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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2주간 수요일]열사람의 나병치유 (루카17,11-1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1 조회수1,13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11일 수요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17,11-19)

2019.11.13.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1독서<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에 따라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티토 3,1-7)

신자들에게 상기시켜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남을 중상하지 말고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어 모든 이를 아주 온유하게 대하게 하십시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3ㄴㄷ-4.5.6(◎ 1)

◎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아쉬울 것 없어라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당신 이름 위하여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당신 함께 계시오니두려울 것 없나이다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환호송 1테살 5,18 ○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복음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루카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13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스승님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연중 제32주간 수요일제1독서(티토3,1-7)

 

"사랑하는 그대여, 신자들에게 상기시켜, 통치자들과 집권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게 하십시오." (1)

 

사목자로서 신자들의 양육을 위한 지도와 사목의 지침에 대하여 교훈 주고 있는 2장 1~3장 11절의 단락 가운데 본장 1절과 2절은 신자들의 일반 사회 생활을 위한 지도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바오로 서간과 바오로계 공동 서간에는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각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일원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과 윤리에 대해 권면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로마13,1~7; 1티모2,1~3; 1베드 2,13~17). 

바오로는 본절에서 하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생활 지침을 제시하면서 우선 위정자들에 대한 바른 윤리는 순종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통치자'로 번역된 '아르카이스'(archais; rulers)의 원형 '아르케'(arche)는 '시작하다'(루카3,23)라는  뜻이 있는 동사 '아르코마이'(archomai)에서 유래하여, 원래 시간의 연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기점을 말하는 '시작', 만물의 시작을 말하는 '태초'(마르10,6;13,19; 요한1,1; 2테살2,13)이라는 의미를 지녔으나, 점차 '개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지도자'(콜로1,18; 묵시1,8; 21,6; 22,13)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바오로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아르케' 대부분 영적 존재인 천사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으나, 여기서는 문맥으로 보아 국가의 위정자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집권자' 마찬가지다. '집권자'로 번역된 '엑수시아이스'(eksusiais; authorities)의 원형 '엑수시아'(eksusia)는 '선택권'(1코린9,12,18; 2테살3,3,9), '정신적 ,육체적인 힘'(마태9,8; 사도8,19; 묵시9,3), '권위와 권리'(마태9,6; 마르2,10; 루카5,24),'통치권'(마태28,18; 묵시12,10; 17,13) 등을 의미한다.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유사어로 '뒤나미스'(dynamis)도 있는데, '뒤나미스' 체력과 정신력에서 나오는 힘에 강조점이 주어진 주어진 반면, '엑수시아'는 그것이 신적 권위이든 국가적 권위이든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에서 발휘되는 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복수형으로 쓰여 국가의 공직자들 의미한다.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러한 세상 통치자들과 공직자들의 권세에 순종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바오로는 '복종'을 의미하는 단어로 동의어 '휘파쿠오'(hypakuo) 대신 노예가 주인에 대하여 절대 복종함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단어인 '휘포탓소'(hypotasso)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보아 복종하되 종이 그 주인에게 복종하듯이(티토2,9)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덧붙여 '순종'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의 원형 '페이타르케오'(peitharcheo)는 본문과 사도 행전 5장 29절,32절에만 쓰인 단어로 하느님께 보종하는 것을 의미할 때도 쓰인다.


이처럼 바오로는 하느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위정자들의 권세가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하며, 따라서 그 백성은 위정자가 같은 믿음을 가진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상관없이 모두 그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마태17,24~27; 22,15~22; 로마13,1~7; 1티모2,1~7; 1베드2,13~17).

특히 바오로는 앞서 '복종하고'로 번역된 '휘포탓세스타이'(hypotassesthai)는 현재 수동태 부정사 쓰고, 이어 나오는 '순종하며' 번역된 '페이타르케인'(peitharchein)은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 쓰고 있다.

 

여기서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순종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자신에게 이로울 때 뿐만 아니라 불리할 때도 복종과 순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동태와 능동태가 교차 사용된 것은 위정자에 대한 복종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명령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자는 이에 대해 보다 능동적인 태도로 임해야 함 보여준다.

 

당시 사회적인 정황으로 볼 때, 크레타인들은 로마 통치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폭동, 살인 등에 가담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바오로는 이런 자들을 향해 폭력적인 대항 보다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그들이 신자로서 해야 할 선한 의무를 다하도록 교훈하라고 티토에게 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읽고 주해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몸담고 있는 신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까를 줄곧 생각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읽으면, 어떤 독재 권력도, 부패한 권력도,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 권력도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무조건 신자로서의 해야할 선한  일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여야도, 각 단체안의 권력도, 항상 선거때마다 바뀌어, 자신과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통치자와 집권자가 될 수 있으니,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흥분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 그것도 신을 부정하는 권력도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하느님이 허락하셨다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하는가?

 

물론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악을 허락하시는 이 문제, 소위 신의 정의(공의)에 관한 신정론(神正論)에 관한 문제 옛날부터 내려온 문제이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명제를 "보다 더 큰 선을 위하여, 보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하여" 라고 일축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셔서 우리의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니(예지; 豫知), 우리믿는 자들을 좋고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고, 구원과 성화에 이롭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러한 불만스런 환경을 허락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기도하라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그 뜻안에도, 이 땅의 국민과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좋은 권력도 하늘에서 허락하셔야 된다는 느낌을 가진다.

 

특히 성경 안에서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서, 그들이 선민으로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견지하고,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계명에 충실했을 때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를 계속 지을 때에는, 주변 외교 열강들의 침입을 받아 나라를 잃고 유배당하고 종살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집트나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는 선민 이스라엘을 정신 차리게 하는 하느님의 매, 사랑과 회개의 채찍이요, 도구라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의 초점이 동북 아시아로 맞추어지는 작금에서, 유일하게 믿음의 선조들이 피뿌려 얻은 신앙때문에, 독립을 위해 순국한 애국 열사들의 희생때문에,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만이 동북아시아에서 최고로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주위의 나라들을 살펴 보면, 소련은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하지만, 중국 북한의 유물론적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우상 숭배를 하는 일본에 의해 둘러싸인 대한 민국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지구 상에서는 그래도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의 공존을 위해 좋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재를 추구하고 사는  나라이며,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동북 아시아에서 현재 가장 윤리적으로 죄를 많이 짓는 나라이며, 수평적으로 그 죄들을 한류따라 그리고 한류처럼 전 세계에 퍼뜨리고 있는 사탄의 도구 구실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계속 거스르고, 낙태, 살인, 사음과 간음, 성추행 ,성폭력, 가정 파괴, 이혼, 이중생활, 청소년 탈선, 마약, 자살, 사행성 오락, 도박, 게임 등으로 이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세포단위인 가정을 파괴하고, 반생명적 반인륜적 죽음의 문화, 사탄의 문화를 자꾸 만들어 가고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대한민국은 온 천지를 온갖 죄악과 불륜과 불의의 마귀의 운동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책임을 모든 국민, 특히 크리스챤이 지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나 자연 재앙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을 치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요, 필요악(necessary evil)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북한이라는 지구 상에 하나 뿐인 변태적 공산주의, 독재, 세습체제는, 지금도 굶어 죽어가는 800만명의 인민을 살리기 위해, 남쪽에서 인도적 차원에서, 무조건 인간의 기본권과 생명의 존중 차원에서 도와주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남한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회개를 통해, 눈물어린 기도와 희생(성시간)을 통해 무너지는 나라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아야 한다.

 

러니까 지방자치장의 보궐선거라든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와 각 정당은 권력을 잡기 위해 국민, 국민을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대다수 힘없고, 삶의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작고 소박한 행복을 추구하며죄짓지 않고 사는 소시민들을 국민으로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은 구조적으로 썩어 있기 때문에, 윤리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이 권력은 하느님 채찍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왕들이 부패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렸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가 왕의 영향을 받고, 왕과 더불어 망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성직 수도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여도 야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제일 걱정하는 것은 사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드러난 것만도 천조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자기 분수도 모르고,각 정당의 후보들이 복지,복지를 들고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난뱅이도 인권이 있으니,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정당한 혜택은 누려야 하겠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부채가 아주 많은 나라이고, 국민 모두가 근검 절약할 나라이지, 잘못하면 그리스처럼 국가 부도가 날 나라라는 것을 왜 권력자들은 이야기 하지 않는가!

 

마치 우리나라는 신용불량자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최고급 외제차를 렌트해서 끌고 다니며, 명품 옷과 가방을 들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고 있는 격임을 모르고 있는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땅에 실추된 윤리와 도덕성이며, 잃어버린 동방 예의 지국의 명성을 다시 찾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될 때, 우리는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세포 단위인 무너진 가정과 사회를 회복할 수 없으며, 북한 공산주의자들 한테 맞아야 하고, 북한과 같이 망해야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몇 십년 후퇴해야 한다.

 

지금 북한이 공개적으로 남한의 선거에 노골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이미 남한의 고정 간첩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공작하고 획책하고 숨어서 조정하고 있다. 어느 누가 정권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얼음장을 놓는다.

그러나 북한이 위협한다고 흔들리면, 그건 정부도 국가도 아니다. 성경을 보면, 전쟁은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결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깝작되는 것은 마귀들이 자기들의 왕국이 무너질까봐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것이다. 중국 마저도 새로 선출된 지도자가 많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개방된 사람이 되었다.  북한이 발악하면, 연평도 같은 일들이 국지적으로 일어날 수 도 있다. 거기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몰락은 비가시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회개와 기도로, 눈에 보이게는 가진 자들과 있는 자들의 경제 제재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람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이념도 사상도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후보들 중에 누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친한가!

평화적 통일은 친북 정책을 남한 사람들이 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남한의 회개를 보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를 회개시켜 주셔서 하느님의 선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사상이 잘못되었거나,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친하거나, 남한의 자기 혁신과 회개 없이 인간의 힘으로 통일이 가능한 것처럼 선전하는 자들은 절대로 뽑아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평화적 통일과 북한과 중국에 하느님의 나라를 공개적으로 세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 이 중차대한 순간에, 대통령을 잘 못 뽑으면,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온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 누가 뽑히던, 한 세상 살다 가는 것, 잘되든 망하든 같이 가는 건데~~이렇게 말할 수도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 지상의 권력 아래 사는 것보다는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루 빨리 살기를 원했고, 그러기에 오늘의 말씀과 같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어떤 권력 앞에도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론하면서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변화 없이 어떻게 이율배반적인 믿음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지구도 인간들의 욕심과 남용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고,그 끝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복음적 가치관과 사회 정의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가? 그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노력할 뿐이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소관으로 맡길 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 영혼안에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건설하는 일이고, 모든 권력, 체제, 이념을 넘어서 수많은 영혼들을 찾아 나서는 일이며, 그들의 영혼안에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이 시대에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은총의 지위,영혼의 성화를 도모하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혁명(열심)당원(zellotai; 젤로타이)가 되어 이 땅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 안타깝다.


<이 글은 지난 대선전에 수사 사제의 글을 올린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똑같다고 본다.>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17,11-1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5~16)

 

여기서 '병이 나은'에 해당하는 '이아테'(iathe; he was healed)의 원형 '이아오마이'(iaomai)는 '치료하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아오마이'(iaomai)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치유 관련되어 사용되었는데, 특히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이루어질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어로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여 주는 동사이다(이사35,3~6; 61,1).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든 치유의 본질이 기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세 있는 말씀으로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신 치유자 예수님께 있음을 암시한 다.

 

열 사람의 나병 환자들은 눈으로 아무런 증거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제들에게 검증받기 위해(레위14,2) 가던 도중에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루카 복음 17장 15절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았다고 말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단순히 가시적으로 나타난 치유 기적을 이 한 사람만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나병 환자만이 자신의 치유자가 바로 예수님임을 깨닫고 감사하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나병 환자가 자신에게 일어난 치유 기적의 배후에 하느님께서 계셨고, 그분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기에,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며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이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B.C.722년 북부 이스라엘의 아시리아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 그들과 혼혈이 되어 혈통의 순수함이 변질되고, 아시리아의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훼 유일신 신앙마저 변질시켜 혼합 종교를 섬기던 장본인이었다.

그래서 혈통의 순수함과 야훼 유일힌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같이 여겨져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꼐 은혜를 입고 돌아와 무한 감사를 표시 반면에, 선민으로서 다른 민족에 비해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많이 받았던 유대인으로 여겨지는 나머지 아홉은 오히려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사실에만 기뻐할 뿐, 최소한의 어떤 감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루카 복음사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더 합당한 삶을 산다는 모습을 통해서,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과 이름만을 소중히 여기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천주교회는 어떤가?)


여기서 '엎드려'에 해당하는 '에페센 에피 프로소폰'(episen epi prosopon; he threw himself; he fell down his face)은 직역하면 '그는 얼굴을 떨어뜨렸다'이다.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자신의 얼굴을 떨어뜨려 땅에 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존경과 경배의 표시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치유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드렸다'로 번역한 '유카리스톤'(euchariston; thanked;  gave thanks)의 원형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는 성경에서 주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와 성찬례 축복 기도를 가리키는 용례로 쓰였다.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 행위에 이 용어가 쓰인 것은, 그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치유에 대해 하느님께 돌리는 것과 같은 감사의 표현을 했음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그는 자신의 치유를 통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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