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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루카4,15-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3 조회수1,38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3일 화요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루카4,15-24)

 

1독서<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필리 2,5-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죽음에 이르기까지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22(21),26-27.28-30.31-32(◎ 26ㄱ 참조)

◎ 주님저는 큰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앞에서 나의 서원 채우리라가난한 이들은 배불리 먹고주님 찾는 이들은 그분을 찬양하리라너희 마음 길이 살리라

○ 온 세상 땅끝마다 생각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고만 민족 모든 가문 그분 앞에 경배하리니주님께 왕권이 있음이로다민족들의 지배자이심이로다세상 모든 권세가들 그분께만 경배하리라

○ 후손은 그분을 섬기리라다가올 세대에게 주님 이야기 전해져태어날 백성에게 그 의로움 알리리라주님이 이렇게 하셨음이로다

 

복음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4,15-24)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필리2,5~11)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7~8)

 

필리피서 2장 7절은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즉 케노시스(kenosis)을 말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케노시스'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본체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계시나  육화(강생)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그는 육화하심으로써 전지, 전능, 편재성 같은 속성들을 일시적으로 제한하셨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필리피서 2장 6절의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에서 '같음을' 로 번역된 '이사'(isa)의 원형 '이소스'(isos) 대등의 상태 또는 양식을 말하고, '당연한 것으로'(취할 것으로)에서 '당연한 것'(취할 것)으로 번역된 '하르파그몬'(harpagmon; to be grasped)이란 단어는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계속 불잡고 놓지 않으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느님과 동등함(같음)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그의 지위를  계속 고수할 생각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그 영광스런 존재의 상태를 고수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오직 인간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에서 '자신을'로 번역된 '헤아우톤'(heauto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헤아우톤'(heauton)은 '그리스도께서 갖고 있는 영광', 혹은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권위의 행사', '신성', '하느님과의 동등함'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비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지니신 신성이나 본질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우다'라는 표현은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우시어'로 번역된 '에케노센'(ekenosen)의 원형 '케노오'(kenoo) '비우다', '공허하게 만들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잠시 뒤로 한 채, 종의 모습을 취하셨음을 말한다.

 

본절은 3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을 비우셨다',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가 그것이다. 

이중에서 '자신을 비우셨다'만 주문장이고, 나머지 둘은 원어상 분사로 되어 모두 '자신을 비우셨다'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한편,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여기서 '종' 즉 '둘로스'(dullos; servant)는 하느님의 모든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의미한다(이사52,13~53,12). 

그는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다 전하셨고 (요한17,8), 하느님의 을 온전히 다 행하셨으며(요한4,11) 그렇게 함으로써 성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요한17,4).

또한 그는 종으로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루카2,7), 공생활에도 머리 둘 곳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으며(루카9,58), 돌아가신 후에는 무덤까지도 빌리셨다(마태27,57~60).

 

여기에서 '모습'으로 번역된 단어 '모르페'(morphe)는 6절에서도 같이 '모습'(본체)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예수님이 단지 종의 외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이 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원문은 '엔 호모이오마티 안드로폰 게노메노스'(en homoiomati anthropon genomenos)인데, 직역하면 '사람들의 모양 안에서 만들어진'(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이다.

여기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의 원형 '호모이오마'(homoioma) 명사이며, '모양'(likeness)이라는 의미로서(로마8,3 ;묵시9,7)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된 '호모이오시스'(homoiosis)와 같은 어근을 가진다.

즉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듯이(창세1,26),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자기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대로 취함으로써, 인성을 지닌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성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인성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 희노애락의 감정, 오감 등을 지닌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죄는 없으셨던 것이다(히브4,15).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원문은 '카이 스케마티 휴레테이스 호스 안트로포스'(kai schemati hyuretheis hos anthropos)인데, 원문에는 7절에 포함된 구절로서 '외적 모습에 있어서 사람으로 발견되신'(being found in appearance as a man)이란 뜻이다. 

여기에서 '모양'으로 번역된 '스케마티'(schemati) 원형 '스케마'(schema)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형태나 구조'를 의미한다.

 

이 '스케마'(schema)는 '모르페'(morphe; 6절) 와 연결되는 중요한 단어로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전혀 다름이 없는 진정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그는 여자의 몸을 통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고(루카2,7), 주리고 목마르고 피곤함을 경험하셨다(마태4,2; 요한4,6.7; 마르4.28).

슬퍼하며 울기도 하시고(마르3,5; 요한11,35), 육신의 몸이 지니는 최종적 한계인 죽음도 경험하셨다. 

이런 그의 전체적인 모습은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르페'(morphe)가 아닌, 인간의 '스케마'(schema)로 나타나셨다고 표현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 되셨지만, 그 본체(모르페; morphe)에 있어서는 여전히 완전한 신성을 지니고 계셨고, 그 모양(스케마; schema)에 있어서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여전히 신적 모르페'(morphe)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하는 사랑, 거룩, 진실, 의로움 등에 완전하시다는 것을 말하고, 인간의 '스케마'(schema)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가 편재, 전지, 전능, 영광 등의 신적 권위를 능동적으로 제한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는 인간처럼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끼는 존재 양식을 가진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말한다.

 

그는 신적 '모르페'(morphe)를 유지하고 계신 분으로서, 인간이지만 죄가 전혀 없는 인간, 인간처럼 시험을 당하셨지만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이었던 것이다(히브4,15; 2코린5,21).

 

한편 '나타나'로 번역된 '휴레테이스'(hyuretheis)의 원형 '휴리스코'(hyurisko)는 '(찾아서)발견하다', '만나다'(마태13,14; 루카4,17; 요한12,14; 사도17,23)라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여 그리스도께서 그 외양에 있어서는 인간과 전혀 다름없이 사람들에게 보여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 순종하셨습니다' (8)

 

'낮추시어'로 번역된 '에타페이노센'(etapeinosen)의 원형 '타페이노오'(tapeinoo)는 '낮추다', '내리누르다', '겸손하다'라는 뜻이다. 

원문으로 볼 때, 본문의 주동사는 '에타페이노센'(etapeinosen; 낮추시어)이다.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몸이 아닌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그가 평생 하느님의 뜻 아래서만 사셨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분사형으로 사용된 '나타나셨다' 와 '순종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바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쫓아 당신 몸을 십자가에 희생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자 하셨던 것이다(히브10,7). 

또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마르10,4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느님께 대한 궁극적인 순종의 행위였던 것이다.

 

한편, '죽음에 이르기'로 번역된 '타나투'(thanatu) 원형 '타나토스'(thanatos)는 '죽음', '생명의 멸절'을 말한다. 

이 죽음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종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 자기 희생으로 특징지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루카9,23).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여 로마에서 널리 시행된 '십자가형'은 당시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사형 방법이었고, 유대 사회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신명21,22~23; 1코린1,23; 갈라3,13; 히브12,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버림받아 죽기까지(마태27,46), 즉 저주받아 죽기까지(갈라3,13) 자신을 낮추신 것은 버려진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하고, 인간이 받을 저주를 대신 받음으로써,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 (루카14,15-24)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5)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차게 하여라.'  (23)

 

루카 복음 14장 15-24절에는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은 사람의 자격에 대한 교훈이 주어진다.

이러한 교훈이 주어지게 된 계기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있다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된 사람은 행복합니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 하느님의 나라에서 먹게 될 사람의 행복을 찬양한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당시의 유대주의적 관념을 자신의 말 속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주의적 선민 의식 가운데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메시야가 출현하여 유대인 중심으로 건설된 왕국으로 이해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하여 그 나라에서 영광과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지금 이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희망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가서 그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자신감 속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한 이 유대인의 왜곡된 가치관을 무너뜨리시며,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신다.

 

루카 복음 14장 15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확신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유대인은 하느님 나라의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 영광의 자리가 채워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큰 길과 울타리 쪽으로'

 

여기서 '길'에 해당하는 '호두스'(hodus; highways; roads)는 성 안에 있는 골목이나 거리라기보다는 성밖에 멀리 뻗어 있는 도로를 가리키며, '울타리'에 해당하는 '프라그무스'(phragmus; hedges; country lanes)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루카 복음 14장 21절의 '고을의 한 길과 골목'에서 '성밖'으로 그 주인의 초청 범위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들에게서 온 이방인에게로 확대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1절의 '한길과 골목'이 유대 지역을 가리킨다면, 23절의 '큰 길과

울타리'는 온 이방인들의 땅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루카 복음 14장 21절과 마찬가지로 '나가'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go out)라는 명령이 주어지며, 이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여'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 중에 두번째 명령에서는 '강제하다'는 뜻의 '아낭카조'(anangkazo; compel them) 동사가 사용되었고, 여기에 '들어오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의 부정사인 '에이셀테인'(eeiselthein; to come in)이 추가되었다.

둘다 '강제로 권하여 데려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아낭카조'(anangkazo) 동사는 강제성의 정도가 더욱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다.

여기서 쓰인 '아낭카조' 동사는 폭력을 동원한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나 간청을 통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필연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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