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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아킬레스와 거북이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5 조회수1,593 추천수0 반대(1)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15..

(공동번역성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 6:1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500년 전 사람인, 그리스의 수학자 제논, 당시의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이런 논쟁을 던졌습니다. 그리이스 신화 속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아킬레스예요. 그래서 아킬레스의 건이라 그러죠. 그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고 해 보자. 그랬어요. 그런데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훨씬 빠르니까, 거북이 100m 뒤에서 아킬레스가, 출발을 하는 거예요. 동시에! 그러면 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시점을 계산해 보라 했어요. 여러분도 한 번 계산해 보세요.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열 배 빨리 달린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100m 뒤에서 같이 출발 했어요. 그러면 아킬레스가 그 100m를 열심히 달려서, 고 거북이가 있던 곳에 오면, 거북이는 10분의 1만큼 앞에 갔겠죠? 논리적으로! 그죠? 그러면 이제 거북이는 10m 앞에 가 있을 거란 말이죠. 10m를 따라 잡으면, 10분의 1, 1m 앞에 가 있을 거 아녜요? 그 다음 1m를 따라 잡으면, 거북이는 10분의 1m 앞으로 가 있겠죠.

이렇게 논리로 따지면,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 잡을 수가 없어요. 요걸 파라독스(paradox)라 해요. 역설(逆說)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건 뭐 등비수열로도 금방 풀려요. 12m 정도면, 아킬레스가 따라 잡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논이 그걸 몰라서 문제 제기를 했던 걸까요?

그렇게 참된 명제와 모순되는 결과를 낳는 추론을,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는데, 패러독스, 역설이라는 건, 모순을 통하여 진실을 강조하는 어법(語法)인 거지, 모순 자체를 우기기 위함이 아닌 거예요. 그렇잖아요? 그게 역설의 효용(效用)이란 말예요. 제논이 그런 수학적 논제를 제기한 건, 수학공식으로 그걸 풀어보라고 낸 게 아니라, 변하지 않는 유일한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운동이나 설명을 취했을 때, 반드시 모순이 생긴다.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웅변하기 위해 그런 문제를 던졌던 거예요. 따라서 진리는 공식으로, 논리로 해결하려고 하면, 반드시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그 논제를 던진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현상계의 모든 사건이나, 사물, 사유나, 행위 등을 통해서, 걸 창조하신 분이, 그 안에 담아놓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거지, 그걸 공식으로 삼아서, 거기에 묶여버리면 안 된다 말예요. 그 모든 걸 호 코스모스라 그러잖아요? 그걸 그냥 한글성경이 세상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 호 코스모스라는 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순서, 차서로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해 놓은 거란 말예요.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그런데 이걸 그냥 나타난 것으로만 보고, 공식으로 덥석 잡아버리면, 그게 세상이라니까요. 그게 ()’이에요. 나쁜 거예요. 그걸 거짓이라고 그래요. 그 안에 들어 있는 진짜 내용을 알아야 되는데, 그걸 진리라 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눈에 보이는 것에, 묶이면 안 돼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묶이는 걸, ‘탐욕이라 그래요. 보암직도 하고, 이걸! 그리고 그걸 내 손을 뻗어서 잡으려고 하는 그걸, ‘탐욕이라 그래요. 그걸 모든 죄악의 근본이라 그러잖아요? 아담들의 그 생래적 성향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나의 가치를 높이고, 나를 풍성하게 하는 데에, 사용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아담이 다 그래요.

 

예를 들어서 급할수록 돌아가라.’ 역설(逆說)이죠? 급한데 왜 돌아가요? 지름길로 가야지 첩경(捷徑)으로 가야지, 그건 급할수록 돌아가야 빨리 간다는 그 공식을 증명하려고 내놓는 역설이 아니잖아요? 아니, 안 맞잖아요. 그건. 급할수록 돌아가면 안 된단 말예요. 그건 뭐든지 급하게 서두르면, 항상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라는 내용을 강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글자 그대로 이해를 해서, 급할 때마다 먼 길로 돌아가는 바보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들 본다니까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게 곧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명제예요. 역설입니다. ‘패러독스. 그렇다고 그걸 들은 사람이 그 뜻을 곡해해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 모든 걸 소유할 수 있게 된단 말인가?’(그건 오해예요.)하고 오해해서, 모든 걸 소유하기 위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아 보는 것! 이건 바보라고요. 금방 낭패를 당한단 말예요. 명제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에, 가치,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데, 그걸 곡해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에 무게 중심을 둔다 말예요.

이렇게 진리를 아는 사람은, 모든 나타난 것 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보는 눈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 나타난 모든 것은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다 역설이란 말예요. 그걸 옛 성전이라 그래요. 그걸 세상이라 한다니깐요. 그래서 가짜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진짜는, 그 속에 담긴 진리라 말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아는 사람은 모든 타나난 것 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보는 눈을 갖게 되는 거요. 그렇게 진리는, 현상계 속에, 나타남으로 보여지는 역설을 제거하고, 벗겨내서, 그 알맹이를 양식으로 넘겨주는 힘이 있어요.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성경은 수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어디서는 이렇게 하라고 했다가, 어디서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고. 맹세를 하라 했다가, 하지 말라 그랬다가. 살인하라 그랬다가, 살인하지 마라 그랬다가. ‘가서 다 죽여!’ ‘넌 어떻게 지나가는 그 고아, 과부를 돌아보지도 않아! ,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게 살인이야!’ 뭐 이렇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그러잖아요? 모순처럼 보인단 말예요. 그리고 이게 진리라고 했다가, 저것이 진리라고 뒤집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성경의 모순들을 대할 때, 두리뭉실, 스리슬쩍 넘어가요. 그걸 지적했다가는, 자칫 믿음 없는 사람으로 몰릴 수도 있고, 무식하다고, ‘아직도 그걸 모르냐?’ 이렇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이건 모순인데 그러면서도, 그냥 두리뭉실 넘어간다니깐요. 그러나 진리를 알게 되면, 그 모순은, 결국 하나로 귀결(歸結)이 된다는 걸 알게 돼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요. 그 역설적 모순 속에 담겨 있는 진리가,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께서, 범인(凡人)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도록 쳐 놓은 그 역설! 연막! 안으로 들어가 진리를 보는 이들이에요. 그 생명열매를 따 먹어버린다니까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러한 역설의 공식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냥 그 패러독스! 역설이라는 공식에 묶여버린 자들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수사학적 질문이에요. 바오로는 61절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그리고 그 양쪽을 빵으로 딱 놓고, 가운데가 샌드위치 속을 넣은 거잖아요? 61절 보세요.

(로마서 6:1-2)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샌드위치 속으로 뭘 넣었어요? 연합의 교리! 영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예수의 제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신부 이야기! 요 세 가지를 넣어 놨단 말예요. 그리고는 이제 16절부터 순종의 이야기. 그 이야그렇게 율법, 성경을 통해서, 그 율법의 진의를 깨달아 알아, 그 율법을 진리로 갖게 되면, 그 상태를 순종(順從)’이라 그래요. 내가 뭐를 시키는 걸 열심히 행하는 걸 순종이라 하지 않고, 그건 억지로 하는 거예요. 성경은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서, 모든 걸 그렇게 진리로 깨달아 알게 되면, 그 상태를 순종이라 그래요. , 다 그 말이네!’ 이렇게. 여기도 그 말이고, 이것도 그 말이네. 그게 내가 진리가 된 상태거든요. 그 상태!

(사무엘상 15:22) 22 그러자 사무엘이 말하였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

번제와 다른 제사! 그리고 목소리 순종하는 것! 이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번제와 다른 제사는 뭐요? 하느님이 주신 말씀, 율법을 행위로 풀어낸 거죠. 공식으로만 본 거죠 그걸. 그냥 패러독스의 껍데기만 본 거잖아요? ! 그러니까, 한 거란 말이죠.

그러면 목소리의 순종(順從)은 뭐냐 말예요? 그게 사마, 이거든요. 이걸 파자하면, ‘부수고 다시 세우다! 코프가르치다, 교훈하다라멧이거든요. 이게 이에요. 라멧은 원래 소치는 막대기예요.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몰아가신다.’고 했을 때, ‘가르치다, 교훈하다란 뜻이요. 그게! 그러니까 순종은, ‘부수고, 다시 세우는하느님의 창조의 원리를 잘 듣고 배우는 거란 말예요. 그걸 순종이라고 한단 말예요. ‘사마듣다니까. ‘순종하다, 듣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역설 속에 담아주신 진리를, 제사로, 행함으로 망치지 말고, 듣고, 깨달아 그 안에 있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에요. 낫다‘better’가 아니라 그건 아니야. 이거야!’란 뜻이란 말이에요.

오늘 본문을 조금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하면 이러합니다. 법 아래에서, 행함의 짐을 지고, 수고하고 고단한 사람을 살던 자들이, 거저 은혜의 나라로 옮겨졌다! 그들이 더 이상 어떻게 죄와 관계된 자라고 판단을 받겠느냐?’ 이 말이에요. ‘더 이상 어떻게 죄를 짓니? 이젠 죄 못 지어. 그러니까 죄 안 짓도록 노력해!’ 이 말이 아니라니깐요. 이제는 그 죄와 관계없는 나라로 들어갔다. 그 나라에서 행하는 모든 건 다 선()이에요. 은혜의 나라에서 하는 건! 그런데 너희들이 어떻게 죄와 관계가 있겠니? 이런 말이란 말예요. 은혜의 나라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선이에요. 그래서 그 나라 안에서는, 죄라는 걸 절대 지을 수가 없어요. 걱정마라는 거예요. 두려워마라는 거예요.

라는 개념 자체가, 과녁을 잘못 잡는 거잖아요? ‘하마르티아. 올바른 과녁을 보는 눈이 진리죠?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적! 그럴 때, 눈 목()자에 과녁 적()자를 쓰는 거죠. 과녁을 정확히 보는 게, 우리의 제대로 된 목적이 되어야 되는데, 목적이 달라지면, 과녁을 잘못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뭘 자꾸 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면, 목적이 잘못된 거라니까요. 그걸 죄라 그런단 말입니다. 그 올바른 과녁을 보는 눈! 이게 진리의 눈이란 말예요. 그 진리의 눈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사는 그 은혜의 나라에, 어떻게 죄가 들어오겠느냐 말이에요. 저는 지금 윤리, 도덕적 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런 죄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건 인간들이 정의한 죄고, 성경이 말하는 죄는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우리가 법적 개념의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순종합시다! 그러잖아요? 그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순종은 반드시 두려움이라는 걸 전제(前提)해요. 감사나 찬송, 영광이 전제가 된 자발적 향기로서의 순종이 아니라, 그건 존재적 순종이거든요. 그게 아니라, 무섭고, 두려워서, 굴복해버리는, 굴종(屈從)에 가까운 개념이, 우리가 갖고 있는 순종의 개념이라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했을 때, 우리의 예배나 기도의 행위나 종교행위가, 다 두려움 때문이죠? 말로는 천국가기 위해서 그러지만, 그건 지옥 보낼까봐두려워서예요. 두려워서! 괜히 그거 안 하면 해코지 당할 것 같고, 찝찝하고 그래서 한 거 아녜요그걸 성경이 종의 영을 받은 자라 그래요. 성도는 아들의 영을 받았다 그래요. 말이 영이에요. 말로 바꾸어서 번역하시면 돼요. 아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건 따로 떨어져 있는 아버지와 아들 이런 얘기하는 게 아녜요. 성경은 그런 얘기 하지 않아요. 그런 종류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히브리어로 아버지가 아부. 전 세계가 다 같죠? 아바, 아브, 아빠그 단어는 하느님의 집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진 단어. 알레프하고 아부예요. 그걸 파자(破字)하면 하느님의 집이에요. 하느님의 처소! 하느님의 집! 성전을 히브리 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성령의 전, 진리의 전이 되어서, 하느님의 처소가 되면, 하느님은 나를 아버지라고 읽어버리세요. ? 그 아버지를 진리로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로 읽어주신단 말예요. 진리가 아버지잖아요? 내용이! 하느님 아버지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게 진리잖아요. 그걸 내가 알아서 깨달아 마음에 새기면, ‘아버지라고 불러준다니까요. 그래서 이 아버지가 또 진리를 전하여 아들들을 낳는 거란 말예요. 이렇게 전해서.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 거예요. 그 분이 아버지, 진리를 말씀으로 담고 왔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씨를 가진 존재예요. 그래서 아버지들은 아들을 낳는 역할을 수행하게 돼요. 그래서 진리를 담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늘 아버지라 불렀어요. 딱 한 번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만, ‘하느님이라고 부르셨어요. ? 죄인의 대표로 오셔서 죽는 거니까! 그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아버지예요. 그리고 그 아버지와 나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내 밖에 있으면? 하느님이 돼요. 그 하느님은 나를 심판(審判)하는 하느님이 되세요.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른 거예요. 그 전에는 아빠, 아빠라고 불렀다니까요. 아바 아버지가 아빠! 즉 아버지! 이런 말이에요. ‘아바 아버지!’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개념(槪念), 진짜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게 아니라, 그 분을 설명하는 진리가 내 안에 있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하느님을 설명하는 바로 그 진리가, 내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 하는 거예요.

진리를 마음에 담고, 그 진리적 존재가 되는 것이 순종이라면, 그 반대편에 있는 불순종의 죄가 뭐라는 거죠? 진리의 그 표피, 껍데기만을 공식처럼 보고, 그 공식에 맞춰서, 두렵고 무서운 마음으로, 충분히 하느님을 두려워해 드리는 거! 다른 말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하느님을 폭군(暴君)으로 만들어 버리는 걸 죄라 그래요.

내가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천국(天國)에 안 들여보내면 어떻게 하지? 나를 지옥에 넣으면 어떻게 하지? 이게 그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에 가서 그분을 만나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냥 내가 원하는 시설만 잘 갖춰놓은 곳에다가,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를 넣어만 주세요. 그리고 당신은 없어져 주세요. 무서우니깐요! 그런 하느님을 섬기는 걸 죄라 그래요. 율법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그 진리를 율법으로 붙들어 짝을 삼는 거! 가짜 남편! 요걸 죄라 그래요. 그 속에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짝으로 삼는 걸, ‘()’라 그래요. 그래서 항상 짝이 있어요. , ; , 어둠; 신랑, 신부; 뭐 이렇게 다 짝을 주죠. 하느님이!

 

그런데 보세요. 땅은 있는데 하늘은 어디에 있어요? 저 파란 하늘, 저게 하늘인가요? 로켓을 타고 한 번 올라가 볼까요. 거기에는 하늘이 없어요. 그냥 검죠? 파랗게 보이지만 올라가면 검다니까요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이들이,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이라 그런 거예요. 하늘은 검고 땅은 황색이다.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 분들은 하늘이 없다는 걸 알았다니까요. 그러면 그 하늘은 어디에 있다는 거예요? 짝은 분명히 있어야 되니까. 진짜 그 나라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너희 눈엔 안 보이게! 그래서 천국은 있다니까요. 반드시! 그래서 이 세상에는 반드시, 진리와 비진리가 나누어져 있어야 돼요.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비진리를 그 가까이에, 그들 가까이에 두시는 거예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비진리는 다른 게 아녜요. 진리를 담은 그 그릇! 나타난 모습만 보고, 거기에 멈춰버리는 걸, 묶여버리는 걸, 비진리라 그래요.

성전에다가 진리를 담아서 아담들에게 주었더니, 어떤 이들은 그 성전! 호 코스모스를 통해서, 진리에 이르는데, 어떤 이들은 그 성전만 죽으라고 섬기다가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요. 율법에다가 진리를 담아주었더니, 어떤 이들은 그 율법을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는데, 어떤 이들은, 그 율법에 묶여서, 평생 수고만 하다가 지옥가요. 희생제사에다 진리를 담아 사람들에게 주었더니, 평생 희생제사만 지내다가 불 못으로 떨어져요. (우리는 지금 어떤가요?) 그런데 인간의 눈과 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기능이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새 눈과 새 귀를 주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진리예요.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께서 이 땅에서 가르치신 것을 가르친다, 그러죠. 그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그가 내 것을 가지고 가르치겠다.’ 그래요. 예수님이 가르치신 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그분의 입에서 진리가 나왔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근거로 하여 하느님을 죽이더라니까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내 것으로 가르친대요. 그러면 똑같은 그걸로 가르칠 거 아녜요? 그런데 그 때는 살아난다고요. 어떻게? 눈과 귀가 되어서 오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 십자가 이전의 그 예수를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진리가 풀어주는 그 내용을 믿으시는 거예요. 다른 이들은, 그 예수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서, 하느님을 살해한 살인자가 되는데, 어떤 이들은, 그 예수라는 껍질을 부수고,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라는 그 진리에 도달하더라는 거예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주실 때, 불특정 다수에게는 비유만 주시죠? 그리고는 어떤 무리에게는 그걸 설명해줘요. 여러분 한글성경만 보면, 그 무리가 그 무리인 것 같지만, 원어 성경으로 보면 다른 무리예요.

(마태복음 13:1-3) 1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더니 2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 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은 그대로 모두 호숫가에 서 있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군중이 나오죠. 그 두 단어는 똑같이 오클로스예요. 그런데 앞의 많은 사람은 복수인데, 뒤의 군중은 단수예요. 무슨 단수인 무리가 있어요? 똑같은 단어라니까요. 그러니까 헬라어를 모국어로 갖고 있는 이들은, 이런 게 나오면 고친다니까요. 율법사들이 그 일을 한 거 아녜요? 아무리 봐도 이건 어법에 안 맞아! 그렇게 해서 고치면 끝나는 거예요. 진의가 바뀌어버리는 거란 말예요. 오클로스복수로 쓰이면, 불특정 다수의 무리가 맞아요. 이 무리가! 그런데 그 앞에 관사가 붙거나, 단수로 쓰이면, 열두 제자를 가리켜요. 아들이 되는 열둘! 그게 오클로스예요.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천사의 그 많은 무리! 찾아보세요, 다 단수예요. 아들이 된 열둘! 하느님의 아들로 완성이 되는 상징적 열두 제자! 그것이 호 오클로스예요. 그 제자의 상태가 온전한 상태는 아녜요. 제자가 진리를 받아, 성령을 받아, 아들이 되어야 돼요. 그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을 방해해요. 아들이 되어야 된다 말예요. 그런데 제자훈련이 왠 말이에요? 거기서 머물면 끝나는 거라니까요. 아들이 되어야 되는데 제자를 키우겠다니. 또 그렇게 하면 다 부흥을 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열두 제자는, 열두 지파를 완성하는 개념이고, 열두 지파는, 야곱, 즉 이스라엘을 이루는 그 열두 아들의 확장이죠, 그래서 열둘은, 하느님나라의 아들들의 숫자란 말이에요. 제자는 배워서 그 선생, 아버지와 같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 아들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그 유다가 예수를 팔아서 죽이고, 그 열둘에서 빠져 나가자, 즉시 열둘이 채워지는 그림이 성경에 등장하는 거예요. 유다는요, 멸망 받을 비진리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실체를 폭로당하고 죽어서, 열둘을 채우는 마지막 아들이 되는 그 성도의 그림자도 아울러 담고 있어요. 그래서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망해도, 남 유다는 남겨 뒀다니까요.

진리든, 비진리든 이 역사 속에서 다 죽어요. 그런데 한 쪽은 하느님이 죽이셔서 죽는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스스로 죽겠다고, 허벅지를 찔러가면서, 애를 쓰다가, 진짜 죽는 율법주의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자기부인, 자기부인 하니까, ‘그래, 자기부인을 해야 돼!’ 두 주먹 불끈 쥐고, 허벅지를 찔러가며 자기부인, 자기부인 하늘 걸 율법주의라 그래요.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그렇게 부인된 거야라는 그 존재적 개념으로 자기부인을 이해야지, 여러분이 이 땅에서 또, ‘그래 난 죽어야 돼. 빨리 죽어야 돼, 죽자. 오늘도 남편에 대해 죽고, 나에 대해서 죽고그렇게 스스로 죽은 게, 유다라니까요. 고게 자살이에요. 여러분! 그렇게 내가 죽는 게 아니라니까요. 하느님이 왜 나를 그 죽음이라는 그 존재를 통과하여, 이렇게 살릴 수밖에 없었던가를 아는 걸, 죽음이라 그래요. ‘죽어야 돼! 죽어야 돼!’ 이게 율법주의라니까요.

 

아무튼 열둘에서 하나가 빠지자, 황급히 다른 하나가 채워져요. 마티아죠? 한 번 딱 나오고 안 나오는 사람! 마트 티아라는 그 말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마티아는 하느님께서 준비하셔서 아들로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그 선물, 그리스도 예수를 모형 하는 인물이에요. 열두 아들! 그 마지막 아들! 오른손의 아들! 완성된 아들! 베냐민을 모형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의 선물로 세워진다 말이죠.

그래서 제자들이 그를 세울 때, 제비뽑아 세우는 거예요. 투표하지 않아요. 투표라는 게 뭐죠? 사람들의 뜻을 모으는 거죠? ‘, 니 뜻은 어때? 니 뜻은 어때?’ 모아서, 투표해서, 사람들의 뜻을 모아 세우는 걸, 투표라 그래요. 그런데 그렇게 안 뽑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사람들의 뜻을 모아, 투표해서 원로 세우고, 집사 세우고 하는 건, 엄밀히 말해 잘못된 거예요. 사람들의 뜻을 모아 봐야 쓰레기 밖에 안 나와요.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제비라는 건,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걸 인간들이 확인하는 게 제비예요. 그래서 제비뽑아 마티아를 세우는 거예요. 사도들이 자기들의 뜻을 모아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누구냐? 성경 제일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구야? 해서 뽑지 않았다니까요. 마티아는 그걸 설명하고, 바로 사라져요.

그런데 그 나타난 그림으로만 보면 어때요? 사람이 뽑아 세운 거잖아요? 그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마티아는 사라지고, 하느님이 뽑아 세우는 사도 바오로가,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마티아는 하나도 안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고 자리를 채운 사도 바오로가 그 일을 죽 해 나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청함을 받은 자들을 상징하는 많은 사람은 열둘로 줄어들고, 그 열둘은 다시, 한 아들로 축약이 되어야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큰 무리도 아니고, 열두 아들도 아니고, 한 아들이 되어야 성도예요. 예수를 머리로 한, 그 아들! 그래서 성도는 단수이며 복수예요. 그래서 성경에 교회를 상징하는 어떤 단어가 나오고, 항상 복수동사도 나오고, 단수동사도 나오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잘 보세요. 많은 무리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그 군중, ‘호 오클로스에게는, 따로 그들을 불러 비유를 설명해 주세요. 예수의 말은 역설로 가득 차 있어요. 그런데 그걸 풀어서 해석해주는 진리의 영! 그 성령의 말은, 그 역설의 공식을 제거해버리고, 그 진의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단 말예요. 그걸 그냥 문자로 받으면 죽어요. 예수의 말을 전부 문자로 받으면, 죽는다니까요. 그래서 그 설명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어떤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메시야가 되는 거예요. 모퉁이돌이 되는 거란 말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기도 전에, 설익은 제자들을 풀어서 복음을 전하라라고 그러죠? 그 때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버리고 다 도망간 놈들이, 나가서 무슨 얘기했을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그리고 뭐했어요? 기적을 일으켰어요. 병 고쳐 주고, 귀신 쫓아내주고! 그리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어요. 자기들도 몰랐으니까.

저희들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겉으로 대견해 했다니까요. 아니, 귀신들이 진짜 나가던데요!’ 이렇게! 그게 뭐였어요? 진짜 병! 사망이라는 병에 걸려 죽어야 할 우리를, 메시야가 와서 살려낸다는 진리를 담고 있었는데, 이들이 그걸 자기들도 모르고, 그렇게 행하며 다녔다니깐요.

그래서 예수님이 보내지도 않았는데, 어떤 아이의 귀신 쫓아주다가 개망신을 당한 거 아녜요. 안 나가서! ‘그건 왜 안 나가죠? 얼마 전에 나갔는데.’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그리고 자기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니까요. 그걸 보고, ‘, 저거 봐. 기적이네. 표적이네.’하고 쫓아가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이, ‘가서 복음 전하고 와!’ 이건 그걸 듣고 살아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고 보낸 게 아니란 말예요. 우리에게, 그렇게 그걸 껍데기로 보고, 공식으로 보고, 그냥 넘어오는 이들은 죽는다를 가르쳐 준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회개해라, 예수 믿어라, 구원 받아라.’ 다 좋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엉뚱하게 설명해요. 제자들이 전한 그 복음을 전파 복음이라 그래요. 그리고 택함 받은 자들은, 그 전파한 말이 무엇인지를 진리의 성령으로 이해하게 된다니까요. 그게 택함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런 자가 거의 없다그런단 말예요. 그걸 이해하는 자들이! 오늘날도 그렇게 회개의 이야기도 하고, 예수 믿으라고 이야기도 하고, 또 기적까지 행해요. 어떤 사람들은! 병도 막 고쳐줘, 은 이빨을 금 이빨로 바꿔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뭔지를 설명할 능력이 없어. 그 능력이 뭐라 그랬죠? 뒤나미스라 그랬죠? ‘엑소시아는 그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 권세! 그리고 그걸 흘려낼 수 있는 권세를 뒤나미스라 그래요.

그러니까 말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진리로 설명이 되지 못하면, 그냥 허공에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그 말 수준으로 봐요. 바오로가 그런 거예요. 하느님나라는 말에 있는 거 아냐. 말은 아무나 다 할 수 있어!’ 그게 진리로, 능력으로 입증이 돼야 되는 거요. 살아나야 돼요. 내가 나를 용서(容恕)하는 그 탄성(歎聲)이 실제로 일어나야 된다니까요.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라고요.

주님께서, 많은 무리 중에서, 온 무리를 따로 세우셔서, 당신의 말을 설명해 주신 걸, ‘뒤나미스라 그래요. 그건 사실 성령께서 하실 일인데,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법과 진리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그런 장면들을 몇 개 연출해 준 거예요. 그렇게 설명해도 못 알아들었다니까요. 그렇게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그건, 성경을 그렇게 그냥 역설! (파라독스)로만 읽고, 그 내용을 모르면 너희들 다 죽어!’.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이야기하는 그 진리를 알아야 돼!’ 이걸 설명해 주기 위해, 하느님이 몇 개 연출로 보여 준 거예요.

 

(마태복음 13:10-16)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찌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복이 뭐예요? 들을 수 있는 거! 그 진의를 볼 수 있는 것! 그게 복이라니까요. 둘 다 말씀을 받아요. 그런데, 갖자 자기들의 눈과 귀로 해석하고, 이해하여, 자기 것으로 담아요. 한 쪽은 은혜로 담고, 한 쪽은 율법으로 담아요.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율법으로 담은 자들은 어떻게 이걸 담을까요? 그래, 열심히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좋은 밭이 되자!’로 가요. ? 거기서 열매가 육십 배, 백 배 맺는다고 했으니까! ‘좋은 밭이 되자!’ 은혜로 담은 자들은? 우리는 전부 가망 없는 밭인데, 광야 밭인데, 거기에 좋은 씨가 심겨져서, 우리를 거저 옥토, 열매 맺는 옥토 삼아 주시는 거구나! 좋은 씨가 심겨져서!’ 요렇게 이해하게 된단 말예요. 이렇게 완전히 다르단 말예요. 이게 대척점에 서 있는 거라니까요. 조금 다른 게 아니라!

, 그러면 전자는, 옥토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고를 하게 되겠죠. 그 시점부터! 옥토가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명령하신 그 힘센 하느님의 비위를 건드리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옥토가 되어야지 이제. 그걸 두려움이라 한다니까요. 그러나 후자의 무리는,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의 현실을 누리며, 그분을 찬송하며, 그 자유의 진리를 전파하는 자로 살아요. 그리고 그 진리를 전파하는데, 해가 되는 것들을, 그 법 위에 서서, 안 하면서 살 수 있는 거라니까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녜요. 그런데 거기에만, 요기에만!

굳이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 성화에만 묶여서, 어떻게 하면 인간다워지고, 어떻게 하면 신자다워지는가? 요것만 보고 앉아 있어요, 다들! (~ 내 얘기하는 것 같아요...ㅎㅎ)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섬김이라고 착각을 하고, 그러한 두려움에 의해 나오는 행위를, 성화(聖化)라고 이름을 붙여요. 진짜 생티피케이션(Sanctification)은 그거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심지어 그게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해요.

(루가복음 5:17-26) 17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거기에 갈릴래아와 유다의 여러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기도 하셨는데 18 그 때 사람들이 중풍들린 사람을 침상에 눕혀 가지고 와서 예수 앞에 데리고 가려 하였으나 19 사람들이 많아서 병자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 가 기와를 벗겨 구명을 내고 병자를 요에 눕힌 채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예수 앞에 내려보냈다. 20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21 이 말을 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데 저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22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24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집으로 돌아 가라' 하셨다. 25 그러자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 갔다. 26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에 싸여 '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두 무리가 나와요. 하나는 침상에서 일어난 자, 하나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란 자. 여러분이 잘 아는 중풍병자 이야기예요. 중풍병자라고 번역이 된 그 파랄로란 단어는 옆구리가 터지다.’ 새 언약을, 새 술을 율법이라는 헌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지죠? 그 때 쓰는 단어예요. 그렇게 안에서 터지면, 밖으로 마비가 되는 거, 그걸 중풍병이라고 하는 거요. 혈관이 터지면 마비가 되는 거니까. 그 율법에 의해, 옆이 터져버려서, 마비가 된 이 세상의 모든 죽은 자들의 상징이에요. 고 중풍병자가.

그래서 그 에피소드의 관객이 누구죠?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라 그래요. 율법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이에요. 바리새파라스, 분리하다, 부수다.’ 하느님의 진리, 하나의 진리를 율법을 막 부수어내는 게 파리스예요. ‘바리새인,’ 그러니까 둘 다 율법주의의 상징이죠? 율법사들, 바리새인들! 그들을 중풍병자 안에 넣어버려요. 그리고 그 율법주의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의 관객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라,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

 

마르코복음에 보면 그 중풍병자를 넷이 운반했다 그러죠? 네 사람 아녜요. 거기에 보면 넷이에요. ‘넷 아래에 운반되어졌다.’ 4복음, 4계명, 4조각, 겉옷, 네 줄기 강, 이렇게! 다 넷이잖아요? 넷이 그 죽은 자! 율법으로 죽은 자를 어디로 옮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은 자,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워있었다 그래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침상은, 옛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간음이 일어나는 곳! 죽음이 있는 곳!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그 침상이란 단어를 ,’ 사람들이 죽으면 넣는 것, ‘이라는 의미로도 써요. 그 장례문화가 지금은 발달해서 상자에다 넣지, 옛날에는 판에다가 침상처럼 판에다가 눕혀서 무덤으로 들고 갔단 말예요. 그래서 침상을 관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말이죠. 죽어 있는 자가 누워있는 곳이에요. 거기 누워있어요. 율법주의자들이. 죽어 있는 거죠.

그리고 그 침상이라는 단어는 식탁이라는 말과 혼용해서 써요. 그러니까 엉뚱한, 식량이 아닌 게 주어지는 가짜 식탁! 옛 성전이란 말예요. 그게!

(시편 36:4) 4 자리에 들어도 악한 짓만 궁리하고 나쁜 길에 버티고 서서 악을 고집한다.

(미가서 2:1) 1 망할 것들! 권력이나 쥐었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고 마는 이 악당들아,

침상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죄를 짓는 곳이에요. 옛 성전입니다. 음행하는 곳! 먹지 말아야할 걸 먹는 곳! 그게 누워있는 거예요. 새 언약을 담지 못해서, 옆구리가 터져서 마비가 되어 있는 거, 죽어 있는 거죠. 중풍병이에요.

그런데 죽어야 할 자를 넷이 운반해서, 그리스도께 옮기는데, 거기에 쓰인 단어가 제테오예요. 제테오,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는 거예요. 구하라, 찾으라에 쓰인 단어란 말예요. 그 단어가!

그 넷이 그 죽어야할 자라 가야 할 곳, 감추어진 어떤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예요. 그래서 감추어진 곳을 찾아가는 거예요. 이제 넷이! 그러니까 이 그림은, 복음이라는 그 넷이, 죽은 자를 침상에서 들고 나와서,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그림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앞길을 무엇이 막고 있어요? 무리가 막고 있죠? 사람들이 많아서 못 들어갔다는 말이 아녜요. 그 곳에 쓰인 단어가 호 오클로스예요. 단수예요. 누구? 제자들이에요. 아직 진리가 되지 못한, 진리를 모르는 제자들! 그러니까 진리를 전하는데 뱅해가 되는 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이들이 아니라니까요. 아는 척 하는 얼치기들이 꼭 방해가 돼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올 때도 제자들이 막고요, 소자가 오는데 소자도 막고, 이방 여인이 오면 제자들이 또 막아요. 다 쫓아버려요. 하느님이 그러죠. ‘쫓지 마! 막지 마!’ 그 무리예요. ‘자격 있는 사람만 와. , 주님 저런 더러운 것이 만지러 오는데 막을까요?’ 그건 율법주의잖아요? ‘, 깨끗한 사람, 자격 있는 자만 와! 우리 스승을 독대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자만 와!’가 뭐예요? 율법주의란 말예요. 그게! 그들이 막았어요. 복음을 막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제자가, 아들이 되지 않으면, 항상, 그 상태에서 머물면, 이게 문제라니까요. 그렇게 예수께로 가는 길에 얼치기 제자들이 막고, 그 무리가 막고, 또 지붕이 막아요. 루가복음에는 기와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그런 단어는 없어요. 팔레스타인에 무슨 기와가 있어요? 그냥 슬라브죠, 지붕이에요.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그 지붕도 성전을 가리키는데 써요.

(스바니아 1:4) 4 '나는 손을 들어 유다 국민과 예루살렘 온 성민을 치리라. 여기 얼마 남지 않은 바알의 신상들을 없애고 그 사제라는 것들을 이름도 없이 쓸어 버리리라. 5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들을 예배하는 것들, 야훼를 예배하면서도 맹세는 밀곰을 두고 하는 것들,

우상을 섬기는 건, 다른 게 아녜요. 하느님이 두려워서, 자기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하여, 하느님을 섬겨드리겠다고, 금욕과 율법지킴에 애를 쓰는 자들을, 우상을 섬기는 자! 이방인의 제사장!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카마르란 단어가 그 말이거든요. 이방인의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어떤 제사장이냐 하면 금욕과 율법지킴을 애쓰는 제사장이란 뜻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지붕에서 우상을 섬겨요. 제사장들이 있는 곳이 성전이었단 말예요. 그런데 거길 지붕이라 그래요. 그러면 그 성전이 그리스도께 가는 길을 막고 있어요. 넷이 뜯어야죠. 부숴버리는 거요. 히브리 사람들의 지붕을 뜯어버리면, 그건 천장이 홀랑 날아가는 거예요. 다 부서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중풍병자를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내려 버리죠. 그 때 예수님이 뭐라 그러죠? 성경에는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그런 뉘앙스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그 말이 아니라,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요. 그러한 모양들 다, 전체가! 요걸 믿음이라 그래요. 믿음이란 단어가 피스토스, 피스티스이렇게 있잖아요? 오미크론 시그마가 헬라어 뒤에 붙으면, 항상 존재, 믿음이 된 자를 가리키거든요. 그게 피스토스예요. ‘하느님은 미쁘시다.’ 그랬을 때, 그 단어가 피스토스예요. ‘하느님은 믿음이시다.’ 하느님의 이름이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설명해 주는, 나타난 것으로 추론하는 걸 믿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믿음도 나중에는 없어져요. 실체가 오면!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 믿음도 사라지고 희망도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 거예요. ‘아가페!’ 하느님만 남는다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게 믿음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요. ‘이게 믿음이야!’ 그래놓고, ‘네 침상을 가지고 떠나라.’ 그래요. 그 말은 그가 붙어 있던, 그가 속해 있던, 그걸 그와 떼어내어 살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젠 그거 네 것이 아냐, 일어나서 갖고 가! 갖다 버려!’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침상에 묶여 있던 그 상황! 이제 그게 네 것이 아니니까, 그거 들고 떠나라는 거예요. ? 믿음이 이렇게 그림으로 제시되었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이제 거기에 안 묶일 수 있잖아? 떠나!’ 그래요. 그런데 그걸 본 자들이 정신이 나가요.

(루가복음 5:26) 26 사람들은 모두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도 마음은 두려움에 싸여 '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이거 굉장히 기특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이게 그런 말이 아니라니까요. 여기 놀라다라고 번역이 된 엑스타시스익스타시예요. ‘엑스타시스!’ 깜짝 놀라서, 정상적인 정신 상태와 냉정을 잃는 걸 엑스타시스라 그래요.

그래서 엑스타시 같은 마약을 먹으면 정신을 잃는 거예요.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의식이 사라지는 거라니깐요. 엉터리로 열심히 종교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은 이런 엑스타시를 느껴요. 그래서 이상한 행동들이 막 터져 나오는 거예요. 마약 엑스타시 같은 거 먹으면 그런 이상한 행동들이 나오죠? 소리 지르고 막 깔깔 웃기도 하고, 이게 엑스타시예요. 좋아해요. 그 사람들은 그걸 좋아한다니까요. 쾌락이에요. 인간들 수준에서 최고의 쾌락을 엑스타시라 하니까. 그렇게 막 소리 지르고, 뭐 울고 그래야, 의심이 사라진다고 그러는데, 아니 그러면 힘이 빠져서 의식이 사라져서, (하하하) 그런데 성경은 그 사람들이 놀랐다고 그래요. 제 정신이 나간 그런 놀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잘 보세요. 나타난 현상만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담긴 복음을 읽어내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일단 정신이 나가요. 놀랍니다. 기적이 있는 현장에서 사람들이 정신이 나가는 이유가, 그리고 그걸 좋아하고, ‘나는 뭘 봤어!’라고 하는 이게 엑스타시예요. 정신이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여기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니까, ‘, 하느님 찬양이렇게 했다는 말로 이해하는데,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난 걸 독사, 영광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렇게 껍데기만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병이 나은 그것이, 하느님의 나타남으로 보더라는 거요. 이걸 독사조라고 하는 거예요. ‘, 이게 진리야?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거지하고 봤다는 거예요. 정신이 나가서! 깜짝 놀라서!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왕 삼으려고 하는 이들이 다 그거 보고 온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들 표적을 보고 온 거야! 그 표적의 진짜 내용을 보고 온 게 아니라, 떡이 맛있어서! 그거 원해서 온 거 아냐?’ 그런 거잖아요? ‘그건 껍데기 아니니? 껍데기!’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돌렸다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 우리가 오늘 기이한 일을 보았다.’ 고게 파라독사스예요. 패러독스(Paradox)! 역설의 껍데기만 봤다는 거예요. ‘야 오늘 우리가 파라독스를 봤네.’ 그래요. 그 사람들이.

이렇게 패러독스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자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해요. 그리고 하느님을 최선을 다해 두려워해주는 걸, 예배라 그래요. 그리고 그걸 순종(順從)이라 그러고, 그걸 섬김이라 그래요. 그건 내 밖에 하느님이에요. 여러분, 그 하느님은 심판의 하느님이라니까요.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이런 말을 주님이 호되게 야단을 치신 거예요.

(루가복음 5:20-21) 20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21 이 말을 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이 누구인데 저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오직 하느님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용서하겠느냐? 이거 맞는 말 아녜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이렇게 얘기했다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악한 생각이라 그래요. 그게 악한 생각이다.

(마태복음 9:3-4) 3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하며 수군거렸다. 4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 채시고 '어찌하여 너희들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느냐?

바리새인들의 그것이 악한 생각이라는 말이죠. 오직 하느님만 죄를 용서하지 누가 용서()해요? 오늘날 모든 교회가 이렇게 믿고 있잖아요. 하느님만 죄를 용서하니까, 여러분 이렇게 오기 싫은데, ‘일일연속극봐야 되는데, 여기 와서 억지로 이러고 있는 거 아녜요? (하하하) 대부분 아니지만! 꼭 이렇게 얘기를 해 줘야지, 아니면 비쳐서, 아 골치 아파 죽겠어요.

(루가복음 5:23-24)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24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집으로 돌아 가라' 하셨다.

여기서 어느 편이 쉽겠느냐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이건 어떤 것이 선한 수고냐?’ 이런 뜻이에요. 선한 수고! 어떤 것이 선한 수고겠어? 그래 놓고, 죄를 용서하는 걸 이야기하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여기에서 일어나다, 에게에로란 단어는 존재의 기능들을 막 수집해서, 존재로 세우는 걸 이야기해요. 에제키엘서 37장에 그 마른 뼈들이 덜거덕 덜거덕 하여 모아져서 수집이 되어 일어서죠? 그게 죄가 용서해지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둘은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선한 수고야. 내가 하는 선한 수고가 이거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바로 그거 하는 거야. 그래서 얘가 일어나는 거야.’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죄는 하느님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인자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래요. 여기서 인자는, 물론 1차적으로 예수님이죠. ‘그 사람의 그 아들이니까! ‘하 아담 하 벤그 인자의 족보를 완성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였잖아요? 우리가 루가복음 3장에서!

그 인자의 족보는 요한복음 1장으로 이어져서, ‘말씀, 육신인 우리!’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가면, 우리의 이름이 말씀이라 그러잖아요? 거기서 말씀, 육신, ‘호 로고스 사륵스라 그랬는데, ‘사륵스를 보통사람들이 그냥 이라 번역하는데, 그건 이라는 단어예요, !

그런데 그 옳은 말, 진리의 말과는 상관없는 것이 될 때, 나쁜 영이라고 해서, 육이라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말씀 육신은, 말씀이 된 육신은, 좋은 진리가 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을 인자의 라인으로 본다 말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느님으로부터 낳아진 자가 되는 거예요. 거기서 그 낳아진 자, 그건 단수인데, 동사는 또 복수로 쓰이고 그러잖아요? 교회라는 하나,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 그러나 많은 자들! 그래서 성경에서 그런 걸 포도송이로 비유하는 거예요. 포도가 그렇잖아요? ‘많은 게 모여서 한 송이이니까! 그래서 포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고 인자, 인자가 죄를 용서()한다 그래요.

자 예수님이 진리로 오셨어요.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죄를 용서해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자기가 하신 일이 뭔지를 가르치므로, 죄를 용서하는 거예요. 그죠? 그래서 그걸 깨달아야 , 십자가가 그거였구나!’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게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용서하셨어.’라고 패러독스의 껍데기만 알아요. 아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우리와! 그건 내 밖의 하느님이에요. 하느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대.’ 그 내용을 알아야 돼요. 그래야 , 그렇게 용서해진거구나. 나는 그렇게 해서 생명을 얻은 거구나!’라고 알아야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무조건 바리새인들처럼,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셔! 그래서 그 하느님이 두려워서 열심히 율법지킨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그러는 거예요. 고게 악한 생각이야!’ 우리가 죄용서 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말이 아녜요. 곡해 좀 하지 마세요. 제발! 다 이해할 줄 알고 이렇게 행간을 이해하라고 던지면 꼭 그걸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도 바오로가 어머니의 태로부터 擇定함을 받은 게 율법에서 건져진 거라니까. ‘창세 전 예정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이렇게 이메일이 오고 그러더라고요. 얼치기들이 위험하다니까요. 진리를 막는다니까요. 제자 수준에 있는 자들이.

여러분 죄를 용서해주는 내 밖의 하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수고로이 행하는 모든 걸, ‘악하다그래요. 하느님이! 그런데 대부분 그 수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단 말예요.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서, 내가 나를 용서하는 일이 먼저 있어야 되겠죠? 그래야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인 거잖아요? ‘그래, 내가 그렇게 용서받은 거구나. 할렐루야!’ 해야, 그게 나를 용서하는 거잖아요?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야. 우리의 죄를 용서하셔.’하고, 그 분을 섬기는 데만 전념하고 있으면, 그게 악한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중풍병자를 살린 것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좋아서 엑스타시하는 거예요. 놀라는 거예요. 좋아! 그게 쾌락인 거예요.

 

우리는 진리를, 말씀을, 복음을, 관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안 돼요. 묵시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포착이 되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감히 그 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하느님,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 수준에 맞는 말씀, 진리를 주신 거예요. 그게 야훼 엘로힘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말씀으로 오신 거 아녜요? 그런데 그것도 그 하느님이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이렇게 인정해주기로 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그걸, 내가 알라고 한 수준만큼만 알면, 내가 온전하다고 인정해 줄게. 그래서 산상수훈의 마지막이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너희도 내가 완전한 것처럼 완전하라!’는 건, (하느님처럼 되라는 말이 아니라) 그 하느님이 사랑이 뭔지를 너희들이 깨달아 알아, 그걸 전할 수 있을 만큼만 되면, ‘왼전이라고 인정해 줄게라는 말이에요. 그것이요.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포착할 수 없지만, 하느님이 포착할 수 있을 만큼 허락한, 그건 반드시 깨달아 알아야 된다 말예요. 그래서 그것으로 진짜 용서가 내 안에 일어나야 돼요. 그래서 나를 조금씩, 조금씩 용서해나가는 과정!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니까요. 전부 그 용서를 못해서 다 상처를 이렇게 갖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완전히 용서가 됐을 때 그것이 자유(自由)라 말이에요.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은, 반드시 거듭나야한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거듭나다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돼! 너희는!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서 다시 나오는 거, 백 번해 봐야 거듭나는 거 아냐.’ 그래요. 그런데 거듭나다아노뗀이란 단어가 위로부터 나다란 말이라 그랬죠?

성경에서 자손(子孫)을 낳다라는 표현을 할 때 부정모혈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낳는 것이 하나 있고, 말씀으로 낳는 이걸 위에서 난다그러고, 부정모혈로 낳는 걸 아래에서 난다 그래요. 그래서 선인들이 어머니 자궁을 아래 입이라 그랬고, 입을 위의 입이라 그래요.

그래서 아래 입! 부정모혈로 난 이는, 반드시 위로 또 나야 돼요. 한 번 나야 돼요. 이걸 거듭 남이라 그래요. 어디 낳아서 온 게 아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그 인자의 완성인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했다 그러는 거예요. 성령은 프뉴마말씀으로 잉태(孕胎)되어서, 말씀으로 낳는 이가, 인자의 완성이니까, 우리도 그 말씀으로 다시 나야 되는 거예요. 이걸 위로부터 난다, 거듭난다.’ 그래요. 래서 어머니의 태() 속에서 백 번 나봐야 아래잖아요. 그건 거듭남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옛 성전이라 그랬잖아요.

그럼 보세요. 애기가 아래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하는 게 뭐예요? 엄마, 아빠, 까꿍, 찌찌, 까까 뭐 이런 거! 말을 가르친다 말예요. 그걸 교육이라 그러죠. 가르쳐서 양육하여 사람 만드는 거예요. 모든 건 진리를 담고 있다니까요. 아래에서 나면, 반드시 처음부터 부모들이 말을 가르쳐요. 그래서 그 아이 입에서 말이 탁 터져 나왔을 때, ‘, 엄마 했어!’ 사실 엄마도 아닌데, ‘, ,’ 이러면 또 엄마래.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천재인 것 같잖아요. 모두가! ‘~,’ 그러면 아빠 끄랬다 그러고. 그걸 왜 그렇게 좋아하겠어요? 말을 하네. 아래에서 난 자가 위의 입으로 말을 하네.’ 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걸 위로 난다고 하고, 진리로 낳는다, 성령으로 난다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낳으면 진리가 이해가 되어져야지, 깨달아져야죠. 그건 평생 나 하나를 용서하는 그 일에 매진하는 거요. 그게 신앙생활이라 그래요.

거북이는 절대로 아킬레스를 못 이겨요. 성경을 패러독스로, 껍데기로만, 공식으로만 보고 있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라는 내용을 알아야 돼요. 배워야 돼요. 이해해야 돼요. 절대로 어줍지 않은 율법적 공식으로, 성경의 진리를 호도하지 마세요. 천국은 분명히 있어요.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그러나 진리를 안 이들에게는 그 하늘이 검지 않아요. 그걸 진짜 희망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삶, 잠깐이면 지나가는 찰나(刹那)의 인생이에요. 잘 견디시고, 잘 참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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