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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카타크리마(斷罪)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21 조회수1,592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0.21..

(공동번역성서)

카타크리마(斷罪)


1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斷罪)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로마 8:1-3)

 

, ()와 사망(死亡)의 법()이 어떻게 생명(生命)의 성령(聖靈)의 법이 되는 지에 관해서,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어서, 설명을 좀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단죄함이 없다.’ 네버(never) 그래요. 거기에서 단죄함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타크리마예요. 단죄! 그 단죄라는 단어는,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에 근거하여 죄를 선고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행위에 대하여 심판자가, 자기마음대로, 심판자가 자신의 판단으로, 죄를 선고하는 단어예요.

그러니까 요건 그냥, 도덕이나 윤리나 사회법에 의해, 그것에 근거하여, ‘어 너 죄지었네. 그러니까 너는 죄 있어.’라고 유죄를 선고하는 그런 단죄가 아녜요. 심판하는 이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에 의해, 그냥,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게 단죄예요. ‘카타크리마.’ 다른 말로, 피조 세계의 도덕과 윤리에 근거하여, 우리 쪽의 어떤 것에 근거하여 피조세계의 재판관들이 판단하고 선고하는 그런 의 단죄가 아니라, 만유의 주인이시오, 재판장이신, 그 하느님의 판단에 의한 단죄를 말해요.

내가 아직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 죄 있어!’하고 우리를 단죄해 버린 게 하느님이죠, 내가 나기도 전에, 그 단죄가 나에게 임하여, 내가 죄인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네요. 그거 가지고 누가 따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냥 받아들이죠? 아니 내가 나지도 않았는데, 나자마자 나보고 죄인이래, 그게 카타크리마예요. 카타크리마라는 단어의 동사형이, ‘카타크리노인데요. 그 단어가 바로 뒤에, 3절에 나와요.

바오로는 그 자신의 해방을 자랑하면서, 죄와 죽음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했다에서 나를 해방한 거예요. 바오로가 자기 얘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해방을 자랑하면서, 율법이 연약하여, ‘연약하여라는 단어는, 율법에 걸리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은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하기 위해, 하느님이 뭘 하시는데, 그게 뭔 가 하니,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모양이라는 단어를 잘 보셔야 돼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그 육신에 죄를 없앴다. 그래요. 이게 3절이에요.

거기에서 단죄(斷罪)’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카타크리마,’ ‘카타크리노!’ 같은 단어란 말입니다. 동사형이죠. 하느님께서 율법이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완성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도 없는 분에게, 죄를 카타크리마해 버렸다는 거예요. ‘카타크리노해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 단어가. 죄가 없는데, 하느님이 마음대로, 심판자가 마음대로, ‘너 죄인 해!’하면 죄인인 거예요.

단죄, 카타크리마라는 개념 속에서의 죄는, 실수나 잘못, 그런 개념이기 보단,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개념이 더 강한 거죠.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어떤 행위나, 현상을 근거로 하여, ‘너 죄 있어!’가 아니라, 어떤 걸 성취하기 위해, ‘카타크리마’ ‘너 죄야. 너 죄 해! 죄인 해!’라고 하는 게 카타크리마니까. 요건 실수나 잘못의 개념보다는,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의 개념이 더 강한 거란 말예요. ‘카타크리마라는 개념 속에서의 죄는! 그러니 그걸 깨달으면, ‘! 그렇구나! 그러면 그게 원래 나를 죽일 수 없었던 거네. 나를 어떤 선으로 이끌고 가기 위함이었네!’라고 깨달으면, 용서(容恕)인 거고, 그냥 거기에 머물면, 그게 그냥 예요. 우릴 죽이는 죄! 멸망하게 하는 죄!

여기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봐야 돼요. 그 아들에게 카타크리노하셨다는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 안에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즉 하느님의 모든 장자(長子)들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원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하느님의 장자가, 죄 있는 세상에 내려와서, 죄가 되어 죽으므로 말미암아, 진리를 담아 그릇으로 준, 모형으로서의 세상! 그것이 그냥 껍데기로만 인식이 되어 있을 때, 그걸 라 그래요. 진짜 진의를 못 보고 엉뚱한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걸 죄라 한단 말입니다. 그 죄의 세상에 내려와서, 바로 그 껍데기에 진리를 담고 왔는데, ‘로고스로 오셨네요. 그 껍데기로 오셔서, 그걸 죽여 버리고, 진리만 남기고 가는 거란 말예요. 그렇게 죄가 되어 죽으므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그 단죄와 죽음의 사건에 다 들어가 있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이야기라는 말예요. 우리 이야기! 예수 이야기는 바로 그 하늘의 장자들인 우리 성도의 이야기예요. 그걸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러분은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여러분의 그 밖의 예수를 섬기는 종교인일 뿐이에요. 그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는 단어를 쓰는 거예요.

모양이 뭐냐 하면, 원래 죄 아냐! 원래 죄 아닌데,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다가, 그 모양 삭제(削除) 당하고 가는 거예요. 기실 죄와는 무관한 어떤 존재, 죄의 모양으로 왔지만, 기실 죄와는 무관한 어떤 존재! 그 하느님으로부터 그 카타크리마’ ‘, 죄인이야! 날 때부터 죄인이야! 뱃속부터 죄인이야!’라는 카타크리마, 단죄를 받고 왔지만, 그 죄와 정죄라는 것을 통하여, 생명과 의()를 배우는, 그 원래 죄 없음의 존재! 그걸 아들이라 그래요. 그걸 아들이라 그래요. ‘벤 허, ‘훌의 아들, 훌의 자손이란 뜻이잖아요? ‘이게 아들이거든요. 그 단어를 파자하면, ‘베잍하고, ‘이란 말예요. ‘성전이 말하다, 말하는 성전이게 아들이에요. 예수잖아요, 그게?

 

(로마서 5:18-19)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 그러니까 내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됐는데,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용서받았구나!’ 그런데 그게 뭐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건 중들도 외울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삶으로 살아지고 있냐고요, 그게? 그럼 무슨 말이에요, 이게? 여기서 한 범죄, 한 행동이라고 번역이 된 어구는, ‘죄의 하나, 의의 하나라는 말이에요.

십일조란 단어가, ‘십의 하나라는 말이거든요. 그 십계명이라는 거, 열 개의 계명을 하나로 갖게 되면, ‘아 계명이라는 거, 율법, 말씀이라는 거, 이거 하나, 아가페! 이거군요.’ 라고 하나를 갖게 되면, 그게 하느님께 바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라고, 우리가 한글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는 거죠.

그러니까 죄의 하나, 의의 하나, 그 하나가 뭐예요? 그 하나라는 건, 계명을 말하기도 하고, 그 계명이 설명하고자 하는 그 하느님! 그 분! 그 하나! 그 분을 가리키는 거죠. 십계명이 아가페라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축약이 되고, 그 하나를 가지면, 그걸 모노하나, 모노게네스.’ 그 단어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모노게네스. 그걸 아들이라 그러잖아요? 유니크(unique)한 선(son), 독생자라고 그러잖아요. 아들이란 말예요. 그 하나를 가지면.

그런데, 그 하나의 계명, 그걸 죄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그게 율법의 하나를 갖고 있는 거죠. 그게! 하나, 이건 진리인데, 그걸 죄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죽음이죠? 의의 하나로 갖고 있으면, ‘, 그게 아들이구나.’ 이 말이에요. 그게 18절이란 말예요. 그게 생명이란 말예요. 그래서 19절에 불순종과 순종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 불순종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아쿠오듣다? ‘너희가 이러이러한 것으로 들었으나산상수훈에서 배웠잖아요. 이게 아쿠오거든요. 그 앞에 파라가 붙으면, ‘파라쿠오, 제대로 못 듣다란 뜻이죠? 그걸 불순종이라고 번역한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못 듣는 거! 한 사람의 제대로 못 들음으로 말미암아, ‘아 저게 무슨 말이야? , 하라는 거구나.’ 그게 아담의 선악과 사건이란 말예요. ‘, 그래 선악과 먹고, 이 선악의 구조 속에서, 선한 거, 악한 거 우리가 판단하여, 선한 걸 추구하라는 거구나!’가 희생 제사잖아요? 한 사람의 파라쿠오, 잘못 들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죄인이 된 것 같이! 모든 인간이 다 잘못 듣게 되어 있어요. ‘파라쿠오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처럼, 한 사람의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휘파코스올바로, 주의 깊게, 경청하여 인정하다란 단어예요. 그걸 순종(順從)’이라 그래요. 올바로 듣고 경청하여, ‘아 그게 그거예요? 맞네요.’라고 하면, 그걸 순종이라 그래요. 그런 분이 누구예요? 예수님! 진리로 오신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니까요.

그분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오면, 그게 생명인 거예요. ‘파라쿠오가 박살나는 거예요. 이제! 그러니까 단죄의 근거가 되는, 그 순종과 불순종은, 그 들음의 문제인 거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란 말예요. 그렇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잘못 들음의 존재! 즉 율법의 존재로 이 땅에 와요. 그러나 이미 창세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죄와는 이미, 무관한 결국을 탑재(搭載)하고 오는 거요.

(에페소서 1:4-5)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아들들)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창세전에 하느님의 아들이 됐대요. 그리고 여러분은, 거룩하고 흠이 없다네요. 과거완료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왜 이 세상에 와요?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 내려오느냐고요? 그냥 거기에 놔두면 되잖아요? 이미 창세전이라는 게 뭐예요. 생각 밖의 시간이죠. 생각 밖의 시간이란 단어로 표현하기도 뭐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가 그것 밖에 없으니까! 생각 밖의 시간!

그러니까 이 시간이 아닌 거 뭐 영원이라고도 하지만, 그 때, 다른 차원의 거기에서 이미 우리는 아들이 되었고, 흠 없고 거룩한 자가 되었다 그러네. 그런데 이 죄뿐인 모형의 세상에, 그 진리, 내용만 있는 거기에서, 껍질의 세상에, 껍질을 입고 내려와서, ‘, 이게 아닌 게 그거구나!’를 배우고 가는 거잖아요. ‘이게 아닌 게 그거구나!’ 그런데 이거에서 그냥 머물러 버리고, 이걸로 일희일비하고, 여기서 희로애락을 찾으면, 어떻게 되죠? 그걸 멸망(滅亡)이라 그래요.

,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서, 그 아들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려요. 죄 없는 이가,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단죄 받는 거예요. 그냥 단순히, 우리 모두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짊어지고 죽으셔서, 우리가 무죄한 자가 되었다는 식의 그냥 내 밖의 예수를 무작정 믿어버리면 안 돼요. 그건 믿는 게 아녜요. 그냥 객기이고, 바램이고, 원함이지. 그걸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니까요. ‘피스티스란 단어 자체가, ‘하느님은 신실하시다, 하느님은 믿음이시다.’라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믿음이라는 그 단어, ‘피스티스가 뭐냐 하면,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의 수준에서, 차례차례 번제단, 물두멍, 성소, 떡상, 향단, 촛대, 지성소, 법궤, 요렇게 차서로, 차례차례 설명해 주면, 요 진리의 체계와 차서를, ‘피스티스라 그래요. 그런데 그게 하느님을 설명하는 거니까, ‘하느님은 신실하시다! 하느님은 믿음이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티데미되어 있는, 횡으로 서 있는 이것들, 놓아둔 이것들을 통하여, ‘, 그게 그거구나, 이게 진리구나, 하느님이구나!’를 알게 되면 피스토스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 미크론 시그마가 그 뒤에 붙어 버리면, 그걸 마음으로 가진 !’ 그게 되어진 예요. 그걸 우리의 믿음이라 그래요. 피스토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아들 아닌 거예요. 사탄! 마귀! 용서! 사랑! 온유! 은혜! 선물! 이 모든 게, 나와 상관없이 내 밖에 지식으로 와 있으면, 그건 그냥 관념일 뿐이에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신기루라니까요. , 그 사랑? 그 온유?’ 그런데 뭔지를 몰라요. 자기가! 그냥 국어사전이 정의해 놓은, 그리고 드라마가 가르쳐 준, 그런 것으로만 아는 거예요. ‘, 그 사랑? 그 온유?’ 이렇게. 그 모든 건 내 안에서 찾아지고, 적용되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내 구원과 관계있어요.

이렇게 설명해 볼게요. 우리는 이미 하느님이 창세전 선택에 의해 구원받은 아들입니다. 창세전이란 라는 존재가 존재로 생성되기 이전입니다. 그건, 우리의 이 생각 밖의 시간이므로, 거기에는 순서도 없고, 기다림이 없고, 흐름이 없어요. 그래서 발전이나, 성숙(成熟)이라는 게 없어요. ? 그 자체로 완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창조에다가 뭐 보탤 거 있어요? 없어요. 하느님이 다 하셨으니까. 그게 시간 밖의 그 영원, 아이언영원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미 완성이란 말예요. 다른 차원의 완성되어 있는 존재가 진리인 여러분이란 말예요.

 

모세, 바오로, 요한이 진리를 통하여, 그걸 본 거죠? ‘, 완성이야. 그래 그걸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보자.’가 성막이었잖아요? ‘, 그거! 삼층 천에 갔더니. 그거!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거.’ 하고 그거! 전하러 다닌 거예요. 바오로가. 요한? ‘, 완성되어 있는 그거! 하늘의 진리로 보니까 그거는 거기에 이미 완성된 거네. 그러면 죄, , 이게 나랑 무슨 관계야? 그건 완성이네!’ 하고 쓴 게 요한묵시록이에요.

그래서 완성되어 있는 거기가, 그 때 당시에 요한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배경이나 이런 것으로, 그려진 거예요. 그걸 알고 그걸 본 이들이, 전하고 다녔을 때, ‘! 그거요.’라고 받아들이면,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네, 그러면 그거 원래 내 것 아니었네. 나는 아들이네! 거기 완성되어 있는 열두 대문, 열두 지파, 열두 사도, 그 이름이 나네! 그 아들이네! 내가 하느님의 신부 맞네! 오직 그분의 은혜에 의해서,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완성된 아들이 나네!’ 그러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나와 좌나, 나의 행위나 모든 건, 그 완성과는 무관한 거라는 걸 알 때, 내가 구원받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이신 주님이 바로 그러한 존재예요. 시간 밖에서 완전한 존재로 살아 계신 분이 주님이죠?

그런데 그 분이 시간 안으로, 피조 세계 안으로 들어오세요. 성경은 이 세상 모든 게 하늘의 진리를 설명하는 그릇이라 그런단 말예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만물에 하느님이 들어 있어! 그 능력과 신성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그런단 말예요. 모든 천지 만물에!

따라서 하늘의 존재는, 이 세상 만물 속에서, 하늘의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 되는 거란 말예요. 불가에도, ‘석가성불(釋迦成佛), 산천초목(山川草木) 동시성불(同時成佛)’이란 말이 있죠. 석가, 석씨가, 석씨 성을 가진 이가, 성불을 했어요. 부처가 되니까, ‘모든 것에 부처가 있네!’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구약 밖에 없어요. 그들이 갖고 있는 진리의 내용 중에, 성경과 흡사한 게 굉장히 많죠. 어차피 말,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 밖에 없어요. 하느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종교가, 그 하느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들 것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원래 말은 하나라니까요. 진리는!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요. 진리로 완성이 되는 신약(新約)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라고는 하는데, 그것이 뭔지를 몰라요. 스님들하고 이야기해 보면, 그것이 뭔지를 몰라요. 거기까지는 너무너무 말을 잘 해 주셔. 그런데 그것이 없어요.

그거를 야보라는 사람이 금강경 오가해라는 책에다가,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라고 써 놓은 거예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어디에서 부처를 찾느냐?’ 야 모든 게 다 부처인데, 산과 물이라는 그 다름이 무슨 상관이야?’ 이런 말이에요. ‘뭔 상관이야?’라고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 그 진리가 뭔지를 모른다니까요. 엉뚱한 것으로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진리가 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행생활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불교신자예요. 교회에 와 있는 불교신자!

차치하고 성경은, 그렇게 세상 만물 속에, 하느님과 하늘의 진리가, 내용으로 담겨져 있다, 그래요. 내 곁에 있는 남편, 내 곁에 있는 아내, 그들의 성품. 내 자식, 나의 직장, 내 눈에 보이는 저 산, 저 물. 모든 게 다 진리를 설명해요. 하느님만 설명한단 말예요.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피조물이야!’ 이거. 그걸 설명한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그냥 그 껍데기만 보면,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은 거야. 거기에서 벗어나는 거요.

, 그렇게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천지 만물을 그냥 그 껍데기로만 봐주면 그 안에 있는 진리가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나는 그거 아닌데, 왜 나의 껍데기만 보고 그래?’ 이럴 거 아닙니까?

(로마서8,19-23)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9절을 보면, 모든 천지 만물에 하느님의 능력(能力)과 신성(神性)이 들어가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아 예쁘다, , 더럽다, 추하다, 아름답다, 깔끔하다.’ 이렇게 그 껍데기를 보고, 그들을 평가(評價)해요. 그럴 때, ‘아니, 그게 이야기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잖아? 그걸 봐야지! 그걸 못 보고 아름답다, 추하다, 이거 평가해 달래?’ 모든 만물이 그런다는 거예요. 상징적인 얘기입니다. 진리는, 성도는, 그걸 보는 이들이라는 거예요.

,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납니다. 그들도 역시 율법에 의해, 단죄될 수밖에 없는 자로 이 땅에 오죠. 그런데 그들 안에 하느님의 은혜가 임해요. 그리고 진리가 담깁니다. 그들은 이제, 그 모든 자연과 만물 안에서, 진리를 읽어내죠? 그 때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된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그걸, 그 내용으로 못 봐주면, 끝까지 그것으로 존재해야 되는 그걸 멸망(滅亡)이라 그래요. 그걸 구속(拘束), 죄에서 벗어나는 구속 말고, 이 구속, 묶여 있다 그러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도,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지리를 보지 못하면, 여전히 육의 몸에게 끌려다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육의 부귀와 영화와 가난과 좌절과 실패와 성공 등에 의해서, 좌로 치우치고, 우로 치우치며 살게 돼요. 여러분, 그거 자체를 죄라 그래요. 그리고 그들을 단죄 받은 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가 찾아오죠. 그리고는 그 껍데기인 세상과, 육의 헛됨과 무용함과 가치 없음을, 하나하나 폭로해 내세요. 그걸 도와주는 게, 율법과 죄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단죄라는 게, 가입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 그래, 그러면 그게 죄 있음이야.’ 이렇게!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서, 그 섬김의 통치를 바는 자들은, 그 율법과 성전을 통해, 처절한 절망의 자리로 내려가게 돼요. 늘 슬프기만 하고, 고통스럽고 우울하고 이런 게 아니라. ‘, 나는 아니구나! 하느님 앞에서의 나는,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주체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구나!’ 이걸 내려간다고 하는 거예요. 라는 존재의 불가능함과, ‘라는 존재의 덧없음과, ‘라는 존재가 쌓은 업적의 그 헛됨 등을, 폭로당하는 거예요. ‘, 옛날에 그거 했던 그 일들! 얼마나 우리가, , 멋있게 봐 주고, 가치 있게 여겨주고, 칭찬해주고 했습니까.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니까, , 그거 아니었네!’ 이렇게 볼 수 있게 되잖아요.

그렇게 육을 부정당한 이들이 진정으로 를 살리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런 게 아니구나! 그런 게 아니구나! 진짜 나를 살리는 건 따로 있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그들을 아들이라 해요. 존재를 존재되게 하는 건 절대로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구나! 아무 것도 없구나! 그걸 알게 된 이들이, 그 존재의 근거를 하느님에게서 찾게 되고, ‘하느님, 그거 당신이 준다고 그랬으니까 주세요!’ 이게 아이테오예요. ‘빚 갚으세요, 하느님, 나에게 주세요.’ 이게 구하라예요. ‘아이테오.’ ‘제테오.’ 그럼 내가 줄게, 다 줄게. 이거라고요.

구하면 준다.’가 아니라 내가 택한 자들은 그거 구하게 되어 있단뜻이에요. 그렇게 하느님과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연합된 그들! 그들이, 하느님이 생명으로 그들 안에 넣어주신 씨와 연합된, 씨가 자손이잖아요? 씨란 단어 자체가! ‘제라!’ 그들이 아들이라니까요. 씨를 가진 자, 아들.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제쳐 놓고는 결코 완성에 이르지는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記者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을 좍 설명하죠.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고,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라는 거 아닙니다. 하느님이 그런 쪼다들을, 어떻게 믿음으로 만드셨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게 장황하게 나열하고는 그들은 전부, ‘피스티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 그래요. ‘피스티스가 눈에 보이는 걸로 순서 있게, 하느님을 설명하는 게 피스티스입니다. 그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대요. 줬대요. 그런데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래요. 약속은 당연히 진리의 영이에요.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약속의 성령이란 말이 나오죠. 똑같은 단어예요. 호 에팡겔리아약속이거든요. 호 에팡겔리아, 호 하기오스 프뉴마’ ‘약속은 성령이다이런 뜻이에요. 약속은 진리의 영이에요. 진리의 영,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약속의 실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내용! 그 진리! 그 약속이에요. ‘에팡겔리아.’ 그들은 그걸 못 받았다 그래요.

잘 이해해야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과 무관하게 구원을 받았다는 게 아녜요. 십자가 이전에 구원 받은 이들도 전부, 진리, 성령의 영으로 구원 받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21장에서 진리를 아는 이가 되는 것처럼!

그런데 그 때는 굳이 이야기하면, 에피 성령의 시대라 그러죠. ‘엔 성령의 시대가 아니라. 에피 성령은, 물론 이게 이해를 위한 논리의 순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에피 성령은, 신약의 오순절 날, 그 진리의 성령이 불의 혀, 말이에요, (tongue)으로 오시기 전에, 하느님의 필요에 의해,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 가셔서, 그를 사용하시고, 그를 진리로 나타내시잖아요? 그걸 에피 성령의 시대라 그래요.

그런데 그게 이제 때가 차서, 카이로스의 어떤 의미 있는 때가 딱 되어 버리면, 그 때 성령이 교회 위에, 완전히 뿌려지고, 그 때부터는 안 나간단 말입니다. ‘엔 성령의 시대가 오는 거요. ‘안에그 진리의 말씀이 들어오는 거요. 이게 상징적인 이야기란 말예요. 구약 때도 그 성령은 그 안에 들어가서 안 나가시는 거예요. 그 진리의 말씀은 그 마음이 되어, 그가 구원 받는 거란 말입니다.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의 그 깨달음과 증거에 의해, ‘, 저거 진리였구나.’라고 나타나는 것처럼,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에 의해, 진리로 완성이 되어, 그 아들이 되었다는 건, 진짜 그들이 이야기했던 그 약속의 때에, 그 때에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은 교회가, 성도가, ‘그래, 구원은 이렇게 받는 거야!’ 라고 증거를 못하면, 그들은 전부 가짜가 되는 거란 뜻이에요. ‘, 그 약속의 때가 왔는데, 그렇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아들이 된 이가 없다. 너희들은 뭐니? 가짜네!’ 이렇게 되는 거란 말예요. 그러면 이들이 온전치 못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 진짜 불의 혀 같은 그 말, 진리가, 영이 안에 들어오더니, 진리가 되어, 그걸 마음으로 가져, 그 하느님을 알고, 그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어떤, 그 언약의 인물이 되어 버리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그리고 이게 바로, ‘그들이, 구약의 그들이 설명하고 간 내용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면, 이들이 완전한 이가 되는 거예요. 아니면 이들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라니까요. 그들이 이야기하고 간 건데, 그렇게 완성된 이가 나타나질 않아요.

더 쉽게 이야기 할게요. ,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뭐 에녹, 엘리야, 엘리사 사라, 이런 인물들이 구약의 우리가 아주 존경하고 되고 싶은 인물들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이, 전부 진리를 설명하고 간 분들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바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하여 후손이 자자손손 복을 받게 된 아브라함! 아버지에게 목숨도 아깝지 않게 자기의 목숨을 바쳐 효()가 무엇인지를 이 땅에 보여주고 간 이사악! 하느님과 얍복 강가에서, 하느님에게도 지지 않는 기도와 간구로, 축복을 얻어낸 야곱! 열심히 하느님과 동행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와 에녹!’ 뭐 이런 식을 이해를 하면, 그들이 그럴 거란 말예요. 나는 그 사람이 아냐.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게 내가 아니라고! 내가 내 삶으로 살고 가고, 내가 내 이름으로, 또 내 입으로 설명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런데 어떤 이들이 나타나서, ,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설명하는 거고, 이사악은 바로 그 예수를 설명한 거고. 야곱도, 바로 그 야곱에서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는지, 그 구원의 순서를, 우리에게 아주 자세히 설명해준 거고, 뭐 에녹이나 엘리야도, 그렇게, 하느님과 진리와 하나가되어 버리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가 된다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그런 내용으로 설명이 된, 그런 존재라고, 우리가 알아주면, ‘그래, 그게 나야!’ 그들이 완전하게 된다는 얘기예요.

더 나아가 볼까요. 하느님이 진리를 온 세상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고 계세요. 그리고 말씀, 성경, 예수를 통하여, 그게 뭔지를 설명하고 계시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못 알아먹고, 그 분은 하느님이고, 내가 피조물이라는 걸 못 알아먹고, 그분은 고진감래(苦盡甘來)로 우리를, 인과율(因果律)로 우리를,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그런 하느님이야!라고 우리가 오해하고 있으면, 우리의 행위나 열심, 노력에 의해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시는, 권선징악(勸善懲惡)하시는, 그런 하느님이야.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 훌륭하게 성숙되자!’ 이렇게 알고 있으면, 그 하느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말씀으로.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하느님을 이야기하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거 아녜요?

하느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면 그들이 도둑이요, 강도라고 하는 거예요. 왜 하느님의 말씀을 훔쳐다가 엉뚱하게 써. 이렇게. 그래서 아오스딩이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도, 하느님의 아들들에게 구원 받지 못하면, 영원히 감추어진다. 불경한 소리가 아녜요. 하느님이 뭐가 모자라서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그 하느님을 올바로 설명해 주기 전에는, 그건 사람들, 피조물들에게, 하느님으로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하느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 진리를 안에 갖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 얼마나 소중한 거겠어요? 그 하느님이 오해되어지지 않는 세상! 그런 교회! 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느냐고요? 성경이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상과 육신을 주시고 그게 아닌 게 바로 나야!’라고 설명을 하시고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과, 율법과, 옛 성전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하는 거죠.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허물어지는 거요. 돌로 오신 예수가, 하느님이 계명을 써준, 그 돌! 그 돌은 완전히 박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성전이 진짜 언제 박살났어요? AD70. 완성! 안식의 때에 타이터스가 완전히 박살내버렸다니까요. 그리고 금은 다 뽑아갔어요. 진리가 없는 그냥 흙으로 된 성! 이걸 증명해낸 거예요.

,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율법에 의해 맞아 죽으시는 거예요. 주님은 당신이 바로, ‘진리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진리와 생명만 남고, 율법으로 입고 있는 육체는 죽어야 되잖아요? 그렇게 율법에게 자기 육신을 내주시죠. 죄의 모양으로 온 육신, 단죄 받은 육신은 거기서 죽는 거예요. 그럼 죄와 상관없는 자! 그리스도가 되는 거란 말예요.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잠시 죄를 체휼하기 위해 입고 온 육! 그게 죄의 모양이에요. 그 육이 언약의 기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자, 진짜 생명이 팔(8)의 날에,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죽음이 다나토스의 죽음임을 배웠습니다. 그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이 곧, 예수의 죽음이에요. 나도 아들! 예수도 아들! 같은 아들인 거예요. 내 머리! 한 몸이란 뜻이에요. 그러한 십자가의 진의를 제대로 인식을 하면, 예수가 하신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내 관점이 쉬프트(shift)되는 거예요. 어디로? 나에게서 일어날 죽음으로! 예수가 날 위해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날 죽음으로 관점이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고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예요. 율법사가 와서 묻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영생은 율법을 통하여, 뭔가를 열심히 해야 얻는 것이라고 배웠다. 뭘 해야 영생을 얻어요?’ 물었어요. 율법이 예수님에게. 뭘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이 질문은 예수님을 따랐던 부자 청년이 동일하게 했던 질문이죠? 뭘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했단 말예요. 예수님이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이러저러한 거 죽 얘기해요? ‘그거 해!’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려서부터 다 했어요.’ 그래요. 주님이 그럽니다. ‘그러면 네가 그거 다 했다고 하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걸 가난한 이에게 다 주고 와 봐.’ 그래요. 거기서 가난한 이가 푸토코스예요. 푸토코스가 마음이 가난한 자, 성령 안에서 그거 없으면 나는 죽는 자.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도, 이 가난을 채울 수 없을 때에, 나에게는 방법이 없는, 그 가난 있죠? 절대적 가난! 이게 푸토코스란 말예요. 거기에 하느님이 그 단어를 쓰신다니까요.

, 율법 다 지켰다며, 그러면 그 율법은, 곧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다. 그러면 그 사랑! ‘푸토코스한 그 가난한 사람에게 그 사랑을 주면, 그가 살거든, 그럼 네가 다 지켰다고 했으니까. 그거 주고 와봐!’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그는 율법을 율법으로 지켰잖아요?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푸토코스한 사람에게 줄 거 없어요. 그러면 그를 부자라고 하는 거예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는 부자! 그러니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떠날 수밖에 없는 자예요. 그 부자는 바늘귀 문으로 못 들어가요. 내가 문인데, 못 들어가. ‘어떻게 나를 쫓아?’ 한 거예요.

똑 같아요. 율법교사가 은혜의 주님에게 묻습니다. ‘뭘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니?’ 얘기했어요. ‘사랑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 하나 더 나간 거예요. 부자의 이야기에서 이 사랑 이야기한 거예요. 하느님이. ‘그럼 너 율법으로 그 사랑 갖고 있는 그럼 줘 봐.’ 못 줬어요. 여기서는 율법사가 정확히 이야기합니다. , 사랑입니다. 율법은요!’ ‘그래? 그러면 그거 해!’ 그랬더니, 내 이웃이 누굽니까? 가르쳐만 주세요. 사랑 가서주고 올게요.’ 그랬단 말예요. 그런데 율법사예요. 율법사가 가진 사랑은 뭐예요? 베드로 식의 사랑이에요. 십자가 지기 전의 베드로식의 사랑. ‘내가 목숨 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의 그 사랑! ‘그래? 네가 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거야?’ 이 이야기는, 그 부자 청년에게, ‘가서 가난한 자, ‘푸토코스에게, 네가 가진 사랑 한 번 주고 와 봐!’ 이 말이랑 똑같은 말이에요. ‘너 사랑할 수 있어? 그래? 그거 해!’ 그랬다니까요.

그랬더니, ‘그럼 이웃을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의 그 율법사가 말하는 이웃은 뭐예요? ‘푸토코스의 이웃이 아니라 페네스의 이웃이겠죠. 그냥 진짜 가나나한 자, 이웃. 그에게는 율법이 해줄 수 있는 게 있잖아요? 진짜 세상의 구제, 세상의 사랑, 세상의 관심, 율법이 줄 수 있는 거, 줄 수 있다니까요. ‘누가 이웃입니까?’ 그랬어요. 그 때 주님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는 거죠.

이 비유의 주인공인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의 의미. 이거부터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마리테스는 히브리어 쇼무론에서 온 단어거든요. 그런데 그 샤마르가 기본형인데, 그 단어가 깨어 있는 자, 파수꾼, 울타리를 치는 자예요. 울타리라는 게 뭐냐 하면, 예루살렘 성벽, 안과 밖을 나누는 거거든요. 구별 짓는 자.’ 좋은 의미예요.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 사마리아인이 누구입니까? 아시리아에게 북 이스라엘이 멸망당해서, 피가 섞여버렸죠? 유대주의에게, 유대주의 밖의 이방인적인 것, 이것 아닌 어떤 것의 피가 수혈된 거예요. 그런데 누가? 유대인이, 이걸 보고 라고 그랬다니까요. 이게 좋은 거라고요. 성경에서는! 그래서 항상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대조되어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항상 개라고 욕먹는다니까요. 그래서 거기로 지나다니지도 않아요. 유대인들은! 어떻게 율법주의가 진리의 땅을 지나다니겠어요? 깨어 있는 자들의 땅을 지나다니겠느냐고요? 그 얘기하는 거예요. ‘사마리아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니까 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간다, 그래요. 예루살렘은 야라살롬의 합성어. 그러니까 평화, ‘에이레네를 가리키는 거예요. 그걸 가르치기 위해 가리킨 게, 성전이었죠.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인 거예요. 그게 내려왔어요. 어디로? ‘예리호’, 여러고로 내려왔어요. 그건 발광체가 아닌 반사체를 가리킬 때. ! 예리호가 달!

하느님이라는 그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은 피조물 세계가 담을 수 없네요. 그래서 그분이 존재한다는 걸, 어떤 존재가 담고 내려왔어요. 그 하느님을 담고 내려온 하느님! 그러나 그 분은 아닌데, 하느님을 담고 왔어요. 이 분을 알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거야.’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분을 보면, 달을 보면, 해가 있다는 걸 알 듯이, 이 분을 보면 하느님을 아네. 그래서 하느님입니다.

예루살렘이 카타바이노, 내려와요. ‘예리호, .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 발광체는 우리게 감당할 수 없어요. 눈이 멀어버려요. 저기 있는 그분! 자 예루살렘에서 예리호로 어떤 분이 내려오는 거예요. 거기에서 생기는 일이란 말예요.

그런데 그 예리호, 여리고라는 이름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주 특이한 사건이 여리고에서 세 번 일어납니다.

처음은, 당연히 여호수아 5장 이하에, 하느님이 시킨 말을 그대로 외쳐서, 성이, 철옹성 같은 성이, 안에서 바깥으로 무너져버리는 그 사건이에요. 역사서를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보통 성은 밖에서 부수고 들어가기 때문에, 밖에서 안으로 넘어지잖아요? 그런데 이 성이, 역사서에 안에서 누가 민 것처럼, 밖으로 다 무너져버렸대요. 누가 밀었을까요? 무너졌어요. 말에 의해 무너져요. 그들이 어떤 행위도 못하게 하세요. 망치질 한 번 못하게 하세요. ‘하느님, 안에서 밀기 힘든데, 내가 도와줄게요.’라고 깨면 안 돼. 그냥 외치는 거예요. 그 말을 외치는 거예요. 그 함성에 무너집니다.

두 번째가,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쓴 물을 소금을 쳐서, 단물로 만듭니다. 진리로 만들어내죠. 언약으로 말씀을 보게 되면, ‘, 이게 단물이구나!’ 율법이 진리가 되는 게 여리고예요.

신약의 마르코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소경 발토로메오를 만나죠. 는 아들이에요. 그래서 바라바하면 아버지의 아들!’ 가짜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그건요!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와서, 가짜 아버지의 아들 대신 죽는 거예요. 바라바 대신에 하느님의 아들이 와서 죽는 거예요. 가 아버지예요. ‘디메오더러움, 어두움이런 뜻이에요. 더러움의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내가 더러움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내가 그분의 긍휼히 여기심을 못 받으면, 나는 죽는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발토로메오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래요. 내 눈 좀 띄어 주세요.’가 아녜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당신의 자비가 없으면 난 죽습니다!’라고 더러움의 아들이 이야기하니까, 그의 눈이 떠지는 거예요. 여리고는 그런 거예요.

, 하늘의 샬롬이, 예루살렘이, 이 땅에 그걸 가르치기 위해, ‘카타바이노, 내려 옵니다. ‘예리호로 내려와요. 반사체로 내려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성육신을 생각하시면 돼요. 내려오는데, 그걸, 어떤 이는 알아보고, 어떤 이는 못 알아보는 이야기예요. 이건, 우리의 이야기로 제가 설명해 드렸지만, 똑같이 예수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라니까요.

 

한 번 보세요. 그 예루살렘이라는 어떤 사람이, 예리호로 내려오는데, 강도가 나타납니다. , 강도는 율법주의예요. 바리새인,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에요. 한 군데 찾아드리죠.

(호세아 6:9-10) 9 사제들이 강도 떼처럼 세겜으로 가는 길목에 숨어서 노리다가 살인을 하다니, 차마 못할 일이다. 10 베델에선 보이느니 추잡한 꼴뿐, 거기서 에브라임이 바람을 피우고 이스라엘이 몸을 더럽히고 있다. 유다야, 너도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이스라엘의 집이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강도 떼, 이 제사장들이 사람을 오히려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옛 성전을 하느님이 강도의 소굴이라고 부르는 거죠.

(요한복음 10:1)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 가지 않고 딴 데로 넘어 들어 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딴 데, 알라코덴 반대편에서 넘어가다 이게 나타나다예요. 예수님은 문으로 밖에서 들어가죠. 그래서 그들을 건져내야 되니까. 그런데 다른 데서 나타나는 자는, 안에서 나오는 놈들이에요. 담치기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자! 제사장 밖에 없어요. 레위인하고 제사장 밖에 못 들어간다니까. 거기는! 그들이 뭐라 그래요? ‘절도며 강도라 그래요. 그리고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전부 절도며 강도다.’ 그러죠?

예수님보다 먼저 온 게 율법! 절도며 강도! 하느님이 진리를 담아 이 땅에 내려오셨는데, 율법주의,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그 하늘의 진리를, 두들겨 패서 완전히 죽여 버려요. 거기서 거반 죽었다는 게, 그냥 죽었다예요. 그런데 왜 거반 죽었다라고 그러느냐 하면, 죽었는데, 아주 죽지 않은 거. 그게 이상한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란 뜻이에요. 거반 죽은 거! 거기를 레위인과 제사장, 아니나 다를까, 이 둘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절대로 거들 떠 보지 않아요. 율법주의는 진리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너무 나약해 보여! 너무 인간의 자존심을 묵살하는 것 같아! 거들 떠 보지도 않아요. 그런데 사마리아인, 깨어 있는 자라는 어떤 이가 오더니, ‘, 저 죽음이 뭐야?’하고 그리로 가는 거예요. ‘저 죽음이 뭐야?’ 그러더니, ‘어 이게 진리라고 깨달아요. 기름, 포도주, 이게 뭡니까? 말씀이잖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포도주는 새 것. 기름은 진리. 그걸 그분의 죽음에 붓는다, 그래요. 상처란 단어가 트라우마이거든요.

트라우마는 그냥 상처예요. 어떤 상처냐 하면? 죽이려고 때린 어떤 상처를 말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한 거예요. 율법이! 그런데 그 죽음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렇게 되면, 진리를 깨달은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죽음이 내 죽음이라는 걸 아는 거죠. ‘, 그 죽음 아니었으면 난 큰일 날 뻔했네!’ 이렇게 된 거죠. 그러면 내가 그 예수 죽인 거 맞네요. 그래서 자기라는 짐승 위에 그를 태우고. 그래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들어가실 때 뭐 타고 갔어요? 새끼 나귀! 그 짐승을 붉은 빛 짐승!’ 나귀라는 단어 자체가, 뜻이 붉은 빛 짐승이에요. 그런데 붉은 빛 짐승, ‘붉다라는 단어는 성전을 붉게 칠했죠. 그리고 아담이라는 단어가 붉다란 뜻이거든요. 붉은 흙으로 만든. ‘예요. ‘!’ 그래서 너희 죄가 주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리라는 건, 성전, 인간, 호 코스모스, 이 세상은 죄 덩어리라는 거예요.

거기에 그들을 살릴 예수가 타고, 그들이 되어 죽으러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가 자기, 원어에 보면, ‘자기라는 짐승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자기라는 짐승에, 그 분을 태우고 가는 거예요. 성전으로 뭐 하러? 죽이러. 그 예수가 죽어야, 그가 산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이러 가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 아들로 와요. 아들로 오는데,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해요. ‘, 나 아니네.’ 이렇게. 예수님이 그대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강도 맞는 거예요. 율법에게 맞아서. ‘거반 죽어,’ 거반 죽어야, 그 사마리아인이 보이는 거예요. 율법이 죽어야! 율법이 살아 있으면, 자기가 개 취급하던 사마리아인이 다가왔을 때, 절대 못 만지게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율법에 의해 맞아 죽어, ‘트라우마가 생기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 때 은혜가 그를 만질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예수님이 진리로 보이죠. 우리에게! 그리고 율법, 짐승으로 오신 그분이 나를 태우고, 나를 죽이러 가는 거예요. 어디로? 십자가로! 내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면 그 일을 하러 온 예수!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단죄받은, 카타크리마의 그 예수! 그에게 내려진 단죄라는 게 나쁜 거예요?

그래야 여러분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까요. 아무 것도 아니어야.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해라!’ ‘너도 죽을 거야.’란 뜻이에요. 먼저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알아라. 그러면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러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걸 알았는데, 단죄가 나에게 뭘 할 수 있느냐고요? 그래서 바오로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결코 단죄되지 않는다.’ 그러는 거예요. 심판의 단죄. 그건 없어지는 거예요. 이제. 아예 없어져요. 그게 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걸 복음(福音)이라 그래요. 복된 소식인데, 그게 기뻐야 돼요. 그래야 예수 믿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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