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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글방/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4 조회수1,300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인간은 70%가 물이에요. 날 물로 보지 마! 그렇지만 물이에요. 70%가 물이면 물이지 뭐. 뭘 물로 보지 마? 물인데. 식물도 70% 이상의 물을 구성요소로 갖고 있고요.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지구에도 70%가 물이네요?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장육부처럼 오대양 육대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우주나 사람의 세포나 인간의 육체나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나 모두 그 같은 과정을 가고 있고요 생성이나 멸망의 그 과정이 전부 똑같아요. 심지어 구조까지도 똑같고 돌아가는 원리도 똑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겠느냐고요?

성경은 그 물을 가리켜서도 말씀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말씀이라는 게 빠져버리면 그 즉시 없음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원자를 원자 되게 하는 것도 말씀이고 인간과 지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도 말씀의 그림자 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물론 하느님인 거구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물이 점점 줄어들어 기근이 올 것이고, 결국 물이 없어 멸망할 거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는 그 기근을 말씀의 기근이다, 라고 확실하게 짚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심판이요, 멸망이다, 그래요.

, 세상과 이 육신, 그리고 묵시세계의 그 말씀은 같은 과정 같은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도 늙으면 늙을수록 수분이 빠져나가서 주름살이 생기고 건조해져서 죽는 거고 지구도 점점 물을 상실하며 사막화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환경학자들이나 환경단체에서 찍은 사진들 보면 지구는 급속히 사막화 되어 가고 있어요. 호 코스모스의 세상 전체가 물을 잃어 가면서 멸망의 자리로 내닫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60억 인구 중에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40% 이상이에요. 그런데 앞으로 십 년 후면 세상 인구의 70% 이상이 그 물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다, 라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성경대로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 산천초목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전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재밌는 건,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물이라는 것이 사람의 말에, 심지어 글과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더라는 거예요. 예전에 일본의 과학자가 그것을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했을 때만 해도 물리학계는 그 사람을 비웃었어요. 공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걸 갖고 와! 그걸 학문이라고 갖고 왔니? 하고 전부 비웃었는데 요즘은 양자물리학이 대세입니다.

물을 시험용 용기에 담고 그 물에게 좋은 말을 해줘요. ‘고마워, 시원해,, 네가 최고야, 맛있었어.’ 이렇게. 미친놈 같죠? 물에다가 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험을 했단 말에요. 그렇게 말을 직접 들려주거나 종이에 써서 붙여주면 그 물의 입자가 활짝 필 꽃처럼 예쁘게 반응을 해서 육각수가 된다 그래요. 그러니 과학자들이 그런 연구논문을 접했을 때,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현대 물리학은 이 물리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이 물리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힘인, 공식으로 밝혀낼 수 없는 그 양자물리학에 더 몰두하고 있다니까요. 심지어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만 해도 물 입자는 그 생각에도 반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세계에 파장이 일어났어요. 보이는 이 물리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감지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도  어떤 젊은 양자물리학자의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강을 했다 그래요. 원자 크기의 미시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물리 현상인 그 양자현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물질 세계의 법칙이나 원리로 공식화해서 그 속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아로슈와 미국의 와인랜드가 전부 이 양자물리학자들이에요. 그들의 전공분야가 양자 얽힘, 고전 물리학에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그런 내용이에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도 그 앞에서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을 버리고 양자 물리학을 붙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진리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진리라는 건 하느님이 그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줄 때마다 그 명제 값을 거짓으로 내 놔요.

실제로 영국의 북부 도시인 에든버러 시가 그 시 안에 피들 공원이라는 곳에 열두 그루의 느릅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열두 제자의 이름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팻말로 붙여 놨다 그래요. 물론 그중의 하나는 유다 나무였겠죠? 사람들이 그 유다나무 밑의 그늘로는 아무도 안 가요. 재수 없어서. 심지어 그 나무에게 욕을 하고 저주하고 차기도 하고 이러고 갔어요. 그런데 열두 나무 중에 그 유다 나무만 유독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에든버러 시에서 팻말을 바꿨습니다. 그 열두 나무 중에 베드로 나무만 제일 잘 자라더라는 거예요. 우리하고 제일 친숙하니까 그런가 봐요. 딴 제자들을 잘 모르니까. 거기만 가갖고 계속 칭찬했겠죠. 그래서 베드로 나무하고 유다 나무하고 팻말을 바꿔놨더니 원래 유다 나무였던 시들시들 말라죽어가던 나무가 베드로 나무처럼 살아나고 그 베드로 나무가 죽어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있어요. 고구마 순을 수경재배, 이렇게 보이게 심어 놓고 한쪽 표본들에게는 계속 칭찬을 해주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한쪽 표본들에는 계속 욕을 하고 저주의 말을 하고 나쁜 말을 들려줬더니 좋은 말을 들은 이 고구마 순이 네 배나 빨리 크게 건강하게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은 말에 반응을 합니다. 말이 물이고 물이 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건 과학이 증명해 내기 전에 이미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생경하지가 않아요. 당연히 그렇지! 물은 말에 반응을 하여 죽고 살기도 하는 거라니까요. 여러분이 나쁜 물, 나쁜 말을 접하게 되면 이 물은 거기에 반응하여 나쁜 물로 완성되어 죽는 거예요. 이 물들이(사람들). 성경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도 이왕이면 좋은 말을 많이 해주세요. 자기도 이해 못하는 그런 욕들 같은 거 하지 마시고,, 막 육시를 할 놈, . 그 육시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세요? 여러분? 그런데 자식한테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급살 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애들이 그런 나쁜 말을 듣고 자라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현상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의 경지이긴 하지만 이왕이면 좋은 말을 하세요. 서로서로, 부부간에도 그렇고.

그러나 성경에는 두 종류의 물이 있어요. 하나는 나쁜 말에 의해 나쁘게 완성되는 나쁜 물이고 하나는 좋은 말에 의해 좋게 완성되는 좋은 물이에요. 그래서 오직 히브리 성경에만 물이 쌍수로 나옵니다. 이 세상 어떤 단어에 물을 복수로 쓰는 단어가 있어요? Water! 물에는 복수를 안 쓴다니까요. 우리나라도 뭐 물들, 그러나요? , 거기 물들 좀 갖고 와. 그러나요? 아니죠? 그런데 히브리어에만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어에만 물이 복수에요. 쌍수로 나와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나와요. 땅의 물로 하늘의 물을 깨닫지 못하면 저주의 물, 심판의 물에 익사하게 된다는 언약이 창세기에 나와요. 그리고는 성경 내내 그 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반석에서 쏟아지는 물, 생수, 배에서 나오는 물,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 나중에 묵시록으로 가면 무슨 강, 에덴동산에서 강. 계속 물 이야기가 나와요.

자 그렇게 아래의 물,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래의 물로 주신 그것으로 그 위의 물, 위의 말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 아래의 물에 빠져 죽어요. 그러나 이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닫게 되면 그 아래의 물, 그것이 복이에요. 그것이 선물이라니까요. 그렇게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닫지 못하면 아래의 물에 빠져 죽게 되는 그 현실을 기록한 게 노아의 홍수 사건이요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이요,, 요나의 이야기요,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의 이야기요 이런 거예요.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은 양자학에서 말하는 Quantum Entanglement(양자얽힘)로 얽혀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푼다! 그러죠. Quantum Entanglement가 뭐예요? 노벨 물리학상 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전문가들인데, 요번에 같은 것은, 같이 창조된 것은 아무리 거리를 멀리 떨어트려 놓아도 여기에다 자극을 주면 여기까지 함께 자극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바 아닙니까?

여러분은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면 그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래의 물로 위의 걸 모르면 이거는 단절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에 빠져 죽는 거예요. 이걸 율법이라 그래요. 이걸 세상이라 그래요.

 

70%가 물인 이 지구상에 정작 사람이 먹을 물이 2%도 안 된다는 거 아십니까? 70%가 물인 우리 몸에 그 물이 2%만 떨어지면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죠? 그래서 2% 라는 음료도 나와 있는데, 그런데 이 전체 지구상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물이 100% 중에 2% 밖에 안 돼요. 5%가 민물인데 대부분이 빙하로 얼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물 중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기 생명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은 2%도 안 돼요. 그러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하느님의 그 말씀, 그것과 Quantum Entanglement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이 세상에 떨어지는 하느님의 말씀, 어마어마하게 지금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중에 진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말씀은 2% 미만이라는 거예요. 나머지는 먹으면 죽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그렇게 세상과 맞물러 가고 있다니까요. , 이렇게 우리는 먹을 물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위기의식을 당연히 가져야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생수를 찾아 하느님께 아이테오.두드리다 할 수 있는 그런 열정들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보이는 물리의 세계에만 묶여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보이는 세계의 최고 덕목, 뭐예요? 도덕과 윤리잖아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성경을 보거나 신앙생활 속에서 그걸 도덕과 윤리로 밖에 못 읽고 그렇게 밖에 설명을 못 해줘요.

그런데 성경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그렇게 아래의 것으로 보아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해버리면 죽는다고 그런다니까요. 그걸 죄라 그래요. 성경은 그걸 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하고 그런 거짓말을 전하는 이들을 거짓 예언자라 그래요. 그리고 그 세력을 총칭하여 사탄, 대적 자! 라고 해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인도되고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원래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게 이 보이는 세상이며 존재들인 거예요. 그럼에도 그러한 영적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보이는 세상을 끌고 가는 그 힘의 실체와 내용을 깨닫지 못하면. 보이는 세계에 머물다가 그 보이는 세계의 진리 같은 그 법칙, 인과율, 원인을 너희들이 제공한 만큼 너희들에게 결과를 줄게 그 인과율에 붙들려 인과율로 심판받아 죽는 거예요.

하느님이 요구하는 결과는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묵시록의 심판의 장면에 보면 전부 그 심판의 대상들이 자기의 行爲, 자기의 함으로 심판받아 죽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진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입니다. 물리의 세계에 양자물리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용으로 품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에 의해 경륜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현상계에 일어나는 모든 건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나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게 없어요. 뜻이 없는 소리가 없고 내용이 없는 현상이 없는 겁니다. 이건 시편 기자들을 비롯한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이야기에요. 껍데기로 보지 마, 나타난 현상으로 보지 마, 그걸 그대로 판단하여 행하지 마, 그러면 죽어! 단지 우리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 모든 것이 다 어떤 것의 그림자, 모형의 역할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봐야 하는 거고, 보이는 성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봐야 하는 것이며, 그대로 그걸 도덕 윤리로 봐버리면 안 돼요. 그리고 보이는 예수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영, 그 성령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머리에 눈이 두 개가 달려 있고 귀가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눈이 왜 꼭 두 개여야 됩니까? 여러분, 눈이 두 개라고 한 쪽은 저쪽 보고 한 쪽은 이쪽 보게 되나요? 대상을 두 개로 나눠 볼 수 있나요? 그건 꼭 치료를 받아야 돼요. 어차피 두 개인데 한 상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럼 도깨비처럼 크게 하나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나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주시는데요,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먹으라고 하느님이 두 개를 보게 하세요. 너희들은 두 눈으로 두 상을 하나로 반드시 봐야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죠. 하느님은 위의 소리를 아래의 소리로 들려주세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소리로. 인간의 책으로 주시는데 그 아래의 소리로 위의 많은 물소리 같은 그 소리를 알아먹어야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다, 해서 두 귀가 있는 것입니다. 둘로 듣지만 하나로 들어야 되고, 둘로 보지만 하나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들의 호흡이며 생명이고, 코가 하나, 그걸 그대로 한 마디로, 한 말로 해야 너희는 내 백성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래의 것으로 위 걸 보면 되는 거예요. 아래 소리로 위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말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 땅의 물리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묵시 세계 속에로의 함몰은 반드시 물리 세계 속의 것들의 파괴가 전제되는 거예요.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겁니다. ? 이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들의 이 한계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그 진리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거 아닙니까? 성령이 오셔서 그 껍데기를 벗겨 준다니까요. 그런데 가장 먼저 벗기는 거는 그 육체의 껍데기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라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체를 십자가에서 도륙 당하는 거예요. 껍데기가 확 벗겨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진리의 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십자가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준 훌륭한 시청각 교재였던 거예요.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1919번째 문자인 코프가 바로 그러한 뜻을 갖고 있는 문자에요. 부수고 다시 세우다. 인간들의 문자 안에 이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원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파괴라는 단어가 너무 자극적이다, 너무 공격적이다 하면 그걸 부정이나 부인으로 바꾸셔도 돼요.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귀에 들리는 것,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것 등이 사실은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에요. 내 육신과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이 내 현실이 아니고... 이것은 무언가를 교훈하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라고. 그 어떠한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꾹 참고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허벅지를 찔러가며 가는 게 자기부인이 아니라 그걸 아는 거.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그게 자기 파괴인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돼야 다시 세워질 수가 있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렇게 되어야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 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예수의 십자가에요. 자기 십자가 아니라니까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 지고 와그랬다니까요. 성도의 인생 속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그 물리세계의 파괴가 경험되어야 되는 거고 그것이 옳다는 게 그 안에서 인정이 되어야 돼요. 그래 이렇게 부서지는 게 맞지! 그래야 진짜 가치, 진짜 생명이 뭔지를 내가 알지.~~~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고, 의존하고 애착을 갖고 있는 이 현상계의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부정되고 부인되고 말씀의 검에 의해 잘라져 나가고..관계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생략~

오늘 복음 말씀에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네요 그래서 올려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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