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사제에게 주는 글 - 성인들과 의인들 안에서 고난을 받는 교회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 가톨릭출판사)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6 조회수1,390 추천수1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옷타비오 신부를 통해 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에서/ 1999.10.30 교회인가/ 가톨릭출판사)

 




성인들과 의인들 안에서 고난을 받는 교회


 형제여, 쓰시오. 나는 오리오네 신부(2004년 5월 16일 시성)라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성격으로 고난을 받고 있소.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머리는 '신성'과 '인성'으로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니, 그분은 교회의 실제적인 우두머리시오. 이처럼 교회의 창설자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꼐서는 부활하신 이후 육체적으로는 더 이상 고난을 받으실 수 없지만, 영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고난을 받고 계시오. 그분의 '구속'과 무한하신 '사랑'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죄 때문이오. 이는 역설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미련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오.

 하느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오. 그분은 진리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이오. 그런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깨우쳐 주시려고 얼마나 여러 번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셨는지! 사람들은 주의가 산만하고 무관심하고 무감각한가 하면, 악하고 비뚤어져 있기 십상이고 그분께 대한 증오가 가득하지만 말이오!



믿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하셨는지 모르오! 성인들에게 수없이 발현하시어, 인류와 그리스도인들의 배은 망덕과 그분께 자기 자신을 봉헌한 이들, 곧 사제와 수도자와 수녀들의 배은 망덕으로 말미암은 한없는 슬픔과 고통을 털어 놓으셨으니 말이오!

 그분께서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소 : "(가시로 둘러싸인 당신 심장을 가리키시면서) 사람들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 마음을 보아라. 그럼에도 이 마음은 그들에게서 모욕, 배은 망덕, 업신 여김.... 따위만 받고 있을 뿐이다." 그분의 성심은 피를 줄줄 흘리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소? 그대도 다른 이들과 함께 그것을 본 증인이오. 그분께서는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가시에 둘러싸인 당신 성심을 보게 하셨소. 그러니 그분은 그 가시들로써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셨겠소?

 그분의 고통과 끝없는 비통을 입증하는 그러한 발현들이 특히 이 어두운 시대에는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봉헌한 자들과 심지어 주교들까지 의심을 품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도무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소.

 그들은 믿지를 않소. (이른바, 신앙의 위기이오.) 믿지 않을 뿐더러 믿기를 원하지도 않소. 믿기를 두려워하고 있소.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이 내포하는 필연적인 결과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소. 내가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바로 주님께 자기를 봉헌한 사람들, -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하고 무신론적인 세상과 맞서서 예수님의 참된 증거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에 누구보다도 큰 비통과 실망을 안겨 드리고 있는 것이오.

 이와 같이,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과 무관심과 미지근함과 불신에다, 게쎄마니 동산에서처럼, 그리스도인들과 온 인류가 그 분에게 끊임없이 쏟아 붓는 온갖 종류와 온갖 성격의 죄와 치욕과 중죄와 위법 행위들을 보태어 본다면, 그대는 그분께서 얼마나 엄청나고 한정없는 고통을 받고 계신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영혼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분, 그들을 위하여 무한히 고통을 받으셨고 지금도 받고 계시는 그분에게는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한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을 보시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오.



십자가를 지고 있는 교황


 형제여, 교회의 보이지 않는 머리이신 분이 형용할 수 없이 큰 고난을 받고 계신 것처럼, 교회의 보이는 머리인 교황도 정도는 다르지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큰 고통을 겪고 있소.

 교황은 가장 높은 정상에 있고, 그 정상에서 교회를 보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잘 볼 수 있소. 그는 교회에 배어 있는 교만을 보고,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을 보고, 교회를 갈기갈기 분열시킨 상처들을 보고, 주제넘은 신학자들의 오류와 이단 때문에 찢어진 교회를 보고, 영적 도덕적 관용주의에 의한 방종을 보고, 무질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교회를 보고 있소. 또한 교회 구성원들의 악한 표양을 알고 있고, 교회의 원수들이 암암리에 꾸미고 있는 음모와 증오를 알고 있소. 이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은 미어질 지경이오. 오직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도움만이 그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금까지 지켜 주셨을 뿐이오.

 이 모든 것에, 교황과 가장 가까이 있고 또 있어야 할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태어 보면, 교황의 고통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오.

 많은 주교들과 거의 모든 사제들은 교회의 보이지 않는 머리이신 분과 보이는 머리인 교황의 고통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모르고 있소.

 형제들이여, 교회의 보이는 우두머리에게 고통을 주는 동기가 이다지도 크고 심각한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이신 분의 고통은 얼마나 무한히 더 큰 동기를 지니고 있겠는지 생각해 보시오! 그분께서는 보이는 우두머리가 보듯이 전체를 총괄적으로 보실 뿐만 아니라, 당신 신비체의 각 지체와 온 인류를 한 사람 한 사람 낱낱이 보시기도 하니 말이오.

 아무리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환히 보이지 않겠소?



가공할 영적 빈혈증


 형제여, 교회는 성인과 의인들 안에서 고난을 받고 있소. 그들의 고통은 사랑의 정도에 비례하오. 그런데 그 고통의 이유는 주교와 사제와 봉헌한 영혼들이 일반적으로 걸려 있는 가공할 영적 빈혈증이 그들에게 극심한 안타까움을 야기한다는 점에 있소.

 성인들과 의인들은 또 지옥 세력들이 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그야말로 순교의 고통을 겪게 하기 때문에 괴로워 하오.

 형제여,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았소. 그렇게 한다면 너무 장황해질 테니 말이오. 그러나 이 점만은 기억하기 바라오, 즉, 수많은 사제들의 미지근함과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비난받아 마땅한 행실로 인한 정신적 영적 불쾌감은 건강한 지체들인 일반 신자들에게도 가벼운 고통이 아니라는 점이오.

 그럼에도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니, 실망은 금물이오. 집중적인 공격으로 그대를 실망에 빠뜨리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 때문에 영향을 받거나 소심해져선 안된다는 말이오. 그리고 사람들의 무분별에 개의하지 마시오. 내가 세상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만약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러니 '위에서'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하오. 나는 언제나 그 목소리에 순종하였고, 그리하여 내 개인적인 성화와 다른 많은 영혼들의 성화를 위하여 하느님 섭리의 계획 안에서 (그분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오.

 형제여, 용기를 내시오. 지상의 여정은 짧은 반면에, 그대를 기다리는 상급은 영원하니 말이오.

 그대는 혼자가 아니오,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집'에 먼저 와 있는 우리가 그대와 그대의 벗들과 함께 있소.

(1977년 1월 13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기본적인 진리


 아들아, 나다. 예수다. 받아써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어제, 죄의 용서와 악마의 억압으로부터 영혼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각 사제는 나와 하나 되어 자기를 아버지께 바치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너는 이 기본적인 진리를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다시 말해서) 영혼의 목자들이 이 진리를 확신하고, 예비 사제들에게 장차 내 '피'와 '수난'의 결실을 맡아 관리할 내 사제로서 지게 될 책임에 대하여, 인간적인 책임 이상의 그 신성한 책임에 대하여,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자각을 가지도록 유의해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말이다?

 그렇지 않다, 아들아.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거나 전할 수가 없다. 그러니 예비 사제들에게 주어지는 지도나 교육이 내가 요구하는 것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거나 정반대이기 십상이다. 목자와 교육자들 자신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영혼들이 아니라면, 예비 사제들을 너그럽고 거룩한 영혼들이 되도록 양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띤 활동은 이단적인 행동주의에 오염된 것이다


 - 그렇지만, 예수님, 매우 열성적인 목자와 사제들이 있고, 그 수도 상당히 많습니다.

 - 아니다, 아들아! 분명히 말하거니와, 거룩한 목자와 사제들이 있긴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열에 들뜬 듯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목자와 사제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단적인 행동주의에 오염된 자들이다. 나는 사람을 겉 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갈라 2, 6참조 - 역주), 홀로 나만이 아는 객관적인 사실로 판단한다.

 자기를 산 제물로 바친 영혼들은 숨어 있기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오늘날, 신학교나 수도회에는 긍정적인 것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과거의 규칙들을 폐지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치했는데, 거의 모든 것이 나의 '뜻'과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원칙에서 온 것들이다.



자유는 방종이나 무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아, 네가 더 잘 알아듣게 해 주마. 사람들은 자유와 무질서의 개념을 혼동하고 말았다.... 수많은 교육자들과 또 수많은 사제와 목자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여 맞바꾸어 버렸고, 그 때문에 신학교 속에 도덕적 관용주의란 것이 침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비 사제들이, 물질주의에 물들어 관능적인 쾌락이라면 아무것도 사양하지 않는 하고많은 젊은이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거나 거의 다르지 않게 되고 말았다.

 물질주의와 온갖 종류의 성적 경험이 배어 있는 부도덕한 호색 영화나 폭력 영화같은 것을 보는데......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선택하려면 인생을 알 필요가 있다고들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생명은 활동적인 것이니 움직이지 않는 생명은 없으며,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삶 역시 활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선이나 악을 향해 움직일 자유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선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선을 향해 나아갈 때만 그 삶의 목적과 소명과 존재 이유를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악에 빠져 버리면 자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따라서 그의 품위도 떨어뜨리게 된다.

자유는 방종이나 무질서를 뜻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끔찍한 도덕적 영적 파괴


 아들아,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ab aeterno) 선택하신 영혼들 안에 (성소의) 씨앗을 심으신 순간부터, 그 씨앗은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의해서, 또 하느님의 뜻에 따라 믿음과 사랑으로 교육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그들의 성소를 실현할 임무를 맡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지고 보호되고 옹호되어야 한다.

 아들아,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예수이다. 그야말로 이단과 타락의 온상이 되어 버린 몇몇 신학교의 도덕적 영적 파괴상이 어떤 정도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네게 말하지 않으련다. 나로서는 이제 그토록 숱한 악으로 끔찍하게 더럽혀진 불결한 지역을 정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아들아, 네게 의견을 묻는 이들에게 신학교와 종교 교육기관에 가라고 권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그들 역시 의심과 불확신 속에서 수도자 성소라는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심히 고통스러운 상황을 재정립하기 위해서, 과감하게 조처를 취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단지 비겁함과 두려움과 사람들의 평판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굳건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의 행동을 세상의 판단에 묶어두지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판단에만 매이게 할 따름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6년 12월 1일 ④)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터무니없는 뒤바뀜


 종교 교육을 부차적인 학과로 간주하고, 심리학이니 교육학 같은 세속적인 학문 연구에 우선권을 주는 신학교들이 있는데, 이것은 여간 잘못된 일이 아니다!

 종교 교육은 장차 사제가 될 사람들에게 베푸는 모든 규육의 핵심이요 중심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신적 '스승'인 네 예수나 '사도들의 모후'이신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사제들이 세속적인 학문에 깊은 소양(素養)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영적인 풍성함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 사제가 될 사람들의 교육을 보완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지 말아야 한다.

 신학교에서 첫째 가는 필수적인 교육, 본질적이며 다른 것으로 대치 할 수 없는 교육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과 어떤 형태로도 타협할 마음이 없는 매우 깨끗한 장상 교직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거룩한, 이 말의 참 뜻 그대로 거룩한 장상들 말이다. 사실, 거룩한 스승이 없다면 성덕의 학교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들아, 내가 앞에서 일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은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다. 이단적인 장상 교직자들이 흔히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만 속에서 꽃을 피우며 번성한다. 교만은 정신적 탐욕이지만, 조만간에 육체적 색욕에 이르기 마련이다.



타고난 재능이 쓸모가 있으려면.....


 너는 방금 성서의 이 대목을 받아썼다 :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분부하시고 나서.... 가르치시면 전도하시려고 그 곳을 떠나셨다." (마태 11, 1) 이 말은 교육을 담당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영혼의 목자들이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신학생들에게 어떤 점으로 보나 나무랄 데 없는 영적 지도를 하는 일이다.

 '영적 지도자'의 주된 임무는 어느 사제든지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 곧 하느님의 교회 안의 뛰어난 사명은 사제 자신을 희생으로 바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일이다. 이는 우선 사제의 "나"를 없애고, 다음에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절대로 일치하지 않는 세속의 가르침에 대립하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완수할 수 있는 사명이다. 따라서 신적 스승인 나와 성인들과 순교자들을 본받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무화(無化) 시키는 것이다. 이 자아 멸각(滅却)의 원형이요 모범인 사람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들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성소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예비 사제들로 하여금 그들의 타고난 재능은 겸손하게 하느님을 섬기고 하는님의 영광과 자기 자신의 성화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도 영적 지도자의 임무이다.

 영적 지도자가 마음을 써야 할 또 하나의 일은 이 뽑힌 사람들에게 어떤 외적 활동도 그 자체로, 또 그 자체에 의해서 영혼들의 성화와 구원에 소용되는 것은 없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구원하시는 분은 언제나 오로지 하느님뿐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상의 결함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제가 된다면....


 택함을 받은 이들은 은총의 (신적) 생명이 자신 안에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하고, 사제직의 위대성과 품위와 능력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 배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의 사제들은, 용납할 수 없는 교육상의 허점과 결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고, 악의에 찬 마귀들에게 죽도록 시달리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스스로 얼마나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택함을 받은 이들은 그들로 하여금 구속주 그리스도의 큰 군대 안에서 아버지와 교사와 지휘관이 되게 하는 사제직의 특성을 숙지(熟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성체성사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안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깊고 흔들림 없고 바위처럼 굳건한 믿음이 몸에 배도록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오염되고 중독된 성소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이미 꺠끗하지도 투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더럽혀지면 바람과 사랑도 쇠퇴하기 마련이니, 은총의 신적 생명이 오염된 영혼 안에서는 죽어 버리고, 수없이 많은 사제와 수도자와 수녀들을 잃을 만큼 교회를 뒤엎는 가공할 위기가 온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교회에 치명상을 입히는 크나큰 비극이다.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 나 예수가 인격적이고 육체적으로 참으로 현존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실재이고, 이는 무한한 겸손과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능력과 신적 지혜의 신비이다. 그런데 사제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이 인격적 '현존'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동 구속자가 될 수 있겠느냐? 네게 강복한다, 아들아, 나를 사랑하여라!

(1976년 12월 1일 ③)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재


 신학교나 종교 기관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겠느냐? 온갖 것을 조금씩 다 가르치는데,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고 가르친다. 심지어 반드시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을 흔히 맨 나중에 가르치곤 한다. 그러니 물질주의와 같은 악이 교육을 담당한 책임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애와 정력과 수고를 아낌없이 바쳐야 할 교육 목적에서 얼마나 벗어나게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네게 사제들은 그 본성상 희생 제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거니와, 그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이 완전한 '희생 제물'이기 때문이다. 이 스승은 사랑과 무한한 자비의 행위로, 그가 선택한 이들을 그 자신의 왕다운 사제적 권능에 참여시키기를 원한다. 바로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 안에 있기를, 따라서 먼저 희생 제물이 되고 나중에 영광 속에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제직은 아주 많은 권능들을 내포하고 있어서 모든 계급의 천사들마저 두려워 떨 정도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대전에 시립해있는 대천사 가브리엘은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 '강생'의 숭고한 신비를 예고하기 위한 특사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된 '말씀'이 그의 사제들에게 준 왕다운 권능들과 그 품위를 생각할 때, 천사들은 경탄과 놀라움을 느끼는 반면, 사탄과 그의 저주받은 군대는 절망적인 분노와 극심한 충격에 사로잡힌다. 자기네보다 훨씬 열등한 사람들이 그토록 높고 숭고한 품위에까지 들어올려진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아, 이 모든 것이 엄연한 실재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실재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실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마귀들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분별을 비웃고 있다.
 이 통탄할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만일 한 사람의 신학생 주위에서 수호자와 보호자와 양성자로, 또 신적 '씨앗'으로부터 시작된 이 일을 완성으로 이끌 대리자로 있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소명을 초자연적으로 생활할 수 없다면, 이 신학생이 그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 자신의 소명을 살아 낼 수 있겠느냐?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스스로 믿지 않고 실감하지 않고 생활로 실천하지도 않는 것을 가르칠 수가 있겠느냐?

 성소는 약한 묘목이다. 가시덤불에 에워싸여 있다면 이 묘목은 숨이 막혀 죽고 만다.
 그런데 현재, 상당수의 신학교 교수들이 바로 그런 가시덤불과 같다.
 성소는 빛과 열을 받아야 하는 약한 묘목이건만, 교육을 담당한 이단자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자와 물질주의자들이 그 빛과 열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성소는 오아시스에서 무르익기 마련이다

 충격적인 사건들과 소음과 방종과 혼란과 논쟁으로 뒤섞인 현대 생활의 번잡한 환경 속에서는 성소가 무르익을 수 없다....
성소는 현대의 이단적인 세계의 인생관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는 인생관을 내포한다.
 성소는 오아시스에서 자라나며 무르익기 마련이고, 오아시스란 응당 그 주위에 사막이 펼쳐져있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성소들이 유실되고 말았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 가장 중요한 사도직에 부름받은 이들의 책임은 얼마나 무겁겠느냐?
아들아, 그들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길과 목초지라면 어떻게 성소자들을 한걸음 한걸음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새로 태어날 교회에서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사제직의 위대성과 존엄성을 배워 알고 자각하는 사제들, 세속적인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로 기꺼이 나를 따르는 겸손한 사제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사제들은 세상이 악마에게 속해 있다는 것과 악마는 십자가의 겸손이 아니고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십자가의 겸손으로 악마를 이겼으니, 내 사제들도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네게 강복한다, 아들아, 나를 사랑하고, 기도하여라! 바야흐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수많은 사제들의 정신과 마음에 은총이 스며들도록, 너 자신을 봉헌하여라!

(1976년 12월 1일 ②)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

 

주님, 모든 연옥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특히 전세계로 퍼진 코르나19로 죽은 모든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한숨과 기도를 들어주시고, 국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지도자들이 회개하여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아멘.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1,3)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1,3) 

♥장한상요셉, 양점상마리아, 장가브리엘,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들 (성인의 통공)♥ 

♥안토니오 비오, 릿다, 미카엘,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성인의 통공) 

미사신청 : 11월 1일~3일, 11월 7일, 11월 9일, 11월 30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