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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다운 봉사의 자세(밭 가는 종의 비유).. 종은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9 조회수1,632 추천수0 반대(0) 신고

참다운 봉사의 자세(밭 가는 종의 비유)

 

예수의 비유들 가운데는 주인과 종의 이갸기가 꽤 많다. 주종 관계를 다룬 비유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주인의 떠남과 돌아옴을, 어떤 것들은 종의 셈 바칠 의무를, 또 어떤 것들은 이 둘 다를 모두 이야기의 기본틀로 삼고 있다.

 

고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주종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는 1세기 지중해 연안 지역의 사회 구조를 구성하는 근본 틀이었다. 이 시대의 주종 관계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고용인과 노동자 사이의 계약 관계와 다르다. 예수 시대의 주종 관계는 가족 관계처럼 자발적이고 지속적이다.

 

종은 주인에게 자발적으로 절대 복종하고, 주인은 종을 가족의 일원으로 보호하며 그의 삶 전체를 책임진다. 상호의존과 연대의식에 바탕을 둔 이 관계는,법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이 신뢰가 무너졌을 때 주인과 종의 관계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이 경우 대개는 종이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이런 종에게 주인은 맡겨진 직책에 대해 철저하게 셈 바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주종 관계는 그 자체로 모순을 지닌다.

첫째, 이 관계는 연대성과 자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강제성을 드러낸다. 주인과 종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자발적으로 상대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은 종에게 일방적으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한다. 힘있는 편은 어디까지나 주인이지 종이 아니다. 종은 충성을 요구당할 뿐 주인에게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

 

둘째, 이 관계가 정상적일 때는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가족 관계처럼 지속적이고도 평화로운 모습을 보이나, 서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을 때 당사자들은 폭력으로 이를 해결하려 든다. 그것은 이 관계가 정해진 계약이나 법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말기에 자주 일어났던 노예들의 반란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위에서 지적한 주종 관계의 상호의존, 강한 연대감, 가족적이고 자발적인 분위기는 이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이고, 일방적인 강제성과 폭력적인 해결은 이 관계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주종 관계의 이 두 특성이 주인과 종이 등장하는 예수의 비유들 안에 잘 나타나 있다.

 

밭 가는 종의 비유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 집 주인은 시골 농가의 평범한 농부이다.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은 농사일과 식탁 준비를 동시에 해야 한다. 그가 데리고 있는 종은 농사일과 식탁 준비를 동시에 해야 한다. 이 비유 어느 구석에도 그가 꾀를 부리거나 펀둥펀둥 놀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하루 종일 밭에서 또는 들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난 종이 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은 그에게 식탁 시중까지 요구한다. 비유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청중은 이를 당연시한다.

 

7절의 질문은 "물론, 아닙니다."라는 답변을 전제로 한 것이다. 9절의 질문.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의 직역은 그가 지시받은 대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인데, 이 질문 역시 물론 아닙니다.”라는 답변을 전제로 한다.

 

10 절의 너희도17,1 ‘제자들이나 5절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이 비유의 출처는 어디인가?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는가 아니면 초대교회의 산물인가? 복음서의 다른 비유 전승처럼 이 비유도 양자택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비유의 근간은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나, 이를 초대교회에서 자체의 봉사자들에게 적용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복음 저자의 편집과정을 통하여 오늘과 같은 형태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처음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주요 대상은 바리사이처럼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 의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상급과 우리의 선행을 맞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비유에 자주 등장하는 종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해석한다. 초대교회 사도들, 특히 바오로는 자신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사도4,29; 로마1.1; 1고린7.22; 갈라 1.10). 이 비유를 대하는 초대교회의 복음 전파자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고도 쓸모없는 종으로 생각하려는 가르침을 비유에서 끌어내었다이 비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전한다.

 

첫째, 모든 의무를 다 수행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의무수행을 완벽하게하고 나서도 우리는 아직 은총에만 의지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일을 자기 과시나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참조; 로마 3,27; 1고린1,29; 에페 2,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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