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시대 징표 풀이 (루카12,54-5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23 조회수1,40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이 시대의 징표는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4-59)

 

 

1독서<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에페 4,1-6)

주님 안에서 수인(囚人)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그분은 만물 위에만물을 통하여만물 안에 계십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ㄱㄴ.5-6(◎ 참조)

◎ 주님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강 위에 굳히셨네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이들이 야곱이라네그분을 찾는 세대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복음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4-59)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제1독서 (에페4,1-6)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1-3)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사람이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자신이 창조한 사람들 가운데(창세1,1)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로마8,30)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구원 과정은 개인의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본절에서 '받은 부르심' 이라고 번역된 '에클레테테'(eklethete)가 수동형이란 사실과 더불어 '교회'라는 뜻의 '엑클레시아'(ekklesia)와 어근이 같다는 점에서 이 사실이 드러난다.

즉 본문에서 바오로가 언급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름받은 것이다.

 

따라서 에페소서 4장 2-3절에 기록된 겸손, 온유, 오래 참음과 같은 거룩한 성품을 갖는 것이나, 4장 11-12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나 예언자, 복음 선포자, 혹은 교사의 직무를 감당하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에페4,12)

 

한편,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갖는다는 말인데, 구체적 내용이 2절과 3절에 있다.

특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죄에서 거룩함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그리고 분열에서 일치에로의 부르심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성도 각자는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2절과 3절의 말씀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구체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2절 상반부는 '~을 가지고'(with)라는 뜻의 전치사 '메타'(meta)가 2회나 쓰였다.

 

직역하면, '모든 겸손과 온유를 가지고, 오래 참음(인내심)을 가지고' 가 되고 이것은 이어 나오는 '서로 참아 주는 것'(서로 용납하는 것)의 전제 조건이다.

 즉 교회 안에서 한 성도가 다른 성도를 사랑으로 참아 주기 위해서는 모든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심이라는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는 성품은 겸손이다.

겸손은 온유나 인내심보다 먼저 나왔을 뿐만 아니라 새 성경은 '다하고' 로 번역했지만, '모든'이라는 뜻의 관사 '파세스'(pases)의 수식을 직접 받는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와 가장 기초적인 덕을 이루는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을 낮춤' 이 겸손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것은 '겸손'에 해당하는 '타페이노프로쉬네스'(tapeinophrosynes ; humilitas)가 '낮아짐'(lowliness)이란 의미를 갖는데서도 알 수 있다.

 가장 큰 겸손의 도 보이신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셨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겸손의 극치를 보이셨다.(필리2,7.8)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날마다 자신의 옛 본성과 자아를 부정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마태16,24)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세우신다.(야고4,6)

 

특히 이렇게 하느님 대전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성도 각자가 소유하고 있을 때 교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채워줌으로써,교회 공동체 전체가 분리되지 않고 일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온유' 즉 '프라우테토스'(prautetos) 역시 성경에서 성도들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사랑의 특성이면서(1코린13,4)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중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이고(갈라5,22.23) '폭력'의 반대로서 구원받은 자들이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성품으로 묘사되고 있다.(콜로3,12 ; 1티모6,11)

 

특히 이 온유는 약함으로 인한 온순함을 의미하지 않고강함을 절제함으로써 나타나는 부드러움(meekness ; gentleness)을 의미한다.

온유는 거대한 화물선이 부두에 정박해서 짐을 내릴 수 있도록, 배의 측면과 부두의 선착면 사이에 끼워진 고무 타이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동일한 본체로서, 전능한 분이시면서도 온유하셔서 무력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으시면서도 온유하셔서 죄인들을 참으시면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온유로서 우리를 대하셨기에, 구원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을 향해 같은 온유함으로, 즉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강한 심장을 가지고, 외적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과 행동으로 대해야 한다.

 

'인내심'(오래 참음 ; long-suffering)도 '온유'와 함께 코린토 전서 13장 '사랑의 송가' 에 나오는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스'(makrothymias)의 원형 '마크로튀미아'(makrothymia)는 '멀다'(루카15,13), '길다'(마르코12,40) 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 '마크로스'(makros)와 '진노'(묵시록14,8), '화'(분)(루카4,28) 이란 의미의 명사 '튀모스'(thymos)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분노로부터 먼 감정' 즉 '분노를 자제할 수 있는 감정' 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된 중요한 단어이다.

로마서 2장 4절은 구원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이에 해당하는 '마크로튀미아'를 '그 큰 인내'(길이 참으심)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들이 삶 속에서 죄를 많이 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과정 중에서 탈락하지 않고 계속 하느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해 길이 참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역시 다른 지체들을 향해 또한 자기 자신을 향해 오래 참아야 함이 당연하다.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사랑'에 해당하는 '아가페'(agape)는 자신의 이기적 감정을 충족시키는 욕망적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의 유익을 이루는 이타적 사랑으로서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 사랑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까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내어 주셨다.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 안에서 지체된 자들을 마땅히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참아주고'(용납하고)에 해당하는 '아네코메노이'(anechomenoi)의 원형 '아네코마이'(anechomai)는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관대함을 나타내는 동사이다.(마태17,17 ;사도18,14 ;2코린11,1)

본문에서는 명령 분사 현재형으로 쓰였는데, 이것은 곧 명령의 의미를 나타낸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지체가 많다.

특히 에페소 교회는 순수한 이방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듣고 성도가 된 자 등

문화적, 종교적, 사상적 배경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겸손과 온유와 인내심으로 서로 참아 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한 몸이 교회는 결코 유지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명령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분사 '아네코메노이'를 사용해서 서로를 참아줄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평화의 끈으로'

바오로가 에페소서 4장 1-6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 즉 교회 공동체의 일치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은 평화의 끈(매는 줄)이다.

즉 '평화'라는 끈을 가지고 일치를 힘써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평화'에 해당하는 '에이레네스(eirenes)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lom)의 번역어이다.

샬롬의 용례는 신변의 안전(창세26,31), 물질적 평화(2사무7,1; 2열왕5,22)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의 평화(탈출31,17)도 포함된다.

 

또한 개인의 안전과 평화만이(2사무3,23) 아니고, 국가나 공동체의 평화도 포함한다.(2사무17,3) 따라서 평화란 성도 개인의 차원에만 머룰러서는 안되고, 교회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누려야 한다.

 

바오로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평화를 '끈'(매는 줄)으로 비유하였다.

이에 해당하는 '쉰데스모'(syndesmo)의 원형 '쉰데스모스'(syndesmos)는 '~와 함께'(with)란 뜻의 전치사 '쉰'(syn)과 명사 '데스몬'(desmon)의 합성어로서, 둘 이상의 노예나 죄수를 차꼬나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을 말한다.

 

'데스몬'이라는 단어는 '결박하다'(마태12,29), '묶다'(마태13,30)라는 의미의 동사 '데오'(deo)에서 유래하여 '결박(투옥)(사도20,23)으로 번역되며, '올가미', '차꼬'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명사이다.

이러한 합성어 '쉰데스모스'는 특히 콜로사이서 2장 19절에서 교회를 몸에 비유하는 문맥에서 '관절과 인대'(힘줄)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결국 '평화'라는 '끈'은 성도와 성도 사이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공동체로 혹은 하나의 몸처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서로 이질적인 지체들을 하나로 묶어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끈인 것이다.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교회안의 성도가 서로 평화롭기 위해 애를 쓴다면,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애쓰십시오' 로 번역된 '스푸다존테스'(spudazontes) '애를 쓰다' , '노력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스프다조'(spudazo)의 명령 분사 현재형이다.

 

여기서 지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은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기간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서로 무관하고 이질적인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일치가 끝까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체된 각자의 지속적인 노력 중요하다.

 

한편, '하나'(한)라는 단어는 에페소서 4장 3-6절에 도합 일곱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속성에서 일치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3-6절의 내용을 세례 입문자에게 들려주는 신경(credo)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는 저절로 되거나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을 품을 때에(필리2,2)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값진 열매이다.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12,54~59)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54ㄴ~5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줄곧 말씀하시다가 이제는 그들과 더불어 군중들로 그 대상을 확대해서 팔레스티나의 지리적 조건에 따른 기후의 변화를 반영하여 말씀을 하신다.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비가 오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팔레스티나는 그 서쪽이 지중해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서쪽에서 오는 바람은 다습하게 되어 비를 뿌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54절과 55절에서 '바람의 방향에 따른 준비'에 대한 말씀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팔레스티나 남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기 때문에 남쪽에서 바람이 불게 되면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팔레스티나는 몹시 더워지게 된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남풍이 불면 더울 것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하였다.

 

이처럼 사람들은 천기를 분별하여 날씨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할 줄 알았지만, 시대와 진리에 대한 분별에 있어서는 무관심하여 무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우회적으로 짚고 계신 것이다.

 

'위선자들아'

'위선자들'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타이'(hypokritai; hypocrites)는 '휘포크리테스'(hypokrites)의 복수형이다. '휘포크리테스'는 원래 '연기자' '무대 연출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위선'은 하늘과 땅의 기상은 분별한다고 하면서도 진정 알아야 할 이 시대의 다가올 심판은 깨닫지 못하는 실제적인 어리석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여기서 '위선자들'이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이 시대'에 해당하는 '톤 카이론~투톤'(ton kairon~tuton; this time)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말한다.

왜냐하면, 루카 복음 12장 51~53절에서는 이미 예수님의 활동 시기로부터 '분열'을 가져다 주는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재림과 다가올 심판의 임박한 시기를 암시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원문에서 '시대'에 해당하는 명사 '카이로스'(kairos; time)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순서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즉 '카이로스'는 사람의 운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으로서 여기서는 '종말론적으로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다가올 심판을 준비해야 할 모든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이 구절은 루카 복음 12장 58절과 관련해서 볼 때, 영원한 멸망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다가올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 대전에 져야 할 개인의 책임은 각자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는 '구원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위 독서와 복음 해설은 수사사제님의 글을 옮겨 올리는 것입니다.

올바로 성경을 알리시는분이 있어 행복합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