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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참 좋은 죽음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21 조회수1,495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21.

(공동번역성서)

참 좋은 죽음

(로마8:1-2)

1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7장에서 율법(律法)과 죄()의 그 역할(役割), 그 효용(效用)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한 후에, 8장에서 진정한 해방(解放)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8장에서, 그렇게 죄와 율법으로, 진리와 생명에 이르게 된, 그런 성도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요.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로마서8장은, ‘진리가 된 자들아, 육의 행실을 따르지 말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로 요약을 할 수가 있어요. 모든 것은 합력이 되어서, 선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니까. 현상계에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규정해 놓은 죄라든지 어두움이라든지, 이런 것으로, 그런 것으로, 이렇게 저렇게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절망하거나, 기뻐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계시된 진리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너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너희들이 알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8장의 마지막 절이죠? 그 어떤 것도 너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그 죄도! 그 더러움도, 결국은 너희들에게 하느님께서 선을 완성하기 위해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것이므로. 그것도 너희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거야!’라고 이야기한단 말예요. 그게 바로 로마서 8장의 내용입니다.

육의 행실을 끊고, 영으로 육을 죽여라!’라고 하니까, 단순히 나쁜 일하는 걸 멈추고, 영적인 일에만 힘쓰라! 라는 말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요.

우리는 7장에서 죄와 그 좋은 사망이죠? 그 사망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바오로의 교훈을 충분히 봤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잘 깨달아서 죽으면, 그 율법의 효용(效用), 역할이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 성경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게 죄가 뭔지를 잘 깨달아서, ‘! 그래. 이건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아니구나!’라고 내가 죽으면, 그걸 다나토스의 죽음이라 그러죠 말씀이 나를 죽여 낸 거란 말입니다. 그게 말씀의 완성(完成)이란 말예요. 그렇게 죽으면, ‘그게 말씀의 완성이요, 그게 곧 생명(生命)이다.’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해방(解放)’이라는 게 일어난대요. 그게 2절이에요. 본문 2. 거기에서 해방이라는 게 일어난다는데, 엘류대로라는 해방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는,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다, 도덕적 책임과 책무에서 면제(免除)되다, 노예자리에서 풀려나다라는 의미의 단어예요.

그렇게 진리로, 해방이 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의 노예로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법과 무관한 자가된다는 거예요. 그들은, 모든 도덕적 책무에서, 자유로운 자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법의 노예로 안 살아도 된다는 말예요. 그게 해방이란 단어가 바로 그 단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율법의 노예로서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막 산다는 게 아닙니다) 이제 법위에 서서 법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는 뜻이에요. 그게. 해방이 담고 있는 내용이란 말예요. 방종(放縱)이나 방임(放任)과는 다른 거예요. 그렇게 해방이 된 자들을, ‘살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법에 잡혀 있으면, 죽은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그거란 말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 생명과 성령의 법, 성경에서 예화를 끌어다가, 성경으로 설명해 드릴 테니, 잘 한 번 들어보세요.

진리의 영, 즉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말씀이 된 자들은, 성경을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 말이, 로고스가 영이요, 프뉴마요, 생명, 조에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말씀으로, 진리로, 말씀이 되는 거예요. 진리가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단 말예요. 그렇게 말씀에 의해, 진리의 말씀에 의해, 그 진리의 말씀이 된 자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역할로 부름을 받는다고 그래요. 성경이!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기름부음이란 건 성경에서 기름이라는 것은 항상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름을 덮다, 기름을 바르다, 금으로 싸다(성전이 그렇게 되어 있죠?)’말씀으로 덮다는 뜻이에요. 조각목에 불과한 이런 피조물이란 존재를, 말씀으로, 기름으로 덮어버리면, 하느님의 것이 된다는 의미거든요. 그게 그리스도예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야라 그래요. 그래서 진리를 우리, 내가 들어서 내 마음에 담으면, 진리의 겉옷을 입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로 덮었다고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 ‘크리스토스이렇게 복수로 뭉뚱그려 설명을 해요. 이름을 붙인단 말예요. 성경이! ‘크리스토스, 그리스도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예요.

그것을 그렇게 해서, 언약 안에서, ‘언약(言約)’ 이게 십자가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사실은 성경에 그런 십자가라는 말은 없어요. 그냥 스타우로스, 언약, 기둥이란 단어거든요. 그걸 그냥 십자가라고 번역을 해서 쓰는 거예요. 크로스(cross)’라고! 그런데 사실은 그게 언약이라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는, 메시야는,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어,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 ‘, 말씀은 그거군요!’라고, 다 이루어낸 다음에,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그 하느님이군요. 이놈들이 흉내 내고 있었던 거네요.’라고 말씀을 완성한 다음에,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고, 그걸 진리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였잖아요? 그래서 그걸 전해 주고 그들을 살려내는 게, 메시야, 그리스도잖아요? 그 역할을 그리스도인들이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총칭하여 인자(人子)’라고 불러요.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인자(人子)는 예수님 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인자다 그런 거예요. ‘인자가 구원한다.’ 그런다고요. 그건, 예수님만 구원한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 그리스도로 오신 그 분에 의해, 진리를 부여 받은 자들이, 그 인자들이, 그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여러분도 오늘날 그 역할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반드시 언약, 스타우로스안에서의 다나토스!’ 그 죽음을, 육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 그 법으로 죽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죽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거란 말예요. 로마서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두 법은 같은 법이라니까요. 같은 법으로 죽고, 살아나는 거예요. 죽는 게 사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선악과가 생명나무 열매가 되는 거예요. 따로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나무는 항상 단수, 하나가 나온단 말이죠. 한 나무! 그런데 그 인자들을 죽 거슬러 올라가보면, 예수님부터 (루가복음 족보에 보면 인자의 라인이 쫙 나오죠?) 맨 꼭대기에 하느님! 하느님 그 밑에 아담, 아담이 뭐예요? 사람(), 그런데 거기에는 그 아담, 하 아담이라고 되어 있다 그랬죠? 그래서 하 벤 하 아담이 인자인데, ‘그 아담의 그 자손!’ 이게 인자란 말예요.

그러니까 이 라인에 그 아담, 진리가 된 아담을 하 아담이라고 관사를 붙여요. 성경은! 그리고 그냥 인간, 보편적 아담을 그냥 관사 없이 아담이라고 쓴단 말예요. 그런데 그 족보 안에서는, ‘하 아담이 된다 말입니다. 그 아담의 라인 위에는 하느님이 계세요. 하느님이 그 아담을 보내어, ‘그 아담의 라인들이, 즉 예수로 완성되는 그 아담의 라인들이, 하느님의 그 그리스도의 역할들을 하는 거예요. 진리로! 말씀으로!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말씀으로 죽어요. 우리는 피조물, 하느님은 하느님임!’ 그러니 하느님 흉내 내는 거, 그만두자!’라는 거예요. 그게 말씀으로 죽는 거예요. 그게 무트의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구약에 보면, 그 인자의 라인! 그 진리가 된 하느님의 백성들의 라인에, 누가 누구를 낳다, 낳다, 낳다를 전부 히필동사를 쓴다 그랬습니다. 동사나, ‘소팔동사를 쓰면, 그냥 부정모혈로 낳는 거예요. 사람이 그냥 사람을 낳는 거고, 히필동사로 쓰면, 그걸 낳게 하다라는 의미가 되어서 말씀으로 낳다예요. 셈의 아들이 다섯인데, 그 중에 아르박삭 하나를 히필동사로 낳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 하나 건진 거예요. 하나.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란 말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들을 낳는 거예요. 그들을 인자라 그래요. 성경이. 그들은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과한단 말예요. 그래서 그 죽음은, 좋은 죽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죽음은 완성이란 말예요. 그런데 이 땅에서 그 완성을 끝, 완성, ()이라는 걸, 가장 멋지게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인간의 죽음이라니까요. 인간은 그게 마지막인 줄 알잖아요? 그걸 완성이라고 한다고요. 인간들은 끝이라고 안다고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 죽음을 들어, 이게 완성이라고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죽음에 대한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그 죽음이 아니란 말예요.

보세요.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게 무섭고, 두렵고, 그런 더러운 게 되는 거지만, 죽음이! 그 이후에 어떤 것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에게, 그건 하나의 문()이라니까요. 그냥! 그건 무섭고 더러운 게 아녜요. 그래서 그걸 하나의 그냥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여, ‘완성(完成)이라는 게 이런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죽음으로! 그래서 죽음이라는 건 나쁜 게 아니란 말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죽음, 사망 이런 게 나오면, 무조건 나쁜 거, 이렇게! 그래서 그 사망에 이르면 안 되는 거.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1) 1 한 처음(太初),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연합)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담고 내려오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고스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 자신! 거기에 있는 보이지 않는, 우리가 무()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는 그것은 레마라고 하죠? 그런데 그것을 어떤 그릇에 담아서 보여주는 거, 나타내게 보여주는 걸 로고스라고 한단 말예요. ‘말씀이라고 한단 말예요.

그렇게 로고스, 말씀으로, 예수가 육을 입고 내려 오셨잖아요? 그 하느님은 아니지만, 그 하느님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내는 거란 말예요. 이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그게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그 엘로힘은 그 하느님은 아니란 말예요. ? 그 하느님은, 이 현상계에 있는 이 인간들의 이성에, 포착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수준의 하느님을 계시하기 위해, ‘엘로힘으로 천지를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그게 그거예요. 그 말씀, 보이는 그 하느님으로 오시는 거죠?

그래서 그분이 이제 말씀이에요. ‘! 그분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담고 온 그분, 말씀.’ 그런데 그 말씀이 말씀을 낳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을 낳아요. 성경이, 성도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거 아세요? 우리도 진리를 받아, 바로 우리는, 피조물은, 아무 것도 아니다.’는 한계를 이 땅에서 확증해 내고, 증거 해 내고, 그 하느님이 진짜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도 말씀인 거예요.

(요한묵시록 19:9, 11-13) 9 그 천사는 나에게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성도)은 행복하다' 고 기록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또 이어서 '이 말씀은 하느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11 나는 또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흰 말이 있었고 '신의,(믿음)' '진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그 위에 타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공정하게 심판하시고 싸우시는 분입니다. 12 그분의 눈은 불꽃 같았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을 썼으며 그분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의 몸에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분은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그분의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 이라 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하느님의 말씀이래요. 자 심판하시는 예수님도 말씀! 이 땅에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분의 이름도 말씀! 어린양의 신부인 우리도 말씀! . 우리 그분도 진리, 나도 진리. 예수님이 내가 진리요 그랬잖아요? 우리도 진리래요. 우리도 말씀이래요. 예수님의 이름과 우리의 이름이 똑같아졌네요.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죠? 그러니까! 말씀이 말씀을 낳은 거예요. 진리가 진리를 낳은 거란 말예요. 그 전체를 인자(人子)’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냥 피동적(被動的)으로, 그냥 그 예수를 추억(追憶)하고, 감격(感激)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삶을 그대로 내 삶으로 사는 그리스도들이라니까요. ‘크리스토스라니까요. 이게 다른 거예요. 이게 같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아주 다른 거란 말예요.

이렇게 이해를 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어! 이제 내가 와서, 율법으로,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너희들이 전부 하느님 살해범으로 폭로가 되어 버렸네! 전 세계가! 이방인 유대인 할 것 없이 합심하여, 하느님을 죽이네, 진리를 죽이네.’ 그러면 율법으로서, 율법의 역할과 효용!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성취된 거잖아요?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준 거라면서요, 성경이?

 

그러니까 율법으로 오신, 두 번째 성전으로 오신 예수가 그 역할을 끝낸 거네요. ‘다 이루었다.’ ‘! 너희들은 한 사람도, 의인은 없어 한 사람도 없으니까, 진리를 못 알아보네. 그리고 그 진리를 꺼버리네. 그러니까 그분이 스스로 죽어,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하지 않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신을 알겠니? 그러니 그 분이 하느님이요. 너희들이 피조물이지?’라고 십자가, 스타우로스가 선거죠.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거예요. 거기서. ‘다 이루었다.’ 이거 하러 온 거야. 내가. 예수님이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살려야 사는 거야. 하느님이 살려야 사는 거야! 스스로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어!’ 이걸 확증한 거죠?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자. 그리고는 그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그 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고, 소리치고, 죽자 영혼이 떠나갔다. 그래요. 이걸 너무 너무 아파서, ‘아 아파, 너무 괴로워!’ 소리 지르고 비명 지르고, 확 죽으니까, 이 안에 있는 혼령 같은 게, 휙 떠나갔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게 뭐죠? 무슨 소리를 질렀어요? ‘크라조 프호네 메가스 아피엠 호 프뉴마거든요.

메가스라는 건, ‘큰 소리로가 아녜요. 메가스라는 건, ‘위대한, 엄청난말을 외치고, 뭐라고?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프뉴마,’ , 말이라 그랬어요. ‘생명이 어디로 넘겨졌다, 보내졌다라는 뜻이에요. 혼령이 확 떠나간 게 아니라!

프뉴마영혼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프뉴마가 보내졌다. 어디론가 보내졌다. ‘아피에미이가 보내다란 말이거든요. 하느님이 율법으로 보내신, 말씀을 담아 보내신 예수의 육을, 언약 안에서 죽여 버리고, 다 이루어내자, ‘인간들은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러자 완성된 진리가, 어디론가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그 생명, , 진리가 어디로 또 보내지더라는 거예요. ‘아피에미!’ ‘다 이루었다라는 선포가 일어나자 어디로 보내졌을까?

(요한복음 15:26) 26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게 프뉴마예요. 예수님이 크게, 위대한 메가스의 외침을 외치자, 떠나간 프뉴마있죠? 프뉴마가 이 프뉴마예요. ‘알렛떼이야, 프뉴마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 그 예수가 그리스도였군요! 그가 담은 건 진리였군요! 그가 한 표적, 기적 모든 게 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었던 거군요!’라고. 그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걸 이해시킨다는 거예요. 어떤 걸로? 그걸로 설명하여! 그게 그거였다는 것을 이해시킨다는 것이죠. 나를 증거 할 것이요.

(요한복음 16:13-14)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니까요. 온 세상은 어떤 이에게는, 껍데기로만 보여서, 여기를 목적지로 삼게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이게 진리로 보여서, 여기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게 되는 거란 말예요. 똑같은 거라니까요. 하나로 보게 된다 말예요. 진리를 알게 되면. 요한일서 보세요.

(요한일서 5:6-7) 6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7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

보세요. 예수의 육은 반드시 실패해야 돼요. 아무도 구원하면 안 된다니깐요.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이나,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구원되면 안 돼요. 구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쑤셔 박아 넣어주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깨닫는 거지. 그걸로 알아보면 안 돼요. 그러니까 육은 실패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영이 와서 성공을 해내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말씀을 갖고,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무트의 죽음으로 죽어버리면, ‘무트라는 게, ‘말씀의 완성이잖아요. ‘말씀의 표!’ 그걸 말씀의 완성이라 써 놓고, ‘죽음이라고 읽는다니까요. 히브리 사람들이.

그렇게 죽으면, 내가 그 죽음의 과정, ‘무트, 다나토스의 죽음을 통과하게 되면, ‘나는 아니고 하느님이 전부입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이 신입니다. 나는 하느님처럼 살려고 선악과 먹었지만, 아닌 거 이제 알았습니다.’라고 알게 되면,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고, 그걸 살았다그래요. 그를!

선악과 먹은 걸 이제 알았어? 그러면 이제 생명나무 열매 먹은 거야.’라고 해주는 거예요. 성경이 그래서 생명나무 열매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거예요. 안 주려고 꽁꽁 감춰놓은 게 아니라! 그거 아는 자만 그거 먹은 걸로 여겨주는 거란 말예요. 그게 산 거란 말입니다. 하늘의 생명이 뭔지를, 이 땅에다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땅이 갖고 있는, 가장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그것으로 그 생명을 설명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죄와 율법이라는 게 주어진 거라고,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7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란 말예요.

그래서 그 진리를 받은 이들은, 그 말씀을 받은 이들은, 그 말씀의 삶을 살아야 되잖아요? 어떻게? ‘그분이 하느님이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단지 그분을 설명하는 모형이네요. 사실 이건 헛 거네요. 곧 헐려야할 모델하우스인 거군요. 내 육을 포함하여!’ 이걸 증명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끌려간다니깐요.

그렇게 여러분이 진리를 삶으로, 입으로 그렇게 설명하면,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어떤 이들이, 그걸로 또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가, 그의 아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낳은 거니까. 하느님이 그렇게 여겨주신다 그랬어요.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이 사람이 진리를, 기름을, 금을 넘겨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을 보낸다고 얘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요한묵시록 20:4-6) 4 나는 또 많은 높은 좌석과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심판할 권한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예수께서 계시하신 진리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해서 목을 잘리운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낙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습니다. 5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 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거룩합니다. 그들에게는 둘째 죽음이 아무런 세력도 부리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제가 되고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을 할 것입니다.

메타 크리스토스또 왕노릇 한다 그러죠? 바실래이아통치라는 말이에요. 이것과 반대말은 둘로스, 이라는 말이에요.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치! ‘그들이 통치하더라예요. ? 이제 법에 종속되어 사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통치하더라.’예요. ‘영원 안에서 통치하더라. 천 년 동안!’ 뭘로? ‘그리스도로, 메타 크리스토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전제 되어야 될 게 뭐라고요? 예수의 증거,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목을 베어. 이게 다나토스의 죽음이에요. ‘너 아니네.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이거 아니네.’ 이렇게 머리를 바꿔줘야 되는 거란 말예요.

그렇게 죄가 죽음의 법이 목을 날려 버리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로 머리를 붙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정죄에 이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 8:34-36)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여기서 온 세상 호 코스모스에요. 하늘과 땅 아닙니다. ‘호 코스모스가 뭐예요? 옛 성전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적인 것! 나의 몸을 비롯하여! 그걸 열심히 얻으려고 하죠. 나의 가치 챙기기! 나의 자존심 챙기기!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다들 착각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온 세상을 얻었다 치자, 프쉬케,’ 을 얻었다 치자, 그게 죽임이야. 진짜 죽는 거야. 그런데 그 죽음을, 프쉬케를 잃어버리면, 그가 구원이 이른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세요. ‘내가 죽어야 돼! 그리고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야 돼! 세 번째 것으로 세워야 돼!’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안 돼요. 죽으면 안 돼요!’ 야단첬어요. 꾸짖었습니다. ? 내가 다 버리고, 쫓았는데 당신이 죽으면 나는 뭐냐는 것이죠. 그랬더니 예수님이, ‘사단아라고 불러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일반 명사입니다. 그래서 일반 명사는 항상 번역을 해 줘야 되죠? ‘대적자예요. ‘네가 하느님의 말씀의 성취에 대적자로 일하는 거 알아?’ 이런 말이에요. ‘이 마귀 새끼야!’ 이런 말이 아니라. ‘사탄아, 그게 대적자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요. ‘그게 대적이야! 내가 죽어야 된다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리고는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나를 쫓으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 쫓아야 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 때문에 자기의 허벅지를 찔러가며 부인하려고, 부인도 안 되는 걸, 뭐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죠? 십자가 지고 쫓으려니까. 고난 주간 같은 때, 진짜 큰 십자가 만들어서 그걸 짊어지고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 봤죠? 그리고 결국 어떤 놈은 거기에다, 자기 몸을 박아서 죽었어요. 작년인가, 언제.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성경을 문자로만 보면 그렇게 되는 거요. 거기에 자기가 왜 매달리냐고? 그 십자가가 그 십자가예요? 아닙니다.

이걸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해드리면 이렇게 돼요. 나를 쫓게 될 사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간 길을 그대로 쫓게 될 사람이 누구예요? 인자들이에요. 그리스도들! 그리스도인! 나를 쫓게 될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아파르네오마이자기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이거예요.

인간들은 인간의 말이 있어요. 자기의 마음, 두 마음으로, 선악의 두 마음으로, ‘에피뚜메오라는 탐욕으로 갖고 있는 자기 말이 있죠. 비진리, 세상의 말, 그 말을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이런 말이에요. 이게 자기부인이라고 번역이 된 거죠. 완전히 거절하게 되고. ‘스타우로스십자가가 아니라, 언약이에요. 기둥이에요. 크로스(cross)가 아니라, 기둥, 언약 안에서, ‘아이로될 거다. 아이로가 뭐요? ‘나샤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바꾼 건데, ‘파괴하다, 받아들이다예요. ‘파괴하다, 세우다.’ 파괴해서 세울 거야. 언약 안에서 그는 파괴해서 세울 거야. 나를 쫓게 될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성도라고 그래. 그리스도인이라 그래! 그런데 그들은 반드시 자기 말을 거절하게 돼! 세상의 말, 비진리를 거절하게 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가 세상에서 죽는 거요. ‘, 나 아니네.’ 이렇게 되는 거니까. ‘우리는 열심히 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셔야 되는 거네.’ 그러잖아요? 그렇게 내 말을 거절하게 되면 그가 죽고,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야. 어디서? 언약 안에서. 이런 말이에요. ‘십자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다라고 하니까, 십자가를 지고 질질 끌고 쫓아가는 거죠.

말씀으로 온 예수님을 그대로 쫓아 살게 될 성도들의 삶! 파괴되고 다시 서는 거예요. , 프쉬케가 망하고, ‘프뉴마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言約이 뭐예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언약이라 그러잖아요? 그 언약이 뭐였느냐고요? ‘내가 예수로, 율법으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이거죠? 율법, 온세상(호 코스모스), 육은 아니라는 걸 내가 반드시 증명해야 되므로, 죽이고, 그리스도로 살린다.’ 이게 언약이잖아요? 그래서 파괴도고 살린다. ‘아이로라는 단어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먼저 파괴를 경험하다니까요. 절망이에요, 절망! ‘뭐 이딴 게 다 있어?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왜 이 정도야.’ 그렇다고 그게 막 패역한 사람으로 막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토록 자기에 대해서 고통스러운 인식을 자각하게 되는 거라고요. 예수 믿자마자 그냥 성자가 되어서 , 잘한다, 잘한다.’ 이게 안 된다니깐요.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이들이, 이 온세상 속에서 날마다 죽게 된다는 거요. , 이놈의 성질! 그냥 날마다 죽여야지!’해서, 꾹 참는 게 날마다 사는 거예요. 날마다 죽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훨씬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내고 말거야! 내가 날마다 죽는다. , , 나 그렇게 괴롭히는데, 내가 날마다 죽어서, 나는 너보다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걸 증명해 낼 거야!’ 요게 사는 거예요. 시퍼렇게 사는 거. 날마다 죽는 다는 건, 다나토스의 죽음! 그 안으로 던져진 자는, 단 한 순간도 그 죽음의 과정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날마다 죽여 간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어디로? ‘넌 아니다, 나싱(nothing)이다.’라는 그 자리로.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그런 거예요. ‘나는 날마다 죽어.’ 그게 다나토스예요. 나는 날마다 죽어! ‘내가 아니다.’라는 걸 증거하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죽는 거예요. 죽으면 내가 없어지는 거니까. ‘날마다 죽는다!’ 성도의 운명적 실존이에요. 그게. 매일 죽어, 날마다 죽어,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 아니스테미,’ ‘아나+ 이스테미, 위로 똑바로 세우다.’ 이게 부활이죠 파괴가 안 되면 아니스테미가 안 되는 거예요. 부활이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 부활장! 아니스테미의 그 장에서 죽음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니까요. ‘안 죽어? 그러면 너희들은 못 살아. 너희들은 부활을 착각(錯覺)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사는 거, 죽은 자의 부활이야. 죽은 자들이 생각하는 부활이야! 그건 부활이 아니다. 그게 진짜 죽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 한다니까요. , 아나부스타시, 부활을 고린도전서 15장이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한 번 보세요.

(고린도전서 15:31-32) 31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을 나의 자랑으로 생각하며 이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32 내가 설혹 에페소에서 맹수와 싸우는 위험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당한 일이라면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내가 자랑할 게 하나 있어! 나는 날마다 죽어. 그 죽음의 과정에서 난 빠져 나올 수가 없어! 그런데 그건 내 자랑이야! 그런데 내 죽음은, 어떤 범인들이 죽은 그런 죽음과는 다른 죽음이다! 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내가 다른 범인들처럼, 맹수의 굴에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겠다고, 맹수에게 물어 뜯겨 죽는 그런 죽음을 말하는 줄 알아? 그거 아니야. 그렇게 죽었으면 이게 나에게 무슨 유익(有益)이 되겠니? 내 부활에 그게 무슨 유익이 되겠어? 우리는 그걸 가치 있다 생각하고, 그걸 순교(殉敎)라고 하고, 그들을 추앙(推仰)한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무슨 유익이 있냐? 부활에! 무슨 말이에요? 그건 개죽음이다. 그 말이에요.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란 이야기예요. 보세요.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그렇게 죽으면 못 살아나. 진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죽음은, ‘다나토스, 내가 말하는 그 죽음이라니까. 아니 그 죽음은 너희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니까. 이렇게 얘기해요. ? 예수를 믿겠다고, 그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수가 나를 물어뜯어 죽이고 있는데, 비명 한 번 안 지르고 이 꽉 물고 참는 건, 하느님처럼 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무서워요. 되더라니까요.

저 옛날에 안기부에 가서 고문을 받는데, 진짜 아무데나 바늘로 다 찍어도 진짜 이 악물고 악 소리 한 번 안 질렀어요. 돼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네가 훌륭한 사람으로, 정말 훌륭한 신앙인으로 남들에게 박수를 받았다면, 너는 개죽음을 죽은 거야! 그런다니까요.

여러분, 예수는, 우리에게 믿으라고 준 거 아니잖아요? 그 예수가 진리를 담고 왔는데, 못 알아먹었으니까, 그 예수는 실패해야 된다니까요. 실패한 예수를 추억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온 진리!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알게 되면, 그분이 하신 일이나, 그분이 표적으로 준 일이나, 그게 다 뭐예요? ‘! 하느님나라는 이렇게 하느님이 완성하신 거구나! 하느님의 안식이라는 건, 이렇게 하느님이 시작하여 하느님이 완성하는 거구나! 거기에서는 슬픔도 눈물도 질병도 그런 사망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곳이구나!’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거니까. 그건 더 이상 우리에게 놀라운 게 아닌 거란 말에요. 그건!

그게 갖고 있는 내용이 너무 놀랍고, ‘메가스너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더 이상 우리에게 신기하고, 놀랍고 감동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알게 되면요, ‘그 예수 부인해! 안 그러면, 네 아들 다 기름에 튀겨 죽여 버릴 거야!’ 그러면 당연히 부인해야죠. 그래, 그래. 나는 진리로 갖고 있어요. 그러면 내 아들 살려서, 어떻게 든 그 진리를 들려줘야지. ‘죽이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 나는 그 예수 믿는 믿음을 굳게 지켜서, 칭찬 받을 거야!’ 이걸 개죽음이라 그런다니까요. 성경이.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라는 게 고작 거기예요. 신사참배? 그거 안 한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다 모여 있는데, 신사가 뭡니까? 거기에 진짜 신이 있어요? 걔네들은 죽어서 다 지옥에 가 있어요. 무슨 신이 거기에 있어요? 아무 것도 아녜요. 그거요! 거기에 절 한 번 하는 게 뭔데요? 그게!

 

후미에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 사진 쫙 깔아놓고, 일본사람들이나 공산당들이 잘 써 먹었던 건데, 밟고 지나가, 안 그러면, 너희 교인들 다 죽일 거야.’ 그가 안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여럿 죽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그게 예수입니까?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푸른 눈의 그 청년이 예수 맞아요? 진짜 예수의 사진이라고 쳐요. 그 예수는 밟히러 온 거라니까요. 찢기려 온 거라니까요. 침 뱉음을 당하러 온 거예요. ? 육의 대표로 왔기 때문에! 당연히 밟아야지. 그리고 진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그 사람들 살려서, 들려 줘야지요. 그거 안 밟는 게 그렇게 대수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거 보세요. 인간의 보편적 자존심을 높여 준 건, 전부 추앙(推仰)하고,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전부 밟아버린다니까요. 이거부터 깨야 돼요. 그러니까 순교라는 것도 여러분이 잘 생각해야 돼요. 톡소포자충, 기생충도 그런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까요. 쥐새끼를 고양이 앞에서 대들게 만드는 게, 기생충이란 말예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걸 요구하시겠어요? 그런 결단과 용기와, 그런 이김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까? 성경이? 천만의 말씀입니다. 잘못 가도, 한 참 잘못 간 거예요.

그 예수를 섬김의 대상, 추억의 대상으로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지! 주는 번역해 줬잖아요? 성경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 예수 믿으라는 말은 한 군데도 없어요. ‘예수 믿음이라는 말이 로마서에 한 번, 묵시록에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피스티스 히에수예요. ‘피스티스가 뭐라 그랬어요. 진리의 체계, 율법의 체계죠. 그걸 담고 온 예수, 그걸 진리로 믿으라는 얘기지, 진리로 가지란 얘기지, 예수를 믿어라가 아녜요. 그러면 피스토스가 되어야죠.

그런데 그걸 부인하지 않겠다고, 부정하지 않겠다고, 사자에게 먹히고, 이런 게 무슨 유익(有益)이 되니? 그러는 거예요. 바오로가!. 내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죽음 아냐! 오히려 극단적인 예지만, 너무너무 무서워서 예수를 부인하고, 뭘 진리를 알아서도 아니고, 너무 너무 무서워서, 기름에 튀겨 죽인다는데, 그러면! 살짝 기름 한 방울만 튀겨도 얼마나 쓰리고 아픈데요.

그런데 풀무불 앞에 놓고 시커먼 사자 앞에 놓고,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앞에 놓고, ‘너 부인 안하면 죽일 거야!’ 해서, 무서워서 부인했어요. 그리고서는 하느님 이래서 나에게는 예수가 없으면 안 되는 거군요. 이래서 저는 쓰레기입니다.’라고 하면, 그가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은 거예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녜요, 여러분! 하느님이 그렇게 시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끌고 갈 수도 있어요. 어떤 목적이 있으셔서.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러나 그걸 성숙한 신앙인의 목표지점으로 잡지 말라는 얘기예요. 아니라니깐요.

그러면서 사도 바오로가 나같이, 그 날마다의 죽음을 죽어야, 다시 사는 거야. 너희들 그 죽음을 죽고 있니?이거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부활이야!’ 이게 고린도전서 15장이에요. 그래서 거기서는 육을 부인을 안 해 버려요. 그냥 입은 거라 그래요. 입었으니 너희들이 썩어지고, 부패할 거 그냥 갖고 있다는 거예요.

푸우데이로 에도스에도스, ‘습관적인 예법, 습관적인 도덕이란 말이니까, 푸우데이로가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인 예법! 부패하고 타락한 습관적 예법은, <‘크레스토스, 자비로워야하는, 교제를 호밀리야.’ 교제거든요. 교제가 뭐예요? 진리를 갖고 서로 흘려주는 게 교제란 말예요. 자비로워야 하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호밀리야, 교제> ‘카코스, 악한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래요. 습관적인! 그걸 부패했다 그래요. 그걸!

습관적인 예법, 관습, 도덕은 그걸 가지고 진리를 논한다고 하는 자들은 진짜 자비를 이야기하는 교제를 카코스, 하게 만들어!’ 그래요. 그러니까 깨어서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하라 그래요. 그러면 여기서 죄가 뭐예요? 너희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예수 믿겠다고 맹수에게 먹히고, 사자 굴에 들어가고 한 것! 그런 거! ‘라는 거예요. 그런 죽음 아냐, 그건 죄야. 의를 행해! 어떻게 행해요? 의가 뭐예요? 하느님께서 다른 의를 준비하셨다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라, 그러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거! 그게 의를 행하는 거예요. 사도 바오로의 내러티브 속에서. ‘그거 해! 그게 사는 거야!’

 

(마르코복음 8:35)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프쉬케)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구원)것이다.

이제 진리와 상관없는 껍데기로서의 영이 사륵스, 라고 하는 거죠. ! ! 이런 건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사실은요! 프쉬케이라 그래요. ! 육신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 육신은 들숨, 날숨으로 살죠. 호흡으로 살죠. 들숨이 뭐냐면 밖에 있는 깨끗한 공기를, 그걸 들여 마셔야만 내가 살고, 날숨으로 내 안의 더러운 것을 뿜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나를 살리는 건 내 밖에 있네요. 이거 막아버리면 나 죽으니까! 나를 살리는 물! 나의 70%를 이루고 있는 물! 밖에 있죠. 내 안에서 생산 돼요? 아닙니다. 이거 없으면 죽어요. 음식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생명의 근원을 내 밖에 갔고 있고, 그게 끊어지면 나는 죽은 자가 되는 걸, ‘프쉬케라 그래요. 프뉴마,’ ‘너희 안에서 생수가 솟아나리라그러죠. 안에서 물이 생산 된다네요. 그리고 그 프뉴마는 호흡이라고도 하네요. 그 안에 있다는 거네요. 호흡이! 진리가 너희 안에 있다는 건 뭐예요? 진리를 생명으로 내 안에, 마음으로 갖고 있는 걸, ‘프뉴마라 그래요. 그걸 영생이라 그래요. 이건 누가 빼앗아 갈수 없으니까! 그걸 살았다고 하는 거요. 프뉴마와 반대 돼는 개념이 프쉬케예요.

그러니까 진리가 되지 못하고, 이 프쉬케, 온 세상에서, 이 프쉬케의 위상을 높이고 여기에서 뭔가 쇼부를 보려고 하는 그게 프쉬케의 구원이에요. 그리고 이 프쉬케가 갈 천국, 거기를 열심히 소망하는 거.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그런 말이에요. 프쉬케를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나와 내 말, 예수님의 그 말씀!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프쉬케가 죽으면, 목 베임을 당하면, 그는 구원에 이른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 죽음은 좋은 좋은 거예요. 예수 믿으면 절망도 없고, 외로움도 없고, 고독(孤獨)도 없고, 고통(苦痛)도 없고, 고난(苦難)도 없고, 그렇게 가르치는 건 100% 사기(詐欺)예요. 되지도 않아요. 오히려 그리로 내려가서, 하느님의 은혜를 다소곳이 구하는 거예요. 그들을 성도라 그래요.

 

, 생각해 보세요. 그 육신! 그들에게 좀 좋은 옷 입혀주고, 그들의 평균 임금을 높여주고, 열심히 데모해서, 교회가, 촛불 들고 나가서, 그들에게 밥 조금 많이 먹게 해 줬다고 해서, 프쉬케가 프뉴마가 됩니까? 프쉬케 그렇게 해서 그냥 죽어요. 하지 말라는 건 아녜요. 하세요. 이왕이면, 유산 많이 남겨서 자식들 싸움박질 하게 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 많이 도와주면서 사세요. 인지상정으로.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나 훌륭한 신앙인이지?’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그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진짜 중요한 건, 그들에게 프뉴마를 넘겨주어, 그들을 프뉴마(진리)로 살려내는 거! 이게 진짜 우리가 신경 써야 될 거 아닙니까? 거기에 먼저 매진(邁進)해야죠. 그런데 이걸 모르니까, 전부 프쉬케(육신)의 일에 여념(餘念)이 없는 거예요. 혈안이 되어 있는 거죠. 그거 밖에 아는 게 없으니깐요. 그리고 그건 세상도 칭찬해주니까! 그것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열심히 하게 해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있어요. 그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루가복음으로 가서, 그 연결부분을 설명합니다.

(루가복음 9:25-27) 25 사람이 온 세상(호 코스모스)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전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27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

온 세상, 프쉬케! ‘온 세상을 얻게 되면 멸망에 이르든지 해를 입게 된다.’ 그래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유익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래요. 그게 그들에게 유익이 되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주님이 26절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예수와 예수의 말, 로고스죠? 그 말을 진리로 전해지지 않으니까, 율법으로 받아들이겠죠? 나와 내 말을 수치(羞恥)! ‘에파이스퀴노마이 그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를 수치로 놔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수치로 가지면, 수치라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완전함 있죠? 율법은 완전함! 사랑이라는 완전! 그 하나로 완성이 되어야 완전이죠. 테텔레스타이가 완전이잖아요? 그게 히브리어로 타밈인데, 타밈완전이 되지 않은 상태는, 전부 수치라 그래요.

그러면 그걸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고, 아가페로, 진리로 깨닫지 못하고, 법으로 가지고 있으면, 수치로 가지고 있으면, 내가 그를, 완전하지 못한 자! 수치로 놔 둘 거야! 이런 말이에요. 너희들이 그걸 수치로 가지면, 내가 그들을 수치로 놔둘 거야! 그러니 말씀은 반드시, 하느님의 그 아가페, 사랑, 진리로, 하나로 완성하여 갖고 있어야 돼요. 내가! ‘아 그분의 사랑이 다구나!’ 이렇게. 그 완전! 수치의 반대말. 완전이라는 단어가, 신명기에 나와요.

(신명기 18:13-14) 13 너희는 한 마음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만 섬겨라. 14 너희가 이제 몰아 내려는 이 민족들은 복술가나 점장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만, 너희에게만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점장이나 복술자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네게는 야훼가 이걸 용납하지 않는다. 길흉을 말하고 복술을 말하는 게 뭐죠? 오늘날 교회가 그거잖아요? 인간들의 길흉(吉凶), 무슨 적용(適用), 어플리케이션, 어떻게 하면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게 길흉과 복술(卜術)이지 뭡니까? 그들은 그걸 듣는대요. 무당의 말, 이런 말이 아녜요.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육신의 유익을 위한 말을 네게 절대 용납하지 않아! 이런 말이에요. 절대 용납하지 않아! 인간의 존재가치 확립과, 향상에 관한 그런 길흉의 말, 복술의 말, 그건 너희들에게 용납하지 않아. 너희들은 진리를 듣게 될 거야! 그건 너희들의 프쉬케와 아무 상관이 없어! 그들이 완전한 자야! 죽어서 사는 자야! 이런 말이에요.

(루가복음 9:27) 27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다.'

이게, 곧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가 있다니까, 막연히 추측해서, ‘, 그 때 이 숨이 끊어지기 전에, 하느님나라를 본 제자들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이 아니라, 직역을 하면, 내가 진리로 말한다. 여기 사람들이 서 있다. 죽음, 다나토스! 그 죽음을 기요마이, 맛보지못하면 하느님나라를, 하느님의 그 통치라는 게 무엇인지를 호라오, 깨달아 알 수없는 자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런 말이에요. 다른 말로, 그들이 하느님의 그 통치를 호라오, 깨달을 수있다. ‘하느님이 우리를 통치하시는 거구나. 우리가 하느님 아니구나.’ 그걸 호라호할 수 있는 이들은 반드시 다나토스의 죽음을 맛보더라. 그렇게 된다. 그들이 여기 서 있다. 이게 진리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나라를 호라오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맛보아야 돼요. 이 땅에서 여러분이 그 죽음을 맛봐야 된다니깐요. 그런데 그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면서요. 그러면 죽음도 좋은 건데, 그 죽음의 증상이 다른 것들! 그거 갖고 너무 파르르 떨 필요가 없잖아요? 너무 통곡하고 절망할 필요는 없잖아요? 다 그거 경험하게 해주려고 하시는 건데. 그러니까 잘 견디란 말입니다. 건 성도에게 날마다, 반드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다나토스예요. ‘무트!’ 죽음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죽음을, ‘스스로 죽는 죽음이라고 말씀하세요. 성도들이 죽는 죽음은! 그건 스스로 죽는 죽음이래요. 그건 남들이 죽이는 죽음 아냐! 그건 얼마든지 너희의 가치를 높이고, 자랑할 수 있는 죽음이잖아? 그런데 그것조차도 허락이 안 된대요.

스스로 죽는 죽음이 뭘까요? 여러분이 진리를 알게 되면, ‘, 아니구나. 이 육은 이렇게 제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거구나!’ 자기가 하느님, 머리가 되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구나! 그런데 얘가 이렇게 안 죽지? 너무 절망적일 때가 많죠? 그 때 어떻게 우리가, 남들은 전부 이 프쉬케를 살리고, 이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신앙생활까지도 동원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거예요? 도대체가. 아니 어떻게 내가 죽어야 된다는, 이게 죽는 게 옳다라고 인정을 하게 되죠? 성경은 그걸 엑소시아, 능력(能力)’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걸 하느님이 주신다, 그런다니까요.

(요한복음 10:17-18)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엑소시아가 말씀을 담게 되면 내가 권세(權勢)! 권능(權能)! 능력(能力)이 생기는 거라 그랬죠? 이걸 전해 주는 걸, ‘두나미스의 능력이라 그래요.

그 능력을 나에게 주시니까, 내가 그걸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생기는 거예요. 하느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셨대요. 진리를 주셨대요. 그랬더니 내가 버릴 권세가 있다는 거예요. ‘하느님 이것 좀 어떻게 죽여주세요!’ 이렇게. 그게 다시 얻는 거란 뜻이에요. 그게 다시 얻을 권세예요.

예수님이 그렇게, 진리이신 그분이, 이 땅에서 그렇게 죽었다는 거예요. 그 죽음이 바로, 다나토스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로마가, 너희들이 잡아 죽인 게 아니라! 그거! 단순히 그것만을 그린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죽는 그 죽음! 스타우로스, 언약 안에서 죽은 그 죽음이, 바로 다나토스의 그 죽음을 같이 함께 묘사했던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계명은 내 아버지께 받은 거야.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하느님의 성전! 그걸 아버지라고 읽는다고 그랬죠? 내 안에 들어온 진리! 그것이 나에게 그 능력을 주더라. 그래서 여러분이 아침마다 일어나면, 또 나는 왜 여전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지? 이렇게 통회 자복이 나오는 거요. ‘아 이 육 좀 빨리 죽었으면.’ 이렇게. 그럼 맹수에게 뜯겨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또 무슨 사자 굴에 들어가 죽고, 그거 너무 추앙하지 마세요. 진짜 죽는 죽음은 그것보다 몇 천 배 어려워요. 선악과 먹은 아담이, 그거 목구멍에서 토해내는 건, 그것 보다 몇 천 배 더 어려워요. 그건 한 순간 물어뜯기면 되는 거지만, 이건 평생 가는 거기 때문에 힘들어요.

그래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하느님 차라리 날 좀 죽여주세요. 난 힘들어서 못 살겠네요.’라는 탄식이 나온다니까요. ‘차리라 죽는 게 낫지. 이걸 언제까지 이렇게 살라는 겁니까?’ 이 고백이 나온다 말입니다. 무슨 예수 믿는다고 늘 히히덕거리고, 기쁘고, 기쁨 충만? 성령 충만? 그렇지 않아요. 그거 미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으로 깨달아지면, 무트, 다타토스의 죽음이지만 거기에서 해방이 일어난다는 거에요. ‘해방(解放)!’

육신(프쉬케), 밖에서 들어오는 생명의 숨을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하면, 죽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하느님이 코끝을 잠깐만 잡고 있어도, 다 고깃덩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과 상관없이, 그 호흡을 내 안에 진리로 갖고 있으면, 그게 영생(永生)이란 말입니다. 그 육이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사는 건데! 우리는 육을 위해 프쉬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프쉬케)의 만족을 위해 예배하고, 프쉬케의 진짜 만족을 위해서 구제도 하고, 프쉬케들의 세상! 프쉬케들의 천국! 이걸 위해서 별짓들을 다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런 것 좀 하자고요. 하는데, 교회의 목적으로는 삼지 말자는 거예요. 무슨 사회운동이다, 구제다, 헌신이다, 이런 거는, 그냥 사람이 사람의 세상에서 살 때 필요한 거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사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하는 일로 여기시면 돼요.

성경에는 그런 종류의 구제나, 그런 종류의 헌신, 그런 종류의 사회구제, 사회운동, 이런 거 얘기 안 해요. 그걸 다 헛일이라 그래요. 아래에서 난 자들은, 반드시 위로 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다 멸망(滅亡)의 고깃덩어리예요. 거기에는 관심도 없고,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그 프쉬케들이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 게, 그게 도대체 뭡니까?

성경이 아래에서 난 것은 반드시 위로 나게 하라그러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게 위로 난다는 게 뭐예요? , 위로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기가 아래에서 나잖아요? 그러면 위의 입으로 가르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 아빠, 아빠 해봐. 아빠얘가 어느 날 아빠!’라고 엄마가 가르쳐 준, 아빠가 가르쳐준 그 말을 정확히 똑같이 하면, ‘! 내 아기가 아빠 했네.’

우리 하느님이 그걸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진리를 계속 말씀해 주는데, 못 알아들어, 그런데 어느 날 그가, ‘, 그거요!’ 하고 아버지!’라고 하면, 그게 진리니까. ‘그래! 그거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너를 이 땅에 보낸 거 아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는 거예요. ‘아버지.’ 진리를 아는 거예요. 그게요! ‘아버지!’ 그래서 교육이라고 그러잖아요. 애 낳아서 그렇게 가르치지 않고 저 산에다가 이리나 곰에게 맡겨 놓으면 이리예요. 그건요! 그게 사람이에요? 그렇게 산다니깐요. 늑대 소년, 뭐 이런 거 나오잖아요? 그건 늑대예요. 래서 위로 나야 된다. 아노뗀, 거듭남이라고도 번역을 하는 거예요. 그게 위로 나다예요.

왜 인간의 기관 중에, 인간의 생물학적 탄생에 쓰이는 기관 중에서, 배설물이 함께 나오는 줄 아세요? 인간들이 생명이라고 내어 놓는 모든 건, 바로 그 더러운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걸 암시해주는 거예요. 하느님이 뭔가 좀 잘못 만든 것 같지 않으세요?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생명의 탄생의 기관에서 왜 배설물이 나오게 만드느냐고요?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만 왜 매력을 느끼고, 왜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냐고요? 그게 인간들의 한계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거요. 그건 더러운 거예요. 거기에서 나서 거기에 그렇게 있으면, 그 더러움으로 넌 배설물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너는 위로 나야 된다는 거요. 진리로 나야 된다는 거예요. 아래에서 난 그 육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 난 진리로, 하느님나라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성전, ! 인간의 수라 그랬죠? 2! 히브리사람들에게서 그가 두 마음이니까. 선악의 수가 2예요. 둘로 와서 셋으로 사는 거예요. 둘로 와서 죽고, 인간으로 죽고, , 세 번째 성전으로 살아나는 거예요. 하느님화() 되는 거예요. 여러분, , 진리로, 사는 거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8:23) 23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어떻게 위에서 났어요? 우리는 부정모혈로 아래에서 났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났단 말예요. 그 얘기하는 거예요. 성령이 뭐예요? ! 진리! 생명! ‘나는 위에서 났어. 그렇게 나야 돼. 너희도.’ 뭘로? 진리로, 진리의 성령으로.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해 준다? ‘온 세상에 속하지 않은 걸로 여겨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호 코스모스가 내 육체도 포함하는 거니까, 너희들에게는 그게 삭제되는 것,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다가 유죄를 선고해? 그 말예요. 세상에 속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안 하고 그냥 꾹 참는 거, 그게 성숙한 신앙생활 아녜요. 그렇다고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막 하면서 살라는 말도 아녜요. 그렇게 살게 되지도 않아요.

어떻게 그 메가스,’ 진리의 성령을 안 사람이, ‘, 이젠 개차반으로 막 살아도 되겠네.’ 이게 됩니까. 꾹 참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왜 그런 걸, 먼저 법으로 주셨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러면 하고, 안 하고의 행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진리가 된 사람은 그게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냥 그 속에서 진리를 오히려 찾아내요. 결국은, ‘내가 즐기던 이런 것도 진짜 나를 즐겁게 해 주는 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 거지, 그걸 안 하고 꾹 참으면서, ‘너는 왜 아직도 그 수준이야?’ 이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거예요. 그거 죽은 거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뭐 누구의 수준을 따집니까? 아니 누구를 단죄해요?

진리는요, 자기를 보게 되어 있다는 거요. 얘 보기에도 바빠요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악한지. 얘 보고, 얘 걱정하기에 더 바쁘다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오만 군데 돌아다니면서, 남 참견을 다 하고 다니는지 말이죠. 어차피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면, 거긴 그냥 친목계예요. 그러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친목계 한다는 게 난리들이냐고? 그리고 혹시 거기서 진리가 전해져서 올바른 진리가 잘 전해지면, ‘야 하느님이 저런 사람들을 들어서도 진리를 전하는구나!’ 역시 호 코스모스, 인간, , 프쉬케는, 나싱(nothing), 하느님이 전부.’ 깨달으면 되지 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들도 많아요.

그런 거 하지 말고 자신을 보라고요. 그리고 나를 신경 쓰라고요. 여기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이 프쉬케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가? 저 말씀으로! 왜 남을 신경 쓰고 있어요? 그거예요. 그게 죽고 다시 사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이에요. 진리만 남고, 나와 내가 관심 두고 살았던, 호 코스모스적 세상이 조금씩 죽어서, 말씀이 완성되는 삶을 사는 자! 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죽음! 그 다나토스! 그걸 기요마이, 맛봐, 하느님의 나라, 바실래이야,’ 하느님의 통치를, ‘호라오!’ 비로소 볼 수 있는, 깨달음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좋은 죽음! 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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