 무슨 나무인지 안다 그랬잖아요? 여러분이 생명나무 열매, 그 말을 맺으면, 말이 열매라고 했으니까. 여러분은 예수라는 생명나무예요. 그런데 프뉴마 다이모니온귀신의 말, 이걸 내 놓고 있다면, 여러분은 선악과예요. 그냥! 거기서 선악의 구조 속에 갇혀서 여전히 선악과 열매만 맺는 죽은 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가짜 열매 맺는 자!

여러분은 정말 하느님과 연합되어서, ‘I am who I am,’ ‘가 되어 계세요? 아니면 여전히 불안해서, 좀처럼 뭘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 하는 너희로 머물고 계십니까? 주님은 분명히 둘로 갈랐어요. ‘너희!’ 그게 이혼한 자들이에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의 예수! 그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랬죠? 그리스도예요. 여러분이. 기름 부음 받은 자, 성령 받은 자, 생명나무 실과를 주렁주렁 맺어 다른 이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진리가 된 자! 그걸 아는 사람들이 막 산다고요? 데리고 오세요. 그 사람. 제발 좀. 그럼 이제 막 살까? 이게 진짜 깨달은 거겠냐고요?

이 지구의 생명은 태양에 달려 있죠? 태양에 의해 지구는 끌려 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태양이, 일 초에 400만 톤씩 죽어가는 거 아세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태양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1초에 400만 톤씩 태양은 죽어요. 폭발한다고요. 그런데 태양이 융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갈 수록 커져요. 400만 톤씩 커지는 거예요. 죽으면 죽을수록!

이 태양이 죽어간다는 건, 그 태양이 생명을 쥐고 있는 지구는, 반드시 죽는다는 얘기죠? 태양이 그렇게 지어졌다니까요. 1초에 어김없이 400만 톤씩 죽어가요. 그런데 점점 켜져. 그러면, 이 태양이 점점 커지면서, 지구와 가까워지면, 여기는 어떻게 된다? 불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로 멸망한다고 하는데, 이 메카니즘을 보시란 말예요.

빛이신 하느님이, 죽어요. 자기를 비워, 우리를 살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살리느냐 하면, 태양이 점점 커지면서, 이것들을 먹어서 태양화 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태양은 죽어가는 건데, 그 안에 죽어서 들어간 자들이, 태양으로 사는, 메카니즘, 원리란 말입니다. 이것이!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죽음을, 그 분이 자기를 비워 나를 살렸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의 성도는, 그 하느님의 죽음이, 나를 삼켜야, 내가 하느님으로 산다는 걸 아는 거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힘이 드느냐 하면, 태양이 지구를 불태우는 것만큼 뜨거워요. 그래서 불같은 시련이라고 하는 거요. 신앙생활을 통해, 그렇게 하느님이라는, 빛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건, 뜨거운 거예요. 그래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통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거예요. ‘죽어야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신 이 삶이 옳은 거예요. 힘들죠. 어렵지 않습니까? ‘! 난 행복해 죽겠어.’ 이런 사람 있어요? 여기? ‘예수를 믿고 나니까, 행복해 미칠 것 같아! 단 한 순간도 슬퍼진 적이 없어. 우울한 적이 없어!’ 이런 사람, 그 사람은요! 집중관리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힘들어요. 많이 힘들어요. 그래서 차라리, ‘하느님, 차라리 날 좀 떠나 주세요. 너무 뜨겁습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 입에서 나와야 돼요. 아니면, 여러분은 복음을 삶으로 산 분이 아녜요. 우리 예수님도 , 뜨거!’ 그러고 가셨는데, 우리가 뭔데, 날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면서 이 세상을 사냐고? 예수님이 아 뜨거!’ 그러고 가셨다니까요. 십자가 위에서. 그게 무트예요.

진리가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질수록, 여러분은 점점 고립(孤立)될 것이고, 점점 공격을 받을 거예요. 그러나 그게 사는 길이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까지의 삶이, 눈 한 번 꿈쩍했더니 여기 왔죠? 한 번 더 꿈쩍하면 가는 거예요. 그렇게 길지 않아요. 잘 견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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