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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카13,10-1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26 조회수1,28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루카13,10-17)

   

1독서<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4,325,8)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성도들에게 걸맞게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이것을 꼭 알아 두십시오불륜을 저지르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에서 받을 몫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누구의 허황한 말에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그러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진노가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립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상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에페 5,1)

◎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라.

○ 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제때에 열매 맺고잎이 아니 시들어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복음 환호송

○ 주님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요한 17,17 참조

 

복음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독서 (에페4,32-5,8)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4,32)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5,1)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것은 에페소서 4장 31절에 나열된 성도가 마땅히 버려야 할 부정적인 것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로서 새롭게 된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요소들이다.

먼저 '너그럽고'에 해당하는 '크레스토이'(chrestoi; kind)는 31절에서 언급된 행위들 (원한, 격분, 분노, 폭언, 중상, 악의)과 정반대되는 마음과 태도를 종합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닮아가려고 할 경우에만 체득되는 하느님 자비하심의 성품과 관계되는 것이다(에페2,7; 로마2,4).

혹자는 이 단어의 어원을 그리스인들이 자기 이웃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길 정도의 마음에서 온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다음 '자비롭게 대하고'에 해당하는 '유스플랑크노이'(eusplangchnoi)의 원형 '유스플랑크노스'(eusplangchnos)는 문자적으로 '강한 내장을 가지고 있는'(having strong bowels)이다. 고대 근동의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감정이 사람의 내장 가운데 존재한다고 여겼다.

 

본절의 '자비롭게 대하고'(compassionate; tender hearted)라는 표현도 이런 사상과 관련되어 마음의 중심,  내장 안에서부터 상대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을 갖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 ~  용서하신 것처럼'

각각 '용서하신 것처럼','용서하십시오'로 번역된 '에카리사토'(echarisato)와 '카리조메노이'(charizomenoi)는 모두 '카리조마이'(charizomai)를 원형으로 한다.

'카리조마이' '은총'을 뜻하는 '카리스'(charis; '무상으로', '공짜로'라는 뜻)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문자적으로  '은총을 베푸풀다'라는 뜻이다(1코린2,12; 선물; 필리1,29; '특권').

 

그런데 여기에서 은총을 베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용서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로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용서의 은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죽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성도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진 빚을 갚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희생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용서의 은총을 모른체 하는 태도이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않느냐?" (마태18,33)

한편, 여기서도 '하십시오'로 번역된 '기네스테'(ginesthe)는 현재 명령형으로서 이 역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용서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5,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구성원 각자의 새 생활에 대한 권면을 기록하고 있는 에페소서 4장 17절~6장 20절의 단락 가운데서 5장 1절~14절은 특히 이란 이미지를 사용하여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권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을 여는 본절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될 것을 직접적으로 권면한다.

 

이러한 서론적 권면에 이어지는 에페소서 5장 2절 이하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다룬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4장 31절, 32절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본절 서두에 나온 '그러므로'로 번역된 '운'(un) '따라서','그렇다면'이란 뜻을 지니는 추론을 나타내는 접속사란 사실도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즉 사도 바오로는 성도는 마땅히 하느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4장 31절, 32절에서 이웃에 대한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새 성경에서 본절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분은 ~ 되십시오'에 해당하는 '기네스테'(ginesthe)가 원문에서는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이 단어는 본절의 맨 앞에 나와 강조되면서 동시에 바로 다음 절에 가장 먼저 나오는 '여러분도 ~ 살아가십시오'(페리파테이테; peripateite)라는 단어와 절묘한 대구를 이룬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현재 명령형으로 하느님을 본받는 것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랑의 행위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사오 바오로는 각각의 절의 선두에 나오는 두 단어의 대구를 통해 '됨' '삶'(행함)을 강조하고, 또한 강조하는 순서를 통해 '삶'(행함) 이전에 '됨'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본받는 사람'에 해당하는 '미메타이'(mimetai)의 원형 '미메테스'(mimetes)는 다른 사람의 특성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 '미모스'(mim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모방자'(imitators)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성도는 영적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속성을 그대로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미로 쓰였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각을 가진 성도가 삶 속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상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왜 하느님을 본받아야 하며 그것이 가장 큰 이상인가?

그것은 먼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은(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사랑받는 자녀답게' '사랑받는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게'라는 뉘앙스를 나타낸다.

 

여기서 자녀라는 표현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이며(창세1,26; 5,1) 특히 성도는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인격의 원형이 되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1코린15,22.45).

 

또한 그분을 닮는다는 것 에페소서 4장 24절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3,10~17)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1~13)

 

루카 복음 13장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귀가 들려 허리가 굽어진 병에 걸린 한 여자를 고쳐줌으로써 말미암아 야기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13장 11절에 '마침'으로 번역된 '카이 이두'(kai idu; and behold)에서 '이두'(idu; behold)라는 표현은 뒤따라 나오는 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여자'라고 번역된 '귀네'(gyne; a woman)가 강조되는 것은 사탄한테 묶여(16절) 병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불행한 처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나타나는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14~17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불행한 이 여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정당한 행위임을 독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시달리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astheneia; crippled; of infirmity)는 '병', '연약함'을 가리키는 '아스테네이아'(astheneia)의 소유격이다.

이 소유격은 '결과'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마귀'를 가리키는 '프뉴마'(pneuma; a spirit)와 연관시켜 볼 때, 이 병은 마귀로 말미암은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16절에서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탄이 ~ 묶어 놓았는데'로 묘사해 주고 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결과'를 가리키는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된 본문은 그 여자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여러 묘사가 모두 마귀들림으로 나타난 결과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마귀들림(부마)으로 나타난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여자의 굽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슁큅투사'(syngkyptusa; bowed together; bent over) 기본형 '슁큅토'(syngkypto)는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syn)과 '몸을 구푸리다', '몸을 굽히다'는 뜻의 '큅토'(ky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몸을 완전히 구푸리다'는 뜻이다.

이 병은 아마도 척추염이나 다른 원인으로 말미암아 등뼈가 고부라져 허리를 펼 수 없는 곱사병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원문에서는 '슁큅투사'(syngkyptusa) 앞에 과거에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인 '엔'(en; was)를 사용하여, 그 여자의 이러한 상태가 과거로부터 18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본절의 후반부에 '조금도 ~없는'이라는 관용구인 '에이스 토 판텔레스'(eis to panteles; in no wise; (not) at all)를 첨가해서,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가 지속적이면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준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여자나 주변 사람들의 아무런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능동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

여기서 '풀려났다'에 해당하는 '아폴렐뤼사이'(apolelysai; you are loosed; you are set free) '아폴뤼오'(apolyo) 동사의 완료형이다.

 

이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 여자가 1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몸이 굽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11절의 미완료 과거 시제 '엔'(en; was) 동사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이 여자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로 말미암아 18년 동안이나 계속된 마귀와 질병의 속박(병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맛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완료형 동사가 쓰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치유를 가리킬 때 '치유'의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아폴뤼오'(apolyo)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아폴뤼오'(apolyo)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 from)와 '풀다'는 뜻의 동사 '뤼오'(ly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놓아주다', '해방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나귀가 마구에서 자유를 얻는 것처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이다.

12절은 14~16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된 안식이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찬양하였다'에 해당하는 '에독사젠'(edoksazen; glorified; praised)은 '영광을 돌리다', '찬양하다'는 뜻의 '독사조'(doksazo) 동사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그녀가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또는 '찬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원문은 이 동사가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굽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11절의 '엔'(en; was)동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계속적 고통'에서 '계속적 찬양'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을 묘사해 주면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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