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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0.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0 조회수1,869 추천수5 반대(0) 신고

(서울대교구 순례지, 용산 성직자묘지 성당 내부)

2020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제1독서 갈라 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복음 루카 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저는 소설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데 소설 중에서도 단편보다는

장편을 훨씬 좋아하고 재미있어합니다.

단편소설은 특별한 사건도 없고

얘기를 하다가 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에 반해 장편소설은 이야기 중심이고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해보니, 문득

우리의 삶도 단편소설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별한

사건도 없고, 문제의 해결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과의 갈등도

흐지부지하게 끝나곤 합니다.

정말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면

10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삶이 특별한 스토리를 가지고 독자를

 이끄는 장편소설 같을까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어떤 일에 새로운

사건 몇 가지만 붙었을 뿐입니다.

 또 명확한 해결을 원하지만,

그런 일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삶도 바로 나의 삶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편소설의 재미는

세세한 감정들을 바라볼 수 있을 때입니다.

소소한 행복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비로소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힘들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다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자동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대단한 결말을 가져오는

행복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던

성모님은 분명히 복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십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성모님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님을

배었고, 젖을 먹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의

행복은 대단한 결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편소설과 같은 작은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굳은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어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 3,26)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우리가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메리 노리스)

소득 격차

불평등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불평등은 인구 대다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1970년대 초기 연구에서부터

소득 격차가 큰 나라일수록

폭력 사건이 더 자주 발생하고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치안이 불안하다는

나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 국민 간의 소득 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7~80년대만 해도 도둑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카페에 노트북을 놔둬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정직합니다.
물론 지금도 소득 격차가

 적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옛날처럼 아주 잘 살고,

 아주 많이 못사는 식의

격차가 아니므로 점점

범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소득 격차가 큰 나라는 강도가 많습니다.

강도의 타겟은 누구일까요? 부유하고

소위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평등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사랑만을 강조하신 주님의

모습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순례지, 용산 성직자 묘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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