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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독서묵상 (에페1,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7 조회수1,497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1,15-23)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7-18)

 

앞의 17절에서 성도 그리고 교회위에 부어진 지혜와 계시의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 일찍이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고(호세4,6), 하느님은 그 백성들에게 하느님 알기를 요청하였다.(호세6,6) 이러한 지식은 단지 사색하고 성경을 읽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하느님께 대한 객관적 지식이 곧 하느님을 안다는 바른 지식이 될 수 없다.

 

17절에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에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알게' 로 번역된 '에피그노세이'(epignosei)의  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 그 자체로 이미 '알다' 라는 의미가 있는 '기노스코'(ginosko)에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에피'(epi)가 붙어 '철저하고 정확히 안다' 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 을 의미한다.

 

특히 이것은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그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앎은 단지 성경을 읽거나 인간적 탐구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예레31,33.34)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결코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에로까지 나아가게끔 만든다.(예레36,26.27) 바오로는 바로 이러한 앎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이제 18절과 19절에서는,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① 부르심의 희망과  ② 그분 상속의 영광의 풍성과  ③ 믿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그분 능력의 지극히 크심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실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kardias)는 일차적으로 신체 기관 중 하나인 '심장'(heart)를 지칭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원문에서는 '카르디아스'가 아닌 '디아노이아스'(dianoias)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으로서의 마음' 을 의미한다.

 

특히 요한1서 5장 20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해력 뜻하는 '지각'(understanding)으로 번역되어 있어 그 의미의 이해를 돕는다. 성령께서 바로, 전에 알지 못하던 영적 부분에 대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영이라는 사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통찰력을 통해 18절, 19절에 묘사된 세 가지 사항에 대한 깨달음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1)'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

바오로는 먼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느님의 부르심의 희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간구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을 부르신 데에는,그리고 이방인을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로 불러 들이신 데에는 그에 상응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희망은 하느님께서 증표로 주신 성령으로 인해 미래에 있을 완전한 구원에 대한 망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갖는 이 희망은 온전하며 부끄럽지 않다.(로마 5,5.6) 그리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이 희망은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티없고 흠없는 거룩한 교회로 세우실 것에 대한 희망이다.(에페5,27)

 

2)'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바오로가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두번째 것은 하느님의 상속(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상속(기업)이란 말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상속(기업)' 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소유하시는 상속(기업)' 인지는 애매하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을 '소유하시는 상속'으로 보는 견해는 구약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신명4,20 ; 2사무21,3 ; 시편33,12) 신약에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상속(기업)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이다.(에페1,11)

이런 관점에서는 본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우리의 상속(기업)' 아니고, 하느님의 '상속(기업)이 되는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한편, 하느님의 상속을 '베푸시는 상속'으로 보는 경우에는 바오로가 기록한 콜로새서의 문맥과 특히 관련을 갖는다. 콜로새서 1장 12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셨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풍성한 상속(기업)을 받은 자들이다.

원문으로 볼 때, 이 두가지 견해가 다 가능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견해가 모순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상속(기업)인 성도들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성한 상속(기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 깨닫게 되기를 간구하는 세번째 것은 하느님께서 믿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능력의 크심에 대한 것이다. 하느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 독생성자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라면, 우리를 위한 능력의 가장 큰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부활로 이어진다. 즉 자신의 영으로 죽은 예수님을 일으키신 하느님께서 또한 자신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로마 8,11) 우리를 향하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은 곧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

 

18절과 19절에 '그분의' 에 해당하는 '아우투'(autu)가 계속 나오는 것은 인칭대명사로서 강조를 위해 사용된 것이고, 이것은 부르심의 희망도, 상속의 영광도, 능력의 지극히 크심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알게 되기를' 에서 '알게'에 해당하는 '에이데나이'(eidenai)의 원형 '오이다'(oida) 본래 '보다' 또는 '봄으로써 인식하다' 라는 뜻인데,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지식으로서의 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직접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지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18절과 19절에 세 가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체험적으로 얻게 되는 영적 지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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