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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바로알 / 하느님의 아들이 되다(로마8,12-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3 조회수1,462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경바로알기 2020.11.13..

(공동번역성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다(로마서와 함께)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아멘.(로마8,12-16)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안 된다. 이런 말씀 때문에 이 구절을 성화의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갖다가 쓰는 구절이죠? 그러나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는 그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를 이끌고 간다. 하는 이 말도 사실은 굉장히 무서운 말인 거예요.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여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제가 이걸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서 설명을 해드릴 텐데 오늘은 그 서론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물리학과 화학의 발달로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가 원자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고대시대에는 물질의 근원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 같은 사람은 물질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고,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물질의 근원을 숫자, , 넘버라고 봤습니다. 헤라크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봤고요 어떤 이는 흙이다, 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각자의 추론들을 내어놓아 그들의 명제를 합리화하고 증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물질의 근원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존재의 근원. 말씀이라! 그래요. 요한복음 1장에 잘 나오죠? 창세기에도 잘 나오고. 물질의 근원, 존재의 근원은 말씀이다. 그래요.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요. 물론 더 쪼갤 수도 있습니다만, 요즘 더 쪼갰는데요. 하여튼 우리가 알고 있는 거, 원자.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는 99,99% 이상이 다 그냥 진공입니다. 전자와 원자 핵, 그거는 거의 감지가 안 되는 것이고 그것들이 회전하고 운동하여 원자를 구성하는 거죠? 진공이에요. 그 진공에 가까운 원자의 모양과 내용을 주는 것이 법칙과 원리라는 거죠. 어떠한 법칙을 누군가가 거기에다가 부어놨어요. 매겨놨더니 그 법칙에 묶여 그것이 모양과 움직임과 내용을 갖더라는 것입니다. 그 법칙과 원리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죠? 그건 스스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는 게 원리와 법칙이란 거거든요. 그러니까 물질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 맞는 거죠? 그거 말고는 꾹 눌러버리면 그냥 진공이에요. 먼지도 아니에요. 말씀이 빠진 물질은 존재일 수조차 없어요. 우리가 거시 세계에서, 이 거시 세계인 일상에서 경험하는 그 물체들이 지금 보는 것처럼 이렇게 확실한 어떤 모양, 형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원자 세계의 입자가 그와 같은 각자 나름대로의 모양 특질을 갖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모양이라는 건 빛을 비추었을 때 반사된 빛으로 판단되거나 사실 색깔이라는 것도 그래요. 빛을 비추었을 때 그것이 어떤 빛을 반사하느냐에 의해 우리가 색깔이라고 보거든요. 그럼 그 색깔은 도대체 뭐냐고요? 그렇게 반사된 빛으로 판별하거나 감각을 통해서 감지된 기하학적 형태를 우리가 그냥 모양이라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미시세계인 그 원자세계는 그와 같은 의미의 모양이라는 그 말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실지로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그 모양이라는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원자의 세계는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존재합니다. 거시세계에서 멈춰있는 것 안에 원자세계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렇게 그 모양이라는 그릇은 하느님이 붙들고 계신 말씀이라는 법칙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없으면 그냥 신기루에 불과한 거예요. 그냥 없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걸 혼돈과 공허라고 이야기합니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 법칙이 떨어지니까, 이렇게 되어라! 라는 법칙이 떨어지니까 거기에서 물질과 존재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70%가 물이에요. 날 물로 보지 마! 그러지만 물이에요. 70%가 물이면 물이지 뭐. 뭘 물로 보지 마? 물인데. 식물도 70% 이상의 물을 구성요소로 갖고 있고요.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지구에도 70%가 물이네요?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장육부처럼 오대양 육대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우주나 사람의 세포나 인간의 육체나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나 모두 그 같은 과정을 가고 있고요 생성이나 멸망의 그 과정이 전부 똑같아요. 심지어 구조까지도 똑같고 돌아가는 원리도 똑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겠느냐고요?

성경은 그 물을 가리켜서도 말씀이라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말씀이라는 게 빠져버리면 그 즉시 없음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원자를 원자 되게 하는 것도 말씀이고 인간과 지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도 말씀의 그림자 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물론 하느님인 거구요.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물이 점점 줄어들어 기근이 올 것이고, 결국 물이 없어 멸망할 거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는 그 기근을 말씀의 기근이다, 라고 확실하게 짚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심판이요, 멸망이다, 그래요.

, 세상과 이 육신, 그리고 묵시세계의 그 말씀은 같은 과정 같은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도 늙으면 늙을수록 수분이 빠져나가서 주름살이 생기고 건조해져서 죽는 거고 지구도 점점 물을 상실하며 사막화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환경학자들이나 환경단체에서 찍은 사진들 보면 지구는 급속히 사막화 되어 가고 있어요. 호 코스모스의 세상 전체가 물을 잃어 가면서 멸망의 자리로 내닫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60억 인구 중에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40% 이상이에요. 그런데 앞으로 십 년 후면 세상 인구의 70% 이상이 그 물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다, 라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성경대로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 산천초목을 비롯한 모든 만물이 전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될 것입니다.

재밌는 건,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물이라는 것이 사람의 말에, 심지어 글과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더라는 거예요. 예전에 일본의 과학자가 그것을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했을 때만 해도 물리학계는 그 사람을 비웃었어요. 공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걸 갖고 와! 그걸 학문이라고 갖고 왔니? 하고 전부 비웃었는데 요즘은 양자물리학이 대세입니다.

물을 시험용 용기에 담고 그 물에게 좋은 말을 해줘요. ‘고마워, 시원해,, 네가 최고야, 맛있었어.’ 이렇게. 미친놈 같죠? 물에다가 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험을 했단 말에요. 그렇게 말을 직접 들려주거나 종이에 써서 붙여주면 그 물의 입자가 활짝 필 꽃처럼 예쁘게 반응을 해서 육각수가 된다 그래요. 그러니 과학자들이 그런 연구논문을 접했을 때,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현대 물리학은 이 물리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이 물리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힘인, 공식으로 밝혀낼 수 없는 그 양자물리학에 더 몰두하고 있다니까요. 심지어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만 해도 물 입자는 그 생각에도 반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세계에 파장이 일어났어요. 보이는 이 물리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감지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도 요즘 어떤 젊은 양자물리학자의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강을 했다, 그래요. 원자크기의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그 물리 현상인 그 양자현상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물질세계의 법칙이나 원리로 공식화해서 그 속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아로슈와 미국의 와인랜드가 전부 이 양자물리학자들이에요. 그들의 전공분야가 양자 얽힘, 고전 물리학에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그런 내용이에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도 그 앞에서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을 버리고 양자 물리학을 붙들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진리 아니었나요?

그런데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진리라는 건 하느님이 그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줄 때마다 그 명제 값을 거짓으로 내 놔요.

실제로 영국의 북부 도시인 에든버러 시가 그 시 안에 피들 공원이라는 곳에 열두 그루의 느릅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열두 제자의 이름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팻말로 붙여 놨다 그래요. 물론 그중의 하나는 유다 나무였겠죠? 사람들이 그 유다나무 밑의 그늘로는 아무도 안 가요. 재수 없어서. 심지어 그 나무에게 욕을 하고 저주하고 차기도 하고 이러고 갔어요. 그런데 열두 나무 중에 그 유다 나무만 유독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에든버러 시에서 팻말을 바꿨습니다. 그 열두 나무 중에 베드로 나무만 제일 잘 자라더라는 거예요. 우리하고 제일 친숙하니까 그런가 봐요. 딴 제자들을 잘 모르니까. 거기만 가갖고 계속 칭찬했겠죠. 그래서 베드로 나무하고 유다 나무하고 팻말을 바꿔놨더니 원래 유다 나무였던 시들시들 말라죽어가던 나무가 베드로 나무처럼 살아나고 그 베드로 나무가 죽어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있어요. 고구마 순을 수경재배, 이렇게 보이게 심어 놓고 한쪽 표본들에게는 계속 칭찬을 해주고 좋은 말을 들려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한쪽 표본들에는 계속 욕을 하고 저주의 말을 하고 나쁜 말을 들려줬더니 좋은 말을 들은 이 고구마 순이 네 배나 빨리 크게 건강하게 자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은 말에 반응을 합니다. 말이 물이고 물이 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건 과학이 증명해 내기 전에 이미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생경하지가 않아요. 당연히 그렇지! 물은 말에 반응을 하여 죽고 살기도 하는 거라니까요. 여러분이 나쁜 물, 나쁜 말을 접하게 되면 이 물은 거기에 반응하여 나쁜 물로 완성되어 죽는 거예요. 이 물들이(사람들). 성경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도 이왕이면 좋은 말을 많이 해주세요. 자기도 이해 못하는 그런 욕들 같은 거 하지 마시고,, 막 육시를 할 놈, . 그 육시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세요? 여러분? 그런데 자식한테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급살 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애들이 그런 나쁜 말을 듣고 자라서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현상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의 경지이긴 하지만 이왕이면 좋은 말을 하세요. 서로서로, 부부간에도 그렇고.

그러나 성경에는 두 종류의 물이 있어요. 하나는 나쁜 말에 의해 나쁘게 완성되는 나쁜 물이고 하나는 좋은 말에 의해 좋게 완성되는 좋은 물이에요. 그래서 오직 히브리 성경에만 물이 쌍수로 나옵니다. 이 세상 어떤 단어에 물을 복수로 쓰는 단어가 있어요? Water! 물에는 복수를 안 쓴다니까요. 우리나라도 뭐 물들, 그러나요? , 거기 물들 좀 갖고 와. 그러나요? 아니죠? 그런데 히브리어에만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어에만 물이 복수에요. 쌍수로 나와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나와요. 땅의 물로 하늘의 물을 깨닫지 못하면 저주의 물, 심판의 물에 익사하게 된다는 언약이 창세기에 나와요. 그리고는 성경 내내 그 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반석에서 쏟아지는 물, 생수, 배에서 나오는 물,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 나중에 묵시록으로 가면 무슨 강, 에덴동산에서 강. 계속 물 이야기가 나와요.

자 그렇게 아래의 물, 하느님이 우리에게 아래의 물로 주신 그것으로 그 위의 물, 위의 말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 아래의 물에 빠져 죽어요. 그러나 이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닫게 되면 그 아래의 물, 그것이 복이에요. 그것이 선물이라니까요. 그렇게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깨닫지 못하면 아래의 물에 빠져 죽게 되는 그 현실을 기록한 게 노아의 홍수 사건이요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이요,, 요나의 이야기요,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의 이야기요 이런 거예요.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은 양자학에서 말하는 Quantum Entanglement(양자얽힘)로 얽혀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푼다! 그러죠. Quantum Entanglement가 뭐예요? 노벨 물리학상 받은 사람들이 거기에 전문가들인데, 요번에 같은 것은, 같이 창조된 것은 아무리 거리를 멀리 떨어트려 놓아도 여기에다 자극을 주면 여기까지 함께 자극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바 아닙니까?

여러분은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면 그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래의 물로 위의 걸 모르면 이거는 단절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에 빠져 죽는 거예요. 이걸 율법이라 그래요. 이걸 세상이라 그래요.

70%가 물인 이 지구상에 정작 사람이 먹을 물이 2%도 안 된다는 거 아십니까? 70%가 물인 우리 몸에 그 물이 2%만 떨어지면 사람들이 갈증을 느끼죠? 그래서 2% 라는 음료도 나와 있는데, 그런데 이 전체 지구상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물이 100% 중에 2% 밖에 안 돼요. 5%가 민물인데 대부분이 빙하로 얼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물 중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기 생명에 사용할 수 있는 물은 2%도 안 돼요. 그러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은 하느님의 그 말씀, 그것과 Quantum Entanglement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이 세상에 떨어지는 하느님의 말씀, 어마어마하게 지금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 중에 진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말씀은 2% 미만이라는 거예요. 나머지는 먹으면 죽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그렇게 세상과 맞물러 가고 있다니까요. , 이렇게 우리는 먹을 물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위기의식을 당연히 가져야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그 생수를 찾아 하느님께 아이테오.두드리다 할 수 있는 그런 열정들이 있어야 된다니까요.

보이는 물리의 세계에만 묶여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 보이는 세계의 최고 덕목, 뭐예요? 도덕과 윤리잖아요.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성경을 보거나 신앙생활 속에서 그걸 도덕과 윤리로 밖에 못 읽고 그렇게 밖에 설명을 못 해줘요.

그런데 성경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을 그렇게 아래의 것으로 보아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해버리면 죽는다고 그런다니까요. 그걸 죄라 그래요. 성경은 그걸 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하고 그런 거짓말을 전하는 이들을 거짓 예언자라 그래요. 그리고 그 세력을 총칭하여 사탄, 대적 자! 라고 해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인도되고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원래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게 이 보이는 세상이며 존재들인 거예요. 그럼에도 그러한 영적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보이는 세상을 끌고 가는 그 힘의 실체와 내용을 깨닫지 못하면. 보이는 세계에 머물다가 그 보이는 세계의 진리 같은 그 법칙, 인과율, 원인을 너희들이 제공한 만큼 너희들에게 결과를 줄게 그 인과율에 붙들려 인과율로 심판받아 죽는 거예요.

하느님이 요구하는 결과는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묵시록의 심판의 장면에 보면 전부 그 심판의 대상들이 자기의 行爲, 자기의 함으로 심판받아 죽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진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입니다. 물리의 세계에 양자물리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용으로 품고 있는 것이고 그 세계에 의해 경륜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현상계에 일어나는 모든 건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나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게 없어요. 뜻이 없는 소리가 없고 내용이 없는 현상이 없는 겁니다. 이건 시편 기자들을 비롯한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이야기에요. 껍데기로 보지 마, 나타난 현상으로 보지 마, 그걸 그대로 판단하여 행하지 마, 그러면 죽어! 단지 우리 인간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 모든 것이 다 어떤 것의 그림자, 모형의 역할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봐야 하는 거고, 보이는 성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진리를 봐야 하는 것이며, 그대로 그걸 도덕 윤리로 봐버리면 안 돼요. 그리고 보이는 예수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영, 그 성령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머리에 눈이 두 개가 달려 있고 귀가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눈이 왜 꼭 두 개여야 됩니까? 여러분, 눈이 두 개라고 한 쪽은 저쪽 보고 한 쪽은 이쪽 보게 되나요? 대상을 두 개로 나눠 볼 수 있나요? 그건 꼭 치료를 받아야 돼요. 어차피 두 개인데 한 상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럼 도깨비처럼 크게 하나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나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주시는데요, 아래의 것으로 위의 것을 알아먹으라고 하느님이 두 개를 보게 하세요. 너희들은 두 눈으로 두 상을 하나로 반드시 봐야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죠. 하느님은 위의 소리를 아래의 소리로 들려주세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소리로. 인간의 책으로 주시는데 그 아래의 소리로 위의 많은 물소리 같은 그 소리를 알아먹어야 그가 하느님의 사람이다, 해서 두 귀가 있는 것입니다. 둘로 듣지만 하나로 들어야 되고, 둘로 보지만 하나를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들의 호흡이며 생명이고, 코가 하나, 그걸 그대로 한 마디로, 한 말로 해야 너희는 내 백성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래의 것으로 위 걸 보면 되는 거예요. 아래 소리로 위 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말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 땅의 물리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묵시 세계 속에로의 함몰은 반드시 물리 세계 속의 것들의 파괴가 전제되는 거예요.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겁니다. ? 이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들의 이 한계가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 그 진리를 읽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는 거 아닙니까? 성령이 오셔서 그 껍데기를 벗겨 준다니까요. 그런데 가장 먼저 벗기는 거는 그 육체의 껍데기를 벗기는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라 그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체를 십자가에서 도륙 당하는 거예요. 껍데기가 확 벗겨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진리의 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십자가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준 훌륭한 시청각 교재였던 거예요.

아람어나 히브리어의 1919번째 문자인 코프가 바로 그러한 뜻을 갖고 있는 문자에요. 부수고 다시 세우다. 인간들의 문자 안에 이미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원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파괴라는 단어가 너무 자극적이다, 너무 공격적이다 하면 그걸 부정이나 부인으로 바꾸셔도 돼요.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귀에 들리는 것, 내가 감각할 수 있는 것 등이 사실은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에요. 내 육신과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이 내 현실이 아니고... 이것은 무언가를 교훈하기 위한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라고. 그 어떠한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되면...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꾹 참고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허벅지를 찔러가며 가는 게 자기부인이 아니라 그걸 아는 거.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그게 자기 파괴인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돼야 다시 세워질 수가 있어요. 그게 십자가에요. 그렇게 되어야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 되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예수의 십자가에요. 자기 십자가 아니라니까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 지고 와그랬다니까요. 성도의 인생 속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그 물리세계의 파괴가 경험되어야 되는 거고 그것이 옳다는 게 그 안에서 인정이 되어야 돼요. 그래 이렇게 부서지는 게 맞지! 그래야 진짜 가치, 진짜 생명이 뭔지를 내가 알지.~~~ 맞지!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고, 의존하고 애착을 갖고 있는 이 현상계의 것들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부정되고 부인되고 말씀의 검에 의해 잘라져 나가고..관계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보는 삼라만상은 우리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거 같지만 그 존재를 파악하는 건 바로 우리의 사고이고 마음이고 생각이에요. 우리의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그 존재는 각기 다른 상으로 나에게 맺혀져요. 같은 사물을 관찰한다고 해도 관찰하는 사람마다 다른 관찰 결과가 도출됩니다. 그 사람의 경험,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생각 이런 거에 의해.

나라는 사람이 어떤 눈과 어떤 귀를 가졌고 어떤 촉각을 가졌느냐에 의해서.....존재는 각기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산, 똑같은 물, 똑같은 들을 보고도 어떤 이들에게는 크고 웅대하고 넓고 광활하고 이렇게 보여지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작고, 보잘 것 없고 못생기고 추하고 그런 것으로 인식이 될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의 경험에 의해 아니면, 그 사람의 마음에 의해.

똑같은 꽃을 보고도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게 인식이 되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는 추하고 보잘 것 없는그런 그냥 그런 꽃, 이렇게 인식될 수 있어요. 그들에게 있어서 인식된 그 꽃은 같은 꽃이지만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 물리세계 속에서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거 같지만 사실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주관에 의해서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것이 전부 실체요,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 단 말입니다.

내가 본다고 그것이 사실이요 실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도 헛것을 보면서 그것이 실체라고 굳게 믿고 거기에 묶여 평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정작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안 한다니까요.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자연과학이라는 거, 과학자의 마음에 그려진 대자연의 모습이에요. 그걸 과학자들이 그려내면 그걸 자연과학이라고 그래요. 자연 현상과 그걸 과학자들이 그려낸 자연과학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요. 사람을 통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과학도 그 실체가 아닐 수 있네요? 그죠? 아인슈타인이 진리였던 때가 있었지만 그가 양자물리학에 의해 짓밟히는 시대가 온다니까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논제에요. 그것이.

 

오늘 본문도 이러한 선지식을 갖고 보지 않으면 그냥 우리를 옭아매는 올무가 될 수 있다니까요. 육신을 죽여! 왜 안 죽여? 안 그럼 네가 죽는다니까. 육신을 죽여, 영으로 죽여! 그런데 육신은 뭐야? 영은 뭐야? 어떻게 죽이는 거야? 모르면서 마치 남들이 다 하고 있는 거 나만 못한다고 들키면 신앙 없는 사람으로 들킬까 봐 찍힐까 봐 그냥 다 하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불안에 떨고 있는 거죠? 그걸 자유라고 해요? 그걸 복음이라고 합니까? 그걸 진리라고 하나요?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만해도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요. 그래서 멀리 나가면 떨어져. 고기 잡으러도 멀리 가지 마. 그랬단 말에요. 그게 그 당시의 자연과학이었어요. 평평해, 멀리 가면 떨어져. 그 상태에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어디에서나 180도죠? 진리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지구가 평평한 게 아니라 둥근 공 모양인 걸 알게 됐어요. 그러한 둥근 공 모양의 지구 위에서 큰 세 꼭짓점을 찍어놓고 삼각형을 직선으로 그리면 그 내각의 합도 180도가 맞나요? 아닙니다. 원형 위에서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그거보다 훨씬 큽니다. 그러면 그 공식도 진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몰랐을 때는 그건 어디서 건 적용돼야 되는 진린데 그 꼭짓점을 미국에 하나 러시아에 하나, 한국에 하나 찍어놓고 크게 삼각형을 그려놓으면 그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 수준에 의해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속에서의 진리는 수시로 변한다니까요. 수시로 아님이 폭로되고 그 라는 조그만 우물 속에 갇혀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하고 무식한지를 모르고 자기 수준에서 인식되는 모든 현상계의 것들을 사실이요 진리인 것으로 우기고 있는 거예요.

이 물리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최고 덕목은 도덕과 윤리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도 그 수준 이상으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성경 갖고 훌륭한 사람 되고 롤모델 되고 깨끗한 세상 만들면 끝. 그리고 죽는 거예요. 진리는 그 안에 내용으로 담겨 있어요. 보세요, 언제는 만고불변의 법칙이었던 것이 지금은 아니에요.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의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벗겨서 인간들에게 보여주심으로 그들의 업적들을, 바벨탑을 매번 묵사발 내고 계세요. 그거 진리라고 생각해? 정말? 그게 끝이야? 더 이상은 없을까? 끊임없이 묻고 계신다니까요.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 거리에 있는 별이래요. 빛이 일초에 삼십만 킬로 갑니다. 그 속도로 일 년 내내 가는 거리가 1광년이에요. 그런데 가장 가까운 별이 4광년이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거예요. 행성 말고 별. 그런데 그 별들이 가득 차있는 이 은하계의 지름이 십만 광년이에요. 상상할 수도 없는 거예요. 계산도 안 돼요.

그런데 그 은하계가 수 천억 개가 또 있대. 그러면 내 눈에 보이는 그 별들. 지금 밤하늘에서 반짝거리면서 내 눈에 띄는그 별들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거예요? 도대체가? 그러면 그냥 이 물리세계의 물리학 공식으로 따져봤을 때 그 빛이 반짝거려서 내 눈에 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요? 그냥 양자역학의 무슨 빛의 순간이동, 이런 거 따지지 말고 물리학 공식으로 계산해보자니까요. 우리는 물리세계에 살고 있고 그 물리학 밖에 모르니까.

그러면 반짝거려서 내 눈에 그 빛이 왔을 때, 그 별은 지금 없을 수도 있겠네요? 계산하면 수천억 년 전에 반짝했던 것이 달리고, 달리고 달려서 내 눈에 온 거 아니에요? 지금? 반짝거리고 사라져 버렸어요. 내 눈은 그걸 빛으로 인식한다니까요. 그럼 내가 보는 것이 지금 없는 것일 수도 있는 거죠? 보세요. 우리가 지금 으로 확인하는 것도 똑바로 보는 것도,신기루도 아니고 그냥 확인하는 것도.없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눈에 본 건 전부 사실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奇蹟異事를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위험한 거예요. 나는 봤거든’. 너희는 못 봐서 그래. 나는 봤다.’ 라는 것이죠. 그게 사실이라는 것. 그게 실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예요? 사람들은 그 수준이에요. 거기에 묶여 있다니까요. 개미가 분당, 분속 1센티씩 간다고 치고 지구를 한 바퀴 돌 때 8천 년이 걸려요. 그 개미에게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야,는 진리입니다. 걔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지구가 둥글다는 거를 몰라요. 그리고 그 지구는 평평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인간의 수준, 개미의 수준에서 인간의 수준으로만 올라와도 그건 진리 아니죠?

그런데 우리가 감히 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 천지의 주재(主宰), 그 하느님 앞에서 내가 보는 것을 내가 눈으로 인식하고 확인하는 게 실체이며 진리다, 라고 우길 수 있느냐고요. 개미와 인간의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는데 하느님과 이 피조물, 먼지도 아닌 이 피조물 사이의 그 갭, 그걸 갖고 있는 우리가 감히 그 앞에서 내가 보는 거, 내가 인식하는 거 그리고 행하는 게, 이게 진리야라고 우길 수 있냐고요? 심지어 하느님한테 따지기까지 해요. 당신 그렇게 일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이 세상을 좀 보라고. 이 불공평한 세상. 노래도 있어요. 그 언젠가 했던 것처럼 조율 한번 다시 해주세요. 그런 건방진 인간들이 어디 있어요?

우리는 절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내 손에 만져지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과 묵시세계를 그대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느님이 성령을 보내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그렇다면 성령을 안 받은 이들이 인식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그 세상은 ....성령을 받은 이들이 바라보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그 세상과는 달라야 되잖아요. 달라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령도 모르고 그 성령과 관계도 없는 다른 종교인들, 다른 이들도 어떻게 우리가 읽는 성경을 보고 은혜를 받느냐고요? 아니, 세상에 간디는 죽을 때까지 성경을 손에 꼭 쥐고 죽었다는데, 힌두교인이. 그는 진짜 소(), 진짜 그 하느님이 아닌 가짜 소를 섬기다가 간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 성경을 보고 은혜 받았다니까요.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보여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성경은? 그렇다면 그들이 이해하는 그들이 보고 이해하는 그 내용과 우리가 보는 그 진리의 내용은 반드시 달라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그 보이는 것에만 묶여서 그 수준의 행함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그 상태에서 하느님이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성령으로 찾아와서 그 보이는 것들을 깨시는 거예요. 하나하나 깨서 그 알맹이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이것도 깨고, 저것도 깨고 이렇게 깨서 그게 내용이 사실은 이거잖아. 하고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깨지는 거예요. 깨져야 맞는 거예요. 보이는 현상계가 부수어져야 그 안에 내용으로 담겨있는 진리가 우리 앞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작업을 진리의 영, 말씀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떨어지면 가슴이 찢어져야 돼요. 찌어져야 돼요. 그래서 그 말씀을 하는 그이가 밉게 보여야 돼요. 곧 다시 좋아지겠지만. ㅎㅎ 말을 잘 해야지.

 

그러니까 육신이 늙어가고 이 지구가 늙어가고 병이 들고 약해지고 추레해지고 그거는 순리인 거예요. 그리고 그게 맞는 거예요. 그걸 자꾸 거슬러서 주름살 펴려고 그러고 억지로 수분 공급하려고 그러고 탱탱하게 만들려고 그러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선지식을 갖고 오늘 본문 한번 보세요. 그게 그 이야기인지.

(로마8,12-13)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너희가 육체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니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 그런단 말에요. 여기에서 육체가 사륵스에요. 사륵스는 원래 영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래의 말에 머무를 때 그냥 그걸 사륵스’, 육체, 이렇게 우리가 읽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나쁜 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율법. 진리로 해석되지 못한 아래의 물, 그것이 육신이에요. 이 육신. 그대로 살면 죽는 거예요. 그렇게 이해하고 그렇게 열심히 육신으로 행하면 너희는 죽는다, 그래요.

그러나 영으로써, 이게 역격이에요. ‘푸뉴마’. 그러니까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그게 자오’, 생명, ‘로에를 받는 거야. 그게 생명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여기에서 몸의 행실, 그게 우리 육신이 저지르는 그냥 그렇게 미성숙한 행동, 사람들이 도덕과 윤리로 규정해 놓은 죄. 뭐 이런 것일까요?

行實이라는 단어는 프락시스 라는 단언데, 이 단어는 프라쏘에서 왔어요. 프라쏘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냥 익숙하게 자기의 그 두 마음으로 내어 놓을 수 있는 그 행위를 프라쏘라 그래요. 그런 게 뭐가 있어요? 성전 마당에서 행한 희생제사. 율법 지킴,, 이거예요. 습관적으로 계속 행하기만 해요. 뭔지도 모르고요. 그게 프락시스예요. , ‘쏘마는 최선을 다해서 무얼 생산해 낸다 할지라도 그 프락시스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프락시스 호 쏘마그 쏘마가 내어 놓는 그 프락시스가 진리, ‘푸뉴마에 의해 죽지 않으면 너는 그 사륵스를 따라 사는 것이 되는 거고 그러면 넌 죽어! 그 말이에요. 신앙생활 열심히 해서 성숙한 삶을 살아, 이런 말이 아니라. 그런데 그 자오그 생명이 어디에만 있다 그래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안에만 있다. 그러네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은 뭐예요? 예수 밖에는 생명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그럼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내가 받아야 나도 사네요? 예수님이 내 안에 뭐 있다 그랬어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진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생명이라는 거예요. 네가 산 자라면 네 안에 그거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껍데기는? 그건 죽은 걸로 여겨주겠다는 거예요. 몸은 죄로 죽은 거야. 네 안에 그 영 있으면 하느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의 그 영, 진리의 영. 그거 있으면 네 몸은 죽은 거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그 영이 산 거야.. 그게 네 조에’, 생명이야. 그러면 너의 그 프락시스’, 쏘마가 내놓는 그 프락시스는 당연히 죽지.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살아. 그 안에 가진 생명. 것이 참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와 세상과 율법이라는 그 껍질이 벗겨져야 돼요. 그래서 그 대표로 그 육을 십자가 위에, 언약의 기둥 위에서 몰수당하는 거예요. 그 몸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마리아가 못 알아보잖아요. 그 몸은 몰수되는 거예요. 하느님에게. 죽는 거예요. 영이 드러나면 그건 반드시 없어져야 돼요.

그래서 바로 다음절 14절 보세요.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 '푸뉴마 호 떼오스하느님의 말씀 그렇게 바꾸어 이해해도 되지요. 하느님의 말씀. 그것에 의해 인도 받는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그래요. 여러분은 장자들이죠? 장자들의 總會니까. 하느님의 교회가. 여러분이 장자에요. 예수님이 장자잖아요. 원래. 그런데 왜 우리 보고도 장자라고 그래요? 그 예수님, 장자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장자들인, 하느님은 장자밖에 안 받아요. 그 장자, 장자는 다 내 거다, 그랬으니까. 그 장자들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장자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도 장자 맞아요.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래요. 하느님의 영, 그 말씀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

그런데 그 인도하다, 라고 번역이 된 아고라는 단어는요. 성경에는 너무 신사적으로 번역을 해놓았지만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인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그 말씀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있죠? 그들을 보이는 족족 감옥으로 꽁꽁 묶어서 끌고 갈 때 쓰는 단어가 아고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 이리로 가야지? 아니, 아니, 거기 말고 이리로 와~’ 이게 아니라 꽁꽁 묶어서 가기 싫어서 죽을 거 같은 그이를 질질 질질 끌고 가는 게 아고예요.

하느님의 영, 진리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들어오면 그 말씀이, 그 진리가 여러분을 그렇게 질질 끌고 모든 세상과 인간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한 방향으로 가는 그 방향 반대쪽으로 끌로 가는 거예요. 어디로? 십자가로요. 언약의 기둥으로. 질질 질질 끌고 가서 그 율법, 그 육체 거기서 못 박아버리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렇게 진리의 말씀에 의해 질질 끌려가서 그 몸의 행실, ‘프락씨쓰 호 쏘마’, 그 몸의 행실을 도륙 당하는 그들을 가리켜 성경이 아들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아빠와 아들. 그 아들 되고 싶으세요? 되고 싶지 않아도 여러분은 어쩔 수 없어요. 이미 거기에 묶여 있단 말에요. 끌려가야 돼요.

예수님이 그러죠? 너는 내가 밖에서 띠 띠우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그 방향으로 끌고 갈 거야. 라고 그러잖아요? 내가 성령으로 다시 오면 너는 내가 지금 말하는 그 방향으로 질질 질질 끌려갈 거야. 그게 아고예요. 그런데 성경이 바로 그 상태, 그렇게 성령에게 꽁꽁 묶여서 십자가에 도륙 당하여 거기서 살아나는 그들을 가리켜 자유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자유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에요. 그러면 죽는다니까요. 자유는 좋은 말이거든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을 때, 그 자유는, 진리는 너희를 생명으로 살릴 거야, 라는 말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 자유는 적어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놔둔다는 그런 의미의 자유는 아닐 거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그 자유. 그 자유. 그건 성령으로 너희들을 꽁꽁 묶여서 사는 곳, 살아나는 곳으로 끌려갈 거야, 가 자유에요. 그런데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그게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으로 하느님처럼의 삶을 열심히 추구할 거란 말에요. 그런데 그렇게 놔두면 그들은 죽어요. 그렇게 살다가. 그건 그냥 방임이라고 하는 거예요. 놔두는 거예요. 안 끌고 가는 거예요. 그거는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면서 야, 난 어떻게 예수 믿고 그냥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술술 일이 잘 풀려? 꽁꽁 묶여서 끌려가는 게 아들이라 그랬죠?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그런데 그렇게 예수 믿었더니 모든 게 말씀 안에서 술술 풀리고 다 잘 돼. 이건 뭐예요? 딸이지 뭐예요? 죽는 거예요. 그건. 여기 딸들한테 미안한데 그 딸 아니에요. 하여튼,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꽁꽁 묶여서 여러분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아고끌려가야 돼요. 그래야 아들이에요. 그래야 여러분의 몸의 행실이 죽죠. 안 그러면 시퍼렇게 산다니까요. 물고기가 아, 나는 이 물이 너무 지겨워. 이제 나 밖에 나가서 살래, 라고 모래밭에 나오면 굴비 되는 거라니까. 바로. 그건 자유가 아니에요.

진짜 자유는 하느님이 허락하신 그 울타리 안에서 거기에서 그 하느님과 그 하느님이 주신 은혜와 생명을 누리는 걸 자유라고 그래요. 그게 유일하게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그분의 그 살리는 경륜 안에 들어가서 끌려가는 거. 그게 힘들죠. 그런데 그거 풀어놔봐야 하는 짓은 또 똑같이 그짓할 거라고요. 그게 그에게는 십자가 지는 죽음 같은 고통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게 하느님의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꽁꽁 묶어서 십자가로, 언약의 십자가로 끌고 가는 거예요. 너희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언약 밖에 없어. 진리 밖에 없어. 말씀 밖에 없어. 하느님의 은혜 밖에 없어! 길길이 날뛰지 마. 죽이는 거예요. 그걸 영으로 살린다고 하는 거예요. 바로 그 아들의 대표로 언약의 기둥 위에서 율법으로 죽으셨던 거예요. 그분 자신이 율법, 세상, 육신, 예수로 죽어야 그리스도, , 하느님 나라로 산다, 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8장15절 보세요.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의 영과 양자의 영이 나옵니다. 다른 영 아니에요. 이거. 하나는 악령, 하나는 뭐 선한 영, 성령?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영은 말씀이에요. 그런데 종을 만드는 말씀이 있고, 아들을 만드는 말씀이 있다는 거예요. 전자가 율법이고 후자가 진리에요. 그러나 둘은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받느냐에 의해 그 사람은 그 성경에 의해 종이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다니까요. 위로 나게 돼요. 그게 종의 영, 양자의 영이에요.

푸뉴마 둘레이야종의 영은 속박하게 하는 말이에요. 짐을 지우는 말, , 짐이야.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짐이야.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면 신앙 없는 사람으로 또 찍히니까 아, 얼마나 달고 오묘한지 모르겠어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이러는 거지. 사실은 짐이에요. 짐을 지우는 말. ‘푸뉴마 둘레이야’. 그런데 양자의 영, ‘푸뉴마 휘오데시아휘오스에서 나온 거예요. ‘휘오스가 아들이니까. 아들을 만드는 말. 그 말은 아들 아닌데 너 Adopt 해서 아들로 삼아줄게 가 아니라, 아들로 탄생시키는 말. 아들로 완성시켜내는 말. ‘푸뉴마 휘오데시아에요. 성경을 그렇게 진리로 봐야 된다니까요. 그 성경에 의해 여러분이 종이 되면 안 돼요.

이렇게 내가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말씀은 나를 아들로 만들 수도 있고 종으로 만들어서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죽이고 살리는 건 말씀인 거예요. 그 물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물이 없으면 죽도록 이렇게 지어진 거예요. 여러분은 성경을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니 여러분이 어떤 말을 담고 있느냐, 어떤 물을 담고 있느냐에 의해 양과 염소로 갈려요. 그래서 주님도 그러는 거예요. 마지막 날에 너희의 말로 심판받는다.. 그러죠? 너희들이 갖고 있는 말, 그 물로 심판받느냐는 뜻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인 말을 찾아다녀야 돼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사슴은 식도가 셀로판지처럼 되어 있어서 이 목마름이 지속되면 그냥 죽습니다. 이게 붙어서. 그럼 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맬 때는 어떤 열심 으로 찾겠습니까? , 내 목을 축이지 않으면 나는 곧 죽어, 라는 이런 심정으로 찾을 거 아닙니까? 성도는 그런 열심히 있어야 된다니까요. 그 말씀에. 그러니까 그 말씀,. 그것이 나의 부모가 되어 나를 생명 있는 아들로 씨로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나를 마귀새끼로 죽여 버릴 수도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계명을 주시면서 그 십계명 안에 네 부모를 공경해, 그러는 거예요. 그건 육신의 부모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건 도덕책에도 다 있는 거잖아요. 너를 낳게 하는, 아들로 낳게 하는 그 말씀이 있을 거야. 그게 아버지거든. 그게 네 어미거든. 다음 중에 제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해드릴 텐데 그거 공경해. 잘 받아! 이런 말이에요. 그래야 살아.

아람어에서도 마찬가지고 히브리어에서도 아버지라는 단어는 알렙하고 베잍으로 이렇게 조합이 되어 있어요.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 이란 말에요. 그렇게 써 놓고 히브리 사람들이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처소,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성전, 그것이 기록되어 있는 게 뭐예요? 아래에 있는 물, 아래에 있는 말로 하느님이 그걸 기록해 줬어요. 하느님의 성전으로 오신 예수가 이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랬죠? 그러면 그 하느님의 집, 그것이 우리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어떻게 던져져 있어요? 구약시대에는 성전이었지만. 지금은 말씀 밖에 없어요. 그럼 그게 내 아버지네요? 그 말씀이 진리로 내 안에 있으면.

어머니는 알렙하고 이에요. ‘’.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써 놓고 어머니라고 읽어요. 갈라디아서에도 보면 그 하늘의 약속, 그 하느님의 새 언약은 어머니다. 그러죠? 그럼 하느님의 말씀도 어머니, 하느님의 집, 그것이 적혀있는 성경도 아버지.

그럼 부모는 뭐예요? 말씀인 거예요. 여러분을 낳게 하는. 아들로, 생명으로 낳게 하는 건 이 세상에 그 물, 말씀 밖에 없어요. 그래서 물은 생명이다, 그러는 거예요.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인 거예요. ‘

알레프 맴이라고 써놓고 이라고 읽어요. 에미, 어미, 엄마, 마미, 마더. 다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그걸 설명해주기 위해 이런 육의 엄마들이 모형으로 그 자식들에게 붙어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우리에게 씨를 주시는 존재죠? 어머니는 그 씨를 받아 우리를 낳게 하고. 탄생케 하고 우리를 기르세요. 그래서 선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씨를 주셨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뭘 어디로 낳아요? 아버지가 씨를 주시고 어머니가 나를 낳아 기르시니, 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에 한 알의 밀알로, 씨로 심겨지기 위해 오신 제라그 약속의 후손은 누구? 예수. 그분이 우리 안에 이 땅에 한 알의 밀알로 심겨져 우리를 좋은 땅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놓고는 열매를 맺죠. 그죠? 우리를 아들로 완성시키는 거예요. 그럼 그 씨는 우리 안에 심겨져 뭐가 돼요? 우리를 아들로 완성시켜 내는 거, 그리스도의 영. 진리로, 그리스도로 심겨져요. 그러면 나를 낳고 씨를 주시고 나를 키우는 내 아버지, 어머니는 누구? 예수 그리스도인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가, 그 남자가 부모로 떠나 우리에게 온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세기에서. 너희들 낳으러 간다. 그래요. 내가 너희들 낳으러 간다. 성경은 전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냥 흙에 불과한 것들을 이렇게 조물락 조물락 해가지고 사람을 만들어 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죄를 지어서 이걸 다시 저주해가지고 거기에서 그냥 하느님 마음에 조금 들도록 열심을 부리는 것들은 살려내고 아닌 건 그냥 다 죽이고 이런 동화가 아니에요. 성경은.

원래 죽는 흙이었던 너희들을 내가 무엇으로 살려? 생기로 살렸죠? 하느님의 호흡으로 살린, 말이에요. 그건 말. 그래서 히브리어에 그 라는 단어가 이에요, 호흡이에요. 말이라니까. 그걸로 살아요. 그거를 설명해주기 위해 인간을 선악과 따먹은 죽은 자로부터 출발하게 해서 설명해주는 거지, 잘 만들어 놨는데 이것들이 제 맘대로 그냥 선악과 따 먹고, 이게 아니란 말에요. 진짜 생명이 뭔지, 진짜 사는 게 뭔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그건 반드시 필연적으로 있는 거란 말에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선악과 따 먹은 자처럼 살기도 하는 거예요. 그럼 그곳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알고, 고백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반드시 선악과 따 먹는 이 육신,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 이 율법 이거를 몰수당해야 돼요. 차압당해야 돼요. 십자가에 하느님이 못으로 척척 박을 때 감사해야 돼요. 오히려. 이 저주의 바다, 이 아래의 물에서 사는 그들은 반드시, 그들의 동력은 꼬리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꼬리 되면 안 된다, 그랬잖아요. 반드시 머리 돼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꼬리를 삭제당해야 돼요. 절단당해야 된다니까요. 뭐로? 하느님의 양날 선 검, 말씀의 검으로. 꼬리를 절단당해야 돼요. 그래야 생명이에요.

그래서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도 생명이 잉태될 때 난자가, 둥그런 머리 같은 난자가 그 수많은 우글거리는 정자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자기 안으로 빨아들여 머리로 만들어서 생명으로 만들 때, 그 선택받은 정자는 꼬리를 절단당하는 거예요. 머리로 들어간다니까요. 그래야 그가 머리인 예수의 지체가 되는 거예요. 그걸 예수의 머리인 예수의 지체라고 하는 거지. 너는 팔의 역할을 해. 너는 다리 역할을 해. 너는 뭐 엉덩이 역할을 해. 이게 지체가 아니라 머리가 돼야 예수의 지체가 되는 거예요. 꼬리를 절단 당해야.

마찬가집니다. 그 하느님의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율법으로만 들리면 그게 뱀의 말이라니까요. 곡해되어진 땅의 물이 되는 거예요. 그 뱀의 말, 그것이 여러분에게 진리로 와 닿게 되었을 때, 진리의 성령에 의해 여러분이 그걸 진리로 확 받아들이면 그 예수의 말이 꼬리를 절단당하여 머리로, 진리로 내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야, 넌 꼬리로 살아, 열심히 해. 할 수 있다니까. 성숙해, 성화해. 그래야 아버지가 기뻐하시지! 라는 꼬리 가진 말이 되는 거예요. 무슨 머리가 되려고 해? 꼬리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니까 이리로 가게 된단 말입니다.

절대 아닌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 속에서 그 꼬리를 절단 당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그 꼬리가 폭격당하는 이 현실이 복인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꼬리가 절단을 당했을 때 우리는 구원의 낚싯대에 이렇게 낚여 올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 낚는 어부인 하느님에 의해 낚여 올려져야 그 바다에서의 동력의 꼬리를 삭제당하고 밖으로 나와 ....죽어서 사는 거예요.

아래의 물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윗물로 반드시 올라가야 돼요. 그러니까 죽는 게 맞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그 세상, 그 저주의 바다 그 애급에서 나올 때 어린 양 예수가 과월절 제물로 죽자 애굽의 장자인 우리예요.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애굽의 장자들이 한 번에 다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야 나오는 거예요.

그래야 출애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장자들, 애급에서 죽어 하느님 나라,, 약속의 땅의 장자로 살게 되는 그 장자들. 그게 아들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반드시 죽어야 돼요. 그 삶을 여러분의 역사 속에서 인생 속에서 반드시 경험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 그 진리를 받아 육이 죽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현실, 그리고 그 영에 의해 아고’. 질질 끌려가는 성도. 아들의 현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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