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바로알기 / 죽음이 영생의 선물이다 | |||
---|---|---|---|---|
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10-18 | 조회수1,76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경바로알기 2020.10.18. (공동번역성서) 죽음이 영생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데, 어떻게 하느님이 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올라왔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느님이 죽을 수 있습니까? 어차피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을 다시 살리실 수 있으니까, 잠시 당신을 죽였다가, 다시 살리신 건가요? 그러면 십자가는 장난이죠? 어차피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우리에게 그냥 쇼 오프(show off)한 거잖아요? 그건 우리가 가진 말의 정의와,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예요. 우매(愚昧)한 질문이란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死亡), 죽음, 죄(罪), 생명(生命), 의(義), 선(善) 뭐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가진 국어사전의 개념과 많이 달라요.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가 죽는 그 죽음을 죽으시겠습니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건, 진리(眞理)를 설명하는 모형이라 그랬잖아요? 아기의 탄생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결혼(結婚)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육신의 죽음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게 정말 끝입니까? 그럼 그건 정말 나쁜 건가요? 그건 정말 더럽고 무서운 겁니까? 그걸 누가 결정(決定)한 거죠? 그러니까, 이미 그런 결정이 내려졌으니까, ‘어떻게 하느님이 죽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 아닙니까? 그게 악하고 더러운 거니까! 그걸 누가 그렇게 결정해 놓은 거냐 말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금방 우리의 선악체계로 돌아가서, 이건 나쁜 거, 이건 좋은 거,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한 의문을 가져요. 그래서 우린 그리스도가 아니면, 쓰레기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고 있어도 항상 그리로 돌아간다니까요.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형으로 주신 세상 속 죽음이라는 건, 진리와 분리(分離)된 그 피조물의 상태와 결국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영원의 나라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찰라에 불과한 역사 이면의 죽음! 그리로 나가는 죽음이, 시작이라니까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삽니다. 지옥에서, 천국에서. 그러니 차라리 나지 않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났으면 진리를 알고 가야 되는 거거든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사는데, 역사는 찰라란 말예요. 그러면 그 죽음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그 시작! 문이란 말예요. 문! 그런데 인간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끝처럼 보일 뿐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나쁜 거, 무서운 거, 두려운 거, 이렇게 자기들이 결정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는 에녹과 엘리야를 부러워하는 거죠. 안 죽었다고. 그들이 죽었다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달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이 보는 그 죽음과 다르단 말입니다. 육의 죽음이라는 건, 영의 생명인 그 진리라는 호흡, 그래서 ‘루와흐’라고 하는 거예요. 생기를! 호흡이잖아요. 그게 성령이라고도 하잖아요. 영의 생명인 그 호흡, 호흡이 딱 끊어지게 되면, 진리가 끊어지게 되면, 인간의 상태가 그저 썩어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건! 시청각 교재란 말예요. 그 죽음에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죽음은 무엇보다 가치 있고 선한 거죠?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죽음마저도 선악의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우리의 육이 죽는 건 나쁜 것이라고 결정해버리는 거예요. 그 마음 안에 복음,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러한 죽음을 죽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건, 하느님나라에서는, 완성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어요. 모든 것의 끝은, 영원으로의 완성이에요. 역사에서의 끝은! 어떤 이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리로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비진리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 둘이 다, 완성된 존재로 영원을 살아요. 편의상 그렇게 하자고요. 영원을 살아요. 영원이란 말이 그건 아니지만! 한 쪽을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을 지옥이라 그래요. 그래서 전자의 죽음을 종(終)이라 그래요. 종(終)이라는 건 ‘완성하다, 마치다’예요. 그래서 임종(臨終)이에요. 군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은 그냥 사(死)라 그래요. 그냥 ‘죽음’이에요. 소자(少子)의 죽음은 사(死)라니까요. 종(終)이 아니라.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선과 악의 두 마음으로 모든 걸 판단해요. 죽음은 나쁜 거, 악은 더러운 거. 사는 건 좋은 거. 선은 깨끗한 거. 그러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도 ‘죄의 삯’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삯의 정체가, ‘죽음’으로 나와 있어요.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카리스마, 선물’이에요. 은혜라는 말과, 그 은혜의 선물이 ‘영생’이라는 그러한 진술이 연이어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죄라는 것의 개념부터 다시 정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돼요. 여러분이 오늘 내용을 잘 이해를 하면, 그 전 설교나 다음 설교들이 이해가 쉬우실 거예요. ‘죄’라는 단어는 ‘하마르티아’라는 단어예요. 사전적 의미는 ‘과녁을 벗어나다’예요. 과녁 적(的), 목적(目的)! 과녁을 보는 눈이 없으니까, ‘호라호’하는 눈이 없으니까, 과녁을 잘못 보고 그리로 쏴 버리는 것! 그걸 ‘하마르티아’라 그래요. 그 ‘하’라는 부정 접두어, 그리고 ‘마르투스’ 혹은 ‘메로스’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되는 게, ‘하마르티아’인데, 그 ‘마르투스’는 여러분이 잘 아는, 영어에도 ‘말투스, 증인, 증거’라는 말과, 그게 ‘말티온’이란 단어에서 나온 건데, 그 ‘말티온’이 역시 ‘증인, 증거’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법궤 안에 십계명’이라는 말로 쓰이는 단어예요. 그러면 ‘하 마르티온’하면 뭐겠어요? 그 계명이 아닌 것! 그 계명의 진의가 아닌 것! 그게 ‘죄’예요. 그걸 잘못 보고 그걸 법으로 알고 붙들어 버리면, ‘하마르티온, 하마르티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잘못 율법을 내 남편으로 붙들어 버리면, 내 한 쪽 부분이 뭐라 그랬어요? ‘메로스’라 그랬죠? 그 한 쪽 부분이, 엉뚱한 남편으로 붙어버리는 거잖아요? 나에게! 그래서 ‘하 메로스, 하 마르티아’가 ‘죄’인 거예요. 그걸 죄라 그래요. 엉뚱한 남편이 내 옆에 붙어버리는 거! 그렇다면 반대로 진리는 법을 깨고 선악의 법에서 벗어나는 게 진리예요. 다른 게 아니라니깐요. 율법이 ‘호 코스모스, 세상’에서 벗어나는 거! 눈에 보이는 이것, 여기에 갇혀서, 엉뚱한 하느님 섬기는 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야말로 자유(自由)! 그 자유를 주시는 진리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그걸 진리라고요. 다른 거 아녜요.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걸, 율법이라는 짝으로 곡해를 해서 붙들어 버리면, 거기에서는 그 남편과 생산해내는 게 뭐예요? 행위라는 죄만 나오는 거예요. 율법으로 붙들어 버리면! 그러나 그 말씀을 진리로 붙들어 버리면, 거기에서는 생명이 열매를 맺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이! 구구절절이 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그 아브라함이 우리의 대표죠? 하갈이라는 율법을 만나면, 이스마엘이라는 죄를 낳는 거고, 사라라는 은혜의 아내를 만나면, 그게 하늘의 어머니라, 그러잖아요? 성경이 ‘남자가 부모를 떠나가 아니라, 부모로 떠나’거든요. ‘부모로 떠나…’ 우리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갈라디아서에 보면, 우리를 낳는 분이 하늘의 어머니라, 그래요. 우리를 낳는 그 어머니! 그 남편! 다 같은 말이에요. 그걸 은혜로 만나게 되면, 거기서는 생명만 나온다니까요. 찬송만 나온단 말이에요. 거기서는! 잘 생각해 보세요. 죄의 원래 이름이 ‘선악과’잖아요? 죄의 원래 이름이! 기본도 안 되어 있으니까 어디서부터 나가야 될지 모르겠어. 하느님께서 주신 나무의 열매를, 보기에 좋은 선악과로 보게 되면, 그것을 선악의 법으로 먹고, 죄만 출산하게 되는 거요. 그러면 그 출산되는 열매들이, 어떻게 보이겠어요? 선, 악의 열매로 먹고, 선악과만 낳아, 계속해서! 선악의 세상에서, 율법의 세상에서, 그 선한 율법의 모습, 그런 행위를 낳는 게 어떻게 보이겠느냐고요? 멋지게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 죄를 더럽고 추악하게 상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의 죄는, 이 아담들의 율법 세계에서의 죄는, 그렇게 멋지게 보인다니깐요. 깨끗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해 보인다니까요. 왜 율법을 먹고 결혼해서, 율법과 낳는 행위라는 자손이 뭐겠어요. 그 열매가 뭐겠느냐고? 인간들이 좋아하는 그 열매라 말입니다. 물론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게 죄가 아니란 말이 아녜요. 그것도 죄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리고 인간 세상이 보편적으로 정해 놓은 상식을 갖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건 죄가 아닌데…’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예요. 그게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단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래적 마음인 선악구조 속에서, 선하다고 택한 것이나 악하다고, 택한 것, 그래서 안 하는 거! 이게 전부 죄예요.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때, 우리의 두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옳게 듣든, 그르게 듣든, 그 들은 것으로 듣는 족족 죄로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어요. 산상수훈이 전부 어떻게 시작해요? ‘아쿠오’로 시작해요. ‘너희가 들었지? 그렇게 들었지?’ 어디에서 ‘엔 아르케! 태초에 내가 한 이야기를 너희는 그렇게 들었잖아?’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라고 내가 말했을 때, 너희는 어떻게 들었다는 거죠? 율법에서 뭐라 그래요? ‘희생제사 드려’로 듣잖아요? 우리는! 그리고는 드려서, 열심히 희생제사 드려서 죄 짓잖아요? 그럼 ‘간음하지 마!’라고 하면, 어떻게 들어요? ‘간음하지 마!’로 들어요. 그래놓고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세상과 간음하죠? 살인과 간음 배웠잖아요? 그럼 이제 척 알아먹어야죠. 그러잖아요. 보세요. 하느님이 법을 주어요. 율법을 준다고, 계명을 주는데, 그걸 하느님의 의도하는 대로 들어도 죄를 짓고, 그렇게 반대로 들어서, 또 죄를 지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들이 두 마음으로 판단해서, 선하다고 판단된 걸 열심히 해도 죄고, 악하다고 생각해서 안 해도 죄예요. 그 두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한! 그래서 새 마음 준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엄밀히 말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생긴 근성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限界)를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피조물이 신의 말을, 우리가 감히 상상도 안 되고 감지도 안 되는, 그 신의 말을, 진의로 어떻게 알아들어요? 그건 오만(傲慢)입니다. 여러분! 못 알아들어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하느님의 말을 인간이 알아들으면, 안 돼요. 못 알아듣는 게 정상(正常)이에요. 피조물은, 신의 말을 못 알아듣고, 피조물 수준의 일을 해야 정상이에요. 어떤 농부가 자기 소(牛)를 남의 배추 밭에다 묶어놓고,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 그러고 가서 3일 있다 왔는데, 진짜 그 소가 안 먹고 있었어. 거기서! 그건 아픈 소 아니면, 미친 소예요. 소는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라는 주인의 말도 못 알아들어야 되고, ‘나는 이거 먹고 싶다.’라는 자기의 본능을 억제할 수도 없어야 소예요. 피조물은 하느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래서 예언자들이, ‘하느님 쟤네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세요!’ 그랬더니, ‘그냥 가서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가서 전해!’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자연스럽다는 건, 그렇게 되는 게 맞다라는 거예요.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그렇게 해 놓았다는 거요, 하느님이! 그런데 하느님이 피조물의 그런 수준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그럼 그게 무슨 옴니슨스(Omniscience: 전지(全知))의 하느님이에요? 그러면 피조물이 당연히 그 수준이라는 걸 알면서, ‘너 왜 내 수준으로 못 올라와? 너 왜 하느님답지 않아?’ 이렇게 화내는 게 하느님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니까요. 왜?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하느님처럼 됐다고 믿고 있거든요. 모든 인간이 다! 그러니까 그 수준에서 맞장을 뜨려고 한다니까요, 하느님과요! 인간은 하느님의 말로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리고 그 잘못 알아들은 말로, 열심히 율법과 합방하여, 행위의 자손을 낳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주자마자 날름 따먹는 거죠. 그게 피조물의 한계라니까요. 그러한 인간의 욕구와 본능 있죠? 운명처럼 타고나는 생래적 본능을, ‘에피두미야’라 그래요. 그걸 성경이, 오늘 본문이 ‘탐욕’이라고 번역해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나쁜 게 아녜요. 물론 나쁜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어떤 목적 하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란 말예요. 우리는 그런 단어를 대할 때, 얼른 놀부나 스쿠리지 영감을 떠올리죠. ‘탐욕’ 그러면! 그들이 가진 거죠? 그래서 나쁜 거. 그런단 말예요. 그러니까 ‘욕심 부리면 그게 죄를 낳고, 그러면 이제 죽는 거야!’ 그 정도 수준으로 알고 있는 거죠. 성경이 말하는 ‘에피두미야, 탐욕(貪慾), 탐심(貪心)’은, 어떤 존재의 생래적 성향을 가리키는 거예요. 마치 호흡처럼 붙어 있는, 그 존재의 자연스러운 성향이, ‘에피두미야’예요. 그런데 우리 한글성서가 가진 그 단어가 ‘탐욕!’ 우리말이 가진 단어가 탐욕이란 단어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만, 그 수준으로만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자연스럽게 그 호흡처럼 갖고 있는 성향, 그 성향이 ‘에피두미야’인데, 우리처럼 두 마음을 갖고 있는 모든 걸 선악으로 나누어서 판단하고 선택하여 그걸로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성향을 갖고 있는 그런 우리! 그런 그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인 성향이잖아요. 어떻게든 그걸 둘로 나누어서 하나를 택하여, 나의 유익으로 쓰잖아요? 그게 나의 보람이든지, 나의 가치든지, 뭐 그런 거. 그래서 그 성향을, 그 탐욕(에피두미야)을 나쁘다고 하는 거지, 내 마음이 하나면 그 ‘에피두미야’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 돼요. 예수님이 ‘내가 제자들, 너희와 함께 과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했다.’ 그 말은 뭐죠? 내가 나를 주기를 원해. 과월절이 예수님을 고기로 주는 거니까. ‘원하고 원했다.’가 ‘에피두미야, 탐욕’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탐욕이 있었다는 거예요? 똑같은 단어인데. 그 분은 독생자, 모노게네스, 한 마음으로 왔기 때문에, 그 ‘에피두미야’는 선이란 말입니다. (로마서7:7) 7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들어 보세요. 여기서 ‘탐욕’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두미야’예요. 탐욕! 우리가 생래적으로 갖고 있는 그 성향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녜요. 그건 존재에게서 발생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 그것이 율법으로 작용할 때,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인간들이 원하는바’ 그 ‘에피두미야’를 가지고, ‘하느님이 원하는 바, 에피두미야’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주었다는 말예요. 그러한 두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자, 율법을 하느님이 줬습니다. 받자마자, 요건 해야 될 거, 말아야 될 거, 정(淨)한 거, 부정(不淨)한 거, 깨끗한 거, 더러운 거, 즉시 둘로 나누죠. 그래서 율법은 그냥 둘이에요. 하느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면, 그들의 성향이, ‘에피두미야’가 둘이기 때문에, 두 마음이기 때문에, 즉시 하느님의 그 진리를, 둘로 나눠버린다니까요. 그리고는, 자기들의 유익에 합당한 것을 택해서, 그걸 해버리는 걸! 하느님은 ‘죄’라고 얘기를 해요. 하느님이 그걸 죄라 그래요. 그러니까 율법은 그들의 두 마음이 뭔지를 드러내기 위해 준 거라니까요. 너희들이 어떤 존재인지, 내가 내 법, 율법을 줬더니, 금방 둘로 나누어서 희생제사 드리고, 율법 지키고, 이건 해야 돼, 이건 하지 말아야 돼. 자기들이 다 나눠놓았어. 마치 아브라함처럼! 세 번째 그 제물을 드려 했더니, 똑 쪼개 놓았어. ‘바탈!’ 양쪽으로 쪼개 놓았잖아요. 자기를 중심으로 바오로가 자기가 율법의 진의를 몰랐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이라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거니까! 그런데 진리를 알고 보니까, 그 자연스러운 것이 ‘호흡, 에피두미야, 탐욕’ 그게 죄였다는 걸 바오로가 알았다는 거예요. 그러니 율법이, 그 자연스러운 걸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 자연스러움을, 어떻게 탐욕으로 알았겠느냐 이 말이에요. 이 자연스러운 게, 나는 의라고 생각해서 열심을 부렸었다. 그런데 율법의 진의를 알고 나니까, 아니 그게 탐욕이었다고, 율법이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걸 나는 계속하고 있었던 거 아녜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욕을 어떻게 죄로 알아들었겠어?’ 그럼 바오로가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오로에게 해가 된 겁니까? 그게 유익한 거였어요. 그럼 죄가 뭐 그렇게 나빠요? 바로 그게 말하는 성전으로, 말하는 율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하신 일이에요! 똑같은 일이에요. 옛 성전은 말하지 못하는 성전이었고, 말하지 못하는 율법이었잖아요? 소리가 없는 율법, 문자로만 주었잖아요? 그런데 그 율법이 와서 말을 하네요. ‘그건 이런 거였어!’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단 한 사람도!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 옛 성전과 함께, 내가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져야,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 번째 성전으로 서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바오로가 ‘너희들이 성령이 居하는 성전이잖아.’ 성령은 뭐?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와 내가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 되어, 질그릇이 되어서, 난 언제든지 깨어질 수 있는 거니까. 그 때는 지금처럼 유약을 발라서 한 게 아니라, 초벌구이 해 놓은 거니까. 톡 치면 깨진단 말예요. 질그릇이! 내가 그리스도를 담아, 자칼과 네케바의 사람이 되는 거! 이게 세 번째 성전이란 말예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한 진리의 그 체계(體系)와 차서(次序), 이게 성전, 번제단부터 착착착 체계와 차서! 이게 ‘티데미’라 그랬죠? 요렇게 서 있는 걸, ‘아 그게 그거야!’라고 알게 되면, ‘똑바로 위로 서다, 이스테미, 스타우로스, 십자가’라 그랬어요. 그것이! ‘언약’이란 말예요. 그 진리의 체계와 차서는 ‘절대로 너희들은 법에 묶이면 안 돼. 이 보이는 세상에 묶이면 안 돼. 이건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여기에 묶이면 안 돼!’ 그렇게 법에서의 해방을 가르치시려는, 그 하느님의 학습방법이었어요. 그게! 그걸 헬라어로 ‘도끼마죠’라 그래요. 그 ‘페이라죠’가 실패하게 하기 위해 던지는 시험이에요. 세상이 던지는 시험이죠. 그와는 달리 ‘도끼마죠’로 던지는 시험은, 전부 시험실에 들어가서 백 번 실험을 했을 때, ‘아! 이게 다 결과가 같네. 그러니까 이건 진리(眞理)야!’ 할 때, 그 시험 있죠? 그게 ‘도끼마죠’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우릴 죽이려고 하는 시험이 아닌 거! 그런데 하느님의 그 은혜 밖의 아담들은, 하느님의 그 ‘도끼마죠’를 ‘페이라죠’로 받아, 멸망(滅亡)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7:14-16) 14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율법이 죄냐? 이렇게 물어요. 첫 절에서! 여태까지는 ‘그것만 죄야.’ 그래놓고, 갑자기, ‘야, 율법이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거라면, 그게 죄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래놓고는 율법이 신령(神靈)한 것이라 그래요. ‘프뉴마티코스.’ ‘프뉴마’가 영이잖아요. 성령! 옳은 말! 깨끗한 말! ‘프뉴마티코스.’ 깨끗한 말이 된 거 신령한 거야. 율법은 원래의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율법은 신령한 거라는 거죠. 그런데 율법을 육신에게 주면, 육신들은 그걸 사용하여 죄만 낳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낳는 것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도 못해요. 이게 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낳는 걸! 바오로가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행하는 일을 알지도 못하더라! 분명 자기 안에 원하는 바가 있어요.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래, 모든 건 선악으로 판단하면 안 돼. 그래, 모든 건 다 그렇게 용서되는 거지.’ 하는데, 내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금방 ‘죽으면 나쁜 거지.’ 어느새인가 나는 선악의 틀 안에 또 들어가 있다니깐요. 나의 육신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행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한 말을 해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 것! 그 죄를 행하는 것이, 율법이 좋다는 걸, 율법이 행하고자 하는 일을 완료한, 완수한, 결과라는 뜻이에요. 내가 이렇게 되는 게 맞다는 거예요. 율법이 그거 하러 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럼 율법이 도대체 뭘 하러 왔기에, 그게 율법이 선한 거라는 걸 증거하는 거야?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여기서 죄는 도덕적, 윤리적 그런 죄가 아녜요. 제발 이젠 그 수준에서 벗어나세요. 그 죄를 짓는 것이, 선악체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그것이, 율법이 와서 자기의 이름을 완수한 결과라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라는 거예요. 그것이. (로마서 3:20)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로마서 7:12-13) 12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13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도 자기가 하는 일들이, 저희들이 하는 일들이 죄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계명이 와서, ‘그것도 사실은 죄야!’라고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받은 내가, 진리가 뭔지를 알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어느 틈엔가 그리로 끌러가는 것을 보면서, ‘아, 율법이 바로 이걸, 나의 처음자리를 드러내려고 온 게 맞는 거구나!’하면 율법이 선한 거죠? 잘한 거잖아요? 그 일을! 그 말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일차적으로 여러분에게서 일어나는 반응(反應)이 뭐예요? ‘내가 죄인 중에 죄인이 맞습니다.’라는 고백(告白)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나는 그거 잘 지켰어요.’가 아니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죄 덩어리다. 나는 뭘 주기만 하면, 그냥 바로 선악(善惡)으로 갈라서, 하느님이 미워하는 그 죄를 짓는 자다.’ ‘나는 그냥 죄 덩어리네.’ 내가 한 그것이 다 죄라는 걸 알았으면, 이제 그거 안 하면 되잖아요? ‘아, 희생제사 드리는 게 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하느님께 칭찬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죄라네.’ 그럼 희생제사 안 드리면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성당에(예배드리러) 올 때, 소 한 마리씩 안 갖고 오는 거 아녜요? 지금! 그거 알았기 때문에. (잘 새겨 들으세요) 진리는, 생명은, 땅의 것이 아녜요. 그런데 어떻게 땅에다가 생명나무를 심어요? 못 심습니다. 성경이 그래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안에만 생명(生命)이 있더라.’ 그래요. 그러면 이 땅에다가 생명 못 심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거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안 열려 있는 게 맞는 거라니깐요. 땅에는 그게 안 열려요. 아니, 땅에 온통 죄와 어둠밖에 없어요. 그게 피조세계의 한계란 말예요.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온통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There’s no structure. 스트락쳐, 그릇이 없어! 공허는 내용도 없고, 틀도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땅이라는 게 실체가 그렇다니까요.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우리의 육체, 이건 그냥 없는 거예요. 사실 그렇잖아요? 우린 다 원자로 되어 있잖아요. 모든 물질이 다. 그런데 원자라는 게 뭐예요? 원자라는 게 보이지도 않지만! 하여튼 이 방만(放漫)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원자라는 게, 그 원자핵!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막 돌아서 원자잖아요? 그런데 이 방이 원자라고 한다면, 원자핵은 보이지도 않아요. 전자도 안 보여요. 그런데 전기력의 법칙! 법이라는 어떤 것이 주어지니까, 이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인 거예요. ‘어, 이게 원자야?’ 이렇게. 그런데 그 말, 법이 빠져버리면 어떻게 돼요? 없는 거예요. 원자는요! 그래서 여러분을 그 전기력의 법칙을 확 뺀 다음에 확 줄여 보면, 우리는 먼지도 아녜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보이게 되냐고요? 그리고 이렇게 성질도 이렇게 있냐고요? 이렇게 다! 그 법이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그 법이, 말이 말씀이 빠져버리면 여러분은 허깨비라니까요. 이 세상도 전체가 다. 전부 진공이에요. 원자는! 그러니까 없는 게 맞는 거예요. 헛거라는 게 맞는 거예요. 혼돈과 공허라는 게 맞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말이 떨어지니까, ‘있어라’라고 뭔가 말이 떨어지니까, 뭔가가 생긴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냥 ‘나싱(nothing)!’ 그래도 맞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뭐 ‘나싱(nothing)’들이 자꾸 뭘 한다고 그러니까, 하느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저희들이 뭐 존재냐? 선악과,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것을 알려주려면, 그냥 흑암과 죄, 피조물의 그 ‘없음’들의 한계! 그걸로 이게 뭔 지를 가르쳐줘서, 이게 아닌 어떤 것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어요. 왜 그거는 직접 못 담는다니까요. 이 그릇에! 그러면 선악과를 통하여 생명을 가르치고, 죄를 통하여 의를 가르치고, 어둠을 통하여 빛을 가르치는 거요. 하느님은. 그렇다면 그게 왜 나쁘냐고요? 그렇게 해서 하나로 돼야 자유롭다니까요. 그렇게 하느님은 그 죄가 뭔지 그 어둠이 뭔지 알아먹으라고 율법을, 계명을, 말씀을 줬더니, 얘네들이 그걸 알아먹으려 하지 않고, 그걸 지키려고 하네. 그러면서 죄를 지어버리는 거요. 그게 뭔지 알고 하지 말랐더니, 그걸 자꾸 지켜! ‘자존심이 있지. 이거 내가 해 버린다. 그냥!’ ‘없음’들이. 꾹 누르면 먼지도 아닌 것들이! 율법, 율법 하니까,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계명들만을 떠올리는 것 같은데, 율법은 ‘선악과 먹지 마!’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서 십계명으로 주어지고, 모세 오경으로 주어지고, 성경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총칭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계명이에요.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이 가진, 아니 인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그 생래적 본성인 ‘에피두미야’ 그 탐욕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느님이 허락한 선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묶이면 그게 악한 것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서, 하느님을 설명하는 도구가, 말씀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을 직접 설명을 못하니까! 문자에, 소리에, 갇힐 수 없는 그 분을 어떻게 설명해요? 인간이 뭔지를 설명해서, 그 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죄 짓지 마!’라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죄가 뭔지 알았어?’ 이걸 물어보고 싶은 거라니깐요. ‘나=탐욕=죄!’ 이 공식을 잊지 마세요. 그걸 알라는 거예요. 그걸 확실히 깨닫고, 나와는 다른, 그 분의 도움을 구하는 거! 이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야 진짜 완성품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를 품은 ‘나!’ 창세기 1장부터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그 진짜 사람! 그걸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이 그릇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품은 것. 그게 우리의 목적지예요.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사람이 되는 것. 자칼이 남편, 하느님의 역할이고, 네케바가 하느님을 담은 그릇이에요.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연합(聯合)하여 사람이 되더라.’ 그러는 거예요. 이게 목적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메시야에 대한 예언(豫言)은, 여기부터 나온 거예요. 너희들은 그 자칼을 신랑으로 담아, 그 진리를 네 안에 담아야, 사람이 되는 거야. 그게 하느님나라 백성이야. 그 남편을 기다려야 돼. 이게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後孫)으로 나온 거고, 그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후손으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거야. 메시야는 태초, 창세기부터 계시된 거예요. 그런데 엉뚱한 메시아를 자꾸 기다리니까. ‘메시야’를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의 영, 진리를 내 마음에 품는 것! 그게 이 역사의 목적지라는 걸 가르쳐 주는 게, 창세기 1장부터 계속 나온 거란 말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엉뚱한 메시야들을 자꾸 기다리는 거 아닙니까? 이 포로 된 이 자리에서 구해 줄 메시야! 가난에서 구해줄 메시야! 메시야는 그리스도라니까요. 기름! 말씀! 진리! 그러니까 그 진리를 안 사람이, 그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역할에 의해 내게 이해되어진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그 사람이, 메시아를 만난 거지, 그게 되지 않은 사람은,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그 메시야 아녜요. 뭘 관계가 있어야 뭐 메시야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거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까요. 그 율법은, ‘나’라는 존재의 구성, 원자가, 원소 자체가, 모두, 전부 ‘죄’더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는 역할로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죄라고 하기도 하는 거고. 그것을 ‘탐심’으로 부르기도 하는 거예요. 그게 ‘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게 ‘나’라니까요. 그래서 율법이 오자마자 거울로 딱 나를 비춰주는 거예요. 그것로 전부 죄만 지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 ‘에피뚜마야, 탐욕’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면, 죄라는 게 성립이 안 되죠. 그러면 죄가 없으면, ‘의’를 설명 못해요! 그러면 그 죄가 나쁜 거냐고요? 하느님이 절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건데, 어떤 존재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생긴 게 그거란 말예요? 그게? 그러면 하느님이 어떻게 하늘을 설명하느냐고요? 피조물들에게! 그러니 ‘이제 난 자유니까, 막 살아야지’ 그러면 잡아가요. 그러니까 그건 그렇게 사세요. 세상에서 세상 것, 가이사르의 것 주시면서 사시라니까. 그런데 그걸 진리로 끌어들여오지 말란 말예요.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고작 고 수준에서, 성경은 경찰이야, 검사야, 요렇게만 보는 거죠. ‘하지마라고 그래. 하라고 그래. 아니면 잡아 간대. 지옥 보낸대.’ 이렇게. 하느님은 피조물의 한계인 두 마음, 하느님일 수 없는 그 마음을, 율법을 통하여 밝히 보여주시고, 그것을 죄라 이름 하여, 그 잘못된 과녁을, 진리로, 은혜로 바로 잡으시므로 하여, 당신과 한 방향으로 가는, 그게 ‘에이레네’라 그랬죠? 둘이 멍에 같이 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거! 그렇게 한 방향으로 가는 벗을 만들어내는 걸 목적으로 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존재의 목적이에요. 그 전체 과정을, 그 진리의 차서, 체계를 ‘피스티스’라 그래요.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그게 ‘믿음’이에요. ‘하느님은 미쁘시다!, 신실하시다!’ 그럴 때, 그게 ‘피스티스’예요. 그 말은 하느님은 믿음이라는 얘기잖아요. 무슨 말이겠어요? ‘하느님은 믿음이다.’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믿음이 되어라’ 그러잖아요? 그러한 진리의 차서, 체계로, 우리를 가르쳐서, ‘아, 이게 그거예요?’라고 하는 하느님의 의도가 이루어지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믿음! 그리고 나를 그리로 끌고 가는 하느님의 열심을 ‘피스티스, 믿음!’ 나는 ‘피스토스, 믿음이 된 자’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 두 단어가 달라요. 거기에 그러한 하느님의 ‘믿음’이라는 그 열심 속에, 죄가 사용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진짜 무서워하시는 그 죄! 거기에 쓰이는 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죄가 아녜요. 모든 종교에서 죄라고 하는, 심지어 함무라비 법전에서 죄라고 하는 그거 하지 말라고, 하느님이 그들과 똑같이 그냥 막 우리에게 써서 주셨겠냐고? 네? 하느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런 ‘죄’관(觀)이 아예 없으세요. 성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의 처음자리를 ‘직시’하게 하고, 진짜 영의 눈으로 보게 하고, 거기에 절망하게 만들고, 마침내 그 죄인의 자리에서 장렬하게 ‘아, 나는 아니구나, 진짜. 나는 허깨비네. 이거 먼지 맞네.’ 그렇게 장렬하게 사망, 죽음에 이르게 하여, 새롭게 살게 만드는! 그게 사는 거거든요. 그게 생명이거든요. 그렇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쓰는 도구란 말예요. 그래서 아오스딩도, ‘오! 거룩한 죄여!’ 했다니까요. ‘오, 복된 죄여!’ 그랬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죄가 그렇게 좋은 거야. 열여섯 살에 사생아를 낳고, 자기가 그런 걸 통하여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되니까, 그 죄가 너무 좋은 거야. 자기에게는! ‘오! 복된 죄여!’ 그랬다니까요. 아오스딩, 칼빈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런 이면(裏面)의 내용은 다 삭제(削除)하고 안 들어. 엉뚱한 것만 듣고! 그 죄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나를 알았겠느냐 예요. 내가 나를 모르고 어떻게 신(神)을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그 신도 나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죄라는 것을 육의 세상과 다르게 보는 걸, 성경이 뭐라 그런다고 했어요? ‘메타노이아, 회개’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어 저게 사실은 파르르 떨 게 아니었구나.’ 다르게 보는 것.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걸 그렇게 보는 순간 죄라는 게 삭제되죠? 그러한 죄의 삭제가, ‘용서(容恕)’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죄 없음’ 이렇게! 그걸 못 보니까 계속 거기에 묶여서, 여기 와서도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아닙니까? 울고 불고의 신앙!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 그러는데, 오면 다 울어. 왜냐하면 거시서 못 벗어났거든. 자기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시어머니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남편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오면 설움만 북받쳐! 다 울어.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는데. ‘아 그게 사실은, 나를 선으로 이르는 하느님의 선물이었구나!’ 라고 알면, 왜 울고불고만 해야 되냐고요? 우리가. 물론 육을 입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완전히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기쁨이 되면, 범사가 감사할 거 아녜요? 범사는 모든 일이거든요. 그게 안 되면, 범사가 감사가 안 돼요. 사람 죽이고도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거 감사하라, 그래요. 그게 네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는 거라면, 너는 그것도 감사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하타’예요. 그 ‘하타’라는 단어가, ‘빗나가다, 죄 짓다, 타락하다’라는 뜻을 똑같이 갖고 있어요. ‘하마르티아’와! 그런데 ‘하타’라는 단어는, ‘회개하다, 정결케 하다, 화해하다, 용서하다’ 이런 뜻이 같이 있어요. 이게 뭐예요? 말이 돼요? ‘죄’라는 단어 속에 ‘죄사함, 용서, 의, 회개’ 이게 같이 들어 있다니까요. 그 죄로 용서에 이르라는 거예요. 그거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알아, 죄가 뭔지를 올바로 알아, ‘이젠 그건 아니구나!’를 알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여러분! 죄라는 걸 여러분이 올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 뭔가에 묶여서, 여러분 이제 소화도 안 돼요. 말씀을 알면 알아갈수록, 그게 여러분을 더 묶는다니까요. 점점점.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죄가 뭔지를 아는 게 선이에요. 죄가 뭔지를 모르고, 사람의 열심을 부려 행하는 게 죄예요. 잘 구분하셔야 돼요. 죄가 무엇인지를 점점점점 알아가다가 ‘아, 이게 죄구나, 이게 바로 ‘나’구나. 이게 바로 내 안에서 긁어낼 수 없는 두 마음! ‘에피뚜마야, 탐욕’이라는 거구나’ 바오로가 고백한 것처럼! 말씀이 없었으면 바오로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우리도 ‘아, 이게 그거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을 때 그걸 ‘죄의 완성’이라 그래요. 성경이요. ‘죄의 완성!’ 이상한 말 많이 나오죠? 죄가 죄의 역할을 완수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하면, 그리고 ‘아! 이게 하나님이 원치 않는 거네!’라고 내가 인식하게 되면, 그게 바로 율법의 선함이 시인되는 거라고 하는 거란 말입니다. 율법의 역기능이 오히려, 율법을 잘 지키는 나를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바리새인이었잖아요? 그게 율법의 역기능이라니까요. 그건 순기능이 아니었단 말예요. (야고보서 1:13-15) 13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14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되는 것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그러니 무슨 말일까요? 이 죽음은 뭐예요, 그러면? 여기서 사망이 ‘다나토스’예요. 신약 성경에서 사망이라고 번역을 한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여러분이 지금 보는 이 사망(死亡), 이 ‘다나토스!’ 그리고 다른 단어가 ‘네크로스’인데, ‘다나토스’는 아까 종(終)이라 말씀드렸죠? 완성의 의미로서의 죽음이에요. 점점 죽어가다가, 확 죽어서 뭔가로 완성이 되는 게, ‘다나토스’예요. 바오로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을 때의 그 ‘죽노라’가 ‘다타토스’예요. 날마다 죽어서 어떻게 되죠? ‘나는 죄인 중에 죄인이 맞네!’라고 완성되는 거예요. 요걸 ‘다나토스, 사망’이라 그래요. 이건 나쁜 게 아니란 말예요. ‘네크로스’는 그냥 우리 ‘네페쉬’의 숨이 뚝 끊어져 죽는 거. 시체(屍體)! 고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다나토스’의 죽음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무트’라 그랬죠? ‘무트 타 무트’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너희는 정녕 죽을 거야.’ 그랬죠? ‘이거 먹으면 죽여버릴 거야.’ 가 ‘무트 타 무트.’ 죽고 죽으리라 그랬죠? 그런데 그 무트가 뭐라 그랬어요? 파자하면 ‘멤’하고 ‘타우’니까. ‘말씀으로 완성되다.’라는 뜻이에요.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너 선악과 먹고, 너희들이 죄를 낳게 되면, 그 죄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죽게 될 거야.’ 어떻게 ‘말씀의 완성으로.’ ‘무트 타 무트’로 죽어야, 구원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그 선한 죽음이 있단 말예요. 주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왔다.’ 그래요. 그러면 그 분이 그 아버지의 뜻을, 말씀을 완성하면, 어떤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다!’하고 죽는 거예요. 그 죽음이 왜 나쁘냐고?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죽다가, 죽고 죽다가, 날마다 죽다가, 결국은 그렇게 언약의 십자가에서 ‘아니네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맞네요.’라고 죽는 게 구원의 차서(次序)라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가 그렇게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왜 나쁘냐고요? 그걸 보고, ‘하느님이 죽을 수 있어요?’라고 이걸 물어봐야 되냐고요? 여러분, ‘예수님이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갖고 오신 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이 선성이 죽은 겁니까? 인성이 죽은 겁니까? 이렇게들 물으시는데, 성경 어디에 신성이라는 말과 인성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건 조직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수준에서 그냥 만들어낸 말이에요. 그 분은 하느님으로 오신 사람이에요. 신성은 뭐고, 인성은 뭐예요? 아세요? 모르는 말 좀 쓰지 마세요.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라니까요. 그 분은! 그러나 성경의 주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그 하느님은 아녜요. 그 하느님은, 세상이 듣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에, ‘엘로힘’으로, 그 주어로도 나오지 않는 그 하느님이, ‘아마르’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엘로힘’으로 너희들에게 맞는 하느님을, 그 수준에 맞는 하느님을, 계시해 줄 게. 그거 하느님이에요. 하느님!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그 분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분은 아니라고요. 왜? 그 분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위격(位格)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데, 삼위일체, 삼위일체하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그냥 성경 말씀 그대로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거라고 갖고 있으면 돼요. 삼위일체가 있느냐는 둥 없느냐는 둥, 그 따위 소리 뭐하려고 하냐고요? 난 거기에 관심이 없어. 그 우리가 담을 수 없는 피조세계의 ’호 코스모스‘는 도저히 감지도 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을, 우리의 수준에 맞는 하느님이 오셔서, 제시해 주시는 건데, 그 큰 하느님은 아니란 말예요. 그걸 굳이 하자면 위격이 다르다고 하잖말이에요. 그리고 이 하느님도 못 알아먹었기 때문에 이제 진리의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이 되셔서 들어오시는 걸, 껄 또 다른 위라고 하자고요. 그러면 삼위일체가 뭐가 어려워요. 그런 ‘예수님의 죽음!’ 그건 당연한 거예요. 마땅한 거예요. 호 코스모스는 그렇게 죽어야 돼요? 왜? 진리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 기고만장한가 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내려와서 나를 위해 죽어줘야 된다고 우기는 게, 인간들이라니까요. 이 나싱(nothing)들이! 하느님의 법! 그 말만 쑥 빼버리면, 그냥 허깨비인 것들이. 그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와서, 나를 위해 죽어줘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그게 마치 그리스도교인양! 예수님은 장차 하느님의 아들로 영원을 살게 될, 성도들의 역사 속 대표이신 거예요. 하느님이세요. 그 분이 왜 율법으로 오셨겠어요? 그건, 말 못하는 율법! 그저 서 있는 옛 성전! 이 호 코스모스! 아무도 못 알아먹어. 자연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는데,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냥 말 못하는 이 호 코스모스! 그 역할을 하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돼요. 단지 그 옛 성전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옛 성전의 진의를, 설명하시고 간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하는 율법이었어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다.’ 그러죠? 그 말씀이 어디 적혀 있어요? 성경에. 그러면 여러분 성경 보고, 하느님 이래요? 그거 하느님이라면서. 성경이 말하는 바잖아요? 그거 하느님이라면서! 그러니까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적혀있다고, ‘아이고 하느님!’ 들어가며 나가며 절하고 그러나요? 예수님이 말씀이에요. 그 분은 하느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건 성경이 쓰레기인 것처럼, 그 사람에게도 예수는 쓰레기라니까요. 진리로 못 알아먹으면. 창녀들과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먹기를 탐한, 그냥 목수의 아들! 그것일 뿐이에요. 예수님은 성도가 어떻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직접 보여주는 거요. 말씀이시란 말이에요. 그분이 하느님이시란 말이에요. 성도의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느님이 죽어서, 마귀들이 살아난다. 마귀에 불과한 우리들이 살아나는 것! 이런 저급한 공식을 역사에 새기러 온 게 아니라, 호 코스모스의 세상! 그 율법이 죽어야, 그리스도라는 영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피조 세계의 그 한계를 밝히러, 몸소 오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주어진, ‘야훼 엘로힘’의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만을 추억해요. 아니 그게 나와 상관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하여, ‘나’가 누구인지를 밝혀주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늘의 아들들이, 어떤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그 하느님을 찬송해야 되는 거요.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추억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만큼 나에게 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 분을 섬기게 된단 말예요. 그런데 그 분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죽어야 되는데, 그 분을 죽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여전히 살려두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희생제사 드려야 되는 거요. 왜? 영 단번에 드려진 그 제사가, 이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날도 계속 율법을 지켜야 돼요. 자기의 행위만을 의지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율법 지키는 거니까. (나는 매일미사 참여 한다~) 고걸 법으로 생각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남편 밥도 안 해주고! 또 다른 율법을 만들어서 계속 지켜! 심지어 절기도 지켜! 아니 어떻게 뭐 새해절, 송년절도 지키고 성모승천절도 지키고. 심지어는 성인축일까지도 지키고, 교회에서 아니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 놓으면 헌금이 많이 나온다는 거, 저도 모르는 바 아녜요. 그런데 성경에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예수님 안에 그 아버지를 봐야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묶여 있으면, 절대 안 돼요. 여러분! 그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일이었단 말예요. 우리는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나로 절망하고, 미래의 나를 소망하면서, 현재를 불안하게 살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 미래의 여러분이 갈 그곳은, 뭔지는 아세요? 오늘날 그것이 진리로 내 것이 되어야, 비로소 희망이라는 게 생기는 거지, 막연히 미래에 어디에 가야할 그 곳! 확실하지도 않는 그 곳! 그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로마서7,4)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죽었어요. 그런데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방법이 나오는데, ‘호 소마 호 크리스토스’예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이런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뭘까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잖아요? 적어도 그 예수는 아닐 거 아녜요? 그리스도는, 영은, 반드시 그릇이 필요하죠. 그 그릇이 뭐예요? 여러분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면서요. ‘나’란 말예요. ‘나!’ 내가 그 진리를 담은 질그릇이 되어 버리면, 그리고 나는 질그릇에 불과한 자라는 걸 알게 되면, 그 때 그 법이, 나에게서 죽는다는 말예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서,’! 그 그리스도를 담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야.’ 메시야를 만난 자! 과거의 그 예수님 그 분이 하신 일을 추억하라는 거 아녜요. 그것이 뭔지를 내가 알아서. 그것이 진리를 담고 온 어떤 모형이었다면, 내가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을 알았으면,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필요가 없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준 건데, 아브라함이 그걸 알아버렸죠? 더 이상 그 아들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고, 남편이 사는 게, 출애굽기 4장의 피남편 이야기였잖아요? 그게 구원이다. 예수는? 그 아들의 모형이었으니까, 예수의 모형이 이사악이었으니까! 내가 그 진리를 알면, 내가 그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진리를 택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그 역사 속 예수를 계속 섬기는 게 아니라! 그 분은 죽었다니까요! 그래서 세상은 죽어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다른 것으로 왔잖아요?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왔잖아요? 그러니까 그 예수를 추억하면 안 된다고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하느님!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 수모를 당한 그 하느님! 여전히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단 말예요. ‘나’가 도대체 뭔데? ‘나’가! 진리를 담은 예수님은, 당연히 죽으셔야 했던 분이에요. 그 (요한복음 16:7-12)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 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8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 돌아 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1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12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의 대표가 누구예요? 이 세상에 죄인 중에 죄인으로 온 분이 누구예요? 그 세상 죄 다 짊어지고 갔으니까! 예수!! 여기서 세상 임금이 마귀예요? 예수님이란 말예요. 그러면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으로 내가 심판 받을 게.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 임금으로 심판을 받은, 그 사실을 아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심판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걸 내가 알았어요. 이미! 그 사람들을 하나님은 심판 못 해요. 그걸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 임금! 그게 사실은 나죠? 죄인 중에 죄인이 ‘나’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나는 자격 없어, 예수님이 죽어 심판 받았잖아요?’라는 걸 아는 나를, 그 하느님이 심판할 수 있냐고요? 없어요. 그걸 생명(生命)이라 그래요. 그게 구원(救援)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12:31-34)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문밖으로)쫓겨나게 되었다.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 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34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복음 24:4-5) 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5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 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진리의 성령으로 오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옛 성전의 역할을 하는 그를, 그리스도라 하여, 그 예수를 섬기게 하는, 대부분이, 그렇게 하는 그 시대가 올 텐데, 그게 마지막 때야. 그게 심판이야! 언제예요? 지금! 지금이죠.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대부분)이라 그래요. 대부분! 그렇게 죽어야 할 예수를 여전히 섬기고 있으면, 계속해서 희생제사 드릴 수밖에 없어요. 몸이 부셔져라, 일 년에 다섯 번씩, 봉사활동 가야 되고, 가서 열심히 보람은 챙기고, ‘나는 뭔가 했어.’ 뿌듯하게 사는 거죠. 가지 말라는 거 아녜요. 진짜 진리를 알고, 이게 진짜 가치니까요. 그들에게는, 그렇게 섬기는 이들에게는, 예수가 안 죽는 거잖아요? 아니 호 코스모스는 반드시 날마다 죽었다. 이제 그 죽음이 완성이니까, ‘무트’니까! 그렇게 해서 진짜 사는 건데, 그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걸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님이 그렇게 다 이루었다 하고, 완성(完城)의 죽음을 죽으셨는데, 그거 아니고, 살아 있는 예수를 자꾸 섬기면, 그 사람에게, 그 예수가 어떤 예수예요?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예수라니까요. 요한 묵시록에서 봤죠? 그걸 짐승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마귀의 책이 된다니까요. 그렇잖아요? 그 예수는 죽고, 그리스도는 진리로, 내가 그 진리와 하나 되어서, 이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 예수만 계속 섬기고 앉아 있으면, 예수가 안 죽었으니, 영 단번에 드려진 제사도 안 드려진 거고, 제사도 계속 드려야 돼, 율법 행위도 계속해야 돼. 그럼 뭐예요? 성경은 죽었다 그러는데, 죽은 것 같았으나 살아난 자잖아요? 그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아닙니까? 예수가, 세상 임금! 죄인으로 죽어서, ‘나’라는 그 세상! 그 죄인이, 그 임금 안에서 죽고, 그 ‘다 이루었다’라는 완성의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로 다시 사는 거! 하느님의 성전으로 다시 사는 게! 구원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그 예수가 그를 죽인단 말예요. (요한묵시록 13:2-3) 2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았는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았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짐승은 그 용으로부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받았습니다. 3 그 짐승은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었지만 그 상처가 나았습니다. 이것을 본 온 세상 사람들은 놀랍게 여기며 그 짐승을 따라 갔습니다. 여러분이 그 율법에 여전히 묶여 있으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용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를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보세요. 죄인, 세상 임금인 내가 되어서,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었어요. 나에게 세상 임금이 이제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뭘 두려워해요? 왜 여러분에게 마귀라는 게, 사탄이라는 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돼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며, 그런데 왜 세상 임금의 종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안 죽었으니까 두려워하는 거 아녜요? 성도들에게만 그 세상 임금이 죽었어요 그래서 자유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임금 아래에서 율법의 종노릇하게 되어 있어요. 잘 알아듣고 계신 건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이니까. 제발 잘 들으세요, 그렇게, 세상 임금이 내가 되어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진리로 이해하게 되면, 하느님은 나를 더 이상 심판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은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피조물의 생래적 한계인, ‘에피두미야, 탐욕’을 올바로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세요. 그리고 그 율법은, 그들을 죄로 폭로해냅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근사한 행위를,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폭격을 당하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맞게 돼요. 날마다 죽어요. 날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것을 ‘완성’이라 그래요. ‘테텔레스타이! 다 이룬 거야! 말씀이, 율법이 그거 이루려고 한 거야. 다 이룬 거야!’ 말씀하세요. 그 죽음이 예수의 ‘테텔레스타이’의 죽음인 것입니다. 역으로, 예수님의 그 ‘다 이루었다.’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마음에 깨닫게 된 자는, 그러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있는 거잖아요? ‘난 아니구나!’ 이렇게. ‘그거 없었으면,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큰일 날 뻔 했네!’ 둘은 동시에 일어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아는 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열심히 허벅지 찔러가며, ‘부인해야 돼! 부인해야 돼! 화내지 말아야지. 용서해야지.’ 요게 죄 짓는 거예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한 방에 그려낸 거란 말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서, 바로 그걸 깨달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십자가는, 이제 내 것이 되어,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그냥 모형으로 날려 보내도 된단 말예요. 그래서 그거 안 들고 다녀도 돼요. 그런 거예요. 세상 임금! 짐승! 용 같은 건, 뭐 여러분을 괴롭히는 머리에 뿔 달린 그거 아녜요. 밤에 이상한 거 보는 건, 밥 잘 안 먹어서 그래요. (하하하) 그거 혹시 나타나면 저에게 보내세요. 그런 거 없어요. 없다니까요.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모르니까! 모든 게 다 그래요. 모르면 당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서기 전에, 구약 시대에 어떻게 구원받아요? 그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아요. 그 진리를 십자가로 설명해 준 거 뿐이지, 그거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진리를 깨닫고, ‘아 그거, 그 예수, 그 십자가. 모리아 산에서 죽여야지.’ 그렇게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도 그 약속의 실체인 그건 못 본 거 아녜요. 십자가는! 그러나 증거는 받았잖아요? 하느님의 글로! 히브리서 기자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로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가 진짜, 그 하느님이 진짜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 진리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란 말이 아녜요? ‘야, 그 실체가 직접 왔는데, 우리가 그것이 안 됐는데, 걔네들이 그거 헛소리한 거 아니냐?’ 이게 히브리서의 논리예요.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완전하지 못 해. 심지어 하느님도 거짓말쟁이인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인이 안 되면! 진리가 안 되면! 그래서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를 봤다.’ 그러는 거예요. 진리를 봤다는 거예요. 내가 담고 있는 진리를 그가 봤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하 아담 하 벤’ 그 인자의 라인이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지만, ‘무트’로 끝나요. 그리고 ‘와우’ 계속형, 현재 진행형이에요. 아니 옛날 사람인데, 죽었더라면, 과거나, 완료형을 써야지, 왜 그들이 죽고 있더라고 썼을까요? ‘어 죽던데.’ 이렇게. 그들이 계속 그 ‘다나토스’의 죽음, ‘무트’의 죽음, 말씀이 완성되는 죽음을 죽었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으면, 결국 사망에[ 이르면 어떻게 돼요? 진짜 사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야, 나는! 그런데 ‘무트, 다나토스’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짜 산 거니까, ‘나는 산 자의 하느님이야!’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죽음을 죽는 거예요. 예수가 바로 그 죽음을 죽은 거라니까요. 아니 그건 하느님나라의 삶의 원리(原理)예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 생명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는 거예요. 없어지고,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만 찬송 받는 곳, 그 죽음이,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가득한 곳이 천국이라니까요. 하느님이 그렇게 죽으시는 분이에요. 자기를 비워서! 그런데 왜 하느님이 죽으시느냐? 안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죄가 ‘나’고, ‘내’가 죄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그 죄를 밖으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들만 그걸 감지해요. 다른 이들은 ‘나 잘했죠?’ 한다니까요. 성도만 그 죄를 낳아요. 그리고서는 ‘이게 죄야? 율법이 탐욕이 죄라고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뻔 했네.’ 알게 되면 ‘나는 죄인이 맞구나!’ 그게 뭐요? 나의 죽음이에요. ‘다나토스!’ 그러면 그게 사는 거예요. 그게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완성이 되어, 사망을 낳고.’ ‘그게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사요. 거기서 사는 거야. 생명이야!’라는 말이, 갖고 있는 내용이란 말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줍찮게 얕은 수준에서 갖고 있던 건 빨리 깨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이해가 가요. 더 붙들고 있는 한 자꾸 이걸 튕겨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 인본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리를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 왜 율법, ‘에피두미야’가 죄를 낳게 하고, 그 죄는 사망을 낳고, 그 사망이 곧 우리의 선물이며 영생인지 아시겠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