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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령의 날]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마태 5,1-12ㄴ)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2 조회수1,482 추천수0 반대(0) 신고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목도하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 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월 2일 위령의 날  복음 (마태5,1-12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은 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는 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즉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인 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 (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즉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 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는 '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는 '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와 '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는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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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해설중에서>

 

(마태복음5,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라는 말이 나오죠이거 마태오가 일부러 끼어 넣은 거예요그럼 입을 열어 가르치지코를 열어 가르칩니까그런데 왜 굳이 이 단어를 썼을까요구약에서 하느님의 법이 떨어질 때마다 하느님의 입이라는 단어가 종종 나오죠

여기서 마태오가 지금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선언하는 거예요구약에서는 그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죄인들이 죽었어요벌벌 떨었다니까요그런데 여기서 하느님의 법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데 제자들이 턱을 괴고 이렇게 듣고 있는 거예요재미나게이게 신약인 거예요. 어린양의 피 때문에그게 중점이라니까요산상수훈의 핵심은 어린양의 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그런 행동강령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지금 그 자체가 뭔가 해결되어 있는 모습이잖아요하느님이 입을 열어 뭔가 말씀을 하시고.. 하늘의 도를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아무런 제지나 방해 없이 그것을 듣고 있어요즐겁게

그게 지금 뭔가 해결된 게 아니에요그게 어린양의 피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완료가 된 하느님 나라의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그건 너희들의 행위가 아니라는 거예요그래서 마지막에 기초로 끝나는 거라고 그랬어요. 7장 마지막이 모래위에 세운 집반석 위에 세운 집그렇게 기초와 근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설명을 하고 구약의 율법을 부수며 새 계약의 성취를 확고하게 세우는 그런 내용이란 말입니다.

산상수훈의 맨 앞부분과 맨 뒷부분을 샌드위치 빵처럼 감싸고 있는 단어 하느님 나라바로 그 앞에서는 하늘 나라 복음을 전했는데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가고 그랬다라고 하늘 나라가 나오는데그 하늘 나라가 오해되니까 하느님이 하늘 나라를 다시 설명해 주는 거예요그래서 시작이 하늘 나라고 마지막이 하늘 나라에요.

 

(마태 5: 3) 3 행복하여라마음이 가난한 사람들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7:21)21나에게 주님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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