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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0.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18 조회수1,700 추천수4 반대(0) 신고

(춘천교구 순례지, 겟세마니 피정의 집의 예수님상)

2020년 10월 18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제1독서 이사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제2독서 로마 10,9-18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텔레비전 광고로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니,
결혼정보회사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회사는 결혼 정보를 통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인연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결혼정보회사 안에는
등급표가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을 등급으로 매긴다는 것이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비슷한 조건의 만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등급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분명히 세상이
바라보는 기준입니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는 삶,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삶을
살아야 결혼도 가능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는 가톨릭 신부로 살기에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삽니다. 그만큼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저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살고 있어서인지
저 역시 일정 부분 세상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세상 기준에
맞추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저만의 고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사는 삶은 이제까지
충분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주관적으로
나만의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나만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신 뜻에 벗어나지
않는 길이면 분명히 응원해주시고
지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모두 다른 모습을 창조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을 제자들 손에
맡기시고는, 온 세상으로
나가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굴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뒤 부활하심
으로써 당신께 합당한 영광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현재의 어려움만 보지 않고,
머지않아 와서 영원히 계속될
좋은 것들도 바라보도록 만드시고자,
그들에게 세상 끝 날에 대해
다시 일러 주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나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으로
믿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9.10)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만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힘차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 2,5)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역경은 당신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준다.

(앤디 그로브)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하기.

학창 시절,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모두 운동장에 나가 조회를 한 달에

한 번은 꼭 했던 것 같습니다.

실 이 시간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꼼짝 못 하고 오와 열을 맞춰서

그냥 서 있어야 했지요. 땡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는

그 시간은 너무 길기만 했습니다.

 실제로 여름에는 픽픽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는

4절까지 부르고, 시상식도 있어서

상 받는 사람은 호명되어 앞에 나가고,

그 뒤에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2년 동안 얼마나 많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단 하나의 말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학생의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국가가 어떻고,

교육이 어떻고 등의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놀고 있는

내용을 들어 이야기하셨다면 귀를

쫑긋 세워서 들었을 테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냥 “네 입장을 알아, 이해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춘천교구 순례지, 겟세마니 피정의 집의

신앙의 증인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 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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