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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루카16,9ㄴ-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7 조회수1,20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7일 토요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루카16,9-15)

1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0-19)

10 여러분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마침내 다시 한번 보여 주었기에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사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해 주었지만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5 필리피 신자 여러분복음 선포를 시작할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여러분 외에는 나와 주고받는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16 내가 테살로니카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17 물론 내가 선물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여러분에게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18 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넉넉하게 되었습니다여러분이 에파프로디토스 편에 보낸 것을 받아 풍족합니다그것은 향기로운 예물이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112(111),1ㄴㄷ-2.5-6.8과 9(◎ 1)

◎ 행복하여라주님을 경외하는 이!

○ 행복하여라주님을 경외하고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잘되리라후하게 꾸어 주고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그 마음 굳세어 두려워하지 않네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복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16,9-15)

9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제1독서(필리4,10~19)


"여러분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을 마침내 다시 한 번 보여 주었기에,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0~13)

 

필리피서 4장 10절에서부터 20절까지는 필리피 신자들의 재정 후원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감사와 축복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필리피 신자들은 사도 바오로가 옥고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전달했고, 그러한 재정적 도움에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의 호의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에서, '나는 기뻐합니다'로 번역된 '에카렌'(echaren; I rejoiced)는 '즐거워하다', '기쁨으로 가득차다'라는 뜻을 지닌 '카이로'(kairo)의 직설법 부정 과거형으로서 기뻐했다는 과거의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크게'라는 부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기쁨의 정도를 나타내고 있다. '크게'로 번역된 '메갈로스'(megallos; greatly)는 '크게', '대단히 많이', '격렬하게'라는 뜻을 가진 부사인데,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마음이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찼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큰 기쁨 역시 '주님 안에서'(en kyrio; in the Lord)이루어졌다고 표현했다.

즉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이 기쁨이 세속적 측면이 충족된 것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일치로부터 솟아나는 기쁨임을 밝히고 있으며, '주님 안에서'의 기쁨은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이 자신을 돕다가 중단한 후 다시 시작한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다.

 

'사실 여러분은 줄곧 나를 생각해 주었지만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투옥 소식을 전해 들은 필리피 신자들은 한동안 사도 바오로에게 선물을 보낼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사도 바오로가 밝히듯이 필리피 교회가 잠시 사도 바오로에게 후원하는 것을 중단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의가 없거나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원금을 가지고 사도 바오로에게 갈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든지, 또는 갈 수 있는 환경이 허락되지 않았던 듯하다.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로 번역된 '에카이레이스테'(ekaireisthe)는 '아카이레오마이'(akaireomai)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과거에 지속된 행동을 나타낸다.

즉 이 말은 필리피 신자들의 사도 바오로를 향한 관심이 표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좋지 않은 환경, 즉 카이사리아 혹은 로마에 이르는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또한 여행하기에 좋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이 그런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 에파프로디포스 편으로 보내 온 헌금으로 입증되어(필리4,18),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한 것이다.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리피 신자들이 에파프로디포스 편으로 보낸 헌금에 대해 사도 바오로가 이처럼 기뻐하는 것은 단지 궁핍한 상태에서 도움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궁핍'으로 번역된 '휘스테레신'(hysteresin)의 원형 '휘스테레시스' (hysteresis)는 '결핍', '곤궁', '가난'이란 뜻인데(마르12,44), 사도 바오로는  이때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경제적 궁핍과 육체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본문에서 '궁핍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즉 사도 바오로는 물질적 선물로 인해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기뻐한다는 오해를 막기 위해 굳이 궁핍함으로 인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준 것(필리2,25.30; 2코린11,9)에 대해 필리피 신자들에게 감사하면서도, 자신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임을 밝힌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처지'는 원문으로 볼 때, 명사가 아니라 영어의 be동사와 같은 상태 동사 '에이미'(eimi; I am)로서 처해 있는 상태와 상황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처지에서도'로 번역된 '엔 호이스 에이미'(en hois eimi)는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무엇이든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만족'으로 번역된 '아우타르케스'(autarkes)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대명사 '아우토스'(autos)와 '넉넉하다', '충분하다'라는 뜻의 동사 '아르케오'(arkeo)의 합성어로서, '자기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는'이란 의미이며,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성행하였던 스토아 철학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기 의지의 힘으로 환경을 극복하고, 어떤 환경도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즉 내면은 외부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자족 그 의미에 있어서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같을지라도, 그 근거에 있어서는 그들과 같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의 자족의 근거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아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콜로2,3),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성도들에게 주려고 예비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기에(1코린2,9) 언제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수 있었다.

 

'배웠습니다'로 번역된 '에마톤'(emathon)의 원형 '만타노'(manthano)는  '행동이나 경험을 통해서 배우다', '습득하다'(1티모5,4.13)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부정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사도 바오로가 삶을 통해 이미 이것을 체득하였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과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경험을 통해서 (필리3,10),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였고, 그로 인해서 외적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비천하게 살 줄'로 번역된 '타페이누스타이'(tapeinusthai)는 '타페이노오'(tapeinoo)의 수동태 부사이다.

원래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저수지의 수위를 낮추거나 산의 높이를 낮춘다는 의미가 있으나 성경에서는 은유적으로 사용되어 '겸손해지다','비천해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마태18,4; 2코린12,31).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교를 하는 가운데, 주림, 목마름, 추위, 헐벗음, 육체의 고난과 정신적 박해를 겪는 등 갖가지 비천에 처하면서도 그 가운데 적응해 나갔고, 또한 자족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수동태로 쓰인 것은 그러한 비참함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적 환경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풍족하게 살 줄'로 번역된 '페릿슈에인'(perissyuein)는 '페릿슈오'(perissyuo)의 부정사이다.

'페릿슈오'는 '꽉 찬 양으로 존재하다','풍부하게 갖추다','충분히 소유하다' 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영적인 측면의 풍요함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성한 삶을 누린 것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사도 바오로는 회심 전에는 물질적으로 풍요했었으나, 본 문맥에서는 그때의 상황이 아니라 복음 전파자로서의 삶을 말하고 있기에, 사목자로서 살아갈 때 물질적으로도 부요했던 때가 있었음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의 자족함은 비천하든 풍족하든 그 환경에 연연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삶의 풍요로움에 목표를 두고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사도 바오로에게는 이런 외적환경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도 바오로는 오직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는 순교자의 영성으로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처한 환경은 그를 기쁘게 하거나 혹은 슬프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로 번역된 '엔 판티 카이 엔 파신'(en panti kai en pasin; in everything and in all things)에서, '엔 판티'와 '엔 파신'은 각각 단수와 복수라는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단어로서, '모든 것과 모든 일들에서'라는 말이다.

또한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메뮈에마이'(memyemai)의 원형인 '뮈에오'(myeo)는 '비법을 전수시키다', '성스러운 비밀을 가르치다'라는 의미가 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그 비법을 전수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11절 '만족하기를 배웠습니다'에서 '배우다'란 의미로 사용된 '에마톤'이 체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의미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배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전수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가 모든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비결을 터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모든 환경에 적응해 나간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힘을 주시는'으로 번역된 '엔뒤나문티'(endynamunti)의 원형 '엔뒤나모오'(endynamoo)는 동사의 서두에 붙어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 접두어 '엔'(en)과 그 자체로 이미 '힘을 주다', '강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뒤나모오'(dynamoo)의 합성어로서, '능력을 주다', '원기를 돋우다', 활기를 불러일으키다' 등의 강한 뜻이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예수님의 권능적인 활동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에페6,10; 1티모1,12; 2티모2,1; 4,17). 본문에서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그 능력을 부어주심이 항상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안에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엔'(en)은 일차적으로 '~안에'라는 뜻을 갖는데, 여기서도 주님 안에서 거주함으로써 비로소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전치사 '엔'(en)이 '말미암아', '통하여'(through)와 같은 방편의 의미로도 쓰이기에, '주님을 통하여'라는 뉘앙스를 가진다면, 이것은 역으로 주님 밖에서는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로 번역된 '이스퀴오'(ischyo)는 '힘'(마르12,33; 에페1,19)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명사 '이스퀴스'(ischys)에서 유래하여 '건강하다' (마르9,12; 마르2,17), '능력을 가지다','위력을 발휘하다'(사도19.16), '할 수 있다'(마태8,28; 마르5,4; 루카6.48; 사도6,10)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현재 직설법으로 쓰였으며, 일반적 현재로서 관습적 동작이나 일반적 진리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항상 그러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초월적인 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어떠한 행동도 하느님 안에서 다 용납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쁨으로 적응할 수 있다는 의미, 즉 자족에 관한 표현이다.

 

그는 약할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며(2코린12,10)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할 수 있었다(2코린4,8). 사도 바오로가 이처럼 모든 처지 가운데서도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던 그 능력 때문이다.(필리3,9)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모든 것을 채워주는 지혜와 용기와 힘의 원천이신 것이다.

이처럼 본 문맥을 통해서 사도 바오로가 어떠한 처지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과 자신이 함께 일치하여 있기 때문임을 밝힘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복음(루카16,9ㄴ~15)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9)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자구대로 들으면 당황된다.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고  하시니 말이다. 윤리 신학의 기초와 원칙은 목적이 선하면 수단 방법도 선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절은 성경과 양심에 근거한 이런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구절의 앞에 나오는 약은 집사(청지기)의 비유 말씀을 잘 알아 들어야 한다.   

 

주인의 재산을 충성과 성실, 책임감과 주인의식으로 관리해야 하는 집사가 주인 모르게 재산을 불의하게 탕진한 것이 드러나 해고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는 또 한번 주인의 채무자의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주면서 해고당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의 앞날을 준비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의한 약은 집사를 칭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를 가끔 이용해서 당신의 메세지를 전하신다.

그가 저지른 불의와 불의한 방법에 촛점이 있는 게 아니고, 해고 이후의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제빠르게 준비하는 그의 민첩성을 본받으라는 데에 비유의 촛점과 핵심이 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복락)과 영원한 멸망이 달려 있는 그야말로 정말로 심각한 구원의 문제인데, 이스라엘은 너무나 이 문제를 우습게 취급하고 무시하면서 자기 식의 율법적 종교 생활을 하면서 오신 메시아를 몰라 뵙고, 이 세상과 돈과 육의 문제에 매몰되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무관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면, 불보듯 뻔한 그때 그 시간이 반드시 올 때 주님 대전에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때 그 시간은 개인적 죽음으로도 언제 올 지 모르는 것이고,  또한 시체가 있는 곳에 솔개가 달라들듯 필연적으로 오는 종말의 심판으로도 점점 임박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관이신 주님 대전에 회개하지 않고 애써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면서 무사 안일과 불신앙적 완고함과 무딘 태도를 끝내 고수해서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손해인가?하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로'에서 '불의한'으로 번역된 원어는 '아디키아스'(adikias)인데, '불의한 재물'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는 의롭지 못하고 올바르지 못한 재물을 의미하고, 두번째는 꿈란 전통에서  '천국의 보화'(마태6,20)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알아 듣는다. 말하자면, 가치 중립적인 '세속적 재물'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 속에서만 활용 가능한, 효용 가치의 한계적 속성(1티모6,17)을 나타내는 재물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바로 이 두번째의 의미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일때 말씀을 해석하는 데 의문이 없어진다.

세속의 사람들이 자신의 출세와 명성과 지위와 안정을 위해 재물을 가지고 인맥을 넓혀가듯이, 그런 열정과 그런 민첩성과 그런 지혜로움으로 하느님 나라와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17,3)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 단어인 '기노스코"(ginosko; I know)는 단순한 지성적 인식이 아니라 안 만큼 자유 의지로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필리3,8ㄱ) 태도를 지닐때,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의 일이 나의 일이 되어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며 나를 통해 일하시고, 나도 주님의 일에 충성을 다해 협력하는 친교와 일치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숨쉬는 이 공기처럼 살아계시는 주님을 이 땅에서부터 성령 안에서 인격적으로 체험하며, 내세의 천국을 보장받고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11월 남은 달력 한 장 앞에서 자신의 죽음과 회개의 의미를 담아보는 시간을 갖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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