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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소리를 그리는 자들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4 조회수1,466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14..

(공동번역성서)

소리를 그리는 자들

 

글이라는 거, 문자라는 건 소리를 그린 거예요.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면 글에서, 그림이 되는 거예요. 그 소리가 가진 그 내용을 중심으로, 그 그림을 축약하면, 글이 돼요. 단순히 소리만을 그린 걸, ‘표음문자라 그러고, 우리 한글이 표음문자예요. 대표적인 소리문자입니다. 소리문자로 뜻을 설명하기는 대단히 힘들어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죠. 그 의미까지 함께 그린 걸 표의문자라 그러죠. 굳이 분류하자면 성경은, 표의문자예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소리가 없으신 분이에요. 소리가 없는 분! 그분의 것을 그리기 위해선 그분의 뜻과 마음을 그려야 되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이걸 소리로 읽어버리면, 여러분은 그걸 잘못 읽는 거죠. 하느님의 뜻! 그 마음을 아가페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해요. 그걸 그려놓은 게, 말씀이라 그래요. 뜻을 그리는 거!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문자를 준 게, 시내 산에서예요. 이세상의 모든 문자의 기원이 애굽문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애굽으로 들여보낸 거요. ? 말을 주려고. 말씀을 주려고, 문자를 주려고. 그 문자가 유일하게 있었던 애굽으로 보내는 거예요.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그 문자를 알고 있어요. 당시에는 왕족이나 제사장 급에서만, 문자를 알았어요. 그러나 그 애굽 문자는, 상형문자, 신에게 바치는 문자였어요. 그래서 평상문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문자예요. 한 마디로 형상은 있으되, 그걸 알고 익히고 있는 사람도, 뜻을 몰랐어요. 그냥 신에게만 바치는 거예요. 글이라는 걸, 문자라는 걸, 말이라는 걸! 하느님께서 그 문자를 사용하셔서 모세에게 계명을 주시는 거요. 그러니까 모세가 깜짝 놀랐죠. 모세는 왕궁에서 신에게 드려지는 말, 드려지는 글만 보아왔는데, 신이 자기에게 글을 준 거예요. 말을 준 거예요. 깜짝 놀란 거죠.

모세는, 그 문자의 형태는 왕궁에서 익혀서 알고 있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몰랐어요. 하느님은 40일 간 그를 산 위에 앉혀놓고 그 의미(意味)를 가르쳐요. 그럼에도 모세는 그 진의(眞意)를 다 깨닫지 못해요. 그게 인간의 한계(限界)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그 말이 그 안으로 들어와야 돼요. 그게 구약의 새 언약(言約)이에요. 말이 들어와야 돼요.

(출애굽기 34:29-30) 29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내려 왔다. 산에서 내려 올 때 모세의 손에는 증거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야훼와 대화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30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니 그의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이걸 잘 이해해야 하는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바오로 서신이 다 곡해(曲解) 되게 되어 있어요. 언뜻 보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처럼 보이죠?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하면, 여러분의 얼굴에 광채가 나나요? 어떠세요? 똑같은 거예요. 그 하느님과 우리가 지금 만나는 하느님이 다른 하느님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기도, 수시로 하느님과 대화한다 하면서요. 그러면 여러분 얼굴에 그런 광체가 납니까?

이 구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광채가 나는 건 모세의 얼굴이 아니라, 모세가 들고 있는 증거판이에요. 얼굴 꺼풀이라고 번역이 된, ‘오르 파님이라는 그 단어! 파님, 보이지 않는 것의 겉으로 나타난 걸, ‘파님이라 그래요. 오르가 표면을 나타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나타난 것으로 준 거! 그걸 오르 파님이라 그래요. 단순히 사람의 얼굴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란 말예요.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하느님의 얼굴에 사용되는 단어예요. ‘내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얼굴을 뵈옵나이다에 쓰는 말. 하느님의 얼굴이 어디 있어요? 영인데. 그건, 하느님의 나타나심, 말씀! 진리의 말씀! 그걸 내가 직면했다, 깨달았다, 이런 뜻이지! ‘하느님의 얼굴을 내가 봤다.’는 뜻이 아녜요. 영은 보이지가 않아요. 소리도 없단 말예요. 거기에 등장하는 게, ‘파님이란 말예요. 그걸 그냥 얼굴이라고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실체! 그걸 보이는 것으로 나타낸 것.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사랑, 이런 거! 보이는 것으로 나타낸 것, 계명, 율법, 돌 판이란 말예요. 고걸 오르 파님이라 그래요. 거기에서 빛이 났어요. 그런데 그 광채가 나다라는 단어도, 단순히 빛이 나다란 단어가 아니라, ‘뿔을 내밀다, 뿔을 건네주다라는 의미예요. 뿔은 당연히 제단의 네 뿔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거 잡으면 사는 거죠? 뭐예요? 그래서 구약성경에, 그 뿔을, 말씀, 진리로 설명한다 말예요. 그걸 잡으면 사는 거예요. 진리를 잡으면 사는 거예요. ‘뿔을 건네주다는 뜻이란 말예요.

모세가 하느님의 그 파님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증거 판, 그 율법이 뿔을 건네주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진리가 있더라는 뜻이에요. 모세의 얼굴에서 그냥 광채가 막 났다 이런 뜻이 아니라. 그러나 선악구조 아래에서의 아담들은 그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죠. 그래서 지성소가 막혀 있었던 거예요. 못 가요. 못 들어갑니다.

모세도 그 뿔을 감지하지 못했어요. ‘광채를 깨닫지 못했더라.’ 그랬어요. 자기 얼굴에 빛이 나는 걸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 아녜요. 깨닫지 못했더라.’ ‘야다라 그래요. 아론과 이스라엘도 그 진리에 가까이 가지 못했어요. 아론은 누구? 제사장, 율법은 가까이 못 가요. 30절이에요. 그런데 모세가 그들을 불러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한다. 다바르예요. 말하다.’ 말을 하자 그들이 진리로 가까이 와요.

 

(출애굽기 34:31-33) 31 모세는 아론과 회중의 모든 지도자들을 불렀다.(카라.’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을 초청할 때 쓰는 단어) 그들이 자기 앞에 나아오자 모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32 그 뒤에야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나아왔다.(함께 눕다, 하나가 되다’) 모세는 그들에게 야훼께서 시나이산에서 주신 계명을 모두 전하여 주었다. 33 모세는 할 말을 다 하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겠어요? 그걸 가린 거예요. 그 말, 그 계명이 적혀 있는 걸, 가린 거란 말예요. 그게 오르 파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니까,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냥 얼굴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 얼굴! 얼굴이 뭐예요? 은 영, ‘얼의 꼴.’ 나타난 게 얼굴이란 말예요. 원래 얼굴의 뜻이! 이게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이러는 거예요.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로 전할 때는, 계명에서, 율법에서, 수건이 걷혀요. 진리가 말해지니까! 그런데 그게 진리로 말해지지 않고 그냥 파님으로 존재할 때는, 수건으로 가려져 았는 거예요.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그 가려진 것을 그대로 보고, ‘이게 율법이야? 이게 말씀이야?’라고 그 수건이 덮인 채로 보는 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그걸 벗기지 못하고. (이해가 안 가면 여러 번 읽어야 돼요. 이 개념이 확실치 않으면, 맨날 성경을 허투르게만 보게 돼요. 곡해(曲解)하게 된다 말입니다.)

그 율법, 표피적 율법의 개념은, 곧 사라져버릴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그게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수건으로 가렸다 그러는 거예요. 성경이! 사라질 거예요. 율법은 진리로 귀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액면 그대로 수건이 덮혀 있는 상태로 인식해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이라는 것 자체가!

따라서 그 율법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전할 때는 수건이 벗겨지게 되는 거고, 여러분은 지금 수건이 벗겨진 진리를 받는 거예요. 그 율법 자체, ‘파님의 상태로 있을 때는, 수건으로 가려진 거예요. 그래서 이거 해, 저거 해,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이렇게 가려진 상태로, 껍데기로만 보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하느님께서 그 돌 판을 법궤 속에 감추어 두라고 하시고는 누구라도 거기에 들어가면, 다 죽인다.’ 그랬어요. ‘만지기만 해, 다 죽인다.’ 그랬어요. 아니 줬으면, 그걸 열심히 가르쳐서 공부하라 그래야지! 가려놓고, 상자 안에 넣어 놓고 만지면 다 죽인다.’ 그랬다 말예요. ? 하느님이 진리를 주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그리로 가까이 가게 되면, 그게 선악과요, 죽음이란 말이에요. 가려놓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3:13-18) 13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14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리워져서(구약, 율법)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15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일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16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17 주님(그리스도)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 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여기서 수건은, ‘휘장이라는 단어거든요. 휘장, 세수하고 얼굴 닦는 그런 수건이 아니라, ‘휘장이라는 거, 휘장이, ‘파님, 프로소폰여기서는 그 얼굴을 프로소폰이라 했는데,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프로소폰이에요. 그 표면, 나타난 것! 이걸 휘장이 덮고 있어요. ?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서 장차 없어질이라고 번역이 된 카탈게오,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느냐?’라고 했을 때, 사도 바울이 그 율법은 폐하여지고얘기할 때, 고 단어에요, ‘장차 폐하여지다.’ 그러니까 장차 폐하여질 것을 주목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휘장으로 가려놓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명나무 열매를,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가려놓은 건, 은혜라니까요. 그런데 어떤 계명인가 하면, ‘프로소폰, 얼굴.’ ‘프로소폰으로서의 율법이요, 계명이에요. 그건 뭐예요? 표피적인 이해! 그 율법, 그냥 문자로서의 율법. 그걸 얘기하는 거죠. 그걸 가리는 거요. 그건 휘장으로 가려져 있어야 돼요. 선악과가 무엇인지를 알 때,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거거든요. 그것이!

선악과, 생명나무 열매는 다른 거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동산에 나무가 하나 있다그랬어요. 단수로 쓰였어요. 계속 단수, 단수, 단수예요. 하나인데 그걸 선악으로 보게 되면 죽음의 나무예요. 먹으면 죽어요. 그런데, , 이게 뭔지를 알게 되면, 그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거란 말예요. 율법을 그대로,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해서,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이해를 해서, 그것에 묶여버리면 죽음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거잖아요? 고게 가려져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자체가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 그 진리가 진짜 가치잖아요? 그래서 가려놓는 거란 말예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인간들이 가장 먼저 하려고 한 게 뭐였어요? 손을 뻗어 따먹는 것! 요걸 탐욕, 탐심이라한다 그랬죠? 그거는 안 돼요. 그래서 가려야 되는 거예요.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수건으로 가려진 율법을, 가려진대로만 받더라. 그래요. 사도 바오로가 14절을 보면, 그 휘장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진다, 그래요. 그리고는 그게 구약을 덮고 있다그래요.

그런데 주님께로,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면 그게 에피 스트레포라는 단어인데요. 그건 완전히 개종하다라는 뜻이에요. ‘완전히 개종하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개종이 필요해요. 수선이 필요한 게 아니라! 개종을 하면, 그 휘장이 벗겨지고, 지성소의 실체가 훤히 드러난다는 거예요. 그게 16절이에요. 그리고는 17절에서, 큐리오스, 말이다!’라고 이제 설명해주는 거요. 18절을 보면, 설상가상으로, 그 수건이 모세의 얼굴도 아니고, 우리의 얼굴을 덮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해요 아녜요. 고걸 헬라어 원어 그대로 직역을 해 드릴게요. 그게 무슨 말인지!

그리스도의 형상인, 카토프리조마이거울이라고 번역을 해서, 무슨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게 번역해 놓았는데, 그 그리스도의 형상이 반영이 된, 나타나 있는 그 모든 영광! 그 영광! 독사와 그 프로소폰, 그 말에 의해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열리다, 해석되다, 깨달아지다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언젠가는 다,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표피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그 말씀에 의해, 그 휘장이 열리게 되면, 그의 형상, 그 진리를, 진리가 나타난 그 영광! 그 말이 그걸 여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이 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그리스도의 그 영광이 반영이 된 그것, 그 실체로 보게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러니까 진리가 되면, 성경을 덮고 있는 휘장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 보이게 된다는 거예요. 활자(活字)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내용을 모르고, 그 활자로 큐티 맨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한 자를 읽더라도 그걸 그리스도, 예수라는 진리로 해석을 할 때 그게 여러분의 것이에요. 그게 진짜 가치 있는 거란 말입니다.

여기서 수건을 벗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아나 칼립토라는 단어는 아나가 반대니까 그 칼립토라는 단어에다 접두어를 붙인 거잖아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찾아드리면, 여러분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거예요. 고린도후서 4:3 보세요.

(고린도후서 4:3) 3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요게 칼립토예요. 여기에다 아나를 붙여버리면, ‘수건을 벗다예요. 그러니까 수건을 어디를 덮고 있는 거였다? 말씀을 덮고 있는 거예요. 얼굴을 덮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모세의 얼굴을 덮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원래 우리 모두에게 가려져 있던 거예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를 받은 이들에게만, 열려지는 거요. 그리고는 그들만, ‘그래 이거야? 이런 거야?’라고 하고 있고, 그걸 모르는 대다수, 대부분이, 그것도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열려 있는 자들을 가리켜서, ‘, , 저희들만 예수 믿어?’ 이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점점 얘기를 안 하게 되는 거죠. 상대를 안 하게 되는 거요. 그리고 아무데나 가서 함부로 말하기도 싫어요. 어차피 이해를 못 할 거니까. 그러니 이 성경을 여전히 법으로만 보는 이들은 수건이 덮인 엉뚱한 말씀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 수건은,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말씀으로만 벗겨지는 거예요. 그게 벗겨지면, 성경이 절대 법으로 안 보여요. 나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런 것으로 안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모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진리의 문자를 받았어요. 그걸 율법(律法)이라 그럽니다. 크게 포괄적으로 성경(聖經)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글자는 아무도 모르는 글자였어요. 모세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내가 한 말을 외워 들리라.’ 자꾸 말해 주어 외우게 하라는 거예요. ? 문자를 모르니까. 외워 들리라! 그래서 하느님이 그 문자를 하나하나 가르쳐 준 거예요.

그러나 그건 선악구조 속의 인간의 마음에 담길 수 없는 하늘의 진리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때,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 그래요. ‘야훼라는 그 단어는요, 진짜 하느님의 이름이 아녜요. 하느님의 이름이 어디 있어요? 그건 하야동사에서 나온 건데, 그걸 그냥 파자하면, 내 말을 네 말로 쓰자야훼예요.

그러니까 야훼는 그 분을 진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면 성립이 안 돼요.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네 말을 통하여, 내 말! 진리를 설명할 거야.’ 이걸 야훼라 그래요 히브리어가 그래서 모세에게 나타나면, 하느님이 자기를 야훼라 그래요. ‘내 말을 네 말로 쓸께.’ 모세가 그러죠, ‘난 말이 없는데요. 말이 어눌한데요.’ 내 말을 네 말로 쓸게 걱정하지 마!’ 그런 그림이 괜히 나와 있는 게 아녜요. 모세가 말이 굉장히 어눌했나보다. 이런 걸 우리가 알라고 쓴 게 아니란 말예요.

원래 히브리어는 자음 밖에 없다. 모음의 역할을 하는 자음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생긴 거예요. 히브리어 모음은 AD 7세기 경, 히브리 학자들이,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모음을 만들어서 붙인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모음이 없어요. 모음이 없으면 문자는 읽을 수가 없어요. ‘기역이것도 역시 모음을 넣어서 우리가 읽는 거죠? 그리고 띄어쓰기가 없었거든요.

그러면 성경이라는 건, 원래 처음 주어진 성경이라는 건, 처음부터 자음만 다닥다닥 붙어서, 한 덩어리의 자음이었어요. 그건 읽을 수가 없어요. 모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건 소리로 읽으라고 준 게 아니라, 그 하나, 하나, 하나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갖고 나를 알아먹으라고 준 거요. 그러니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이에요. 어떻게 알아먹어요? 하느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면! 그냥 한 덩어리예요. 띄어쓰기도 없고, 모음도 없고, 읽을 수도 없어요. 그래놓고는 하느님이 줬다니까요. 못 알아먹으니까 어떻게 해요?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이게 진리야!’ 이렇게.

하느님에게는 소리가 없다 그랬습니다. 뜻이 있어요. 마음이 있어요. 사랑이라는 그분의 실체, 그걸 그려준 게 성경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걸 알아먹어야지, 이걸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금지하는 법으로 읽으면 절대 안 돼요. 이 세상은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의 방법론을 여기서 찾으려고 해도 안 돼요. 처세술, 이런 거 적혀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적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배우셨느냐고? 여태까지 성당에서? 그거 배우셨어요? 지금까지! 그런데도 불만이 없어, 다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육의 눈으로 볼 수 없게 휘장으로 감추어 뒀다고 하는데, 다들 그걸 보고 있다 그래요. ‘아냐, 난 보여! , 성전이 저기 저렇게 있는데.’ 껍데기만 보는 거요. 예수님이 그들을 뭐라 그래요?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에요. ‘그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하잖아요. ‘그게 진짜 소경이야!’ 그런데 여러분 뭐로 그걸 하느님이 가리는지 아세요? 휘장이 뭐예요? ! 대한민국의 교회여! 어디부터 어디로 가야할지.

 

(히브리서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우리는 마음놓고 지성소에 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그러죠? 그러면 성경을, 율법을, 그리스도의 육체로 가려놓았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찢겨져야 지성소가 보인대요. 그게 찢겨져야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죠? 그러면 율법, 성경, 진리를 예수로 가려 놓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찢겨져야, 우리가 뭐 구원을 받고, 우리의 죄가 용서해진다. 단순히, 그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섬김의 대상인, 우리는 어떤 걸 주면 금방 그걸 내 섬김의 대상! 우상으로 끌어당기는 재주가 있어요. 모든 인간들이 다 그래요! 너희들이 갖고 있는 그 우상으로.

하느님 그러죠? 나를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가 십계명의 제1계명이에요. 나를 우상으로, 다른 신으로 섬기지 마! 나는 나야. ‘I am who I am.’ 그런데 그 예수를,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이신 하느님으로 보고, 그걸 내 마음에 새기는 게 아니라,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대?

이러한 내 섬김의 대상으로, 그리고, 감동받는 대상으로, 내가 칭찬하는 대상으로 갖고 있을 때, 여러분은 지성소를 못 본다는 뜻이에요. 그걸 찢었을 때, 그 예수가 죽었을 때, 모든 종교인들의 그 종교심이라는 게 찢어질 때, 비로소 진리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예수로 가렸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걸 바오로가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요, 거기에 걸려 넘어진다.’ 그러는 거예요. 사도바오로가! 예수에게 걸려 넘어진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에요.

예수 믿는 거, 진리를 깨닫는 게, 쉽지 않아요. 그 예수, 섬김의 대상인 그 예수가 찢어져야, 비로소 내가 그 진리, 지성소를 볼 수 있다는 걸 내가 알게 되면, 그 예수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곧 죽어야 할 대상이 되는 거요. 그래서 향유 옥합을 깬 여자가 그 모형으로 등장하는 거요. ‘주님! 예수님! 당신의 빨리 죽어야 일곱 귀신 들렸던 나! (일곱 귀신 들렸다니까, ‘그 마리아 맞아요?’ 그러는데, 우리가 다 일곱 귀신들린 사람이었어요. 일곱이란 단어는 완전한 귀신 들린 자. 마리아는 다 마라라는 뜻이니까.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주변에 다 마리아만 있었던 거예요. 다른 여자는 이름을 안 써요. 그냥 그 여자 그러지. 다 일곱 귀신 들렸던 그 여자! 다 모형들이란 말예요. 마라‘, 쓴 물이 단 물이 되는 거예요. 쓴 물은 뭐? 나쁜 말. 단 물은 진리가 되는 거예요.) 당신이 빨리 죽어야, ‘마라인 내가 나오미가 되는 겁니다.’ 그게 향유 옥합을 깨어서 부은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늘 날,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와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기 있었으면 막았을 텐데,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되는 거요. 예수님 빨리 죽으셔야 돼요. 이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빨리 죽으세요. 가서!

 

생각해보세요.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이 약속의 자손을 주셨죠? 그게 이사악! 그런데 이사악을 주기 전에 하느님이 약속의 후손을 먼저 약속하셨단 말예요. 그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교회의 대표잖아요? ‘내가 너를 내 후손, 내 아들! 내 약속의 후손으로 만들 거야!’라는 말이었는데, 아브라함이 못 알아먹으니까, ‘아들을 주시려나?’ 그러니까, ‘그래 네 수준으로 설명해 줄게하고 약속의 후손으로 이사악을 준 거잖아요? 그러면 그 이사악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알았으면, 이 모형은 나에게 소중한 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죽여라했더니, ‘하고 휘파람 불고 간 거라니깐요.

마찬가지예요. 예수, 약속의 후손이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하느님의 아들이에요. 그러나 그 자체가 섬김의 대상은 안 된다 말입니다. ‘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그렇게 죽이셨는지라는 그 내용, 진리를 내가 알 때, 그건 필요 없는 거예요. 그 십자가 자체도! , 내가 어떻게 나의 죄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가 아니라, ‘,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전적으로 하느님 측에서 시작하여 완성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를 깨달았으면, 그건 가치가 없는 거라니까요. 역사 속 그건! 그걸 예수를 죽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그 의미도 모른 채, 십자가를 그냥 붙들고 앉아 있으면서, ‘, 어떻게, 나를 위해 그런 일이 벌어졌지?’ 이렇게 되면 그건 내 밖에 있는 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대부분 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요. 그러니까 감동만 하는 거요. 그런데 그 감동은 나가면 금방 없어져요. 여러분 내 감정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은 율법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율법 아래에서 주신 말씀이에요.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이신 예수를 끌어내야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율법이라는 껍질로서의 예수고,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오신 그분이 내용이란 말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라고 편하게 부를 때, 우린 그리스도 예수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지, 십자가 지기 이전의 그 예수! 죽어야 할 예수를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초점을 둬야지, ‘예수를 믿는 것에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다는 게 도대체 뭐냐고요? 그리스도를 믿는 게 뭐나고요? 성경이 그리스도들!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왜 복수로 자주 쓴다 그랬어요? 그게 그리스도가 된 교회! 그리스도라는 게 다른 말이 아녜요. 기름 부은 받은 자성경에서 기름은 뭐? 말씀, 진리를 갖고 있는 자! 품고 있는 자!’를 기름 부음 받았다 그래요. 그걸 그리스도라 그래요. 그 진리를 다른 이에게 전해 주어 그들이 도 그 진리로 살아나는 일을 하는 게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들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여야지, 예수를 섬기고 믿는 것에 그 수준에 멈춰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으니까, 그냥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거지에만 몰두하는 거예요. 잘 이해해야 돼요. 이제 율법주의나 유대주의를 부정하는 그 단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 거예요.

 

(마태복음 24:1-5) 1 예수께서 성전을 나와 얼마쯤 걸어 가셨을 때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 와서 성전 건물들을 가리키며 보시라고 하였다. 2 그러자 예수께서는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그리고 예수께서 올리브산에 올라 가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따로 와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오실 때와 세상이 끝날 때에 어떤 징조가 나타나겠습니까? 저희에게 알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 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형(模型)으로서의 옛 성전에서 나오세요. 예수님은 바로 그 옛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죠? 그래서 나를 부수어라. 내가 사흘 만에 (세 번째 것으로) 일으키리라! (부활하리라 예요).’ 내가 세 번째 성전!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 두 번째 성전은 예수. 세 번째가 그리스도예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를 품은 바로 그 성전! 그래서 우리를 사도 바오로가 너희들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이게 세 번째 성전이거든요.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에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모습으로 부수어진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옛 성전에만 관심이 있어요. 수건이 덮여 있는 그것만 보고 있는 거예요. ?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거든요. 율법주의는 항상 번쩍 번쩍 빛나요. 사람들이 존경하는 일들을 한단 말이죠.

 

제자들이 그 옛 성전 껍데기만 보고, ‘이거 보세요. 멋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때마다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느냐하면, 감람산으로 간다 그러죠? 그건 그 기름의 그 산이라는 거예요. 그 말씀으로서 이야기하기 위해 앉으실 때, 올리브산 그러는 거지! 산꼭대기로 얘기할 때마다 데리고 올라간 건 아니란 말예요. 그 기름의 그 산! 진리를 설명해 주기 위해 예수님이 성전에 앉으신 거예요. 그 진리의 선포자리에서, 제자들이 물어요, ‘이 세상에 마지막 징조로 나타나는 일들이 어떤 게 있습니까?’ 그랬더니, 많은 이들이 아는 그리스도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게 마지막 때의 징조다.’ 그래요. 이 말은 어떤 이들이 많이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그리스도다.’ 이런 단 말이 아녜요. 여기서 많이라는 말, 플루스란 단어는 대부분이란 뜻이거든요. 대부분 그래요, 지금? 아니죠? 몇 명 안 돼요. 문선명, 박태선, , 신천지의 걔, 이렇게 몇 명 안 된다니까요.

여기서 이 말은, 마지막 때의 징조가 뭐냐 하면, 대부분이 진리인 그리스도 말고, 그 예수! 여기에 에고 에이미예요. 그 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에고 에이미, 나를 그리스도다.’하는 자들! 그 대부분이잖아요? 지금은요. 그 분을 그냥 섬기려고 하고, 그 분이 하신 말을 어떻게 하면 순종하려고 하는 거. 나는 죽어야 되는 건데, 지금 옛 성전에서, 올리브산, 그 기름의 그 산으로, 진리로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이, ‘나를, 무너져야 하는 나를, 무너진 이후에, 내가 무너지고 찢겨져 진리가 보여야 하는데, 나를 그리스도다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될 때가 마지막 때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를 나 밖의 것으로, 그리고 추억하고, 칭찬하고, 섬겨야 하는 대상으로 갖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부를 수밖에 없어요? 내가 그분과 연합되어 진리가 되지 못했을 때, 그분을 어떻게 불러요? ‘주여! 주여!’ 내 밖에 있으니까!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 간다.

직역을 해 드리면, ‘내 안에서 말하는 모든 자는,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절대로 그 하늘들의 그 나라로 빨려 들어갈 수 없다.’예요. 직역을 하면! 절대로, 기필코, 절대로 못 들어간다!

신약성경에서 행하라고 번역이 된 포이에오, 히브리어 아싸동사를 번역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아싸동사는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거, 나타난 것을 잘 가르쳐서, 그가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가르치는 거.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를 아싸라 그래요. 그걸 행하다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행하라라는 건 이런 거예요. ‘희생제사를 행하라, 아싸라고 했을 때, 그냥 수건이 덮인 율법으로만 보면, 죽으라고 그거 해야 되죠? 율법이니까. ‘희생제사 행하라!’ 했으니까. ‘아싸!’ 그러나 이걸 휘장이 벗겨진 상태에서 보는 사람은, ‘! 영 단번에 드려진, 그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드릴 희생제사는 이제 다 없어진 거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희생제사 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라고 알아먹었을 때, 그리고 그걸 알아먹게 해 주는 그걸, ‘아싸, 행하다그래요. 그걸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먼지에 불과한 너희를, 내 영, 호흡, 말을 넣어, 하느님과 방불한 그리스도인 만들어, 나와 영원으로 살게 하겠다.’‘난 그렇게 할 거야.’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일곱 번 말한 거예요. ‘난 그렇게 할 거야그게 맹세예요. 하느님의 서원. ‘그 맹세대로 되어라행하다예요. ‘아싸란 말예요. 그러니까 그 맹세함의 주체는 하느님이고, 그분이 끌고 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끌려가는 그 행함 속에 들어 있는 게, ‘우리란 말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하는 말을 전부, 그냥 껍데기로만 보게 되면, 머리 터져서 죽어요. 그래서 솔직히! 몇 개만 하고. 못한다니까요. 그건!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셔서 뭘 찾겠느냐고요? 내거 찾는단 말예요. 그래서 히브리의 결혼 풍습이, 신랑이 신부에게 미리 빙패물을 보내는 거예요. 누군지 몰라요. 하느님이 신부인, 우리에게 와서 뭘 찾겠느냐고요? 내가 준 거, ‘내 말, 진리, 그거 찾는 거예요. 이미 정해진 하느님의 신부는, 하느님의 것을 이미 받아 갖고 있다니까요. 그 여자를 찾는 거예요. 그 신부를 찾는 거란 말입니다. 그것 안 갖고 있으면, 아무리 예쁘고 화려하고 죽죽 빠졌어도, 신랑의 눈에 안 보여요. 안 보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했다 그러죠. 말이에요. ! 그러나 행위는 비슷해요. 다 잤어요. 열 명이 다. 그런데 다른 건, 어떤 이들은 그 진리를 갖고 있더라는 거예요. 똑같이 다 자고 있어요. 그런데 신랑이 올 때가 되었어요. 마지막 때가 된 거예요. 잠자다 벌떡 일어나보니, 신랑이 올 때가 되었네요. 그 때가 되니까, 이 기름이 중요한 걸 알게 되었어요. ‘이거 어떻게 해? 기름.’ 이거 가진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그랬어요. 진리가 빌려줄 수 있나요? 못 빌려줘요. 그래서 못 준 거예요. 아니 하느님이 슬기롭다고 칭찬해 준 여자가 그런 것도 안 빌려 주면 안 되죠? 빌려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주는 거예요. 그건. 그랬더니 슬기로운 여자들이 뭐라 그래요? 장사하는 데 가서 사라!’ 그래요. 장사하는 집! 옛 성전이에요.

그랬더니 이 여자들이 가네요. 살 수 있는 건 줄 알고. 그게 장사하는 집에서도 그거 살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끝이에요. 그 여자들은. 못 사는 거예요. 장사하는 집에서는 절대 그 진리 못 받아요. 문이 잠겼어요. 돌아와 보니까. 문을 두드립니다.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우리가 여기 있어요.’ 그 때 그 신랑이 뭐라 그래요?

(마태복음 25:12) 12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하며 외면하였다.

하느님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진짜 귀중한 존재들일까요? 우리 먼지들이 봤을 때, 이 먼지들이 인본주의니, 인권이니 하면서 중요하게 보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꼭 인본주의에 빠진 인간들이 요런 이야기하면,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저...’ 이런 다니까요.

아니 그건 자기가 그렇게 귀중한 존재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나와 같이 똑같이 존귀한 자들도 인권을 보장해 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놈이 와서, ‘하느님의 은혜, 믿음, 진리가 없으면 쓰레기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하는 소리 같거든요. 진리 없으면 그냥 생명 없는 시체입니다. 그걸 하느님이 왜 사랑해야 돼요? 여러분은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이 넓은 우주에, 이 우주를 만든 분이 여러분을 찾아내야 돼요? 모르는 척하는 게 맞아요. 그분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안다면.

그런데 이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은 자기가 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진리를 못 받는 거예요. 그렇게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뭐 했어요? 일을 무지하게 많이 했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고, 구제하고, 뭐하고, 뭐하고. ‘그런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하세요?’ 주님이, ‘나 안 보여!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해. 나 못 봤는데.’ 그러는 거예요.

라는 단어,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그 사전적 뜻을 갖고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진리가 아닌 것을 갖고, 엉뚱한 과녁 찾아가는 게 죄예요. 말도 안 되는 말.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게 다 진리예요. 성경은 그렇게 진짜 말과, 가짜 말의 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하늘의 물! 땅의 물! 물론 땅의 물은 하늘의 물을 모형하고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거지만, 그걸로 이게 하늘이야!’라고 우기게 되면, 이게 저주의 물이 되는 거요. 그래서 처음 문자를 받은 모세와, 애굽의 모세들이 전쟁하는 거예요. 이 출애굽기가.

여러분, 모세라는 이름은 건져낼 자? 그런데 원래 모세의 이름은 건져 낸 자, 물에서 난 자, 물이 낸 자, 물이 보낸 자.’ 모오세스! 그 이름은 애굽의 모든 왕자들이 다 갖고 있는 이름이에요. 애굽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은 전부 이름이 모세예요. 거기다가, 자기가 진짜 왕이 되면, 자기가 섬기는 신 이름을 앞에 붙여서, 투트모스, 이렇게 이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 모세예요. 그런데 이 모세는, 아랫물이 보낸 자들 (세상의 왕들이잖아요?), 거기에서 건져내어져, 하나느님의 물을 받아, 다시 이 모세들, 아랫물의 모세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거예요. 모세가 하느님의 물, 말을 받아 애굽으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게, 이 땅의 모세였어요. 물들의 싸움이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이 아랫물을 바다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하늘의 물을 갖고 있는 모세가, 그 사이로 통과해버리는 거요. 찢어버리는, 파괴해버리는 거요. 하늘 물의 승리! 요걸 세례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찢겨진 사건이 바로 이거란 말예요.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요. 땅의 물! 그 모형에 멈춰있으면 안 돼요. 하느님은 그 땅의 물, 그걸 휘장이라 그래요. 휘장을 찢어버리고, 껍데기만 보고, ‘엉뚱한 하늘 물! 상상하지 말라!’라고 일갈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 휘장 안에 감추어 두셨던 진리를, 당신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진짜 숨을 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들의 진짜 눈이 뜨이고, 그들의 진짜 귀가 열리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바람, 이게 루와흐거든요. 동풍을 보냈더니, 홍해가 찢어졌잖아요? ‘찢어지다라는 단어거든요. ‘, 루와흐가 영이죠? , 진리를 보내니까 그게 바다가, 아랫물이 찢어지더라. 이게 모형이라 말이에요. 이게 다.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건 우리의 것 중에, 최상의 것을 우리 하느님께 바치는 게 아니라, 그분이 준비하신 생명, 영생을 거저 갖는 거예요.

여러분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서, 여러분이 뭘 하려고 할 때, 하느님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요. 따라서 성도는, 다른 것에 신경 쓰기 이전에, 하늘의 물! 그 열두 가지 열매! 그게 아들이라 그랬죠. 열둘이. 열둘이라는, 그 아들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생명의 물! 진리를 가지는 것에 집중해야 되는 거요. 그게 말씀으로 오시고,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함몰 되는 다른 그리스도들!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성도의 모습인 거예요.

 

(요한묵시록 19:6-9) 6 또 나는 큰 군중의 소리와도 같고 큰 물소리와도 같고 요란한 천둥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께서 다스리신다.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 날이 되었다. 그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8 하느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 9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또 이어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신부들 하나하나를, 뭐라고 이름 붙이느냐 하면, 이들이 하느님의 참되신, 진리의 말씀이야. 그래서 여러분의 이름은 뭐예요? 말씀이에요. 진리란 말예요. 여러분이! 그러니까 하느님의 약속이 내 안에서 성취가 되고, 이루어지는 자로 사는 게 성도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일조를 하는 자로 살겠다고 하는 게, 성도가 아닌 거예요. 성도는 그렇게 하느님의 뜻과 마음을, 삶으로 그려내는 자예요.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뭐라고 했어요? 네페쉬, 먼지에 불과한, 그들 안에, 진짜 중요한 하느님의 , 호흡, 루와흐, 프뉴마, , 진리를 넣어, 그를, 하느님과 방불한 하느님의 아들로 만드는 게 하느님의 뜻이니까, 그게 여러분 안에서 이렇게, 여러분의 삶으로 그려내야 하는 말, 글이라면 여러분은 작아지고() 그 진리가 커져야()하는 모습으로 삶이 그려져야 돼요. 그게 말씀들의 삶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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