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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12,49-5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21 조회수1,39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22일 목요일

[연중 제29주간 목요일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12,49-53)

   

1독서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에페3,14-21)

14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15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20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21 그분께 교회 안에서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아멘.

 

화답송 시편 33(32),1-2.4-5.11-12.18-19(◎ 5ㄴ 참조)

◎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의인들아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주님의 뜻은 영원히 이어지고그 마음속 계획은 대대로 이어진다행복하여라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 보라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복음<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12,49-53)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아니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아들이 아버지에게어머니가 딸에게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에페3,14~21)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6~17)

 

에페소서 3장 14절과 15절이 성도들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기도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체적으로 선 자세로 기도하였다(창세18,22; 1열왕8,22; 마태6,5; 마르11,25). 하지만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할 경우에는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한다(에즈9,5; 루카22,41).

 

마찬가지로 15절에 '무릎을 꿇습니다'로 번역한 '캄프토 타 고나타 무'(kampto ta gonata mu; i bow my knees; i kneel)에서 '캄프토'(kampto)는 '구푸리다', '굽히다'는 의미이며, '고나타'(gonata) '무릎'이라는 뜻이다.

 

15절 본문을 직역하면, '내가 아버지를 향하여 내 무릎을 꿇고 있다'(kampto ta gonata mu pros ton patera; i kneel before the father)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그의 에페소 교회를 위한 기도가 매우 간절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3장 16절에서 19절은 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중재 기도는 에페소서 1장 17~23절과 그 맥을 같이 하는데, 다만 1장 17~23절의 기도는 성도 각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본 단락의 기도는 성도 전체,  곧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굳세어지게 하시고'(강건하게)에 해당하는 '크라타이오테나이'(krataiothenai)의 원형 '크라타이오오'(krataioo)는 13절의 '낙심하다'에 해당하는 '엥카케인' (engkakein)과 반대되는 의미를 갖는다.

 

'엥카케인'이 '용기를 잃게 하다'(discourage)라는 뜻이라면, '크라타이오오'(krataioo) '힘을 얻게 하다'(strengthen)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크라타이오오'(krataioo)는 신약 성경에서 단 네 번밖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루카 복음 1장 80절과 2장 40절에서는 어린 아이의 성장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고, 코린토 1서 16장 13절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인들을 향해 '믿음안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하고 권면하는 데 사용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절에서 쓰인 이 용어도 근육의 힘을 배양하는 육체적인 굳셈이 아니라 내적 인간(속 사람; inner being)을 사랑과(17절,18절) 성령의 충만(19절, 20절)으로 채우는 영의 굳셈을 나타낸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라고 하면서(2코린4,16)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졌었다.

이처럼 본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기도하는영적으로 굳세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에페소 교인들의 '내적 인간'(속 사람)이다.

 

이 '내적 인간'은 인간의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부분이고,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자리이며, 전 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이다.

 이제 '~하게 해주시고'에 해당하는 '카토이케사이'(katoikesai)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도들의 영적 굳셈과 충만을 위한 사도 바오로의 중재 기도에 해당하는 14절에서 21절까지에는 모두 네개의 부정사가 나온다.

16절의 '굳세어지게 하시고', 17절의 '사시게', 18절의 '깨닫는', 19절의 '알게'가 그것이다.

 

이 네 개의 부정사는 '~을 위하여'라는 뜻의 두 개의 '히나'(hina; so that ~ may; ~하도록)절에 의해 각각 두개 씩 수식을 받고 있다(16,17절과 18,19절).

이처럼 원문으로 볼 때 선명하게 드러나는 네 개의 부정사는 사도 바오로의 기도의 핵심을 파악하게 해준다.

 

그 내용은 먼저 내적 인간(속사람)이 굳세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사시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넷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측량할 수 없는 정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본절에서 '~하게 해 주시고'로 번역된 '카토이케사이'(katoikesai)의 원형 '카토이케오'(katoikeo)는 '정착하여 거주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이 동사는 나그네로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다가 떠난다는 의미의 '파로이케오'(paroikeo)와 달리 한 장소에 정착하여 계속 거주한다는 의미이다.

 

특히 하느님께서 그 현존과 임재의 처소인 성전 안에 계신다고 할 때, '카토이케오'(katoikeo)가 쓰였다는 것은(마태23,21) 새 시대에 하느님의 성전이 된 성도들에게(1코린3,16.17)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거주'는 회개를 위해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초점이 있지 않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임재와 관련된 표현이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사람 안의 구체적인 공간을 '마음'(카르디아; kardia; heart)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항상 그분과 동행할 때,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고 살 수 있다(요한16,33).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는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의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초가 굳어지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두 동사는 모두 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이것은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임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은 생물학적 비유와 건축학적 비유가 결합된 묘사인데, 콜로사이서 2장 7절의 '그분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라는 진술과 유사한다.

먼저 '에르리조메노이'(errizomenoi)의 원형 '리조오'(rizoo)는 식물의 뿌리를 뜻하는 '리자'(riza)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뿌리박게 하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확고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한 '테테멜리오메노이'(tethemelliomenoi)의 원형 '테메릴리오오'(themelioo)는 건축할 때에 '기초를 놓다'라는 의미이다(마태7,26; 히브1,10).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는 식물 및 건축물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이중적 표현은 에페소 성도들이 그들 안에 거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18~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에서 사도 바오로는 당시 이단으로 교회에 침투하고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지식으로 하느님께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유일한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다는 것과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의 정도가 무한함을 암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인들이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화된 사랑이다(로마5,8).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인간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최고의 저주와 형벌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수용할 만큼 넉넉하게 '넓고'(platos; 플라토스; breadth),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 계속될 만큼 영원히 '길고' (mekos; 메코스; length; 에페4,5), 그리스도를 하늘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지극히 '높으며'(hypsos; 휩소스; height), 가장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만큼 충분히 '깊다'(bathos; 바토스; depth; 에페2,1~3)는 것이다.

어떤 존재도 그리스도의 이처럼 풍성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마8,39).

 

넓고 길고 높고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고대의 주석가들은 본문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위로는 하늘을 향하고 아래로는 깊은 땅을 향하고 있으며, 옆으로는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큰 하느님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우의적이고 풍유적인(allegorical)면이 없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미치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충만'이라는 단어 '플레로마'(pleroma; fullness)는 하느님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서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상태이기도 하다(콜로2,10).

 

전치사 '에이스'(eis)는 '~으로'(with)라는 수단의 의미로 번역했으나 목적어를 수반하는 본문에서 '에이스'(eis)는 지향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즉 '~에 이르기까지'(up to)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충만으로 채운다'(be filled with)는 번역보다는 '하느님의 충만에까지 채운다'(up to all the fullness of god)라는 번역이 원문의 뉘앙스를 더 살려준다고 볼 수 있다.

즉 본문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충만을 가지고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이르게 될 영광을 구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다(1요한3,2)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복음(루카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49~50)

 

루카 복음 12장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과 충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루카 복음 12장 49절과 5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타올랐으면'으로 번역된 '에이 에데 아넵테'(ei ede anepthe; (if) it were already blazing)에서 '아넵테'(anepthe)동사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닌 부정(不定)과거형으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성서학계에서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본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신앙인과 불신앙인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박해로 인해 믿음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불'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죄악과 불의, 그리고 박해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만, 바로 그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락과 축복이 되고, 고난과 박해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됨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상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요,'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기쁘게 고난을 감수할 의지와 신앙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장에는 그 진리 때문에 세속화(世俗化)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흐르는 교회 안에서조차 따돌림 당하고 배척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스테파노의 순교 형장을 천상에서 서서 바라보시고 동참하시는 것(사도7,55~56)으로 위로를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인정받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면,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

 

당신의 천주성(神性)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으로 다 들어오며 다 보고계신다. 그 안에는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우리 모두의 죄도 다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 겟세마니의 밤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아픈 밤이다.

 

이제 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무죄(無罪)하신 당신의 인성(人性)으로 자발적으로 대속(代贖)해야만 아버지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독당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성(善性)과 성성(聖性)이 회복되신다.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하시는 밤이다. 겟세마니의 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나약한 인성(人性)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겟세마니의 밤은 예수님 당신의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대속의 십자가의 길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 사명인 인류구속사업을 이루실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바로 그 말씀이 루카 복음 12장 49절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그리고 50절의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해야 하시는 고난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洗禮)란 용어로 표현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씻음(정화)과 정화의 의미 가운데서 일치(一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지체)이 되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 49~53절에서 당신이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믿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걸어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 고난, 고난, 고난 또 고난은 없다. 또한 이 땅에서 영광, 영광, 영광 또 영광도 없다.

고난 한번, 영광 한번, 영광 한번, 고난 한번이다. 그래야만 절망하지 않고, 그래야만 겸손하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의 삶을 잘 마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억울한 고통, 터무니 없는 사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간택하신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요,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며, 성령과 말씀과 희생 제사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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