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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참된 부자(富者)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3 조회수1,650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13..

(공동번역성서)

참된 부자(富者)

성경 전체를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사도 바오로 같은 그런 사람도, 요한묵시록 같은 거 못 보고 죽었습니다. 성경 한 부분 안에서 진리(眞理)를 발견하는 사람은 발견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호지 아니한, 아마포 속옷을 입고 계셨다 그랬습니다. 그 호지 아니한 속옷은, 구약에서 이음새가 없는, 그냥 통짜로 된 속옷. 그건 당시 제사장들이 입고 있던 속옷이라 그랬죠? 그래서 제사장들이 상류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옷을, 아주 극 상류층 사람들만 입고 있었어요. 그걸 예수님이 입고 계셨다니까요. 그렇게 비싼 걸 예수님이 입고 있었는데, 그 걸로는 아무도, 시비를 안 걸었어요. 그 하찮은 바리새인들도 그 딴 거 갖고는 시비를 안 걸었다니까요. ‘, 메시야가 그런 좋은 속옷 입어도 돼?’ 이런 거 안 했다고요. 복음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렇게 아마포 옷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화려한 겉치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것이었으며, 그들의 육적지향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준 것이었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호지 않은 아마포 속옷이,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건, ‘()’예요. 그들의 지향성이란 다름 아닌, 부유함이었어요.

그 부유함은 단순히 돈이 많거나 땅이 많거나 자식이 많은 정도의 유치한 유물적 부유함이 아녜요. 성경이 말하는 부는, ‘라는 존재의 가치 상승(上昇)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사유(思惟)와 행동(行動)! 그리고 거기에 소용되는, 자원(資源)과 재료 등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성경은, 그러한 부자들의 모습을,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와, 그들의 축약으로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요. 바리새인들이 다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 전체를, 부자라 그래요. 그들은 굉장히 금욕적인 사람들이었고, 청빈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해서, 그 돈으로 남을 도와주던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부자라고 한단 말예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모두 금으로 덮여있었던 거예요. 상징이에요. 성전의 모든 기명(器皿)들도 다 금으로 덮혀 있었어요. 성경은 율법주의=맘몬이라는 공식을 그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들의 실체는 기실, 모든 쓸모없는 조각목들이었잖아요? 하느님이 일부러 그 조각목을 가지고 성전을 지으라, 그래요. 조각목은 가시나무예요. 그건 땔감으로도 못 쓰는 거예요. 거기다가 금을 입혀서 성전을 만들라고 하셨단 말예요. 그런데 그러한 것에, 겉만 번드르르 하게, 금도금을 해 놓은 헛것! 이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몰론 그건 역으로, 쓸모없는 조각목에, 말씀의 금! 말씀의 기름! 그 금과 기름은 같이 혼용해서 쓴다고 말했습니다. 올리브기름을 짜서 놔두면 노랗게 금처럼 변했거든요. 기름! ! 그게 덮여서 참 성전이 되는 그 은혜의 이야기도 물론 함의하고 있단 말예요. 그건!

율법주의, 그 부자! 성경이 금하는 부자! 그러니까 그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남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어,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부자라 그랬어요. 그래서 그 율법주의를 맘몬과 동일시하여 사용한다 말입니다. 성경은. 그런데 그 율법주의의 시조(始祖)가 아담과 하와지요. 선악과 따먹고 율법주의자, 최초의 율법주의자들이 거기서 나왔잖아요? 선악의 주체가 되어, ‘내가 이제 선악판단을 할 거야!’가 율법주의예요. 아담과 하와죠? 그리고 모든 인류는 그 씨에서 나왔단 말예요. 그러면 그 씨에서 나온 모든 인류(人類)가 뭐다? ‘부자예요. 부자! 여러분이 다 부자예요. 당당하게 사세요. 당당할 일도 아니지만. 다 부자예요.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할 부자들인 거예요.

하느님께서, 생명나무 열매를 막아버리면서, 이들이 손을 들어, 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까봐라 그래요. 솨라흐 야드 라카흐이게 탐욕이란 뜻이에요. 부자 되고 싶은 마음! 하느님이 그 단어를 거기다가 쓰신다니까요.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이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탐욕, 탐심을 갖더라는 거예요. 단순히 그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그 때 무슨 돈의 개념이 있었겠어요?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살아야지. 달랑 인간은 아담과 하와 밖에 없었는데, 그런 부가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거기에 솨라흐 야드 라카흐,’ 탐욕(貪慾),탐심(貪心)이란 단어가 나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선악의 구조 속에 빠진 자가,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바탕으로, 자기의 손을 뻗어, 자기의 생명, 가치를, 쟁취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탐욕인 거고, 그러한 탐욕으로, 자기의 생명을, 쌓고, 성숙시키고, 완성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들이 다, ‘부자예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

예수님께서, 당신을 쫓겠다고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들을, 잘 떠 올려 보세요. 그 부자 청년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어요. 행위로 접근하는 거요. ‘무엇을 해야, 어떤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선한 분은 하느님이시다.’ 선문답 같죠? 뭐예요? 그건 , 무엇을 해서, 선한 일을 해서 구원에, 영생에 이르는 게 아니라, 선한 존재에 의해, 영생은 주어지는 거야!’를 설명하는 거예요. ‘선한 분은 하느님이신데 너, 어떻게 선한 행위를 나에게 물어봐?’ 그러는 거예요.

그 청년이 뭐라 그래요? 자기는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 그래요. 그러면서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부터 죽 이야기를 한다 말입니다. ‘다 했어요. 다 했어요.’ 그걸 뭐라고 한다, 그랬죠? 율법을 지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려고 하는 걸, ‘부자!’ 그래서 부자 청년이에요. 그 사람이. ‘다 지켰어요.’

주님께서 그 청년에게 이야기를 해요. 그럼 네가 가진 걸 다 팔아서 남 줘봐!’ 그랬어요. 단순히 네 재산 다 팔아서 나눠주고 와, 그러면 내가 인정해 줄게 이런 말이 아녜요. 여러분! 그래서 재산 다 팔아서 패가망신한 사람 많아요. 그리고 후회하고. 그런 얘기 아녜요. 네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그럼 너 부자네? 그러면 네가 갖고 있는 그것, 네가 쌓은 그것을 남에게 한 번 줘 봐.’ 어떻게 해요? 줄 수 있어요? 못 줘요. ? 율법주의라는 게 뭐냐면, 내가 그걸 열심히 지켜서 나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쌓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내 거예요. 못 줘요. 절대. 아담들의 본능이에요 그래서 그 부자가 자기 것 팔아서 안 줬다고 이야기하는 거요.

성경은! ‘네가 부자잖아. 그러면 네가 가진 거 한 번 줘봐그랬더니 못 줘요. 줄 수가 없어요. 율법은 모두 그 아가페의 사랑, 그 하나로 수렴되는 거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율법은 하느님 사랑이고, 그와 똑 같은 게 이웃 사랑이야그랬잖아요? 그 다음은이 아녜요. 그들은 똑같은 거야. 그랬어요. 그래서 십계명의 1계명부터 다섯 가지의 계명은, 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를 할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일부터 오까지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여섯째부터는 예수님이 오셔야 가능하기 때문에, 제목만 달아놓은 거고, 예수님이 오셔서 산상수훈에서 설명하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하나여야 돼요. 율법은 하나란 말예요. ‘사랑이란 말예요.

그러면 그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율법의 진의를 알고 다 지켰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을 가진 거죠? 그러면 그 사랑을 흘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는 그 율법의 진의인 사랑으로 율법을 지킨 게 아니라, 엉터리로 그 율법을 세목으로 지켰기 때문에, 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 그건 내 것이거든요. 내가 치른, 상승시키기 위해 내가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걸 주면 안 되죠. 그걸 어떻게 줘요? 못 주는 거예요.

진리라는 건, 하나여야 진리예요. 그리고 변하면 안 돼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 하나는, 한 분이신, 그 영원으로 존재하는 하느님! 그 분의 아가페! 사랑밖에 없어요. 그게 율법이란 말예요. 그 율법을 진짜 그 진의를 알고 지켰으면, 그는 당연히 그걸 흘려주게 되어 있어요. ‘이게 진리예요. 이게 말씀이랍니다. 이게 예수랍니다라고, 흘리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런데 율법으로 지키면 어떻게 돼요? 요걸로, 내 가치를, 상대적으로 상승시켜 남을, 구분하고, 구별하고, 판단하는, 단죄하는데 써요. ‘넌 왜 아직도 성경을 그것 밖에 몰라? 너는 왜 그렇게 허구한 날 교회를 빼먹어? 너는 아직도 헌금을 그 것 밖에 못 해?’ 이런 식으로!

자 그게 땅의 부자들의 딜레마예요. 그는 절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어요. 주님은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럼 누가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단 말이에요?’ 라고 걱정하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23-26) 2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렵다. 24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명쾌하게 얘기해줬잖아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잖아요? 그 부자 청년도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떠났고, 제자들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부자의 의미를 몰라요. 지금! 그러니까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 제자들은 알았어요. 화장실 갈 때 보니까, 예수님이 호지 않은 속옷을 입고 있어! (하하하) 부자예요. 부자였어요, 여러분!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을 때, 아버지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거기에 삯군이 있었어요. 여러분 고대 시대 때, 삯군을 부릴 수 있는 큰 배를 가질 수 있는 이들은, 동네에서 지주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그들이 그 배를, 어디에 감추어 두었다가, 도로 꺼내어서, 고기를 잡으러 가더라니까요. 부자였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면, 당신도 안 되고, 비싼 걸 입고 있으니까! 우리도 안 되는데, 그러면 누가 갑니까?

바늘귀라는 건, 진짜 우리가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의 고 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당시 성전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었죠? 요한묵시록에도 그걸 인용해서 쓰는데, 열둘은 아들의 수라 그랬어요.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나온 거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열두 문이 성전에 나 있는데, 첫 번째 문이 양 문이죠? 제물! 양들이 들어가는 문. 거긴 뚫려있어요. 제물만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맨 마지막 문이 함밋간 문이라는 문인데, 느헤미야서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건 심판의 문이에요. 그런데 그 열두 문 중에, 바늘귀 문이라는 게 있어요. 그 바늘귀 문은, 밤에 살짝 열려 있어요. 모든 문이 다 잠겨 있고, 양의 문만 요렇게 양들이 들어가는 거니까. 그건 닫을 수가 없죠. 그리고 바늘귀 문만 열려 있는데 사람만 요렇게 한 명 들어갈 수 있어요. 밤에! 낙타는 못 들어가요. 예수님이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문으로 낙타가 당연히 못 들어가죠. 그래 너희들도 못 들어가 아무도 못 들어가. 사람은 아무도 못 들어가. 밤의 세상에서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낙타 같은 부자는 절대 못 들어간다는 상징(象徵)이에요. 그리고 하느님과, 남편과 연합된 신부(新婦)! 그게 뭐예요? 창세기에서 사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 사람만 하느님이 그를 품어 안아 그리스도인, 하느님과 방불(彷佛)한 자가 된 그들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는 낙타는, 부자는 못 들어간다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람의 것으로는 절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을 갖출 수 없어!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의해서만 가능한 거야라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한 마디로 왜곡된 율법을, 완전히 묵사발 내버리신 사건이란 말예요. 고게 부자예요.

(요한묵시록 3:17-18)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권고한다. 너는 나에게서 불로 단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나에게서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눈을 떠라.

제발 좀 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제발 좀 봐! 이 말씀이 도대체 뭔지? 이 율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좀 똑똑히 봐!’ 그러는 거예요.

그러한 부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 혹은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단죄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한 땅의 부자들에게, 은혜나 용서 같은 게, 받아들여질까요, 은혜와 용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자가 선물로 받는 거예요. 그들에게만 그건 감사한 일이 되죠. 내 것이 있는데 내가 왜 은혜를 받아야 돼요? 자존심 상하게! 이게 선악과 먹은 아담들의 자존심이라니까요. 절대로 그들은 그 은혜나 용서 같은 것은 원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건 자기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나 통용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선언해 버린단 말예요. 거기에서 가난은 상대적 가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 가난! 그것 없으면 죽는 사람! 그렇게 가난한 자! 그들이 복 있는 자들이에요. 반면에, 부자들은 그거 없어도, 자기들이 갖고 있는 열심과 노력과 자원으로 생명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행하는 자들이란 말예요. 그걸 부자라 그래요. 그게 율법주의잖아요? 오늘날 개혁주의는 여기에 가까운 거예요.

그렇게 말씀을 사랑이라는 온전한 하늘의 떡으로 먹는 게 아니라, 잘게 부스러진 부스러기로 먹는 것이 율법주의에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도 생명의 책은 단수! 한 번으로 나오죠? 단수로 나오지만, 행위의 책은 책들! 복수로 표기되어 있어요. 성경을 사랑, 아가페, 진리, 예수로 못 보는 사람은, 그건 한 권이거든요. 그 책을 여러 세목이 적힌 여러 권의 책으로 보게 돼요. 요 책에서는 요걸 강조하고, 요 책에서는 요런 걸 교훈으로 주고 있고, 요런 식을 보게 된다 말예요. 그걸 부스러기라 그래요. 말씀은 하나예요. 은혜라는 떡이란 말예요. 하늘의 떡! 그런데 그것이 행위의 세목(細目)이 되면, 그 때부터 저주와 사망의 책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누가 가장 감동적인 반성의 모습을 보였습니까? 다른 말로, 누가 가장 부자였어요? 유다예요. 제일 멋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열두 놈이 다 도망갔다니까요. 수제자 베드로는, 욕하며 저주하면서 부인했죠? 가롯유다는 욕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어떻게 되었어요? 몰래 감춰둔 배, 싹 꺼내어서 고기 잡으러 갔어요. 생업에 열중했어요. 유다는 그 서슬이 퍼렇던 성전으로 돌아가서, 제사장들에게 돈을 집어 던지면서, 외쳤어요. 저 이는 무죄다.’ 그리고 내가 무죄한 자를 팔았으니, 벌 받아 마땅하다 그러고, 자기에게 벌을 줬어요. 멋있잖아요? 이게 율법주의예요. 성경은 그걸 부자라 그래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예수님께서 과월절 최후의 만찬 때, 최후의 만찬이란 말도 좀 그렇지만, 마지막 과월절 식사 때,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죠? 그런데 성경이, 유다에게 예수님께서 떼어 준 것은 부스러기라 그래요. 나머지 제자들에게 준 건, 떡이에요. ‘푸쉬키온.’ 그런데 유다에게 준 것만, ‘프소미온이에요. 성경에서 프소미온이란 단어가 딱 세 번 나오는데, 유다에게만 쓰여요. 유다에게만 부스러기로(가루) 줬다 그래요. 나머지 제자들에게는 알토스, ‘클라오떡을 뜯어서 프쉬키온조각으로 줬다, 그래요. 그렇게 주님이 떼어주신 빵조각을 먹은 자들은, 그들의 뻔뻔스러운 행동에도 생명을 얻는 반면에, 주님이 주시는 빵을, ‘프소미온. 부스러기로 먹는 자들은, 아무리 멋진 행동을 내어 놓아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더라는 거예요. 보세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말씀을 부스러기로 먹은 자가, 훨씬 멋있어 보이고, 떡으로 먹은 자들이 훨씬 못나 보여요. 그러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비교의 대표적 이야기가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예요.

(루가복음 16:19-20) 19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20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한 부자가 나오죠? 부자! 지옥 간 부자예요. 이 부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대요. 이게 누구의 옷이에요? 제사장(주교) 옷이에요. 제사장 옷이에요! 율법주의 전체를 통틀어 지금, 예수님이 두들겨 패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면, 성경은 날마다 호화로이 생활했다그러는데, 스트라이노카다 람프로스는 그냥 날마다 잔치만 벌였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모든 날들을 헤메라, 깨끗하고 훌륭하게 하여, 행복과 만족을 얻었다라는 뜻이에요. 날마다 잔치만 했다는 뜻이 아녜요. 그 부자는 모든 날들을 깨끗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내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추구했다 이거예요.

그러나 그 잔치는 자기 잔치, 인간들의 잔치예요. 바로 이 모습이, 율법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세상 인간들의 시선이며, 평가이며 실체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잔치를 벌이기를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행복해 하죠?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해주면, 진짜 개뿔도 가진 것이 없어도, 사람들이 존경해주고, 칭찬해주잖아요. 안 먹어도 배불러요. 저도 해 봤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도 죄()라 그래요.

그런데 그러한 부자와 대조(對照)가 되어 나오는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나자로예요. 그건 엘 아자르라는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한 거거든요? 하느님은 돕는 자이시다.’ 이런 뜻이에요. 하느님이 도우시니까 어떻게 되었다? ‘거지 되더라.’ (하하하) 그 거지라는 단어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에서의, 프토코스와 똑같은 단어예요. 그걸 그냥 거지라고 번역한 거예요. 가난한 자가 되더라. 뭐가 없으면 죽는 자예요. 그 거지! 하느님이 도우시니까, 거지가 되는 거예요. 말씀이 없으면, 하늘의 떡이 없으면, 사망이라는 것을 아는, 어떤 자의 대표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자! 나자로가 부자와 대조되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자로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있다 그러죠? 대문이란 단어, 펠른이란 이 단어는, 요한묵시록에 많이 등장하는데, 성전 문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그러면 부자의 문 밖에 있다는 건, 율법주의의 대문, 옛 성전 밖에 있는 거지예요. 마음이 가난한 놈이!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는 자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때였어요. 부정한 문둥병자들이나 죄인들이 쫓겨나 있던 곳이, 문 밖이에요. 그들은 부정한 자 개, 돼지로 불렸단 말예요. 그래서 거기에 그 나자로와 개가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루가복음 16:21) 21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조각)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여기보면 나자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부스러기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그건 프소미온이고,) 푸쉬키온은 조각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떼어서 준 조각! 율법주의의 대문 밖에서, 옛 성전 문 밖에서 그 성전에서 떨어지는, 율법이 떨어지겠죠? 그걸 떡으로, 조각으로 받아먹는 어떤 이가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지, 개 취급을 받고 있더라는 것이죠. 율법주의가 볼 때 거지, 개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께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부탁하던 가나안 여자에게, 개라고 한 것 아시죠? ‘내 자녀에게 줄 것을 개한테 안 줘!’ 그 여자가 뭐라고 해요?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가 똑같은 단어예요. 그 때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그래! 그게 믿음이라는 거야.’ 그 여자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게 믿음의 내용이라는 뜻이에요. 똑같은 이야기란 말예요. 거기에도 푸쉬키온이에요. 조각!

그렇게 거지 나자로와 개들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개 취급을 받는 어떤 자들이, 그 부자, 율법주의 옛 성전, 그 부자의 상, 제단에서 떨어지는, 그걸 조각, 떡으로 받아먹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거란 말예요. 그러나 그걸 그냥 부스러기, ‘프소미온으로 먹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유다의 부스러기를 먹는 이들이란 말예요. 그냥 율법으로 보는 거, 법으로 보는 거, 표피적으로 보는 거!

그렇게 모래 같은 광야의 부스러기를 먹은 자들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이죠. 그래서 가롯유다가 프소미온그 부스러기를 받고 나갈 때, 성경이 일부러, 가롯유다 앞에 뭘 쓰냐 하면, 시몬의 아들 유다라 그래요. 그걸 뭐 하러 거기에다 쓰느냐 말입니다. 한 번도 안 쓰다가! 시몬이란 말이 물이 없음, 광야, 사막, 모래예요. 시몬의 아들 유다가, 부스러기를 받고, 밖으로 나가더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그에게 필요한 게 정작 뭐였어요? ‘!’ 정결한 물! 그런데 포도주는, 그가 나간 다음에 주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떡만 받고 부스러기로 나가 버렸다니까요.

그 부자가 음부에 떨어져요. 그 음부라는 말은 하데스’ ‘가 부정 접두어. ‘데스에이돈, 말하다에서 나온 거니까! 하데스말이 없는 곳, 진리가 온전치 않게 회자되는 곳하데스라 그래요. 이 세상이 그래서 지옥인 거예요. 그러면 물이 없는 곳, 말이 없는 곳에서 그가 원하는 게 뭐겠어요? ‘.’ 이제 알았어요. 내게 필요한 건, 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 뭘 달라 그래야 돼요? 물 달라 그래야 돼요.

(루가복음 16:24) 24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불러요. 그런데 여기에서의 아브라함은,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고유대명사라기 보다는, 아브라함이 어떤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이잖아요? 그냥 일반 명사로, 어떤 무리, 교회의 아버지. 하느님! 이게 비유예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없는 메마른 혀! 엉뚱한 말로 오그라든 혀! 거기에 말씀의 물을 적셔서 혀를 살아나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에서 그 부스러기 같은 말! 그 모래 같은 말! 그걸 옥토로 적실 수 있는 물이 뭔지 먼저 조명을 해보고 가야 되겠죠? 이 땅의 부자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물! 그게 뭘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물은 진리의 말씀이에요. 성경은 항상 위의 물과 아랫물이 등장하는데, 아랫물은 바다로 표기가 되어서, 저주의 물로, 위의 물의 모형인데, 이게 진짜인 줄 알면, 이게 저주의 물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위의 물이 있단 말예요. 이슬! ! 이런 거. 이른 비, 늦은 비, 이건 다 은혜를 상징하잖아요, 그죠? 참이슬만 먹는 거 괜찮아요. (하하하) 그러나 우박이 떨어지면 큰일나죠?

(창세기 1:1-2) 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보이지 않는 당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시간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늘과 땅으로, 하느님을 나타내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나 여기에서의 하느님도,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은 아닙니다, 여러분. 엘로힘으로서의 하느님이에요. 엘로힘은 알레프가 하느님인데, 그것의 복수가 엘로힘이거든요. ‘하느님들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어줍지 않게 뭐 삼위 일체, 알지도 못하면서 그 딴 얘기들을 하는데, 그거 얘기하는 거 아녜요. ‘하느님들!’

인간들에게 설명이 가능한, 그런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것도 하느님의 실체는 아녜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거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하느님이 엘로힘이라 그래요. 그래서 복수로 쓰였어요.

그런데 어떻게 설명을 해 가시는가 하면, 땅으로 하늘을 설명해 가세요.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하늘이 존재합니까? 파란 하늘! 뭉게구름 떠 있는 하얀 하늘! 노을 빛 물든 누런 하늘! 하늘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늘이 있는 것처럼 살죠. 그렇게 생각해요. 하늘을 그려놓고 그냥 하늘이라고 불러요. 죽어라고 올라가 봐야 그거 없다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하늘을 상정하고 추론을 하느냐 하면, 바다를 보고 하늘을 그려요. 땅의 것을 갖고 하늘을 그린다 말입니다. 마찬가지예요. 성경은,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을 설명하는데, 땅의 것에서 하늘을 읽어냈을 때, 그 땅의 것을 하늘이라 그래요. 그래서 성경은요. 하늘의 진리를 이해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하늘들!’이라 그래요. 헬라 원어로 보면, ‘하늘들이란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그 단어는 전부, 교회를 가리켜요. ‘하늘이라 그래요.

그렇게 땅의 부스러기를 먹는 자들, 이 세상의 부자들은 물이 없어서, 결국 모래, 부스러기로 죽는 거예요. 거기 반드시 물, 말씀, 호흡, 생기, ‘루와흐가 부어져야 더스트(dust)가 아녜요. 그 때는 생령이 된다 말예요. ‘하이 네페쉬 하야가 되는데, 그게 빠지면 부스러기라니까요. 그들은 그 , , 이 들어가지 않으면, 하느님의 말을 전부 법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선악과 먹은 자니까, 그게. 성경은 일관성 있게 그 이야기만 하고 있다니까요. 창세기 11절부터~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용이, 진리와 대적하기 위해, 항상 뭘 밟고 서요? 바다 모래! 그죠?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도 바다와 땅의 경계, 바닷가,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죠? 그게 뭐예요? 모래지 뭐예요. 마태복음에서도,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멸망의 때에 전부 무너지게 된다, 그러고, 반석 위에 지으면, 든든하게 선다, 그러잖아요?

반석은 뭐예요? 추루!’ 그 단어 자체가 물을 내다라는 뜻이에요. 돌이라는 의미보다 반석이라는 단어 자체가 물을 내다란 뜻이에요. 모래 위에 너희들의 성전, 집을 지으면 그게 옛 성전이 되는 거고, 물을 내는 그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그게 참 성전이 되는 거다라는 뜻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물이 있어야 돼요. 진리의 말씀이에요, 물은. 거기에 물이 있는 거! 하늘! 그 물! 그렇게 이 땅의 부자들은, 말씀을 부스러기로 먹고, 물이 없어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인 거예요. 그래서 음부! 하데스에서 부자가, ‘제발, 물 좀 찍어서 혀에 대 달라고 부탁하는 거요. 그랬더니 하늘 아버지가 뭐라 그래요?

(루가복음 16:25) 25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너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니까, 여기서 고생하고, 나사로는 세상에서 고생했으니까, 여기서 좀 위로 받아야 되지 않겠니? 그런 말 아녜요. 그건 해방신학자들이 하는 말이고!

여기에 쓰인 단어가 아가토스카카라는 단어거든요. 부자는, 이 세상에서 너 좋은 것을 받았다아가토스’, ‘선하다라는 뜻이에요. 부자는 세상에서 선하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나자로는 세상에서 고난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카,’ ‘무가치한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에요. ‘카카라는 단어가! ‘너는 세상에서 선하다라는 평가를 받았어,’ 날마다 연락(宴樂)했잖아, 열심히 깨끗하게 살아서 행복을 쟁취하는 삶을 살았으니, 그는 아가토스,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나자로는? 그 율법주의 밖에서 진리만 받아먹고 있었으니, 이 세상은 그를 무가치하게 평가를 한단 말예요. ‘진리가 밥 먹여 주냐?’ 진짜 사는 건 그 길 밖에 없는데. 세상은 그런다니까요. ‘진리가 밥 먹여 주냐?’ 그저 웃지요!

그래서 그 부자는 말이 없는 곳, 그 하데스에서 못나간다 그러는 거요. 못나간다! 그랬더니 부자가 뭐래요? 나에게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이거 비유예요. 예수님이 지금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다섯 하면 생각나는 게 뭘까요? 율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세 오경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주의 전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내려가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좀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믿을 겁니다, 그래요. 율법을 부스러기가 아닌 떡으로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얘기 좀 해주세요, 그래요. 27절 보세요.

(루가복음 16:27-29) 27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모세와 예언자는 누구? 구약이에요. 율법! ‘구약 성경이 있어, 그런데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너와 똑같이 이곳에 와야 돼,’ 그러는 거예요.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가 있다고 그런다니까요. 단 율법을 부스러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율법 속에서 생명의 떡인 예수를 읽어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거길 모면할 수 있어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제사장, 율법주의 상에서 떨어지는 율법을, ‘프소미온이 아니라, 부스러기가 아니라, ‘푸쉬키온조각으로 받는 이들이 반드시 있다는 얘기예요. 모세와 예언자를 예수, 떡으로 받는 이들이 있다는 얘기예요.

(루가복음 24:44-46) 44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46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모세와 율법을 갖고 예수님이 !’ 예수를 설명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여니까, 깨달음이 와요. ‘호라오가 일어나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왔는데, 못 알아봐요. 그때 예수님이 말씀을 설명해주시자, 그들의 뜨거워지고 예수를 알아보자, 가버리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가시죠. ‘푸쉬키온이에요. 괜히 떡이나 하나 먹으라는 게 아니라, 진리! 말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늘 아버지가 하데스에 있는 부자에게 바로 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율법 속에서 진리이신 예수를 들을 수 있어. 분명 들을 수 있어. 은혜가 가입하면. 그랬더니 부자가 뭐라고 하는 지 보세요.

(루가복음 16,30-31) 30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 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31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대요. ‘모세와 예언자, 즉 율법에서 진리를 못 듣는다 할지라도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저희에게 가면, 저희들이 회개할 겁니다.’ 그래요. 그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가면 신기해서, 어떻게 죽은 놈이 살았지? 이래서 믿을 겁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았다는 건, 예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십자가와 부활! 그거면 구약과 상관없이, 그렇게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뭐라 그래요? 안 돼! 그래요. 그들이 말씀 속에서 진리와 만나지 못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 이야기를 똑같이 해 준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 네가 있는 곳에서 못 벗어난다. 하데스에서 못 벗어난다.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한다고, 다 그리스도교가 아닌 거예요. 그게 뭔데요? 진짜로! 그게 어떻게 믿겨지세요? 고민을 해 보시라니까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니까. 십자가는 뭐고, 부활은 뭐냐고요? 말씀을 진리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예요.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복음을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못 듣고 법으로 듣는 이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설교 많이 했는데, 다 그걸 진리로 못 받아들였잖아요? 살아난 분이 얘기를 하면 뭐라고 받아들이느냐 하면, ‘아 그래 저걸 교훈 삼아서 저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인다고요.

그러니까 그건, 예수님이 살아나서 그들 앞에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얘기예요. 그냥 그 예수를 보고, 저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대. , 저분이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셨대. 그러니까 저분을 열심히 섬기자!’ 이게 여러분의 영생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이걸 건강한 신앙이라고 착각(錯覺)들을 한다니까요. 그리고 내가 예수를 섬기고 있고, 믿고 있다고 얘기를 해요. ‘저분이 내 죄를 대속(代贖)하셨대. 그러니까 저분을 열심을 섬기자!’ 그게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救援)하냐고요, ? 그분을 섬겨서! 그분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고, 그 살아남이 곧 나의 살아남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거예요. ‘, 저분은 그렇게 죽어야 되는 거였구나.’ 그리고 거기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에게 부은 그 여자가, ‘빨리 죽으세요.’ 하고 부은 거예요. 당신이 죽어야, 일곱 귀신 들린 내가 사는 거니까. 성경말씀을 표피적으로만 해석해서, 부스러기로, 율법의 조항으로만 보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칭 성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해요. 축하도 하고, 기념도 하고, 단식도 해요. 통곡도 하고, 별 거 다 합니다. 그럼에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모세와 예언자 즉 성경을 그냥 율법으로만 보게 되면, 그건 부스러기, 물 없는 빵, 모래가 되어, 그를 죽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성추루, 생수를 내다라는 단어임에 반해서, ‘부정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라에서의 그 돌은 에벤이에요. 그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그 돌이라는 단어가! 하느님의 아들로 때려죽이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그들에게 진리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것 맞고 죽어요. 그래서 바오로가 그러는 거예요. 누구에게는 그게 거치는 돌이 된다.’ 예수 때문에 죽는 이들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 맞아 죽는 이들이 부자예요.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늘의 모형(模型)이라고, 히브리서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로마서는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느님의 능력(能力)과 신성(神性)이 담겨 있다 그래요. 그릇이란 뜻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만물! 그리고 만물들을 붙들고 있는 어떤 법칙과 현상들까지도, 다 하늘의 것을 모형하고 있는 거죠? 그건 진짜가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진짜가 있는데, 모형이 있으면 이게 뭐예요? 가짜라 그래요. 이걸! 그리고 이 있는데, 그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가짜 그릇은 뭐예요? ‘거짓이에요. 이게! 그렇다고 이 가짜와 거짓이 나빠요? 이걸 통해 여러분이, 그 진리를 알 수 있다면, 그 하느님의 그 아가페, 그 사랑을 알 수 있다면, 그게 하늘이에요. 그 땅의 것으로 하늘을 설명하는 게 하느님이라니깐요.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에서 예수, 진리를 발견해내지 못하면, 그건 그냥 가짜예요. 그게 거짓이라니까요. 그런데 그걸 진리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거짓을 그대로 계속 설교하면서, ‘착하게 잘 사세요. 그러면 복 줄 거예요. 하늘에서 상이 커요. 면류관 줄 거예요.’ 그걸 거짓말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 이야기하는 이들을 거짓예언자라 그래요.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그러니까 세상이 나쁜 게 아니라, 그 세상만을, 진짜요, 참이라고 보는 이들이, 미련하고 둔한 세대인 거예요. 그거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껍데기를 참으로, 진리로 곡해(曲解)해서 그걸 열심히 지키고 추구(追求)하려하는 그런 이들이 바보인 거예요.

하여튼 인간들의 손만 가면, 모든 게 다 망가져요. 그리고 또 재주들은 좋아요.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 내! 참 재주도 좋다. 어떻게 그걸 기필코 만들어내니?’ 좀 있으면 복제(複製)고 뭐고, 이제 새로운 종()이 생길 거예요. 그런데 서서히 생겨서, 나중엔 여러분이 다 인정하며 살게 될 거라니까요. 그렇게 망가져가는 거예요. 여기는요!

율법이라는 껍데기에 묶여서 성경을 무서운 율법 책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읽어내면서, 자유(自由)의 함성(喊聲)을 외치는 이들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진짜 살아계신 예수를 보고서도, 율법에 묶여서, 그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처럼 예수를 본 적이 없는데, 말씀을 통하여, 그 예수를 보는 이들이 있더라는 거예요. 말씀을 통하여. 전자(前者)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저 모형이요, 가짜일 뿐이죠. 예수님이 왔는데 사람으로 왔어요. 진리를 담고 왔어요. 그런데 진리로 못 알아먹어! 그러면 그 예수는 가짜예요.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특히 예수는 거짓말쟁이라니까요.

예수님이 내가 진리다.’ 그러면 그 예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으면 그 예수는 필요 없어요. 이제도 아 이거였어요.’ 해야지! 얼마나 아프셨을까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말예요. 우리는 그 진리의 그릇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인 진리를 깨달아야지, 그 예수라는 껍데기를 숭앙(崇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진리를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와 십자가는, ‘파님,’ 쇼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가치 없다는 게 아녜요. 그게 진리가 될 때, 가치가 있는 거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땐, 그건 (show)’라는 거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가장 처음하신 일이 평화가 있을지어다.’ 그랬죠? 그건 무슨 예수님이 이제 내가 살아났으니까, 안심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걸 거기에다 적어놓은 게 아니라, 성경기자들이 평화다. 에이레네, 휘민. 너희들은 평화다.’ 이렇게 한 어구로 어떤 걸 축약(縮約)해서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평화, 에이레네가 뭐라 그랬어요? 멍에는 소 두 마리가 항상 같이 맨다고 그랬죠? 소 두 마리가 멍에를 함께 매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걸 형상화(形象化)시켜서 그려놓은 게, ‘에이레네라는 단어예요. 요걸 하느님이 이루신다 해서 예요. 그러니까 평화다!’

열왕기상 9장에서, 성전 짓기가 완료된 걸 한 단어로 샬롬이라 그래요. 평화라 그래요. 진짜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그걸 평화라 그래요. 하느님에 의해 완성됐을 때! ‘, 이제 진리가 완성됐구나! 하느님의 뜻이, 언약이 완료가 됐구나!’라고 했을 때, 그걸 평화라 그래요. 그 때 그 평화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게 교회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부활(復活)하셔서 이제 일이 끝난 거예요.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런 거예요. ‘에이레네, 휘민그랬더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먹죠? ‘평화다.’ 그러니까 알아먹죠. 처음엔 못 알아먹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에 토마가 없었어요. 잠깐 화장실을 갔는지, 어딜 갔는지, 하여튼!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의심 많은 토마로 낙인이 찍혀서!

뭐가 의심 많은 토마예요? 나라도 안 믿겠네. 나는 못 봤는데, 나머지 제자들이 봤다는 거예요. ‘그럼 나에게도 보여줘! 그럼 나 믿을게당연히 그래야죠. 그 제자들을 불과 며칠 전까지 누가 높으냐 서로 싸우던 제자들을 어떻게 믿느냐고? 예수님이 잡혀가는 그날까지 누가 높은 자리에 올라갈까 싸우던 고놈들을 어떻게 믿느냐고요? 당연히 나는 못 믿어, 난 보면 믿을 거야!’ 그랬단 말예요. 그러면 진짜 토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 진짜네.’ 그랬으면 그걸 진짜 믿음이라 그래요? 성경이. 아녜요. 그러면 성경 자체에서 충돌(衝突)이 일어나요.

저도 예전에 그 원문을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냥 당연히 번역본들만 읽으니까. ‘, 참 의심도 많은 놈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안 믿냐? 그리고 어떻게 옆구리에다 손까지 넣어봐?’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손을 넣어 보았다는 대목은 안 나와요. 그냥 우리가 막연히 추측하는 거예요. ? 나는 그럴 거거든. 그죠? 성경 어디에 토마가 넣어 봤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정의를 성경이 다시 내려야 돼요.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면, 그게 율법주의가 된다니까요. 아녜요. 거기서 호라오깨달아지는 걸, 내가 신앙(信仰)하는 거예요. 진리를 신앙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토마가 거기에 손을 넣어봤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건! 그래서 다시 원문(原文)을 찬찬히 보니까, 안 넣었어요. 그리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말씀을 듣자마자 토마가 호라오했다 그래요. 찾아볼게요.

(요한복음 20:25-29)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야 이 나쁜 놈아! 이렇게 보이잖아요? 여기에 의문문이 없어요. 완료 직설법 능동태.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께서 너는 나를 호라오 하네 그리고 믿네.’ 이런 뜻이에요. ‘에이돈이라는 단어가 아녜요. 에이돈은 눈으로 보는 거. 그런데 호라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는 걸, ‘호라오라고요. 여기에 그 단어가 쓰였어요. 예수께서 너는 나를 호라오하네. 어떻게 안 만져보고 내 말을 듣고 호라오하지?’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호라오하고 나를 어떻게 믿어? 그랬어요.

그래, 그렇게 보지 않고, 여기엔 또 에이돈이에요. 네 눈으로 보는 걸 믿는 게 아닌,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를 호라오하고 믿는 그들이 복된 거야. 너는 이제부터 그들의 표상(表象)이 되는 거야!’ 이 이야기예요. 그래서 거기에 토마가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는 진짜 믿음이 뭔지를 토마를 통해서 설명해주는 거예요.

아니 보이는 거, 그까짓 거 손가락 넣어보고 믿는 거, 이게 무슨 믿음이냐고요? 그거는 조금 있으면 또 금방 싫증하고, 금방 의심해요. 그렇게 인식하여 믿은 건! 그런데 내가 진리가 되어 내 마음 안에 그 법을 갖게 되면, 그까짓 거 안 봐도 돼요. 안 넣어 봐도 믿는데 왜 넣어 봐요?

여러분 믿음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눈에 보이는 거,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 한 번 보세요. 그 분들이 이제 말씀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하니까, 미친 짓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 그냥 호 코스모스,’ 세상이라는 걸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예수를 향한 열심을 내놓는 그것도, 역시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것대로 행하겠다 이거! 아녜요. 그 안에서, 진리를 봐야 돼요. 그리고 그 진리가 돼서 여러분이 하늘이 되는 거예요.

그게 내 안에 진리로, 사랑으로 딱 간직되어 있어 보세요. 물론 우리 육이, 늘 방해를 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리지만, 뭐 부러운 게 있어요,  뭐 대단한 부끄러운 게 있냐고요? 이까짓 몸뚱이에 일어난 일을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고 상처로 갖고 있고, 또 이까짓 몸뚱아리에 두른 금테가 뭐 그렇게 자랑스럽냐고요? 내 안의 그 진리(眞理)가 진짜인데, 그게 진짜 생명(生命)인데. 다른 것에 눈 두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그냥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그러면 혼자 있어도 행복해요. 괜찮아요! 뭐가 외로워요? 그리고 그 하늘이 된 내가, 한 없이 사랑스러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주신, 내 주변의 작은 것들! 내 가족들! 다 그냥 귀하고 가치 있고 사랑스러워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뭐? 별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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