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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불의한 집사 (루카16,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6 조회수1,67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6일 금요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불의한 집사 (루카16,1-8)

 

1독서<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3,174,1)

17 형제 여러분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사랑하는 여러분!

 

화답송 시편 122(121),1-2.3-4ㄱㄴ.4ㄷㄹ-5(◎ 참조)

◎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나는 몹시 기뻤노라예루살렘아네 성문에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 예루살렘은 튼튼한 도성견고하게 세워졌네그리로 지파들이 올라가네주님의 지파들이 올라가네

○ 이스라엘의 법을 따라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네그곳에 심판의 왕좌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복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집사 일을 청산하게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이렇게 하자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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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제1독서 (필리피3,17―4,1)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18~19)

 

여기서 '원수'로 번역된 '엑트루스'(echthrus)의 원형 '엑트로스'(echthros)는 '적','대항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탐욕의 정신으로 사는 자들과 자기식의 의(義)로 똘돌 뭉쳐져 그것을 내세우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것을 살펴본다.

먼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지 살펴본다.

그들은 자신의 율법적 의(義)라는 철옹성에 갇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내려주시는 은총을 반대한다.

 

복음 그 자체이며, 복음의 내용에 대한 완전한 진술인 십자가의 메시지, 즉 죄인들이 하느님께 죄사함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도록 하기 위해 메시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이 바로 유대율법주의자에게는 꺼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1코린1,23).

 

그들에게 이러한 복음은 불쾌하고 어리석은 것이기에, 그들은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짓누르려고 하는 것이다(사도17,5.13; 18,6;19,9).

'그들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 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유일한 희망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기 때문에(갈라5,4) 그들의 끝은 멸망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이 배'라는 것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함으로써, 그들의 배(stomach)를 신(神)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먹는 문제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얽매어 있다면, 그 얽매는 것이 곧 하느님과 같은  신(神)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이 수치에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느꼈던 할례를 행할 때 육체적으로 벌거벗는 상태가 되는데, 그것은 곧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 것만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통해 폐기물이 되어 땅에 버려진 규정들과 의식들 위에 터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십자가의 원수'를 이교인들의 정욕적인 반도덕주의적 성향으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인가?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아 부정이며, 자아가 죽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아를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자유를 남용하여 정욕을 충족시키는 방종을 일삼는 소위 도덕 폐기론자들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이정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할 교회에 악영향을 주게된다.

이들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하며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육체의 거룩한 정결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도 바오로는 당시 반 도덕적 성향이 강한 초기 영지주의 사상이 희랍 세계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희랍 문화의 강한 영향권 아래 있었던 필리피 교인들에게도 이들에 대한 경계의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필리피서 3장 19절에 진술되어 있는 특징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이 멸망'이라는 것은, 그들이 도덕 폐기론자들로서 이미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육체적 행위는 관계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거룩한 정결과 거리가 먼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들은 은총의 진리를 육체의 방종의 기회로 삼는 자들인 것이다(갈라5,13).

 

둘째로, '그들의 하느님이 배'라는 것은 그들의 무절제하고 통제받지 않는 욕구와 욕망들이 그들의 삶의 유일한 기쁨이요 희망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셋째로, '그 영광이 자기네 수치'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자랑스러운듯이 내세우지만, 하느님 대전에 그것은 수치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네번째로, 그들이 '이 세상 것만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있는 것들, 즉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과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콜로3,5)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상과 같이 사도 바오로가 염두에 두고 있는 '십자가의 원수'는 율법주의자들로도 볼 수 있고, 또한 정욕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반도덕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영지주의자들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견해가 나름대로 모두 설득력이 있지만, 필리서 3장 1~11절은 율법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반면에, 필리피서 3장 18절과 19절은 반도덕주의적인 영지주의자들을 두에 둔 권고라고 보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견해이다.

 

앞서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의 권고를 준 사도 바오로는 이제 필리피서 3장 18절과 19절에서 당시 희랍 세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초기 영지주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희랍 문화권 한 복판에 있던 필리피 교회를 향해 이것을 경계하라는 권고를 준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6,1-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8ㄱㄴ)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더 큰 불의를 저질렀지만, 주인은 이 집사를 칭찬하였다. 

여기서 주인이 칭찬한 것은 집사의 도덕적인 부분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하고 지혜롭게 처신한 행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불의한 집사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고 있는 데 비해,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는 일에 인색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땅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외에는 관심이 없는 '세상의' 집사들도 이렇게 교활할 정도로 민첩하고 영리하게 미래의 상황을 대처하는데하물며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느님의 집사들도 적어도 이 정도의 지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식의 책망과 더불어 교훈이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영리하게'로 번역된 '프로니모스'(phronimos; wisely; shrewdly)는 '신중하게', '사려깊게'라는 뜻인데, 어떤 이익 등을 위해 약삭빠르고 신중하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 복음서에서 사용된다. 

불의한 집사는 위기에 직면하여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미래의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지혜를 보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하느님의 임박한 종말 심판을 앞둔 그리스도인들이 심판 이후에 거처하게 될 복된 처소를 확보하기 위해, 현재 주어진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신속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편, 지금까지는 집사를 수식하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는데, 본절에 이르러 '불의한' 이라고 번역된 '아디키아스'(adikias; unjust; dishonest)라는 단어를 쓴 것은 오히려 집사의 지혜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원형인 '아디키아'(adikia)는 주로 하느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것 (로마1,18)과 하느님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1요한1,9; 5,17)를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의 이 집사의 불의는 그의 직책과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서, 즉 마땅히 해야 할 집사직을 소홀히 함으로써, 주인의 뜻에 불순종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건도 빚을 탕감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물이 예전처럼 낭비되고 있기에 주인에게 집사는 여전히 불의한 사람이다. 

하지만 집사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앞날을 대비하여 민첩하게 처신하고 있는 그 모습만큼은 영리한 대처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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