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福者 윤지현 프란치스코 님 (순교일; 10월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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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태욱 | 작성일2020-10-22 | 조회수1,38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시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가 그의 형이다. 그에 앞서 윤지충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인척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서 읽어 보고 오랫동안 그 내용을 탐독한 끝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윤 바오로는 1787년에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아우 윤 프란치스코와 함께 열심히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갔다. 이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진산을 떠나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 다음 교회 서적을 베껴 읽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 1795년에는 고산의 운동을 방문한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이후에는 교회의 밀사인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혔으며,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는 이미 드러난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다음과 같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교회 밀사가 북경을 왕래한 이유를 알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윤 프란치스코는 조정의 명에 따라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으며,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124위 복자 자료집에서 발췌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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