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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의 나라 (루카 17,20-2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2 조회수1,13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12일 목요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하느님의 나라 (루카 17,20-25)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 염철호 요한 신부 

1독서<그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들여 주십시오.>(필레몬 1,7-20)

사랑하는 그대여, 7 나는 그대의 사랑으로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습니다그대 덕분에 성도들이 마음에 생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큰 확신을 가지고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명령할 수도 있지만,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囚人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18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을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19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내가 갚겠습니다그렇다고 나에게 빚을 진 덕분에 지금의 그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 그렇습니다형제여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이 생기를 얻게 해 주십시오.

 

화답송 시편 146(145),6-7.8-9.9ㄴㄷ-10ㄱㄴ(◎ 5)

◎ 행복하여라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는 이!

○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시온아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복음 환호송 ○ 주님이 말씀하신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한 15,5 참조)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보라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필레몬7~20)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0.12)

 

펠레몬서는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 등과 함께 옥중서간으로 분류되고 특히 콜로새서와 동시에 기록되었으며 수신지가 같다.

다만 콜로새서가 콜로새 교회 공동체 앞으로 보내어진 공적 서간이라면, 필레몬서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적 인물 필레몬 개인에게 보내어진 사적 서간이다.

 

당시 A.D.62년경 바오로가 제1차로 로마 옥중에 수감된 상태에서 필레몬에게 이와 같은 개인 서간을 보낸 목적은, 오네시모스(Onesimus)라고 하는 종이 용서받도록 중재하기 위함이다.

 

오네시모스는 그의 주인 필레몬에게 해를 끼치고 달아난 노예였다.(15절,18절)

그는 필레몬에게서 무엇인가를 훔쳐서 달아났든지, 아니면 어떤 중요한 일을 맡아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냥 도주해 버린 종이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이처럼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는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스가 로마에까지 도망쳐 있다가 거기서 바오로의 사목을 통해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14절) 그리고 바오로 곁에서 시중드는 자가 되었다.

 

바오로가 그를 본 서간에서 '심장과 같은 그'(12절)라고 하며, 콜로새에서는 '충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콜로4,9)라고 소개할 정도로 오네시모스는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오네시모스를 계속 곁에 두어 자신을 시중들도록 하는 것이 유익했으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를 주인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필레몬에게 오네시모스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줄 것을 호소하는 이 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결국 본 서간의 주인공들인 필레몬과 바오로와 오네시모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맛본 자들이, 어떻게 실제의 삶과 그 속에서 관계를 통해 그러한 용서의 사랑을 반사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오네시모스도 되고, 때로는 필레몬도 되며, 때로는 바오로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목을 돕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을 향하여 '아들'이라고 불렀다.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고(2티모1,2),

티토를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라고 했다(티토1,4).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이라고 지칭된 오네시모스 역시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거듭났으며, 바오로의 사목을 많이 도운 것으로 나온다.

 

'얻은'(낳은)이라고 번역된 '에겐네사'(egennesa)의 원형 '겐나오'(gennao)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전존재의 변화를 나타낸다.

전에는 죄를 짓고 도주한 노예였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이다.

 

바오로는 랍비 문헌이나 쿰란(Qumran)문헌에서 발견되듯이, 학생들에 대한 영적 부권(父權)의 측면에서 오네시모스를 대했다.   

바오로가 오네시모스를 영적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 안에서 갖게 되는, 교사와 제자와의 관계를 말한다.

 

한편, '오네시모스'는 '유익한 자'라는 뜻으로, 당시 노예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출신의 필레몬의 이교도 노예였다.

당시 콜로새 출신의 노예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많았고, 게다가 자신의 집에 해를 끼치고 달아난 오네시모스의 행위는 주인 필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이 서간을 접한 필레몬은 본절에서 오네시모스란 이름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오로의 영적 아들로 거듭났다는 소식이 그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내 심장과 같은 그를'

 

'심장'으로 번역된 '스플랑크나'(splangchna)는 7절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본래는 '창자',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내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 단어는 긍정적 감정 즉 친절, 자비심, 동정심과 같은 추상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주인의 마음에 이러한 긍정적 감정을 갖도록 해주는 종이나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부모들은 자녀를 가리켜, 자신의 '스플랑크나'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바오로가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오네시모스에게 자녀를 향해 나타내는 끓어넘치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친자식 이상으로 자신의 심장처럼 극진히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비록 노예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자신을 섬기는 그 모습 속에서 마치 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극진한 사랑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회심한 오네시모스는 이미 바오로의 일부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 필레몬으로부터 오네시모스가 용서함을 받아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기에, 심복같은 그를 일단 필레몬에게 보내는 것이다.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0ㄴ~21)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때'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한 대답을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의 실체에 대해 모르고, 그 도래의 시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인식을 잘못하고 있음을 먼저 가르쳐 주신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모습'에 해당하는 '파라테레세오스'(paratereseos; observation)의 원형 '파라테레시스'(parateresis)는 눈으로 볼 수 있는즉 가시적 방법으로서의 '관찰'이라는 뜻이다.

특히 여기서는 표징들에 대한 관찰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 속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 어떤 징조가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이 가시적으로 어떤 표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 내어서 그 정확한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가운데 가시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다시 일으키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시는 지극히 복된 나라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는 유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물리적 시각으로 확인되는 세상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미래에 당신의 재림을 통해 온전히 완성되어져 나타날 하느님의 나라를 부정하신 게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도래로 이미 이 땅 가운데 영적인 하느님의 나라, 즉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의 영적 무지와 하느님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여기서 '가운데에'에 해당하는 '엔토스'(entos; in the midst of; among; within)을 '안에'(within)라고 번역하면, 하느님의 나라가 '개인의 내부에', '마음 안에'라는 뜻이 되고, '가운데에'라고 번역하면, '너희 가운데에' 혹은 '이 세상 가운데'라는 뜻이 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을지라도, 당시 예수님 앞에는 함께 동행한 제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한 번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있다'에 해당하는 '에스틴'(estin; is)은 원형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이다.

이 시제는 하느님의 나라의 미래적 측면보다는 하느님의 나라의 현재, 즉 현존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활동을 통해 현재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구원과 통치를 인정하며,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이들 가운데 이미 임하고 있는 나라이므로, 바로 이 순간도 우리는 실제로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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