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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초대받은 자의 처신 (루카14,1.7-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31 조회수1,246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초대받은 자의 처신 (루카14,1.7-11)

   2016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1독서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피 1,18-26)

형제 여러분, 18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사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 이 일이 나에게는 구원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5 이러한 확신이 있기에여러분의 믿음이 깊어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남아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26 그리하여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 가면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나 때문에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42(41),2.3.5ㄱㄴㄷㄹ(◎ 3ㄱㄴ 참조)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하느님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제 영혼이 하느님을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영광의 초막하느님의 집까지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은 가운데축제의 무리와 행진하였나이다

 

복음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14,1.7-1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제1독서 (필리1,18ㄴ-26)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0-21)

 

필리피 서간 1장 20절부터 23절까지는 자신의 생사를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바오로의 성숙한 신앙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기적 야망에서 그리스도를 투기와 분쟁으로 전한 자들과 달리 바오로에게는 거룩한 열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간절한 기대'로 번역된 '아포카라도키안'(apokaradokian ; my earnest expectation)의 원형 '아포카라도키아'(apokaradokia)는 세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회화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예민한 기대감으로, 목(카라;kara)을  빼고(아포;apo) 앞을 바라본다(도케인;dokein)는 의미이다.

한자성어로는 '학수고대'(鶴首苦待) 라는 말이 적합하다.

바오로는 학수고대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존귀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한편, '희망'으로 번역된 '엘피다'(elpida)의 원형 '엘피스'(elpis; hope)는 '바라는 것'(사도16,19 ;로마4,18;1코린9,10;2코린1,7)과 '신뢰','신용' 이란 뜻과 아울러 '영원한 내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망덕' 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된다.

 

'내가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부끄러운 일' 로 번역된 '아이스퀸테소마이'(aischynthesomai) 원형 '아이스퀴노마이'(aischynomai)는 '천함', '수치', '불명예'를 의미하는 '아이스코스'(aischo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보기 흉하게 하다','추하게 하다', '불명예스럽게 하다','수치로 가득 채우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서, 부정어 '우데니'(udeni ; nothing)와 함께 쓰였다.

따라서 직역하면,'나는 어떤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절의 선언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 가운데서 나오는 표현이며, 자신이 중상모략으로 인해, 혹은 결박되어 있는 것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는 굳은 신앙의 고백이다.

바오로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시편25,3; 이사50,7)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아주 담대히'

 

'언제나'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는 '항상','늘' 이라는 의미의 부사이다.

또한 '아주'로 번역된 '파세'(pase)는 '온전히','모든'(all)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 모든 담대함으로' 가 된다.

즉 바오로는 현재와 시간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서만 담대한 것이 아니라 늘 담대했던 것이다.

 

한편, '담대함'에 해당하는 '파르레시아'(parresia; boldness; sufficient courage)는 언변의 거침없음과 마음이 담대하고 용기로 가득 차있는 두가지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살든지 죽든지 나는 이 몸으로 ~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살든지 죽든지' 로 번역된 '에이테 디아 조에스 에이테 디아 타나투'(eite dia zoes eite dia thanatu; whether by life or by death)는 필리피서 1장 21절의 표현과 더불어 삶과 죽음을 초월한 바오로의 생사관을 잘 보여준다.

 

바오로는 필리피서 1장 13절-14절에 나오는대로,그리스도 때문에 1차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던 기간중인 A.D.62-63년경 로마 황제 체사르의 재판 결과, 사형이 선고되든지 혹은 석방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결과로 귀결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로 번역된 '메갈린테세타이'(megallynthesetai)의 원형 '메갈뤼노'(megallyno)는 '존귀하게 만들다','위대하게 만들다', '웅대하게 하다'(다른 사람들에게 일부러 보이다,드러내다; 마태23,5),'증가시키다' (커져가다; 2코린10,15),'찬양하다'(루카1,46; 사도5,13; 10,46) 라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본래 문자적 의미는 '수를 증가시키거나 옷에 매달린 장식의 크기를 늘리는 것' 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미래 수동태로 쓰여 바오로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바오로가 수동태로 쓴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로, 자신은 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수단)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코린6,20; 2코린4,10)

 

자신이 석방된다면, 자신의 전인격를 통하여(로마12,1; 에페5,28) 계속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해 나갈 것이지만,그렇지 않고 사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확고한 신앙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으로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께 가겠다는 말이다.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안에는 하느님의 직분을 맡은 사도로서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을 통해 오직 주님만이 영광받으시고,주님만이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성숙한 봉사자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한편,'이 몸으로'로 번역된 '엔 토 소마티 무'(en to somati mu; in my body)는 '감옥에 있으면서',혹은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채찍에 맞은 흔적으로'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전존재로써' 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 자체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1)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갈라티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과 더불어 바오로 사도의 생사를 초월한 인생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삶'(사는 것)이라 번역되는 '젠'(zen)은 죽음에 대조 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살아 있다','생명력을 소유하다'(로마7,1-3; 1코린7,39)라는 뜻을 갖는 동사 '자오'(zao)의 현재 부정사로 쓰여,현재 지속되는 삶의 과정을 나타낸다.

 

'나에게는 삶이 그리스도이며' 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신적인 삶이나(사도17,28) 혹은 영적인 삶(로마8,2-11; 2코린5,17)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의식과 체험이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그리스도가 그의 최대의 관심이라는 것이다.(갈라2,20)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삶의 영감과 지침과 목적과 의미를 제공한다 이러한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서 그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바오로가 행하는 모든 것,말씀에 순종하고,사랑의 힘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돌보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복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자신의 일생이 전부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고,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야말로 바오로가 존재하는 이유 것이다.(필리4,13; 2,5-11; 3,9; 4,4; 2코린5,15참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죽는 것'으로 번역된 '아포타네인'(apothanein)의 원형 '아포트네스코'(apothnesko)는 '자연적 죽음을 죽다'(마태9,24; 루카16,22; 요한4,47; 로마7,2),'도덕적 죽음을 죽다'(로마7,10; 묵시록3,2), '죄에 대해 죽다'(로마6,2 ;콜로2,30)란 다양한 용례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육신적 죽음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상반절의 '사는 것'이 현재 부정사로 쓰인 반면,본문의 '죽는 것'은 부정(不定) 과거 부정사로 쓰여 죽음의 과정이나(1코린15,31; 2코린5,12)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일생에 단 한번 있는 육체의 일회적 죽음을 나타낸다.

 

한편,'이득입니다' 로 번역된 '케르도스'(kerdos)는 '이익', '이득'(필리3,7; 티토1,11)이라는 뜻이다.

바오로는 무조건 살기를 원한 것도 무조건 죽기를 원한 것도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고 죽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바오로가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한 것은, 여러가지 육체적인 고통이나 삶의 무거운 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던 자신이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 깊고 더 완전한 일치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이란 표현이 나오는 23절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맺었던 관계가 죽음으로 인해 파기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깝게 되기 때문에 죽음이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로마 8,38.39)

결국 바오로가 죽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23절), 바로 주님과 함께 본향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2코린5,8)

이처럼 바오로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바오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쨌든 간에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 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선배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 내용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땅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모든 것이 너무나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입니다. 

신부님은 이를 보면서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이처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반면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땅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산, 강, 건물, 자동차 등 모든 것이 분명하고 크게 보이며, 각각의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에만 머무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를 작게만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시고자, 더 잘 이해하시고자 내려오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되시는 겸손을 갖추셨던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낮은 자리는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필수적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정녕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낮추시어 그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고,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높이시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음을 겪으신

당신과 함께 부활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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