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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묵상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2 조회수1,36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12일 월요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요나 예언자의 표징 (루카11,29-32)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제1독서 (갈라4,22-24.26-27.31-5,1)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5~26)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여기에는'에 해당하는 '하티나'(hatina)는 '호스티스'(hostis)의 중성 복수형이며, '호스티스'는 일반적으로 앞에 나온 명사를 받는 관계 대명사 '호스'(hos)와는 달리, 앞에 나온 진술에서 확인될 수 있는 어떤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계 대명사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여기에는'(이것들)이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가르 및 두 아들과 관련해서 언급한(22,23절)것들을 요약적으로 대변하며, '하티나'(hatina)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 지닌 해석학적인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그 해석학적인 특성이란 바로 '우의'이다.

'비유'에 해당하는 '알레고루메나'(allegorumena)는 '우의적으로 말하다'(speak allegorically),'우의적으로 해석하다'(interpret allegorically)란 뜻을 가진 '알레고레오'(allegoreo)의 현재 분사 수동태로 '우의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란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의적으로'(allegorically)란 말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교훈 방법이었던 '비유' 곧 '파라볼레'(parabole)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이다.

 

'파라볼레'는 한 사물이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거나 연상할수 있는 다른 사물 혹은 사실 예로 들어 서로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언어의 한 표현 방법이다.

 

이와는 달리 '알레그레오'는 어원적으로 '다른' 이란 뜻의 '알로스'(allos)가 합성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그 사건의 일반적 이해와는 다른 어떤 해석이나 사실을 설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 그 '다른' 해석이나 사실은 그 본래적인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

 

그 본래적인 사건을 기초로 하면서 그 뒤에 감춰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과 그 두 아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 뒤에 감춰진 현재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우의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현재적 삶에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학습장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단순히 지식적으로 가르치시려고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과거의 교훈을 거울삼아 현재 상황에 적용토록 하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란 표현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오로는 앞서 22절, 23절의 내용이 우의임을 밝힌데 이어서 본문에서는 왜 이것이 우의가 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란 뜻이 있는 '가르'(gar)로 시작된다.

즉 본문은 계집종과 자유인 여자가 두 계약이란 측면에서 이것이 우의가 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두 계약은 물론 하느님의 은혜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과(갈라3,16~18)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통하여 모세와 맺은 계약을 가리킨다(갈라3,19).

 

그런데 여기서 '두'(dyo; 뒤오)란 표현은 이같은 두 개의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여기서 '뒤오'는 그 둘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다.

 

표준 원문은 '뒤오'앞에 정관사 '하이'(hai)가 첨가되어 있다.

희랍어에서 '뒤오'가 관사와 함께 사용될 때는 그 둘이 별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마태19,5; 마르10,8; 1코린6,16; 에페5,31).

 

본절에서도 표준 원문은 하가르와 사라로 알레고리화되는 이 두 계약이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녔음을 강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관사를 붙였다고 볼 수 있으며, '뒤오' 자체가 이런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 바로 하가르입니다'

원문으로 볼 때 강조 문장이다.

새 성경은 번역되지 않았으나, '진실로'(마태3,11), '과연'(마태17,11)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멘'(men)이란 불변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시나이산으로부터 나와서 종살이할 자식을 낳았던 한 계약,  하가르가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본문은 시나이산으로부터 종살이할 자식을 낳은 계집종이 누구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힌다.

그는 바로 '하가르'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4절 후반절과 25절에서 계집종 하가르를 통하여 율법의 성격을 설명했던 사도 바오로는 이제 본절에서 자유인 사라를 통하여 계약의 성격을 설명한다.

 

이처럼 본절의 내용이 앞선 내용과 대조된다는 사실은 '그러나'(but)로 번역될 수 있는 접속사 '데'(de)가 잘 보여준다.

 

율법과 계약의 차이점이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묘사된 반면, 계약이 본절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ano yerusalem; 아노 이예루살렘)으로 묘사되고 있고, 25절의 '종살이를 하고'란 표현이 본절에서는 '자유의 몸'이란 표현으로 바뀐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입니다'란 표현은 하가르와 사라의 신분이 그에 속한 자녀들에게 이어지는 바와같이, 사라로 비유되는 계약에 속한 자 모두가 사라와 같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며, 이것은 갈라티아 교인들도 이러한 축복 가운데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의미를 지닌다.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1,29~32)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29.30)

 

악한 의도로 표징을 구하는 자들(루카11,16)에게 예수님께서 진정한 표징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 내용이 루카 복음 11장 29~36절에 전개된다.

여기서 '세대'로 번역된 '게네아'(genea; generation)는 혈통 또는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라고 표현하고 있다(마태12,39).

사실 표징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이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냈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고서도 또 다른 표징을 구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표징만을 구하는 것을 진실된 마음의 결여로 보고, 진실된 마음의 결여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신실함(믿음)의 상실이기에 이것을 '영적 절개없음'으로 보고 악하다고 질책하신 것이다.

 

또한 '표징'을 뜻하는 '세메이온'(semeion; a sign)은 여기서 어떤 것을 구별해 주는 기적적인 '증거'(token)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아주 궁금해했으며,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빌어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푸는 것인지 판단하고 식별할 수 있는 '표징'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요구하지만'에 해당하는 '제테이'(zetei; they seek)는 '발견할 때까지 찾다'를 의미하는 원형 '제테오'(zeteo)의 현재 직설법으로 쓰여서, 이들이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이실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구했다는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마음으로 메시야로서의 표징을 구하는 이들에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보일 표징이 없다고 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마태오 복음 12장 40절에 나오듯이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가 실제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증거로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후에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그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징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그리스도, 즉 약속된 구원자로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흘 만의 부활로서 명확하게 입증하겠다는 이다(사도1,3; 17,31).

즉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사건이 메시야되심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징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관점으로 루카 복음 11장 30절을 본다면, 이것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루카 복음 9장 22절의 첫번째 수난 예고에 이은, 또 하나의 간접적 수난 예고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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