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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라.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1 조회수1,457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11.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라.

(로마서 6:12-14)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500년 전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에 의해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없는 껍데기 그리스도교였어요. 모든 예배(미사), 라틴어로 진행을 했고, 설교 말씀도, 교황청에서 일괄 작성해서, 각 교회로 보내주던 때였습니다. 그때 사제들은 참 편했겠어요. 설교 원고를 다 보내줬으니까.

그걸 그냥 라틴어로 줄줄 읽어주면, 신자들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앉아 있었어요. 그게 예배(미사)였습니다. 자기 나라말로 된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성찬례에 참석해서, 밀떡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일상생활 속에서, ‘내 탓이요!’를 외치면서, 선한 사람이 되어가는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말씀을 알 길이 없으니, 행위라도 내어놓아야, 마음이 좀 편할 게 아닙니까?

당시 교회가, 인간들의 행()함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했는가 하면, 인간들의 행함에 의해 천국과 지옥이 나눠질 만큼의 가치를 부여(賦與)했어요. 심지어 그것으로 지옥에 가 있는 조상도 빼낼 수 있을 만큼의, 인간의 행위는, 가치 있게 취급되었습니다. 그게 면죄부 아닙니까?

그런데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교사였으니까요. 그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리스도교는 그런 게 아니더라는 거예요. 그는 의인(義人)은 그 자신의 행위로 의()를 얻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종교개혁(宗敎改革)이라는 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믿어야 성도인 거지. 선행을 행하고, 종교행위에 열심을 부린다고,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 사람들이, 성찬례를 하면서, 공복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오늘날 루터교는 아직도 공복설을 주장합니다. 그냥 밀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밀떡과 포도주가 된다는 게, 화체설이 아닙니까?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그것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잖아요?

그리고 침례 교인들을 무수하게 핍박했죠? ‘너희들 물 그렇게 좋아하면, 물에서 죽어라!’ 그래서 1,000명 이상의 침례 교인들을 수장시켜 버렸어요. 맷돌을 목에 걸어서! 원로 교인들이요. 원로들이 주일 날 순찰을 돌아, 미사(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을, 감옥에 쳐 넣기도 했어요. 그걸 은혜라고 합니까?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오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루터와 칼빈은, 예수를 대신하는 이들이 되었고, 성경을 곡해하고 오도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이들이, 칼빈의 개신교강요에서 벗어난 말을 하는 이들은, 개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습니다. ? 그들에게는 성경보다 교리 강요가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하느님의 은혜로만 열리지만, 칼빈이 쓴 책들은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그려진 그리스도 예수! 진리가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말씀을 비판하고, 진리를, 교리를 수정해 가요.

개신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구원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라는 건, 누구든지 다 알죠? 오늘날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한 번만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것. 그까짓 거! 한 번 보자구요.

(에페소서2:8-9)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명쾌하죠?

(로마서 1:17)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원은 행위로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한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뭐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 건 뭡니까? 그냥 막연히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예수라는 분이, 내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내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새기고, 이 뇌리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 놓으면 그게 믿는 겁니까? 어떻게 믿어야 돼요?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왜 하느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왔는데도, 왜 온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안 믿었을까요? 어떻게 믿어야 돼요?

성경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었다고 하고, 부활했다고도 해요. 그걸 어떠한 방식으로 믿어야 하느냐는 거예요? 정말 여러분 그게 믿어지세요? 믿습니까? 그냥 관념으로라도 그렇게 우기고 있으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주님은, 분명히 복 있는 자는, 슬퍼할 것이라 그랬어요. 슬픔이란 단어가 팬테오,과월절이라는 단어라 그랬어요? 그리고 위로를 받다,’ 파라클레오초청받다예요. 그러니까 과월절로 초청을 받는 자가, 복 있는 자다예요. 그러니까 네가 과월절로 초청이 되어 양처럼 죽어야, 복이다.’라는 뜻이거든요. 그 말은 네가 과월절의 어린 양으로 죽은 예수가 되어 봐야, 그가 복 있는 자다!’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성도에게 위로래요. 성경이. 그렇다면, 어린 양의 과월절은, 우리가 관념으로 믿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 그 과월절로 초청이 되어, ‘파라칼레오!’ 초청이 되어 도륙당해 죽어야, 비로소 그게 내 것이 된다. 이런 말이에요. 그걸 믿는다 그래요.

그렇게 되면 다시는 내 삶 속에서, 또 다른 희생제가가 없어도 되죠? 나에게서 그것이 확실히 체휼됐으니까. 이제는 또 다른 의미의 희생제사가 없어도 된다 말예요. 그런데 그건 세상적으로 볼 때, 저주(詛呪)이지 복()이 아니잖아요? 내가 제물이 되어 죽는 게! 신약 성경이, ‘이라고 번역을 하는 마카리오스는 히브리어 바라크, 번역한 거예요. 히브리어의 복 바라크, 축복(祝福)과 저주를 동시에 가리키는 거예요. 신명기 28장에서 내가 축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둔다.’는 말씀이 나오죠? 그리짐 산에서 축복이 선언되고, 에발 산에서 저주가 선언이 되죠? 반씩 나누어서. 이걸 외치라고 한 게 복이에요. 그 자체가!

그런데 그걸 복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복이지만, ‘그게 무슨 복이야?’라는 이들에게는, 저주예요. 법은 하나라니까요. 다른 법이 있는 게 아녜요. 율법이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의 법이 되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게 생명의 법이 돼요. , 이 안에 예수가 있네. 진짜 희생제사가 여기에 들어 있네!’ 이걸 알게 되는 거니까. 그게 복()이에요. 바라크라는 단어가, 그 전체를 함의(含意)하고 있어요.

바라크를 파자하면, ‘베잇, 로쉬, 카프거든요. 이게 알지 못하는 복이라는 단어예요.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 복을!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알아져요. 이해돼요. 그 사람에게만 복이에요. 그걸 바라크라 그래요. 그런데 그 복의 실체를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면, 저주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게 복이 돼요. 저주가 무엇인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아는 게 생명이라 그랬죠? 그걸 알면 다시는 선악과 안 먹을 거 아녜요. 그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거예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나무가 단수예요. 계속 단수! 그래서 인간들에게 선악과가 먼저 주어졌던 거예요. 죽어서 사는 것! 따라서 복을 받은 이들은, 저주의 현실에서부터, 경험하여 복의 현실로 올라오게 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아무리 귀에 못이 박히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라는 말을, 듣고 외운다 해도, 그게 여러분의 일이 되어지지 않을 때, 그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해요. 그건 믿는 게 아녜요.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십자가는, 내 죽음의 인식에서, 비롯되므로 내 것이 될 수 있어요. 나에게 나의 죽음이 인식될 때, !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이구나!’라고 알게 되는 거고, 그 때, 예수와 내가, 하나로 연합이 되는 거예요. 그걸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부활(復活)이에요.

라는 존재 자체!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어떤 종류의 행위, 시도, 열정 등도, 하느님 앞에서, 마땅히 멸할 것 중에 좋은 것! 우리가 드리는 모든 좋은 것은, 다 마땅히 멸할 것 중에 어떤 것이었잖아요? 그리고 더러운 옷! 이사야는 그것을 더러운 옷, 필시 랙(filthy rags), 똥 걸레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그것보다 더 더러운 표현이에요. 그건요! 우리의 최선의 의가 그렇대요.

그렇게 우리와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하느님 앞에서 모든 것이 아님이 인식될 때, ‘가 죽는 거예요. 그게. ‘아니네하고 가 죽게 될 때, ‘, 그래서 이런 무력한 나 때문에, 이런 더러운 나 때문에, 예수가 죽은 거구나!’라고. 그게 사실로 와 닿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 이해(理解)가 곧 살아나는 거고, 그걸 믿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게 바로 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서 나의 죽음이, 그 분의 십자가를 진리로 밝혀내는 거예요. 내가! 내가 이 땅에서 진리로 그걸 밝혀내지 않으면, 내 삶 속에서 그 삶이 일어나지 않고, 나에 대한 용서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내가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자로 사는데, 어떻게 그게 참이며 진리입니까? 그의 영향을 받아 내가 이 세상에서 진짜 죽은 거네라고 알아야 , 그게 진짜구나라고 알게 되는 거 아녜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그 진리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도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요. 이 자연이 전부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아들! 진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이 다 거짓 것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이 자연이, 피조물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는 거요. ? 내가 진리를 품고 있는데, 이 인간들이 못 알아보니까. 진리가 나타나야 내가 진리가 되거든요. 이 자연이요! 하느님은, 복음을 알아듣는 이들에 의해, ‘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너희들 왜 나를 자꾸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니?’라고 그렇게 외친 거예요. 하느님이. 그러니까 그러한 이해도, 설명도 없이, 무조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문구를 외치고 다니거나, 붙이고 다니는 건, 자칫 잘못하면, ‘, 그렇게 해서 그 예수를 그냥 믿으면 되는 거야? 섬기면 복 주는 거야?’ 그걸 보고 어떤 이가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여러분 그 사람을 죽이는 거지, 전도한 게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차에다가 함부로 그 딴 소리 좀 붙이고 다니지 말아요. 그리고 아무나 보고 예수 믿으세요.’ 이 딴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그걸 다 설명해 주세요. 그럴 거면! 도대체 예수 믿는 게 뭐냐고요? 그러니까 그런 진리가 되지도 않는 인간들이, 스님들이 지하철에서 뭐 시주하고 있으면, 머리에다 손 얹고 안수하고 지랄들을 떠는 거요. 왜 그러냐고? 왜 그런 무례한 짓이 어디 있느냐고요? 그 사람도 나름대로 지금 진리를 찾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불교는 구약의 끝이기 때문에 안타까울 뿐이라고! 그런데 거기에 대놓고 지가 뭘 안다고 안수를 하고 있냐고요? 심지어 명동에 나가면 십자가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더라고. 보니까! 그리고 마이크는 어디서 구했는지, 하나씩 다 들고 다니면서, 뭐라고 얘기하는 건지 시끄러워 죽겠어요. 그걸 전도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6:31-32) 31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32 간수와 그 집안 온 식구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여기까지 설명을 해 줘야, ‘그게 믿는 거예요?’라고 거기서 그가 죽어요. 그런데 덜렁, ‘주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희생제사 하세요.’란 말과 다를 바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말씀을 전하자, ‘로고스에 담아 레마를 전하자, 그 간수가, 목숨을 그냥 내 놔요. 자기가 지키던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다 그랬죠? 그건 그 사람들 놓치면 죽는다는 거예요. 그 죄를 다 합쳐서 간수가 뒤집어쓰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에는.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이 말씀을 듣더니, 이 사람들을 씻겨서 집에 가서 밥까지 대접했어요.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기쁘게 보내줬다니까요. 육의 죽음이 일어나야 돼요.

그렇게 믿음이라는 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라는 존재에게서, 먼저 경험이 되어져야,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십자가도 진리가 되는 거요. 사실이 되는 거요. 아니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건!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목수가 하나 와서 그냥 죽은 거! 그거 이상의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냥 관념일 뿐이에요. 믿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불안해서, 마냥 섬기기만 하는 거죠. 뭐라도 갖다 바쳐야 안심이 되고, 자기 몸을 혹사시키기라도 해야, 마음이 놓여요. 그래서 죽어라고 해요. 그걸 오늘 본문이 몸의 사욕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몸의 사욕!’ 그것 쫓아가지 마!

에피뚜미아두미아, 두시야희생제사에다가 에피라는 강세를 붙인 거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라는 어구에서의 순종하다라는 그 단어, ‘히파수오듣다라는 단어예요. 몸의 사욕을 쫓아,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건,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본능이에요. 하느님과 떨어졌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된다니까요. 인간은요!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율법적인 말로 듣지 말고, 그걸 들어서, 엉뚱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걸 들어 엉뚱하게 행하지 말아라. 이게 몸의 사욕을 듣지 말고, 순종하지 말고의 뜻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면, 일단 모든 인간들이, 자기 안의 마음! 선악으로 받아들여서, 해야 돼? 말아야 돼? 이렇게 먼저 생각한다니까요. 그게 몸의 소욕을, 사욕을 쫓지 말라예요.

이어서 너희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드리지 말고,’ 그래요. 의의 무기로 하느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그 어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번역을 하면, ‘너희의 그 지체! 이건 히브리어로 제라예요.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제라거든요. 남자의 측면, 한쪽 부분! 부분은 지체예요. 그 뜻이죠? ‘그 너희의 지체를, 한 쪽을, 불의의 갑옷으로, 성립하게 하여, 죄를 짓지 말고, 의의 갑옷으로 하느님 앞에 서라예요.

여기서 무기라고 번역이 된 호플론, 전쟁용 무기 중에 특히, 갑옷을 가리키는 거예요. 호플론에다가 파스라는 단어를 붙이면, 그게 모든, 전부이런 뜻이거든요. 全身 甲冑라는 단어가 되는 거예요. 이 무기, 호플론에다가 파노플리아가 에베소서 6장에 쓰인 전신갑주예요. 옷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엉뚱한 옷 입지 말고, 진짜 옷 입어!’ 이런 뜻이에요. 너희가 만든 더러운 그 에피뚜미아, 몸의 사욕, 더러운 옷!’ 그걸 죄로 성립시키지 말고, 하느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무기! 의의 갑옷을 입고, 하느님께 무기로 드려라. 이건 옆에 서다는 뜻이란 말예요. 의 갑옷을 입고, 하느님 우측에 서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완전 무장이라는 거예요. 절대 죄가 들어올 틈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 6장에서 전신갑주로 설명이 되는 거란 말예요. ‘파노폴리아. 그러니까 진리를 모르고는 절대 의의 갑옷, 의의 무병기. 의의 옷을 입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수시로 희생 제사, 에피뚜미야, 몸의 사욕으로 돌아가게 된다 말이에요. 잘 보세요. 전신갑주에 나오는 가장 처음이 뭐예요? 단어? 에베소서 6장에서 진리의 띠? 성경들 좀 읽으라니까.

(에페소서 6:13-14) 13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전신갑주)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띠로)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이거 다 같은 말이에요. 여러분! 여기서 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페리존님인데요. 이 단어의 명사형이 페리대시스예요. 이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하고르라는 단어거든요. 그 단어가 라는 단어예요. ! 그런데 그 띠라는 의미보다는 갑옷이라는 의미를 더 많이 써요. 그러니까 이 전신갑주, ‘파노폴리오.’ 갑옷은 진리의 띠라는 게 함축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맨 앞에 나오는 거예요. 헬라어나 히브리어에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맨 앞에 두거든요. 그 띠, 진리의 띠! 이야기하는 거예요. 평안의 복음에 예비한 신, 뭐 이런 게 다 진리에 관한 거잖아요. 복음의 이야기, 말의 이야기란 말예요. 胸背, 이런 거 다!

그런데 그 진리의 띠를, 그 옷을, 인간의 행함으로 바꿔버리면, 저주의 때, 저주의 옷이 되어버려요. 창세기의 그 진리의 띠와 반대가 되는, 저주의 때가 나오는데, ‘하고르가 어디 나오는 지 한 번 보잖 말예요.

(창세기 3:6-7) 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 주었다. 남편도 받아 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치마)로 앞을 가리웠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다.’에서 치마가 띠예요. ‘하고르!’ 여러분 아마존같은 곳에 가면 사람들이 밑에는 안 입어도 띠는 다 하나씩 하고 있죠. 신기하지 않아요? 그것도 열두 개를 합니다. 기가 막히죠. 그래서 그 열두 개가 안 되면 부끄러운 거라 그래요. 아래는 다 벗었는데, 띠 하나 모자라면 부끄럽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요. ‘예요. ! 엉터리 갑옷, 엉터리 옷이라는 뜻이에요. 자신들의 행위를 지키기 위해 서로 없는 가짜 열매! 무화과나무 열매 안에 들어 있는 건 씨가 아니라 그랬어요. 수술 머리예요. 꽃이에요. 그거. 그런데 열매인 척 하는 거. 그래서 성경이 그걸 갖다 쓴 거예요.

하느님은 열매를 원하는데, 열매인 척하는 걸 하느님께 갖고 와서 드리려고 하는 게, 인간의 행위잖아요? 고 잎을 엮어서, 자기들 나름대로 진리의 띠를 해 입었어요. 하느님이 고거 찢어발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가죽으로 입히죠? 부끄러움을! 가린단 말예요. 그 가죽이 뭘 상징하는 거예요? 성전을 덮은 게 가죽이란 말이에요. 참 성전으로 입혀버리는 거! 이게 성경 전체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걸, 이 아담과 하와가 입은 더러운 옷! 이걸 이사야가 말 그대로 더러운 옷 그런 거예요. 그리고 즈가이야서에서도 더러운 옷 입은 자가 나오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거 벗겨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스가랴서에 보면, 그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대제사장이라 그래요. 대제사장,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입은 옷은 항상 에봇이었으니까!

제사를 지내면 양을 죽이고 소를 죽여서, 피의 반은 바닥에 뿌리고, 반은 가지고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우슬초에다 묻혀서 에봇에다 반드시 발라야 돼요. 그런데 제사를 한 두 번 드리느냐고요? 피 범벅이 된 옷이 바로 그 옷이에요. 제사장의 옷! 예수님이 그걸 입고 있다는 건, 바로 그건 아니다. 그래서 내가 그 대제사장이 되어 죽으러 왔다는 의미에서, 묵시록에서 계속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의 왕으로서 그 분이 나타날 땐 흰 옷을 입고 있다니까요. 하느님은 그걸 벗겨 버리세요. 그리고는 진짜 성전! 가죽으로 갈아입힌단 말예요. 그걸 아마포라고도 해요. 자신의 노력으로 입은 게 아니기 때문에, ‘아마포예요.

에제키엘서에 보면, 제사장의 服式을 설명하는데, 아마포를 짜라 그래요. ? 이유도 나오죠? 너희들 땀나면 안 되니까. 인간들이 땀을 흘려 하느님께 뭘 바치는 걸, 거기서부터, 하느님은 거부하시는 거예요. 양털 옷을 만들지 마! ? 땀나니까. 나는 너희들 땀 냄새 맡기 싫어! 그랬단 말예요. 하느님이 입혀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마포라고도 하는 거란 말입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서에서, 전신갑주, ‘파노플리아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건, 바로 창세기의 그 가짜 띠! ‘하고르,’ 가짜 갑옷을 겨냥한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이, ‘불의의 병기,’ ‘의의 병기,’ 이렇게 표현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다 같은 말이에요. 몸의 사욕! 불의의 옷! 무화과 나뭇잎! 잎사귀 치마! 다 율법! 다 하나를 가리키는 거예요. 비 진리!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많은 옷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창세기에서의 그 무화과 잎사귀 옷과, 가죽 옷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가 또 옷 이야기예요. 여러분, 히브리어로 이라는 게, ‘옷 입다예요. 아벨과 셋의 이야기, 카인과 아벨과 셋, 아담의 아들들이잖아요? ‘이라는 단어가, 여러분 영어에 수트(suit)’ 고 단어가 세트(Seth)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옷을 입다그것도 정식으로 차려 입다.’ 어떻게? 아벨이라는 자는, 이름 자체가 하벨, 공허예요. ‘죽음이에요. ‘없음이에요. ‘나싱니스(nothingness)’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죽으러 온 자란 뜻이거든요. 이름 자체가! 그러니까 죽어야 돼요. 마땅히! 카인은 고걸 죽여야 되는 자고. 아담의 대역이거든요. 그런데 카인이 만약에 고걸 죽이고, ‘, 이렇게 해서 우리가 사는 거야라고 진리를 알면, ‘으로 옷 입고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걸 모르면, 그냥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옷 입는 이야기예요. 역시 이것도!

성경에 보면 을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준 자라 그래요. 아벨의 옷을 입고 살아난 자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래서 하느님이, 아벨이 죽은 걸 전혀 슬퍼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너 왜 사람 죽였어?’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으세요. 그냥 네 아우 어디 있니?’라고 물어보세요. 그 의미는, 지금 네가, 아벨이라는, 죽으러 온 어떤 자를 죽였는데, 네가 그 한 일을, 그 내용이 뭔지를 아니?’ 라고 물은 거예요.

만약에 카인이 그 때 , 이게 그런 거였습니까? , 저는 죽어 마땅한 자가 맞네요!’라고 나왔으면 그는 진리를 안 자가 되고, ‘으로 살아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그런데 내가 동생을 지키는 놈입니까?’라고 이야기한 건, 몰랐다는 걸 상징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거거든요. 그래서 카인이 처음부터 살인(殺人)한 자가 되는 거예요. 카인이 자기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동생을 죽였잖아요? 고게 살인이다를 설명해주기 위해, 희생제사 계속 가치 있게 드리려고 하는 게, 살인이다. 산상수훈을 들었으면 이제 알잖아요? 고게 살인이다를 설명하기 위해,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림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거란 말예요.

쉬운 말로 우리는 모두 다 카인이에요. 아벨을 죽인 카인! 그러나 내가 아벨 죽인 자 맞습니다.’라는 카인은 으로 살게 되지만, ‘내가 언제 아벨 죽였습니까? 내가 그 아벨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 카인으로 죽는 거예요.

(요한복음 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장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래요. 갑자기 진리 이야기를 하신다니까요. 그게 살인이다. 이런다니까요. 그러니까 자꾸 자신의 제사만 의지하는 거예요. 자신을 위해 드려진 영 단번의 제사를 알지 못하니까. 그게 율법주의에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의 본능(本能)이에요. 이상하지 않아요? 저 오지에 있는 사람들의 종교에서도 전부 희생제사가 있어요. 전부 제물을 죽여서 피를 내요. 그게 뭐냐면,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생래적으로 율법이 새겨져 있더라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 먹은 거예요. 그게! 그래서 바오로도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마음이 율법이다.’ 다 희생제사 하고 앉아 있어요. 하느님은 그거 하지 마!’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그러니까 다 죽어야 된다니까요. 계속 도륙(屠戮)하고 있으니까. 아니, 생각해보세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전부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어요. 다 율법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이, 전부 다! 그러니까 아담들은 그 율법에 의해 죽는 거요.

그렇게 성도는, 선악과, 옛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에 먼저 던져져요. 그걸 세상이라고도 하고, 옛 사람, 옛 성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호 코스모스라고도 해요. 성경이 그걸 속옷이라고 해요. 속옷. 그런데 그 속옷, 선악과, 옛 성전, 율법, 호 코스모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속옷이, 진리의 겉옷! 전신갑주! 호플론! 의의 병기가 되는 형국으로, 진리가 설명이 되어져요 성경에서. 지금부터 의 옷, 호플론, 전신갑주 파노플리아를 입는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잘 오신 거예요. 어렵지 않아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옷이 항상 등장합니다. 속옷, 더러운 옷과, 속옷은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늘 갈아입는 거예요. 그리고 겉옷! ‘호플론.’ 밖의 것을 막아주는 병기로서의 옷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도,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겉옷을 함께 주라.’라고 얘기했죠? ‘율법을 달라고 하는, 그걸 가르쳐 주는, 달라고 하는, 로고스를 들으러 오는 자들이 있거든, 겉옷으로 함께 줘야지, 그것만 주면 소용없어.’ 라는 뜻이라 했어요. 두 종류의 옷이에요.

그런데 속옷이 먼저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겉옷과 속옷을 다 입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입고 계셨던 속옷은, ‘호지 않은 속옷이라고 적혀 있죠? 구약에서는 그걸 반포 속옷이라 그래요. 호지 않아다는 건, 통짜로 하나라는 뜻이에요. 그건 제사장들이 입었던 옷이에요. 그리고 그 당시에 중, 상류층 이상의 귀족들만 입었던 속옷을, 예수님이 입고 계셨어요.

무슨 청렴, 청빈, 이따위 소리들 좀 하지 마세요. 그리스도교는 그런 거와는 상관이 없다니까요. 가난하면 뭐 다 거룩한 줄 알아요. 돈 벌어서 잘 사세요. 예수님도 귀족들 속옷 입고 있었다니까요. 호지 않은 제사장 속옷! 이음새가 없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전부 가린다는 의미에서 호지 않은 속옷이에요.

제사장들은, 겉옷 입지 않고 그 호지 않은 속옷만 입고 있었어요. 그리고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만, 겉옷을 그 위에 챙겨 입고 들어가서 죄의 용서함, 전체의 죄의 용서함을 끌어낸 거예요. 그래서 속옷은 제사장들의 옷이에요.

(출애굽기 28:39) 39 또 너는 고운 모시실로 속옷을 지어라. 모시로 사모()를 만들고 수를 놓아 가며 제복띠를 만들어라.

이렇게 속옷은, 제사장들과 옛 성전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두 벌 옷을 가져가지 마!’ 그런 거예요. 거기서 쓰인 말이 디오 키토나스두 벌 속옷이에요. ‘옷 두 벌 갖고 가지 말고 한 벌만 갖고 가!’ 이런 말 아니라, 너희들이 지금 내가 진리를 전하라고 보내는데 속옷만 두 개 갖고 가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겉옷도 갖고 가야지라는 의미에서, ‘두 벌 속옷 가져가지 마!’ 그런 거지. 옷 두 벌 갖고 가지 마 그런 거 아녜요. 그러니까 속옷을 두 벌 갖고 가게 되면 수퍼맨 옷차림이 되는 거예요. 스판 내복에, 위에다가 팬티를 입은 그게 속옷 두 벌이에요. 그럼 그건 바보죠. 그건! 그렇게 입고 가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그 속옷과 겉옷이 누구에게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주어지는 지 한 번 보세요.

(요한복음19:23-24) 23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단 병사들은 예수의 옷가지를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서 한 몫씩 차지하였다. 그러나 속옷은 위에서 아래까지 혼솔 없이 통으로 짠 것이었으므로 24 그들은 의논 끝에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든 제비를 뽑아 차지하기로 하자' 하여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 가지며 내 속옷을 놓고는 제비를 뽑았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시편 22편에서 그대로 예언된 거예요. 이거! 예수님의 겉옷, ‘히마티온을 예수 죽인 자들이 나누어 가져요. 네 조각으로! 산상수훈에서도 마지막 다섯 계명을, 네 개로만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사복음서도 네 개이고, 그리고 구역에도 사복음서가 있어요. 창세기 빼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요걸 원문에 맞게 설명을 하면, 그의 겉옷을 취하여, 진리를 취하여, 그 십자가가 뭔지를, 그 네 부분으로, 그들 안에, 각각의 지체로 되게 했다.’ 이런 뜻이에요. 행간의 의미가! 단순히 옷을 나눠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기에 분깃이란 단어도 나오고, ‘되게 했다,’ ‘성립시켰다이런 단어도 나오고 하는데, 그냥 그걸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국어학자들이 그냥 요렇게 감수해 놓은 거예요.

이건 하나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보여 지고 있는 그 진리를, 성경에 보면 네 부분이란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네 부분으로, 예수 죽이는 자들이 취하니, 겉옷을 취하니, 그 넷이, 그들 안에서 각각의 분깃, 이게 각각 나눠가졌다 이렇게 번역이 되었는데, ‘각각의 분깃으로 성취됐다, 성취되더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율법인 속옷이 그들에게 어떻게 되어야 돼요? 찢어지고 나누어진 책 들이 아니라, 하나로 이해가 되어야 되죠? 사랑으로! ‘, 그게 그거였구나!’

속옷은 나누지 않고 통째로 하나로 가져가는 거예요. 겉옷은 네 조각으로 찢어버린다니까요. 그런데 그들 안에서, 지체로, 부분으로. 그게 성립이 되니까, 성취되니까, 그들의 겉옷이 되니까, 속옷이 하나로 보이는 거예요. ‘, 사랑! 아가페! 하느님!’ 이렇게 보이더라는 거예요. 나중에 이해가 기실 거예요.

요한묵시록에 성도들이 입은 옷, 흰 옷도 전부 히마티온, 겉옷이에요. 신기하지 않아요? 겉옷이라고 써 있어요. . 예수님이 입으신 옷도, 겉옷! 열두 해 혈루를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다 그러죠. 그것도 옷 가가 아니라 겉옷이란 뜻이에요. 겉옷! 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옷술을 만졌다도 겉옷이란 뜻이에요. 옷 술이 아니라. 진리를 만지면, 진리와 접촉하면 다 살아나는 거예요. 겉옷이에요.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눈이 부신, 휘황찬란한 옷을 입으시죠? 그 옷도 겉옷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묵시록에서도,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말아!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것도 겉옷이에요. 그거 지키라는 거예요. 진리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법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겉옷 뺏기면, 속옷도 있는데, 왜 겉옷 뺏기면 벌거벗는다고 얘기할까요? 겉옷을 입었다는 건, 이미 그 속옷이, 율법이, 진리로 겉옷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거 벗겨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게 벗겨지면 벌거벗게 되는 거야.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1-4) 1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 2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4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 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이해하세요? 속옷과 겉옷의 이야기예요. 어떻게 더 선명하게 설명을 해요. 이걸?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겉옷이, 속옷을 덮어버리면, 속옷이 안 보여요. 그래서 덧입는다 하는 거요. 덧입는다! 그러나 율법의 측면에서 봤을 때, 요건 아니니까 폐해져야 되니까, 어떤 곳에서는 벗어라라고 이야기 하는 거요. 그러나 이걸 벗어서 딴 게 오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진리가 이해되어지면, 요게 겉옷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덧입어라 라고도 또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사야 61:10)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신랑 신부의 혼인 잔치를, 겉옷을, 신랑이 입히시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의 겉옷! 구원의 겉옷! 이게 호플론이에요. 전신갑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의 옷이예요. ‘호플론을 입어라, 입고 하느님, 신랑, 옆에 서라. 신랑 신부가 결혼하는 거예요. 옆에 서는 거예요. 팔짱끼고.

그런데 그 율법의 속옷을 갖고, 성경을 갖고, 성경을 이야기하고,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그것도 다 지켜내지 못하고, 진리도 발견해내지 못할 때, 어떻게 돼요? 그들에게 준 그것도, 뺏기게 돼요. 그렇잖아요? 일단 줬어요. 속옷을 줬단 말예요. 그것으로 예수라는, 진리를, 겉옷을 이해하라고 줬는데, 그걸로 진리로 가지 못하면, 그걸 뺏긴다고 하는 거예요. 입은 것도, 준 것도 뺏겠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란 말예요.

(마르코복음 14:48-52) 48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49 너희는 내가 전에 날마다 성전에서 같이 있으면서 가르칠 때에는 나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다.' 50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51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 가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52 그러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붙들리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세요. ‘내가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를 가르칠 때, 너희는 나를 붙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칼과 몽둥이로 붙들러 오네.’ 정작 성전에서, 진리로 나를 붙들라고 가르쳤더니, 그 때는 안 붙들더니, 지금 칼과 몽둥이로 나를 죽이려고, 붙들러 오네. 여기서 붙들다,’ ‘크라테오붙들다, 지니다, 취하다이런 뜻이에요. 진리를 붙들 때도 쓰고, 어떤 사람을 해를 가하기 위해 붙들 때도 쓰는 단어란 말예요.

인간들이, 진리로 예수를 붙들지 않고, 칼과 몽둥이로 죽이려고 붙들러 온 거예요. 율법은 진리를 박살내기 위해 붙들죠. 진리가 되기 위해 붙들지 않아요.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하는데, 진리를 박살내기 위해 붙든다니까요. 오늘날 우리 교회를 가장 공격하는 이들은, 교회예요. 스님들은 좋아하더라고요. 오히려! 무슨 뜻인지 알고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떤 스님이 듣더니 , 이 사람 진리 전하는 사람이야.’ 이게 좋아해야 할 말인지... (하하하)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도망갔다 그래요.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부정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던 거예요. 그러니까 도망간 거예요. 제자들조차! 그들도 예수를 칼과 몽둥이로 잡으러 온 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를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그 무리 속에 한 청년이 등장하죠? 그 청년이라는 단어와 무리라는 단어는 네아네스코스(?)’로 같은 단어예요. 한 쪽에선 그걸 그냥 단수로 쓰고, 무리는 그걸 복수로 쓴 거거든요. 같은 놈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요 청년의 이야기로, 그게 뭔지 설명해 줄 게.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같은 단어예요. ‘네아네스코스이게 뭐 마르코라느니, 루가라느니. 그건 몰라도 돼요. 누구면 어때요? 벌거벗고 도망 간 게.

잘 보면 그 청년이 뭘 두르고 있는데, ‘고운 삼베를 두르고 있다 그러죠? 요게 신돈이에요. 제사장의 속옷을 만드는 고운 삼베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 쉽게 말해서 속옷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벗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후서 5장의 우리가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에서 고 단어와 똑같은 단어예요. 그런데 어떤 놈이 지금 벗은 자로 도망가고 있는 거예요. 그 똑같은 단어로! 뭘 벗겼겠느냐고? 예수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준 그것도 벗겨버린다는 거예요. 그래 도망가! 가려면 가! 그러면 너희들에게 준 이것도 필요 없어! 벗겨버리는 거요.

(요한묵시록 16:15) 15 그 때에 '잘 들어라. 내가 도둑같이 오겠다. 벌거벗고 다니는 부끄러운 꼴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고 자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거 창세기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벌거벗었으므로 숨었습니다. 그래서 가렸습니다. 뭘로? 가짜 진리, 무화과나무 잎사귀 띠로! 하느님이 그거 벗기고, 진리의 띠로, 전신갑주 입어! 그런 거잖아요? 묵시록에서 이거 똑같이 이야기하는 거요. 그 옷 입었지? 벌거벗고 도망가지 않도록 그거 지켜! 이게 성도의 모습이에요. 진리의 말씀에 끝까지 묶여서 사는 자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진리의 그 옷을 지켜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는 거 같지만, 여태까지 제 등에 비수를 꽂고 도망간 사람들은, 전부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어디서 이런 말씀을 또 듣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 그런데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못 들어요. 중도에, ‘이건 뭐야? 난 못 죽어!’ 이러고 대부분 도망가요. 그러나 끝까지 그 옷을 지키는 이를, 지니는 이를, ‘오래 참음, 인내라 해요. 다른 거 아녜요. 뭐 고난이 왔을 때 그거 꾹 참았다. 그건 뭐 딴 사람들도 할 수 있어요. 다른 종교인들도 다 할 수 있다니까요. 그건! 그 겉옷은 속옷이 무엇인지를 알 때, 그 속옷 위에 덧입게 되는 거예요. 그때 그는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13:14)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게 에피뚜미아예요. 본문에 나오는 몸의 사욕, 음욕, 희생 제사. 이렇게 번역이 된 단어예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율법주의 안에서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 좀 도모하지 마! 이 말이에요. 그러니 그리스도가 우리의 겉옷이에요. 우리가 지켜야 할,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겉옷이란 말입니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에피뚜미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하게 된다 라는 말이에요. 여기도 역시 희생 제사란 단어가 쓰인 거예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천상의 예수님이 입으신 모시옷과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만들어 입힌 아마포가 다른 것으로 나와요.

(요한묵시록 15:6) 6 그 성전으로부터는 재난을 하나씩 손에 든 일곱 천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깨끗하고 눈부신 모시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진리의 띠! 그 분이 진리의 금 띠를 띠고 모시옷을 입고 계시는데, 여기에서는 그 모시옷이 신돈이 아니라, ‘린넨이란 단어가 나왔죠? ‘리논이에요. 이건 겉옷을 만들 때 쓰이는 삼베예요. ‘리논! ‘신돈은 속옷을 만들 때 쓰는 삼베고. 성경에서 그 법을 은혜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 속옷이 겉옷이 되지 않으면, 여러분이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돼요.

(마르코복음 4:21-25) 21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등불을 가져다가 됫박 아래나 침상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지 않느냐? 22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요걸 빛으로 드러내어서, 그들을 살리려고 준 거야) 2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24 또 말씀하셨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 들어라. 너희가 남에게 달아 주면 주는 만큼 받을 뿐만 아니라 덤까지 얹어 받을 것이다. 25 누구든지 가진 사람(이해한 자는)은 더 받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여러분 빛이라는 건, 어두움을 드러내는 거잖아요? 그러면 빛은 뭐예요? 어둠을 드러내는 거면, 어둠이잖아요? 그러나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보는 자들이 죽는 거고, 그 어두움을 빛을 통하여, ‘, 이게 사실은 빛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구나!’라고 아는 그 자들이 사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은 하나라니까요. 이게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연합이라는 의미란 말예요. 다른 게 아녜요. 여기에 무슨 선악이 있고, 어둡고 밝음이 있어요? 그건 다 진리 안에서 하나라니까요. 율법은 그 자체로는 어두움이지만, 그 어두움의 정체를 빛을 통해 보게 되면, 그게 곧 빛이잖아요?

달을 통하여 해가 저렇게 비치고 있는 거구나!’라고 알면, 그 달이 곧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월()에서 시작하여 일(), 해로 끝나는 거예요. 월화수목금토일. 월에서 시작해서, 이게 뭐야 화수목금토. 음양오행이거든요. 이걸 통하여 아 이게 해야!’해서, 그래서 일요일이 그렇게 기쁜 거예요. ,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모든 건 다 진리를 담고 있어요. 진리가 되면 모든 게 다 나를 통하여 진리가 돼요. 그래서 그들이 나를 기뻐하는 거야.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자 보세요. 그러면 그게 벌거벗음이고, 그렇게 말씀이 없는 게 굶주림이라면, 구제가 뭐예요? 진짜 구제가 뭐예요? 벌거벗은,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게 구제죠? 그럼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진짜 구제가 뭐겠어요?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진리를 전하여 그들에게 겉옷을 입혀주고, 하늘의 생명, 말씀을 그들에게 주어 먹이는 걸, 성경이 구제라 그래요. 성경에서 불쌍한 이들 구제의 대상을 뭐라 그래요? 고아와 과부라 그러죠? 고아는 뭐? 아버지가 없는 자. 과부는? 신랑이 없는 자. 그들에게 아버지와 신랑을 소개해주는 게 구제예요. 그걸 섬김이라 그래요. 그래서 고아와 과부가 대표로 나오는 거예요. 불쌍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 밖에 없어요? 성경은 전부 진리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단어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다니까요.

야고보서에서, 묵시록에 나오는 그 벌거벗음의 상태, ‘너희들 벌거벗지 않게 옷 잘 지켜에서 그 벌거벗은이라는 단어가 야고보서에서 나오거든요.

(야고보서 2:15-16)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뭘 주라는 거예요? 말씀을 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안 주고 엉뚱한 얘기하면서, ‘평안해요. 배부를 거예요. 잘 될 거예요.’ 그러면 뭐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믿음이냐가 이 이야기인 거예요.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그러고, 자기만 혼자 쳐 먹고, 살이나 디룩디룩 찌고, 이런 거 경고하는 말이 아니라, ‘, 어떻게 진짜 벗은 사람, 진짜 배고파서 죽을 사람이, 에 주리고 목마르다.’에서 그 단어는 상대적 굶주림이 아니라 그랬죠? 이거 없으면 죽는 절대적 굶주림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가 진짜 살고, 그가 진짜 입을 겉옷을 주지도 않고, 엉뚱하게 감정적으로 위로해 주면서, 두 주먹 불끈 쥐게, 밖에 나가서 또 열심히 희생 제사하게 만들어 놓고, ‘잘 될 거야, 평안할 거야, 배부를 거야, 열심히 해봐. 하느님이 복 줄 거야, 응답해 줄 거야.’ 이러면, 이게 무슨 믿음이냐?

그러면 함이 있는 믿음은 그 말씀을 흘려주라는 얘기예요. 엉뚱하게 십자가 들고 나와서, 괜히 사람들에게 피해주는 거 하지 말고. 아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바보가 그걸 보고 예수를 믿겠느냐고요? 욕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거 안 하면, 손발 떨려서 못 산다니까요. 불안해서. 그거라도 안 하면 어떻게 버티느냐고요. 희생 제사를 해야지. 당분간 명동에 또 못나가겠네. (하하하)

그래서 구제와 봉사와 섬김의 직분으로 뽑힌, 집사들이 일곱 집사죠? 일곱 집사들이 구제하고 섬김을 하는데, 전부 말씀을 전하다가 죽는 거예요. 성경 어디에 그들이 불쌍한 사람에게 밥퍼주고 쌀 갖다주고 했단 말 있어요. 일곱 집사 대표가 누구예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테파노필립보브로코로니가노르디몬 바르메나와 또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니골라오를 뽑아 사도들 앞에 내세웠다.’ (사도6,5)

스테파노는 뭐한 사람이죠? 구약을 설명한 사람이죠. 스테파노가 한 설교를 읽어보세요. 전부 구약의 이야기예요. 그러나 그 속에 진리를 담아 설명하고 죽어요. 구약은 모세로 죽은 거예요. 스테파노는! 그런데, 필립보는 이사야서, 구약을, 신약으로 설명해 주고, 그가 자유롭게 풀려나요. 이방인이!

그 이방인이 누구예요? 이디오피아 사람이에요. 3,000km 밖에서, 절기를 지킨다고, 희생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온 거예요. 하느님이 답답해서 보낸 거예요. ‘가서 그게 뭔지 이야기 해줘. , 3,000km를 제물을 갖고 쟤가 여기를 온다 세상에.’ 필립보가 이야기해줬어요. 그가 기뻐서 갔다. 그래요. 그 다음 해에 또 과월절 지키러 왔을까요? 안 옵니다.

고걸 끝내버리는 게 집사! 일곱이라는 말이 , 브엘세바에서 일곱 번 말하다잖아요? 일곱 번 말하는 건 언약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교회의 일을 담당하는 이들을 원로라고 하고, 그들 중에 말씀을 전하는 일로, 진짜 구제하고 섬기는 이들을 집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가, 칼빈의 말만 듣고, 집사는 교회 행정을 하고, 장로는 무슨 영적인 거, 영적인 거 개뿔이나 뭐하냐고? 장로들이? 사고나 치지 교회에서! 뭐 잘하는 거 봤어요? 장로들이! 그런 거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직분이니 뭐니 그런데 가세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란 말입니다.

디콘(deacon)’이라는 건, 말씀으로 입히고, 말씀으로 먹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스테파노와 필립보가, 집사의 역할을 하나로 묶어서 보여주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구제예요. 돈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밥 퍼주고 이런 거 하세요. 하지 말라는 거 아녜요. 그러면 마음도 편하고 따뜻해지고. 애들에게 교훈도 되고 좋아요. 그러나 이걸 신앙이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자는 거예요. 그런 거 하지말자는 게 아니라.

 

여러분 우리의 가능성과, 자원이 다 멸해져서, 우리가 살아야,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예수 믿는 거예요. 덮어놓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그 예수는 또 다른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믿으라 그러면 그게 또 다른 우상이 된단 말이에요. 지금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가 바로 그 예수예요 소, 그 예수를 죽여야 돼요. 내가 아벨을 죽여야, 셋으로 부활할 수 있어요. 그 말은 나를 죽여야 되는 거예요. 진리로! 그리고 그게 뭔지 알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진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서 살아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걸 동양학에서는 환갑(還甲)이라 그래요. 십간십이지 있죠? 천간지지(天干地支)라 그래요. 그걸. 하늘의 열을, 땅의 열둘을 깨달아, 짝을 맞추면, 하늘의 갑으로 완성이 되는 거요. 그래서 육십이 환갑이죠? 그래서 환갑이 되면, 진리를 담고 있는 거니까!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이 하여튼 진리를 그렇게 담아준다 말예요. 그러면 환갑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 땅의 열둘은, 이 열을 이해하여, 천간, 십간, 땅의 것이 죽고, 하늘의 갑으로 사는 거구나!’하고 죽는 거잖아요. 그래서 환갑 때에, 고 환갑을 맞은 분이 제사상 뒤로 가는 거요. 환갑상을! 그런 거 생각도 안했겠지만!

동양학에서 어떻게 차리느냐하면 제사상하고 똑같이 차립니다. ? 그러니까 여기에서 자손들이 환갑 맞은 이에게 절을 하는 건 죽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있는 이는, ‘그 죽음이 뭔지 아니?’라고 몸으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이걸 환! !

베레쉬트가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이 본이는 땅의 것으로 하늘의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게 창세기 11절의 첫 단어예요. ‘베레쉬트, 태초에.’ 그게 갑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갑으로 시작해서,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개로 설명하는, 땅의 것, 짐승으로 설명해서, 이게 짝이 짝짝짝짝 맞춰 갖고 육십 개가 되면, 전부 한 번씩 짝이 되어서, ‘아 이런 거야라고 했을 때, 죽고, ! ! 하늘의 것으로 완성되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그는 당연히 죽어야 되는 거지.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지낼 때 제사장이, 항상 이편에서 여기를 보고 제사를 드렸단 말예요. 성막에서도 마찬가지고.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 제사는 안 받아. 네가 진짜 이 제사를 중보하는 중보자가 되려면, 이리로 넘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게 무엇인지, 여기다가 얘기해 주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맞는 거예요. 지금! 이게 진짜 제사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죽어서 산다는 게, 모든 철학(哲學)이나, 종교(宗敎)나 모든 고등종교, 하등종교 구별 없이, 다 이야기하고 있다면, 한 번 생각을 해 보시란 말예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로 결론짓지 못하고 있고, 계속 헤매고 있지만, 우리는 신약이 있잖아요? ‘그게 이거구나!’라고 신약이 있잖아요? 하느님은 전부 그걸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걸 못 알아먹고.

그러니 성경은 어떻게 쓰겠느냐고요? 그 도구들을 전부 그 따위로 쓰고 있는 이 인간들이, 성경은 어떻게 쓰고 있을까? 생각 좀 해보란 말이에요. 무조건 성당(예배당)에 앉아 있고, 예수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천주교(예수교)! 이런 생각 버리시라니까요. 그리스도교는, 여기에서 진리를 깨달아, 여기에서 죽고 여기에서 살아야 돼요. 일단! 그래야 여러분은 영원(永遠)으로 가요. 영원히가 아녜요. ‘영원히는 시간이 길게 늘어진 걸 영원히라 그러죠. 그건 끝이 있는 영원이에요. 그래서 영원히아녜요. ‘영원으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움직임이 없는 진리! 그것으로 존재할 때, ‘영원으로라고 하는 거지. 성경에는 영원히라는 개념은 없어요. ‘영원이란 건, 움직임이 없는 거예요. 하느님이 준 그걸로, 그대로 사는 거예요. ‘영원으로사는 거예요. 그걸 천국이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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