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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기 / 아들로 죽고 자기 아들로 살다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0-31 조회수1,307 추천수0 반대(0) 신고

오늘 내용에서 한가지만이라도 아~! 그렇구나를 느끼시기를~~~

성경바로알기 2020. 10. 31.

(공동번역성서)

아들로 죽고 자기 아들로 살다

 

성경은 절대 이원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책이에요. 진리가 하나잖아요. 그런데 그걸 둘로 나누면 안 된다니까요. 진리는 둘로 나누어서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으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논해져서는 안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그 이원적 관계인 절대 타자로, 그분은 내 밖의 절대 타자로나도 그분과 절대 타자의 자리에 있고 이러한 그런 이원론적 관계로 이해가 된다든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와 그 예수에 의해 구원 받은 나, 이런 식의 이원적 관계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그 아들을 경외의 대상으로 섬김의 대상으로 놓고 섬겨버리게 된다고요. 이게 잘 하는 것 같지만 그거 아닙니다. 이게 전부 헬라의 이원적 해석에서 기인한 오해들인 거예요. 그게 겸손한 것 같고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그렇게 네가 그 자리에서 나를 섬기겠다고 하는 게 사실은 네가 하느님 노릇 하는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잘 이해해야 돼요. 그거, 겸손한 거 아니에요. 거기에 다 속고 있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 우리 성도 전체를 가리켜 아들, 장자라 불러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내 장자, 라 그랬다니까요. 내 장자.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長子라 그래요. 그리고 그들의 會合인 교회를 장자들의 總會라고 한다니까요. 장자들만 있어, . 아들만 있어. 그들만 모인 곳이에요. 그걸 교회라고 한단 말이에요. 아들이 머리이고, 다른 장자들이 지체가 된 하나, 다 아들이에요. 그냥 그거 자체가 아들이에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라니까요. 예수를 머리로 한 하나. 바오로는 그들을 가리켜 아들이라고도 부르고, 주님도 그렇게 씨, 복음의 씨, 진리를, 그 씨를 마음으로 가진 이들을 아들이라 그래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아들, 아들 할 때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어떤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 안에는 예수도 들어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데 그 분이 그 전체를 대표하는 거지 나머지 아들들은 그 아들과 상관없는 아들들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씨라고 했죠? . 제라, 후손, . 아들은 생명의 씨인 진리를 가진 모든 자들을 총칭하는 개념이에요. 그게 아들이에요. 그래서 생명을 담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 말씀이라고도 하고 아들이라고도 하는 거예요. ? 진리, , 말씀을 가졌기 때문에. 그 씨를 가진 자가 아들이라니까요. 남자 여자 마찬가지잖아요. 씨를 가진 건 남자죠? 아들이란 말에요. 그 씨를 남자가 여자에게 주면 그 안에 생명이 들어가 그 여자가 씨를 갖게 되고 그 안에 그 생명이 잉태되면 그를 아들이라 그래요.

신부가 아들을 신랑으로 가지게 되면 그 신부가 아들과 연합이 되어서 아들 안으로 함몰되어 들어가는 거예요. 씨를 가진 아들로. 또 다른 아들로 새롭게 재탄생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진리를 가진 이들은 그 안에 생명의 씨를 가진 이들이 되어서 신부에서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이 점점 남성화 되어져 가는 거라고 했죠? 그건 진리를 담고 있는 거예요.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 저 마누라가 왜 저렇게? 옛날엔 안 그러더니 저렇게 그냥 빡빡하게 변해가는 걸까? 아니, 원래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은 우리가 감지할 수도 없고 담을 수도 없어요. 아예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안 돼요. 그분의 이름이 어떻게 하느님이에요? 하늘에다가 님, 자 붙인 게 어떻게 그분의 이름입니까? 이름도 부를 수 없는 그분.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은 아도나이라고 바꿔서 불렀죠? 그렇게 바꿔서도 부를 수 없는 그분. 그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존재, 아니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거예요. ? 그건 우리의 오감이 감지가 되어야, 오감에 감지가 되어야 존재죠? 그런데 그분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수준에 맞게 진리로 말씀으로 전해 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그 하느님이 내 안에 있다라고 여겨주시는 거란 말에요. 우리의 수준에서 담은 그 하느님. 그걸 엘로힘이라고 그래요. 그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바로 성전이 되는 거잖아요. 그 하느님이 계신 처소니까. 그 사람을 가리켜 하느님의 처소라고 부르고, 히브리사람들은 그 하느님의 처소를 알레프 베이트해서 아브라고 써놓고 아버지라고 읽는단 말이에요. 하느님의 처소라고 써놓고 글자 파자를 하면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래서 그 안에 진리를 담고 있는 이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진리를 씨로 생명으로 갖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의 처소가 되어서. 그래서 바오로도 너희는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잖아. 너희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줄 모르니?’ 그런단 말에요. 성령이 하시는 성전으로 글자로 써놓고 히브리사람들은 아버지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면 이제 그 자기 안에 아버지를 가진 이들은 그 아버지에 의해 낳아진 아들이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아버지에 의해 아들은 이제 사용되어진단 말이에요. 예수 안에 아버지 계셨죠? 내 안에 아버지 계시다. 그랬잖아요. 그 아버지가 예수를 그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했잖아요. 그리고는 결국 그의 육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니까요. 그게 아버지의 영광이 완료되어 있는 거, 아버지의 영광이 확 피어난, 아버지의 영광의 절정이 육의 죽음이었단 말이에요. 육체는 아니고 그 아버지가 전부다! 이거.

그래서 하느님도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내 아들들, 내 백성들 오라고 해. 그런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의 영광, 하느님의 영광을 독사’, 나타내는 자로 사는 거예요. 그 하느님을 내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그런데 그 하느님을 내 영광을 위해 이용해 먹잖아요. 자해를 해서라도. 따라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에레츠‘, , ’에레츠하느님이 시작하신다.‘ 그물을 쳐서 잡기를 시작하신다. 이게 땅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요. 그렇게 써놓고 땅이라고 읽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땅은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물을 확 던져서 잡아 올리는 곳이에요. 그래서 잡아 올려서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아 요거 나쁜 고기 버리고 좋은 고기만 끌고 올라가시는 거예요. 그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그물의 비유란 말에요. 그게 땅이에요. 아들을 요 땅에 보내셔서 아들들만 싹 올라 올리세요. 죽여서. 바다에서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오면 죽는다니까요. 이 저주의 바다에서 아들들을 낚아 올리는데 그들만 죽어요. 나머지는? 꼬리로 열심히,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 꼬리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지 자랑 하다가 그 저주의 물에서 죽어요. 아들들은 거기에서 꼬리를 삭제 당하고 머리로 편입이 되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로 편입이 되려면 그 목이 잘라져야죠? 그래서 묵시록에 보면 하느님의 백성들이 전부 참수 당했다, 그래요. 이 머리, 자기 인생의 주체로 사는 그 주체권을 빼앗긴 하느님의 백성..., 그게 죽음이란 말에요. 육체의 죽음.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의 모양으로 육체의 죄를 정했다라는  그 말씀은 나와 무관한 저 팔레스타인 땅에 이 천년 전에 왔던 어떤 그 아들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아들이 대표하고 있던 나의 이야기란 말에요. .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는 동시에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그러죠? 성경에 그러잖아요. 너희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아니 하늘에서 의인으로 완성이 된 이들이 왜 이 땅에 와서 죄인의 역할을, 의 모양으로 살다 가느냐고요? 왜 죄의 모양으로 살다 가게 해요? 그게 뭔지를 깨닫게 해서.... 너희들을 존재가 되게 한 그 의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우리 아들들이 이 땅에 와서 정죄당하는 거예요. 단죄라는 건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그런 어떤 일을 근거로 하여 죄를 선고하는 게 아니라 재판관이, 심판관이 자기 임의대로 너 죄 있어! 그러면 그걸 단죄라 그래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의인인 우리에게 내려 보내는 거예요. 예수님, 아들인 그분을 내려 보내서 너 죄인 해, 그러면 죄인이에요. 예수님은 죄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죄인 해! 죄인의 대표로 죽어, 그러니까 죄인이에요. 그게 아들이라고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느님은 여러분을 죄인으로 만들었다가 의인으로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의인으로 완성해 놓은 그게 ...도대체 어떠한 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된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죄인의 과정을 잠시 살게 하시는 것뿐이라니까요. 그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감지가 돼야 돼요. 우리 아들들이 되었다면서요? 그런데 그 아들이 이 땅에 왜 이렇게 죄인으로 내려와서 그 죄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 하며 사느냐고요? 여러분이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그러는데, 어려워요. 세상 사는 게 다 어려워요. 쉬운 사람 하나도 없다니까요. 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요? 아니, 이 세상 것들을 내 에너지와 배경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정말 행복한 사람, 잠깐 잠깐은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계속 주구장창 행복한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힘들어요. 죄 때문에 그래요. 그걸 통과시키면서 ...그것이, 내가 하느님 흉내 내는 그 삶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이며 인생이라니까요. 그래서 아들들을 잠시 죄의 모양으로 단죄하여 내려 보내는 거예요. 경험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율법, 즉 말씀에 의해 죽고... 진리로 살아나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인 거예요. 아들이거든요. 내 이야기예요. 내 이야기.

복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사람들이 자꾸 비현실이라고 그러는데 맞아요! 내 현실은 하늘이거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런데 자꾸 교회에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달래. 아니, 내 현실이 묵시인데 무슨? 현실적인 이야기를 자꾸 해달라고 그래요? 그렇게 우리의 하느님 흉내 내기가 종료되면 우리는 이제 하늘에서 하늘적 존재로 영원히 사는 거예요. 이렇게 아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여야 하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거죠.

 

(요한복음 517-21) 17 그러나 예수깨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기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시며 자기를 하느님과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을 시켜 이보다 더 큰일도 보여 주실 것이다. 21 그것을 보면 너희는 놀랄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듯이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 진리이신. 생명을 품고 오신 예수가 말씀 하세요. 내 안에 아버지가 계셔. 그 아버지가 일을 하시는 게 내 일이야. 그게 내가 하는 일이야. 내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일이야. 나는 아버지에게 장악되어 있어. 그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을 하는 게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 아버지가 내 안에서 일을 하는데,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일을 하는데 이렇게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세요. 나는 내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고, 하라는 일만 했다. 그래요. 내 스스로 한 거 아무것도 없다, 그래요. 본인이 직접. 다 아버지가 했다, 그래요. 예수인 그 껍데기는 아무런 주도권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한다니까요. 그런데 그분이 아들이었단 말에요. 그게 아들의 삶이에요.

,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야? 맞아요? 틀려요? 이거 보세요. 자신이 없다니까. 아니, 성경에는 우리를 창세전에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신 없죠? 섬기는 데는 도가 텄어요.

그런데 그 하느님이 내 안에 아버지로 와 계시고 내가 아들이라는 걸 이야기하려면 뭔가 께름칙해. 이게 헬라의 이원론에 빠져서 그런 거라고요. 그건 불경한 게 아니에요. 하느님의 백성을 그렇게 창조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 안에 아버지 있어. 그리고 그 아버지에 의해 나는 존재야. 그 아버지가 하는 일을 내가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아버지와 나는 하나지? 그러면 내가 사는 거는? 내가 존재인 것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는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게 아들이에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존재의 메카니즘이라고요. 그게 그것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도처에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많은데 그 분을 그냥 내 밖에 어떤 타자로 저기에다가 던져 넣고 그냥 열심히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하는 거예요. 그걸 우상이라 그래요. 나와 상관없는 어떤 힘 있는 존재,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내 유익을 내 인간적인 욕심을, 에피뚜미아를 도와줄 수 있는 어떤 존재를 내가 섬기게 되면 그걸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우상 섬김이라고 그래요. 그것을. 그게 무속신앙이라니까요. 신비주의나 기복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건 이제 이야기도 하지 말자고요.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이 다 하셨으니까, 십자가, 피 이게 다 완성했으니까 우리는 그냥 거기에다가 다 맡겨놓고 우리는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죄인으로 살면 돼, 막 살어! 이거 위험한 거예요. 똑같이 십자가, 십자가 피, , 하지만 그건 내 밖의 십자가에요. 그건 내 밖의 피예요. 그게 사뭇 경건하고 거룩하고 인본주의를 탈피하는 율법주의를 탈피한 대단한 신앙인 거 같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돼요.

들음, 다음에는 앎으로 가야 돼요.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그럼 됐지 뭐. 이게 아니라. 됨의 자리로 가야 된다니까요. 그건 과정이에요. 그것이. 우리 인생 전체,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과정. 그리고 누림의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들음, . 거기서 끝나버리면 이걸 영지주의라고 그래요. 그래, 다 완성 됐다며? 이루어 졌다며? 그 십자가가 다 했다며? 그 피가 다 했다며? 그 예수가 다 했다며? 그런데 뭐? 내 밖에서 일어난 그 일.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해요. 그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야 그것이 내 십자가 내 피가 된단 말에요. 십자가와 피가 내 밖에서 나를 구원한 어떤 능력으로, 객관적인 어떤 개념이나 관념으로 존재하면 그거 자체가 우상이에요. 무시무시한, 다른 우상보다 더 무서운, 666 같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와 피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

그러니까 여러분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어 있단 말에요. 그 언약 안에서 육을 부정당하는 그 일을 반드시 지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다 내 이야기에요.  묵시록에서 그 성경을 생명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책에 내가 기록되어 있어야 생명책에 내가 기록된 거죠? , 염라대왕이 들고 있는 그런 게 생명책이 아니라니까요. 성경이 생명책이라니까요. 생명! 이란 말에요. 거기에 적혀 있는 게 내 이야기여야 내가 생명책에 錄名된 거예요.

그런데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이야기고 야곱의 이야기고 예수의 이야기이고 바오로의 이야기이면 내가 그 책에 기록 안 돼 있는 거라니까요.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에 떨어지죠. 그러니 이게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밖의 어떤 이가 준, 법이 되어서 내가 지켜야 할 거, 하지 말아야 할 거. 이렇게 보이면 이건 내 책이 아니란 말에요. 누군가 나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 던진 책이 되는 거지. 그런데 절대로 헬라의 이원론은 이걸 하나로 못 봐요. 그래서 법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돼있어요. 내 거가 안 되는 거예요. 내 거가.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에피소드로 보여주는 곳이 있어요. 성경에서.

 

(루가복음 7,11-15) 11 얼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 갔다. 12 예수께서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13 주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 하고 위로하시며 14 앞으로 다가서서 상여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젊은이여,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셨다. 15 그랬더니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다.

넘겨주었다, 그래요. 넘겨주었다. 아들을 넘겨주다, 이런 뜻이거든요. ‘디도미’. 아들이 죽었다가 사는 이야기에요. 아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의 그 이야기란 말에요. 고거를 이렇게 실물 교재를 사용하여 주님이 설명해주는 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나인 성, 나인이라는 이름은 성경에 여기 밖에 안 나와요. 지리책을 봐도 지금도 거기가 어딘지 몰라요.

그런데 성경에 그냥 나인 성이라고 이름을 이야기해버려요. 그런데 나인이라는 지명 뒤에 폴리스라는 단어가 붙어 있거든요. 폴리스는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를 이야기해요. 폴리스. 성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은 도시는 다른 단어로 씁니다. 그런데 당시에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는 예루살렘 밖에 없어요. 그래서 폴리스 그러면 산 위의 그 도시. 빛이 비추면, 등불이 비추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춰지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산 위의 동네가 폴리스에요. 팔레스틴에서 산위의 동네는, 산위의 도시는 예루살렘 밖에 없어요 다 평평한데 거기만 해발 800m란 말에요. 예루살렘이라는 거기 자체가. 그래서 구약에서도 그 산, 그러면 전부 거기에요. 예루살렘이에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그 산에서 온다고 했을 때, 성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바로 그 예루살렘. 그 산. 그래서 거기를 성전이라 그래요. 그게 폴리스거든요. 그런데 나인이라는 그 이름 뒤에 폴리스를 붙여서 지금 성경이 그 율법의 핵심이며 중심인 예루살렘을 지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인이라는 이름을 또 붙여요.

이 나인이라는 이름은 헬라어에는 이렇게 쓰이지만 히브리어에서 온 단어인데 나아라는 데서 온 단어에요. 나아는 목초지. 초장, 풀밭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이 단어는 성경에서 이 율법주의의 예루살렘 있죠? 거기를 하느님이 예언서에서 이 나아라는 단어를 어떻게 쓰느냐 하면 그 초지, 나아’, 이거는 이미 황폐해져서 먹을 것도 없는 그러한 메마른 초지. ‘나아. 이렇게 선언을 해버리고 예언서에는 그러나 내가 그 초지, 나아를 회복시킬 거야. 라고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써요. 이 단어를. ‘나아. 시편 23편에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할 때 그 草場나아 예요그러니까 나인 성’, ‘나인 폴리스라는 건 예루살렘, 이제 회복될 필요가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거예요

거기에 과부! 케라라는 단어가 반드시 남편이 필요한 그 남편이 없으면 반쪽에 불과하여 불완전한 존재, 라는 의미예요. 단순히 남편이 없는 존재란 뜻이 아니라.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 남편 못 만나면 그 황폐한 풀밭에서 그냥 굶어 죽는 그런 과부, 고아, 그런 신세라는 걸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나인 성의 과부라는 그 단어 자체가. 그런 배경을 설치해 놓는데 아들이 죽네요. 여러분. 이 이야기는요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이야기예요.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뭐예요? 로마의 백부장은 로마인이에요. 로마의 군인은 히브리사람도 할 수 있었어요. 로마 시민권만 있으면. 그러나 간부들은요, 백부장, 천부장 이거는 로마인 아니면 안 돼요. 그러니까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유대주의 밖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유대주의 밖의 어떤 이가 자기 하인이 아프다고 예수님께 찾아와요.

그런데 그 파이스라는 단어는 사실 아들이라는 단어로 쓰는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아들이에요. 백부장의 아들. 그러니까 백부장의 아들도 아니고 그 이방인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치유되는가, 구원을 받는가의 이야기가 백부장의 이야기예요.

그래서 백부장의 이야기에 백부장이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예수님에게? 그래, 내가 가서 고쳐줄게 그랬더니 주여! ‘레오레고’, 말씀만 하세요. 레고 로고스’,말씀만 주세요. 그래요. 그러면 내가 치유가 됩니다. 백부장이. 아니에요. 주님 그런 거 말고요, 말씀을 주세요. 그러면 아들이 낫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이스라엘 안에서는 이런 믿음을 못 봤다, 그래요.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한다니까요. 율법주의 전체를. 유대주의, 율법주의 이스라엘아! 이게 믿음이야. 너희들 안에는 이 믿음이 없어. 너희들이 열심히 율법 지키고 행위를 내놓아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아들은 이렇게 말씀을 주세요. 하여 그 말씀으로 살아나는 게 아들이야, 라고 율법주의, 유대주의 이스라엘 전체를 부정해 버리세요. 믿음 없는 자들로. 그리고 그 율법주의 밖에 있는 어떤 이방인이 말씀을 받자, 아들로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로마의 백부장이에요.

요 이야기는 바로 그 밑에 나인 성 과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그 아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서 또 아들의 이야기로 나와요. ?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메카니즘에 의해 온전하게 치유가 되었는지를 이제 또 실물 교재로 또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유대주의 밖에 있는 그가 말씀으로 진리로, 아들로 살아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나인 성 과부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라니까요.

 

그 이야기는요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 데칼코마니에요. 딱 찍으면 똑같은 이야기. 그런데 열왕기상 17장의 그 이야기가 일단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고기와 떡을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던 거거든요. 그거. 그거 막고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했을 때, 루가복음에서는 저 까마귀를 봐라, 그렇게 나오잖아요? 까마귀라는 단어 자체가 덮다, 장막을 치다, 이런 단어라고 했으니까 옛 성전이란 말이에요. 옛 성전이 물어다 주는, 광야로 물어다 주는 그 떡과 고기는 절대 그들을 살려낼 수 없다, 그게 율법이거든요.

그래서 그릿 시냇가에서 먹는 거예요. 먹고, 그릿이 뭐라 그랬어요? 카라트라고 했어요. 인간이 선악구조의 두 마음으로 하느님께 뭔가 드리려고 할 때 항상 둘로 나누어서 제사와 율법으로 드린단 말에요. 고걸 바탈이라 그랬어요. 그럼 하느님이 그 반대쪽으로 넘어가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경계가 생겨요. 그게 카라트에요. 거기서 나온 단어가 케리투투, 이혼증서란 말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여러분이 법으로 보고 하느님께 이걸 자꾸 지키고 행위로 내놓아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 라고 하면 하느님이 넘어가서 케리투투 해버리세요. 그러면 성경이 여러분에게 이혼증서가 되는 거예요. 하느님과의 이혼증서.

그래서 엘리야가 까마귀로부터 떡과 고기를 받아먹고 그릿 시내가 홀랑 말라버릴 때, 그 카랏트, 그릿 시내를 넘어가버려요. 경계를 확실히 그어버리는 거예요. 유대, 이스라엘, 너희는 까마귀가 주는 떡과 고기를 먹는, 진짜 기근 속에 있는 자들이야. 그런데 그 밖에 풍년이 있단다. 그게 기근의 이야기에 붙어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는 카랏트그릿을 넘어가죠? 사르밧, 이방이에요.

이방에 갔더니 거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알며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요. 내가 가진 건 이 밀가루 한 줌밖에 없는 그런 쓰레기 같은 존재인 것을 아는, 남편이 필요한 어떤 과부가 있네. 그런데 그 과부에게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까지 홀랑 뺏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이라는 거라니까요. 그랬더니 비로소 그 집에 풍년이 와요. 기름이, 진리의 말씀이 떨어지지 않고 양식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러면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그걸 설명해주는 게 그 과부의 아들이 죽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다고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한 말에요. 역시 이것도.

백부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너희 안에는 이런 믿음 없어 라고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카라트, 그릿 시내를 홀랑 넘어가서 나인 성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과부를 만나는 거죠. 남편이 필요한 과부. 그런데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네요?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쓴 단어가 그 죽음이라는 단어가 완료 능동태에요. 스스로 죽었다라는 뜻이에요. 그 말은 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뜻이 아니라 누가 내 몫을 뺏는 게 아니라 나는 스스로 버릴 권세가 있는 자야, 라고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스스로 죽은 과부의 아들이 있어요. 남편이 필요한 아들. 우리 얘기 하는 거예요. 우리 얘기. 그 아들이 죽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과부의 獨子그게 모노게네스예요. 독생자. 외아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獨生子를 주셨으니, 에서 쓰신 그 독생자 랑 똑같은 단어라니까요. 그 아들이 독생자래요. 모노게네스, 하나만 가진 자. 하느님의 진리를 하나로 가진 자. 모노게네스그 아들이 죽어요. 그 아들이 누구예요? 예수이면서 나라니까요.

예수께서 그 아들에게 손을 댔다. 뭐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나요? 한글성경에? 거기에 쓰인 단어가 아푸토마이인데 그거는 아교로 딱 붙이다. 이렇게 같은 면을 아교로 딱 붙여버렸을 때, 요렇게 하나가 되죠? 요즘도 그 어떤 강력한 본드보다 강한 접착제가 아교예요. 민어 부레로 만든 거. 그래서 진짜 단단하게 붙이려면 아교로 붙인다고요. 그 단어에요.아푸토마이예수가 그 소년에게 붙어 버렸다. 그래요. 연합, 연합이요, 연합. 예수의 죽음으로 죽고 예수의 부활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관에다가 손을 얹었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소로쓰라는 단어는 사실 침상이라는 단어에요.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관이라는 걸 잘 안 썼어요. 아주 왕이나 귀족들, 특별한 사람들 아니면 세마포로 이렇게 싸고 뭐 향유 같은 거 넣고 이런 거 아니었으면율법 상 그들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되고 죽음을 봐도 안 돼요. 그래서 누가 죽으면 그가 죽은 침상을 그대로 들어서 무덤으로 가지고 갔어요. 그 침상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죽어 있는 아들과 예수님이 아푸토마이’, 붙어 버린 거예요.

열왕기 상에서는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에게 그대로 포개지지요? 요렇게 세 번. 그랬더니 아들이 살아나는 거거든요. 아들과 하느님, 엘리야가 (하느님의 이름이에요. ) 하느님이 아들과 하나가 되자 살아나는 거예요. 죽은 자가. 그렇게 밖에 살 수가 없다니까요. 우리는. 죽은 자들은. 그러면 그의 육이 부정되는 거기 때문에 그가 죽고 사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말을 하더라,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거기에다가 그렇게 적어 놨을까요? 죽었다가 살아나서 말 한 게 뭐 그렇게 대단해요? 먹었더라, 울었더라, 감격했더라도 아니고 말을 했다. 로고스. 말이 없고, 말을 할 수 없고 말을 들을 수 없는 게 죽은 거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분이 그와 하나가 되자 죽은 자가 살더니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백부장의 이야기에서는 한말씀만 하옵소서. 나에게 말을 하면 내가 낫겠나이다. 했더니 예수님이 말씀을 던졌네요. 살아났어요. 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받아 살아났더니 내 안에 말이 있네?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 그 말을 가진 자를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독생자에요. 모노게네스.

 

열왕기 상의 그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한번 보세요.

(1열왕17: 23-24) 23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 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부인의 아들이 살아났읍니다.' 24 그러자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어른께서는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십니다. 어른께서 전하신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 알았읍니다.'

진리라는 단어에요. 이게 진실이란 말이. 당신의 입에 있는 게 진리네요. 아니, 아들을 줬으면 아들아! 뭐 이렇게 하던지, 우리 아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이래야 되는데 갑자기 그런 말은 다 잊어버리고 당신의 입에 있는 그 말이 진리네요? 그 진리가 살렸다는 뜻이에요. 그 진리로 살아나는 거네요. 과부가 아들로 살아나는 거예요. 진리를 받아. 그 이야기가 나인 성 과부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관이라는 게 사실 물질에 국한되어 있어요. 우리의 사전은 오감으로 감지가 되지 않는 걸 존재라고 하지 않아요. 하다못해 냄새라도 있어야 돼요. 그래야 존재라고 하죠? 미루어 추측하여.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물질이 그 안에 비물질의 세계의 것인 그 비물질의 진리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 물질이 죽었다, 그래요. 죽은 것은 존재가 아니에요. 성경은 그걸 존재라고 하지 않아요.

성경이 숨 쉬고 생각하고 움직인다고 살았다고 이야기 안 한다니까요. 살아있는 건, 살아있음이라는 건 그 안에 하느님의 것, 비물질의 세계의 그것이 들어있을 때, 그게 살았다, 라고 그래요. 그럼 그게 빠지면 죽었다, 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죽은 것들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거는 가치 있다? 없다? 무가치 한 거예요.

 

(갈라디아218-20) 18 만일 내가 전에 헐어 바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나는 스스로 법을 어긴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믿음이 진짜라는 것이에요.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가 진짜 생명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육체를 얼마만큼 개발하고 성숙시키느냐 이런 거는 구원과 유기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는 거예요. 나쁘다는 거 아니에요 하세요. 이왕이면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세요. 그러나 그거는 그리스도교인의 목적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루가복음 1524)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맏아들은 밖에 있다가 돌아와서, 하느님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야 되고 잃었다가 얻어야 돼요. 예수님이 그렇게 얘기했더니 유대인들이 뭐라 그랬어요? 내가 아버지를 떠나 본 적이 없었거늘 내가 언제 종이 됐었냐? 내가 뭐 어디서 풀려나야 된다는 거냐? 나는 아버지를 떠나 본 적이 없어~. 맏아들이죠? 이거요?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거 다 했습니다. 내가 언제 아버지를 떠난 적이 있습니까? 난 한 번도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어요. 이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를 칭찬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 하고 세상에 나가서 돼지들과 돼지우리 안에서 돼지 쥐엄 열매 싸움을 하던 저놈을 기뻐하세요? 왜 장자의 상징인 그 반지를 저놈한테 끼워주세요? 아니,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아버지 이거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아니 우리가 한 일로 평가를 해달라니까요. 내가 아버지께 뭘 잘못했냐고요?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그러면 그 일로 나를 평가해주세요. 자기가 행한 일로 아버지를 야단친다고요. 아니, 그건 공평한 처사가 아니잖아요? 은혜 같은 거 이딴 개뼈다귀 같은 소리 하지 말고 한 일 대로 상을 주세요! 시퍼렇게 산거죠? 안 죽은 거예요. 그 아들은.

탕자는? 나가 보니까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돼지 우리라는 걸 알았어요.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던 짐승이에요. 그리고 자리를 봤더니 돼지들하고 쥐엄 열매, 돼지 먹이 갖고 싸우고 있네? 내가 돼지구나! 를 알았어요. 그럼 이건 먹을 거 아니고 진짜 먹을 거는 어디 있지? , 아버지 집에. 그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풍성하게 먹던데. 그리고 머리 긁적이면서 뭐, 착한 일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하게 뭐 업적을 쌓고 온 것도 아니에요. 그냥 머리 긁적이면서 신발 질질 끌고 돌아온 거예요. 아버지, 여기 밖에 비빌 데가 없어요. 나를 살려줄 양식을 줄 곳은 여기밖에 없네요.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그래 네가 그렇게 죽었다가 살았구나? 네가 그렇게 잃었다가 찾아진 아들이구나. 그걸 회개라고 그래. 그러잖아요? 그죠?

그래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여기에 이게 붙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걸 다 싸잡아서 비유, 파라볼레, 단수로 쓴다고요. 그러니까 요 세 가지, 네 가지 비유는 다 한 비유라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게 다 회개의 이야기였잖아요. 이게 회개야.

그 죄를 통하여 의와 선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걸 회개라 그래요. 죄를 달리 보게 하는 거. 그게 메타노이아란 말에요. 그러니까 반드시 여러분이 돼지라는 걸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이 돼지우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는 게 그렇게 쉽냐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하느님 앞에서 다나토스의 죽음을 죽으며 피조물의 자리로 잘 내려가면 되는 겁니다.

외롭고 힘들고 때로는 이 세상이 주는 어떤 위로나 위안이나 응원이나 이런 걸 안 주기 때문에 우울하고 힘들고 어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데 그 세상의 평화에 갈급해 있다고요.

그리고 그것만 배워왔기 때문에 그거와 다른 평안을 에이레네를 하느님이 주는데 그게 때로는 외로움으로 감지가 되고 우울함으로 감지가 되고 힘듦으로 감지가 되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라니까요. 세상도 줄 수 있는 평화로 그게 감지가 되면 뭔가 잘 못된 겁니다.

 

(로마서 66-11)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라.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이 두 마음으로 자꾸 하느님을 섬기려고 그래서 자꾸 뭘 섬겨드리고 뭘 해드리려고 나를, 이 목숨 바치오니 이리로 간다니까요. 그런데 하느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래요. 영의 새로운 것은 진리의 말씀이죠. 진리의 성령. 그걸 흘려주는 게 진짜 섬김이죠 그게 하느님 마음을 알아드리는 거라 하느님 섬기는 거고. 그게 내 이웃에게 흘려지면 그들이 그것으로 살아나니까 진짜 사랑이네 그게? 진짜 섬김이네!

그게? 이 세상에서 같이 촛불 들고 나와서 데모 좀 해줘가지고 밥 몇 숟가락 더 먹게 해주고, 봉급 좀 올려 받게 해주고 공평하게 임대주택 얻게 해주고 해봐야 진리 전해주지 않으면 죽으면 지옥인데 그게 무슨 섬김이냐고요? 시간 많으면 하세요. 그거 나쁜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거 전에 먼저 할 거 하고 하라니까요. 진짜 섬기는 거.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거.

진리 없이 육체가 쏟아낼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을 아무리 많이 쏟아낸다 할지라도 그거 다 배설물이라고 했어요 사도 바오로가. 그 단어는 똥이라는 단어에요. 영양가가 아무것도 없는. 물 위에서 둥둥 뜰 수밖에 없는 헛 거. 하느님이 그걸 그렇게 인정 안 해준다는 거예요. 진리가 없이 하는 모든 일은. 진리만이 생명인 거예요. 그 진리로 가는 길이 예수인 거고 그 길을 가야 진리를 만나고 생명을 얻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야. 내가 생명이야.’ 그 말은 내가 방법이고 내가 과정이며 내가 내용이고 내가 완료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이 하시는 거예요. 하느님이 내가 알파요, 오메가라, 알파는 헬라어의 첫 단어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단어에요. 내가 시작하고 끝낸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나인 성 과부 아들의 이야기 다음에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제자들 보내서 오실 그이가 진짜 당신 맞습니까? 이렇게 물어요.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예수님이 그 다른 이를 담고 오셨는데 그 다른 이라는 내용을 세례요한이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을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의 마지막 완료자, 완성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약의 마지막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 율법과 예언서,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는 말라기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그런다니까요. 얘가 구약의 마지막이야. 그래요. ? 세례요한이 구약의 그 마지막 인물로 대표로, 모형으로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목 잘려 죽는 거라니까요. 그리고 뭐로 완성 돼요? 사랑의 사도 요한으로 완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이 4복음서가 세례요한에서 시작되어 요한복음으로 끝나는 거고, 신약성경은 세례요한에서 시작되어 요한묵시록으로 끝나는 거예요. 요한이 죽고 다른 요한, 다른 이가 완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도요한이 누구랑 같이 불림을 받아요? 성경은 항상 짝으로 불림을 받죠? Duo, 야고보와 요한. 형제잖아요. 보세요. 그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세례요한과 다른 요한의 이야기를 또 담고 있어요. 사도 중에 제일 먼저 목 잘려 죽은 사람 누구? 야고보에요. ? 그리고 요한이 완성하는 거라니까요.

야고보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야곱, 실족시키는 자. 비진리, 강도 이런 뜻이에요. 그가 요한, 요하네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죠? 그 단어에요. 야훼의 은혜라는 뜻이에요. 요하네스가. 강도에 불과한 실족시키는 자. 비진리가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요하네스, 완성이 되는데 그 가운데에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도 그러는 거예요. 이 사람이 예수님 사촌이에요. 같이 자랐다니까. 육 개월 차이밖에 안 나요. 그런데 하느님이 찾아오셔서 물세례 계속 줘라. 그러면 그 중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는 사람이 하나 있을 거야. 그가 메시아야. 그래서 계속 물세례를 줬어요. 그랬더니 사촌이 오는데 아니 그 위에 진짜 성령이 임하네? 너 였냐? 이렇게 된 거죠? 아니 그런데,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을 거라고요. 자 치기도 같이 하고 놀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자기가 감옥에 가 있는데 메시아라고 온 인간이 안 구해주는 거예요. 이게 율법이라니까요.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거.

그러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 그 모형인 껍데기만 본 거예요. 구원을 못 받았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세계요한이.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요. 그리고 마지막이 요한묵시록이니까 성경 전체는 요한에서 요한으로 끝나네. , 야훼의 은혜에서 시작하여 야훼의 은혜로 끝나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백부장의 이야기로 이스라엘이 묵사발 되고 나인 성 과부이 이야기로 하느님의 은혜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원의 이야기가 설명되고 그 다음에 요한의 이야기가 또 붙어 있는 거예요. 면도칼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하느님은 진리의 네러티브를 이렇게 이어가신단 말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죽어야 사랑으로 완성되는 진리의 사도 요한으로 살게 되는 거. 이걸 설명해주기 위해 오실 그이, 다른 이, 오실 그이에서 어떻게 다른 이가 되니? 네가 아들이 되어 목 잘려 죽으면 그걸 다른 이로 보게 되는 거야. 이걸 요한이 삶으로 설명해주고 간 거예요. 넌 아직도 물질세계에 갇혀 있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수준으로 대답해주죠? 제자들에게. 가서 얘기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 거기서 푸토코스를 써요. 가난한 자가. 푸토코스가 절대적 가난, 진리의 결핍을 아는 이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줘. 그렇게 되면 앉은뱅이가 일어나. 소경이 눈을 뜬다. 귀머거리가 듣게 돼. 그리고 문둥이가 깨끗하게 된다. 가서 얘기 해. 이거 예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그대로 얘기 해줬어요.

그러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 예수 믿으면 병이 낫는 거구나. 이렇게 받아들이겠죠? 예수님은 그 안에 진리를 담아 주신 거예요. 아들이 죽고, 아들 안에서 죽고. 아들 안에서 산 자들은 그의 결핍이 그 과부의 한 부분이 진리로 채워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가난한 자의 결핍이 채워지는 거고 그 때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귀가 열리고 그들이 말을 하게 되고 그게 바로 부정한 자가 정하게 되는 거야. 이 이야기를 해준 거란 말에요. 주님이.

 

그럼 한 번 보자고요. 앉은뱅이, 다리가 없어요. 듣지 못해요, 보지 못해요. 말을 못해요. 요런 짐승이 하나 있는데 뱀입니다. 뱀은 성대가 없어요. 성대가 없어서 소리를 못 내는데 혀만 있네. 소리가 없는 자가 혀만 갖고 있으면 뭐예요? 그 혀가 글로싸? 불의 혀처럼 성령이 임한다 했을 때 그 혀를 성경이 방언이라고 번역했어요. ‘글로싸말이 없는데, 내 안에 가진 진리가 없는데 혀만 날름거리는 게 뭐예요? 방언이에요. 내용도 모르는 엉뚱한 말만 뇌까리는 거. 뱀의 혀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말이 없다니까요. 성대가 없어요. 소리를 못 내요. ? 내 안에 진리가 없거든. 뱀은 눈으로 입체적인 시각 이걸 확보할 수가 없어요. 입체적인 시각이 없어서 형체를 분간하는 게 아니라 열과 냉한 것만 분별해요. , 고막. 아무것도 없어요. 진동만 감지해요. 다리가 없어서 서지도 못하네.

그러면 원래 진리를 알지 못한 우리가 그 뱀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뱀 돼서 죽을 게 그래야 너희들이 평안의 복음을 전할 그 발이 생기고, 아름답도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발이여! 그 발이 생기고. 너희들의 귀가 열리며 너희들의 눈이 뜨여지고 너희들이 말을 하게 될 거라는 거예요. 그게 부정한 뱀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뱀, 옛 뱀 이거 딴데 가서 찾을 게 아니라, 하느님 내가 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죽음으로제가 이렇게 그 진리를 말하고 그 진리를 보고 듣는 자가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이리로 가야죠. 그게 나의 죽음이잖아요. 내 육의 죽음. 그거 하라는 거예요. 이게 뭐가 어렵냐고요.

아니, 하느님이 하늘의 비밀을 감추어 놨다고 그래요. 감추어 놨다 그러고 그거를 가르쳐 주려고 너희들에게 성경을 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으니까 내가 가르치는 자를 함께 보내줄게 라고 까지 말씀하셨어요. 그럼 그거는 어떤 이가 열심히 하느님과 씨름하며, 말씀과 씨름하며 잘 배워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쉽게만, 날로 먹으려고 해요? ㅎㅎㅎ

 

성경은 절대 문자로 보면 안 돼요. 그냥 여러분이 국어책 읽는 수준으로 그리고 도덕책 읽는 수준으로 그렇게 봐버리면 성경은 그냥 도덕 윤리 책이 되어버린다니까요. 그럼 그건 여러분의 영생에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게 돼요. 언어나 문자, 소리는요, 말은 항상 인간중심으로 변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아주 급속도로 빨리.

그래서 우리가 쓰는 언어를 50년 전의 어른들에게 가서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할아버지들, 손자들하고 얘기하면 저게 무슨 얘긴가? 그래요. 그 정도로 변한다니까요. 지금 우리가 소리로 갖고 있는 하늘 천, 이거는 얼마 전까지 하늘 텬이었어요. 그런데 텬은 발음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발음하기 쉬운 천으로 자기들이 바꿨거든요. 그런데 텬이라고 읽었던 시대에 진리가 기록되었다고 생각해보자고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천이라는 글자를 갖고 그 시대로 가요.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천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이 천이 뭐야?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렇게 변화되어진 이 이라는 이 수준, 이 영역으로 그 성경을 보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 텬이라고 쓰였을 때의 그때 당시로 올라가서 배경과 문화와 그리고 그걸 쓴 이의 뭐 환경이나 인품 성격, 심지어 이런 것 까지도 다 고려를 하여 이게 이런 의미 겠거니 하고 공부를 해야 되는 거예요.

성경은 절대 소리로 읽으면 안 돼요. 내용으로 읽으셔야 돼요. 아니, 아예 띄어쓰기가 없었다니까요. 모음도 없었고. 그걸 어떻게 읽으라고 주느냐고요. 소리를 내는 순간 너희는 이것을 왜곡시킨다고 하느님이 그렇게 준 거예요. 성경을. 그러니까 내용으로 하나하나 보라는 거예요.

 

(시편 192-4)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셨다.

진리는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는 거예요. 그러나 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내용을 아셔야 돼요. 성경 많이 아는 거? , 열심히 하셔서 많이 아세요. 그러나 그것들은 다 진리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 전부, 나 아무것도 아님.그 해박한 지식, 레위기 몇 장에 무슨 얘기가 있고, 그건 성전에서 무슨 얘기이고 이런 거 하나도 몰라도 돼요.

예수, 성경, 호 코스모스의 세상, 내 육신 전부 뭐예요? 거기로 건너가기 위한 배라니까요. 그런데 육지에 건너왔는데 그 배를 왜 짊어지고 다녀요? 거기에 건너간 사람은 필요 없어요.

아유, 나이가 들으니까 치매가 걸려서 옛날 성경을 자꾸 잊어버려. 괜찮아요.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잊어버려야 되는 거예요. 버리세요. 자꾸. 그러나 그걸 통하여 내 마음에 심겨준, 하느님이 내 마음에 심어준 그것만 갖고 있으면 된다니까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 금강경하고 반야 신경이거든요. 금강경 읽어보며는 진리, 진리, 진리, 진리, 전부 진리에요.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아셔야 됩니다. 진리가 되어야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금강경이 그 얘기에요. 그런데 내용이 없어요. 그 진리가 어떻게 되는 거며, , 무슨 얘기에요? 그런데 끝까지, 그러고는 반야 심경에서 건너가라, 건너가라 그 너머에 진리가 있다, 그러고는 끝내네?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그거를 전파 복음이라 그래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짊어지셨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뭐 어떻게? 금강경하고 반야 심경하고 그게 뭐가 달라요? 아니 그 내용을 설명해줘야지요. 그래서 그 내용을 다른 예화도 아니고 성경에서 일부러 하나하나 골라다가 다 이렇게 설명해주는데 그게 왜 어려워요? 아니, 게 그거 였어? 이렇게 감동적이어야지. 성경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다들. 아니에요. 여러분 그게 생명입니다.

물질은 영의 세계에서 아무소용이 없어요. 여러분이 나중에 새로운 육신을 부여 받아 하느님 나라에 가게 되지만 그렇게 진리를 품은 그러나 완성된 그 육신은 영이에요. 물질이 아니라니까요. 그 세계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담지 못한 물질의 허황됨을 잘 배워서 아들로 죽고 다른 아들로 사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이 살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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