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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기적이니까 피조물이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1 조회수1,820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0년 가해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이기적이니까 피조물이다>



 

복음: 루카 17,20-25



LORENZETTI, Pietro 작, (1325)  

 

 

 


오늘 복음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언제 오느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다윗 시대처럼 외적으로 로마를 몰아낸 강력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시기 위해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십니다.

 

내적인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동시에 행복의 나라입니다. 태초에 하와는 뱀에게, 아담은 하와에게 지배당했습니다. 자아나 사람에게 지배당하면 하느님께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만이 남습니다. 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에 의해 지배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므로 우리를 사랑할 줄 아는 분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창조자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본성상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찾게 됩니다. 피조물은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먹고 지배해야 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본성상 누군가를 위해 피를 흘리지 못합니다. 다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삽니다.

 

물론 무리생활해야 하는 고등동물일수록 사랑을 조금씩 부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기적 본성에 지배당합니다. 만약 개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일까요? 사랑과 매우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인간에 의해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알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동물들은 사랑에 대해 조금은 배우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 이기적입니다. 이기적이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조차도 이기적 본성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키아벨리군주론 17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이타심은 배워서 실행하는 것이고, 이기심은 모든 피조물의 본능입니다. 배워서 나오는 행위는 본능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은 죄수들을 호주로 보내어 신대륙을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에서 호주로의 여행은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배의 선장들은 형기를 마치면 자유인이 될 죄수이자 신대륙 개척자들을 최대한 사망사고 없이 호주로 이송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3년간 12.2%의 죄수들이 험한 항해를 견디지 못해 사망하였습니다. 아무리 죄수지만 너무 가혹하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영국은 그래서 새로운 시도들을 해 봅니다.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선장을 선발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획기적인 성과를 낸 묘안이 나왔는데, ‘성과보수 원리를 이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에게 출발할 때의 죄수 숫자가 아니라 도착할 때 살아있는 죄수 1인당 호송비를 지급한 것입니다. 결과는 이후 세 척의 배가 422명을 호송했는데 사망자는 단 1명뿐이었습니다. 신앙심으로도 안 되고 도덕적 당위성으로도 안 되던 것이 돈으로 된 것입니다.

[참조: 인간 세계의 불편한 진실, 이기심, 유튜브 채널 ‘Hunet’]

 

 

인간이 나에게 의리 없게 이기적으로 대한다고 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본성을 갖게 태어났습니다. 다만 그런 본성으로는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없기에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지 못합니다.

이런 논리로 보자면 본성상 이타적일 수 있는 존재는 피조물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본성상 타자의 에너지를 빼앗으며 사는 본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내어줄 수 있는 본성을 지닌 분은 사랑의 에너지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만이 본성상 이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피를 흘려 아기를 낳을 때 이타적입니다. 어쩌면 가장 창조자를 닮는 시간입니다. 피를 흘려 생명을 낳는 분이 창조자이고, 남의 피를 흘려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삶에서 창조자의 삶으로의 변환을 꾀하는 인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본성의 변화를 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창조자의 피입니다. 본성은 새로 태어나야만 바뀌는데 우리를 창조자의 본성으로 바꿔줄 수 있는 분의 피는 창조자의 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전쟁 추운 겨울에, 어머니가 자신을 겉옷으로 감싸 자신을 살려준 것에 대해 아이도 성장하여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하며 겉옷을 벗어 어머니 무덤을 덮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겉옷을 벗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처럼 사랑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동시에 수난의 필요성도 말씀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죽음은 믿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피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로,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 삽니다. 이 믿음은 그 부모의 피 흘림의 열매입니다. 오직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창조자라 믿어야 누군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랑의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피를 흘려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창조적 본성에 지배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https://youtu.be/T8QPJ2qBYHs

유튜브 묵상 동영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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