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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묵상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1 조회수1,51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11일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묵상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이사야 25,6-10ㄱ)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8)

 

'죽음'에 해당하는 '함마웨트'(hammaweth) 죄의 결과에서 오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무트'(muth)에서 유래한 명사로서(창세2,17), 육체적 죽음 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 모두 포괄한다.

영적 죽음은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상태로서(에페4,18), 생존시에도 하느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없으며죽어서는 하느님의 의노의 심판에 처해지는 운명을 나타낸다.

 

죄를 범함으로 이 땅에 들어온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이러한 영적 죽음이 지배하는 한, 완전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주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마련하여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하기 전에 죽음을 완전히 없해 버리실 것이다.

 

한편 '없애 버리시리라'에 해당하는 '빨라'(balla)의 원형 '빨라으'(ballah)는 일반적으로 음식물 따위를 목구멍 아래로 삼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창세41,7; 탈출7,12; 민수16,30; 욥기20,15).

이 죄많은 세상에서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1베드5,8), 장차 다가온 종말의 날에 주님께서 생명의 원수인 죽음을 삼켜 버리실 것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강조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어 있으며, 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완료 시제는 과거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prophetic perfect)로서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그 실현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한다.

한편 이러한 죽음의 파멸에 대해서는 묵시록 21장 4절에 확정적이고 선명하게 예언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고'

 

'눈물'에 해당하는 '띠므아'(dimah)는 슬픔과 애도의 문맥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되면, 주 하느님께서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흘렸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

 

이것은 주 하느님의 위로가 넘칠 것을 의미하는데, 그의 위로가 세상에서 흘렸던 모든 눈물과 당했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넘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풍성하여 어머니가 바깥에서 다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자녀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듯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난당한 자녀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예언은 묵시록 7장 17절, 21장 4절에서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다.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본문은 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결코 단죄를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되는 축복을 받을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주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여 범죄한 대가로 인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설 때 단죄를 당해 그 수치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구속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 대전에 설 때에 세상에서 연약하여 지었던 죄로 인해 결코 단죄를 당하거나 수치를 입지 않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과 관계된 진리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신 백성'에 해당하는 '암모'(ammo)는 구약 시대에 오직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게만 한정하여 주로 사용하던 명사 '암'(am)에 3인칭 소유격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을 가진 자들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로마8,14~17).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문은 이사야 25장 6~8절의 예언이 이사야 예언자 자신이 지어낸 허탈한 희망의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로부터 비롯된 계시의 말씀임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예언이 신적 권위를 지녔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은 이유의 의미를 지닌 접속사 '키'(ki; 왜냐하면)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계시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위의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연중 제28주일 복음(마태22,1~14)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려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2.5.10~12)

 

루카 복음 21장 23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정화하시고 가르침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러한 일을 하는 권한에 대한 질문을 한다.

여기에 대해 21장 24~27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하신 후에 이어서 세 가지 비유를 들어 그들이 사악하고 완고한 죄악됨을 지적하신다.

 

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21,28~32),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의 비유(21,23~46), 그리고 오늘의 혼인 잔치 비유(22,1~14)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시며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셨고, 이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다시 한번 더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것에 대한 심판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22장 1~10절에서는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과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언급되고, 11~14절에서는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당한 운명이 언급되고 있다.

이 비유는 과거 유대인 중심으로 진행되던 구원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초대에 응했지만 거룩함과 의로움의 옷을 입지 않으면 종말의 날에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복합적인 주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에 비길 수 있다'에 해당하는 '호모이오테'(homoiothe; is like)는 하늘 나라에 해당하는 천국이 마치 혼인 잔치의 전반적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천국'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자기 아들을 위해 어떤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의 정경으로 구체화시켜 묘사하고 있다.

 

'혼인 잔치'로 번역된 '가무스'(gamus; a marriage; a wedding banquet)는 '가모스'(gamos)의 복수 목적격이다.

'가모스'는 '결합하다'는 뜻의 '감'(gam) 이라는 어근에서 유래하여 부부라는 새로운 결합이 이루어지는 '혼례식'을 말한다.

 

특히 복수형으로 사용될 때 이 단어는 혼례식 때 행해지는 여러 행사들을 의미하는데, 혼인 예식을 포함한 혼인 이후의 축하 순서로서 음식을 먹고 나누는 잔치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식탁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한 상에서 먹고 마심으로써 동질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졌다.

 

특히 절기에 이루어지는 식탁의 친교는 구원받은 백성이 누리는 하느님과의 친교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하고 익숙한 식탁의 친교를 실례로 들어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절에서 임금이 베푼 혼인 잔치는 이미 오기로 예정된 손님이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초대받은'으로 번역된 '케클레메누스'(keklemenus; were bidden; had been invited)는 '칼레오'(kaleo)의 과거 완료 분사이다.

 

임금은 혼인 잔치 전에 이미 몇몇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이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구약의 선민들로서 혼인 잔치로 비유되고 있는 천국 잔치에 먼저 초대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지'로 번역된 동사 '에텔론'(ethelon; they would)는 '텔로'(thelo)의 미완료 과거로서 '원하다', '좋아하다', '갈망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이 단어가 여기서는 부정어 '우크'(uk; not)와 함께 사용되어 전혀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마태오 복음사가 반복과 계속의 의미가 있는 미완료 과거로 이 동사를 기록한 이유는 하느님의 뜻에 반발하여 복음으로서의 초대를 거부하는 행위가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22장 4절에서 일차 초대에 거부한 자들에 대해 임금은 노하지 않고,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또 다시 초청한다. 이것은 인간의 거역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오래 인내하시며, 또 다시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준다.

앞에 나온 첫번째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키며, 두번째 종들은 신약의 복음 전파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22장 4절의 본문 서두에는 '보라'를 뜻하는 감탄사 '이두'(idu; behold)가 등장한다.

이것은 두번째 종들을 파견한 임금이 만반의 준비를 이미 다 갖추어 두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잔칫상'으로 번역된 '아리스톤'(ariston; banquet)은 초기 희랍어에서는 일하러 나가기전 아침 일찍 먹는 처음 음식즉 조반(the first food)를 가리켰는데, 후기 희랍어에서는 점차로

'점심'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루카11,38; 14,12).

 

'황소와 살진 짐승'에 해당하는 '호이 타우로이 무 카이 타 시티스타'(hoi tauroi mu kai ta sitista; my calves and fattened cattle)에서 황소 앞에는 남성 복수 정관사 '호이'(hoi)와 살진 짐승 앞에는 중성 복수 정관사'타'(ta)가 쓰였는데, 여러 마리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연 설명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판타 헤토이마'; panta hetoima; everything is ready; all things are ready)라는 말을 첨가해서, 혼인 잔치의 음식은 큰 잔치를 치르기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만큼 천국의 잔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최대의 만족을 주는 풍성한 잔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22장 5절에는 임금의 잔치 초대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과 이유들이 나온다.

여기서 '아랑곳하지 않고'로 번역된 '아멜레산테스'(amelesantes; they paid no attention; they maid light of it)는 '보살피지 않다', '무시하다'는 뜻을 가진 '아멜레오'(ameleo)의 과거 분사이다.

 

이렇게 임금의 거듭된 간절한 초대 자체를 아예 무시하며 전혀 반응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그들에게 부여된 놀라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거절은 22장 7절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비참한 멸망을 가져온다.

 

당시 그들의 관심사는 임금의 초대보다는 밭과 장사였다. '장사'로 번역된 '엠포리안'(emporian; business; merchandise)은 '엠포리아'(emporia)의 목적격으로서 규모가 크지 않은 '장사', '상업', '사업'을 말한다.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의 소유, 즉 현실 문제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본문과 유사한 구절인 루카 복음 14장 19절과 20절에는 잔치의 초대를 거부한 이유가 밭을 산 것외에도 겨릿소 다섯 쌍을 사서 부려 보려고 가는 것과 장가 든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 역시 자신의 현실 문제에 얽매여 구원에로의 초청을 등한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22장 6절의 '나머지 사람들'로 번역된 '호이~로이포이'(hoi~loipoi'; the rest)는 자신의 관심을 쫓아간 두 종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새 성경은 이들이 집이나 마을에 남아 머물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장가간 사람들'을 나타내는 유대적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결혼하여 아내를 취하면, 집에 머무르면서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모든 사회적, 국가적 의무로 부터 제외되었는데(신명20,7; 24,5), 루카 복음사가가 큰 잔치의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세번째 이유가 장가갔기 때문이라고 밝히는 이유이기도 하다(루카14,15~24).

 

그런데 이 '나머지 사람들'이 임금의 종들에게 취한 태도가 '붙잡다'(사로잡다), '때리다'(능욕하다), '죽이다'라는 점점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는 세개의 동사를 사용해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구원에로의 초대를 거부하며 하느님의 예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능욕하고 살해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임금은 22장 7절에서 당장 군대를 보내어 자기 종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그래서 이제 22장 10절에서 '거리에 나가~만나는 데로' 데려오게 된다. 여기서 '거리'로 번역된 '디엑소두스'(dieksodus; main roads; street)의 원형 '디엑소도스'(dieksodos)는 '빠져 나가는 길', '출구'라는 뜻을 가진다.

 

원문의 '디엑소두스 톤 호돈'(dieksodus ton hodon; street corners)은 '통하여 나가는 길'로서 지방 도로들이 끝나는 성(城)앞의 장소를 가리킨다. 이곳은 각 지방들을 잇는 지방 도로와 성(城)으로 들어가는 길이 만나는 장소로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다.

따라서 임금이 종들을 보낸 곳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일뿐만 아니라 성(城) 밖이므로 이방인들도 있었다. 이것은 이제부터 초대받은 자의 자격은 철폐되고, 사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중에 임금의 명령에 응답하는 자는 누구나 초청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의 의미를 찾게 한다.

 

이제 22장 11절에서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등장한다. 고대 근동의 잔치에서 잔치를 연 주인은 처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잔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나타난다.

여기서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잔치가 본격화 될 것임을 보여 주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천국 잔치의 본격적 시작 시점인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예복'으로 번역된 '엔뒤마 가무'(endyma gamu; a wedding garment)는 '혼례식 때 입는 옷'을 말한다. 원래 '엔뒤마'(endyma; a garment) '겉옷'이나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옷 위에 덧입는 옷이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에는 혼주가 나누어 주는 예복을 입어야만 했다.

분명히 임금이 잔치에 합당한 옷을 나누어 주었는데도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이것은 너무나 무례하며 불성실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잔치 석상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심판의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심판의 때에 필요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갈라3,27), 본래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에 성령 충만과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갈라5,22~24; 묵시19,8).

 

이제 22장 13절에서 임금은 그를 벌하기 위해 하인들을 부른다. 여기서 '하인들'에 해당하는 '디아코노이스'(diakonois; attendants)는 '디아코노스'(diakonos)의 복수 목적격으로서 '봉사자', '시중드는 사람'을 가리킨다.

 

22장 3절에 나온 '종들'에 해당하는 '둘루스'(dulus; servants)와는 확실히 다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보내어졌던 임금의 종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상징하지만, 여기의 '하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상징한다.

 

'손과 발을 묶어서'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심판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결코 자신의 노력으로 이 심판을 돌이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깥 어둠'은 지옥을 상징하는데, 하느님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천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곳이며, 희망이 도무지 없는 곳이다.

 

또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사가가 즐겨 사용하는 것인데, 종말의 심판에 대한 애통이나 애곡을 표시할 때나, 영원한 형벌에 처한 인간의 극심한 괴로움과 완전한 절망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임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극도의 괴로움,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22장 14절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는 단언적 진술의 말씀으로 비유가 마무리된다. 이것은 재판장의 최종 선고와도 같은 확정적 말씀이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클레토이'; kletoi; called; invited)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자로서 '간선된 자' 가리킨다.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준다.

 

 


올바른 가르침만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알수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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