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도란도란 글방 / 1260일=42달=삼년반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4 조회수1,411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2020.11.14. 

 

1260=42=삼년반

 

성전 바깥뜰은 재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민족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42) 동안 짓밟을 것이다.” (요한묵시록 11,2)

 

그것은 이방인에게 밟히는 시간이 42달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1260년 예언, 즉 성경은 한달을 30일로 계산한다. 그래서 42달은 1260, 그리고 하루는 1, 그래서 1260년의 기간이 되는 것이다. 성경의 달력은 한달이 30일이다. (창세7:11; 8:3,4; 7:24 참조)

 

그러므로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 , 하느님을 믿는 자들을 척량하는, 재어 보는 심판을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심판, 즉 참된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는지를 재어보는 심판이 언제부터 시작된다고 했는가? 믿는 자가 진실로 회개했는지를 살펴보는 심판을 언제부터 한다고 되어 있는가? 심판은, 1260년 동안 성전이 이방인에게 짓밟힌 후에, 다시 말해서 교황권이 중세기에 진리대로 살며 성경대로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핍박한 1260년의 종교 암흑시대(AD538-1798)가 끝난 후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니엘서에서도 이미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다니7:23-27). 심판은, 42, 3년 반 후에, 1260년의 핍박 기간 후에 있다고 했다.

 

그 여인(교회)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여인이 천이백육십 일 동안 보살핌을 받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묵시12,6)는 말씀이 나온다. 중세기 때에 핍박당하며 쫓기던 교회가 참 교회였다. 그런데, 묵시록11:3절을 보면, 두 증인이 굵은 베 옷을 입고 예언을 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두 증인이 누구인가? 이들은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라고 했다. 이 해석 때문에 많은 사교들이 등장하여, 자기가 이 두 증인 중 하나라고, 자기가 올리브나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증인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인 하느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마음에 유혹을 받아, 길을 벗어나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그들에게 경배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주님의 진노가 너희를 거슬러 타올라 하늘을 닫으실 것이다. 그러면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소출을 내지 않고, 너희는 주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좋은 땅에서 바로 멸망할 것이다.”(신명11,16-17)

엘리야 때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중세기 때는 그 3년 반이 예언적 기간이 되어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1260년 동안 교회에 성령의 비가 내지리 않았다. 곧 영적인 기근이 오랫동안 계속된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물이 피가 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파라오왕은 모세를 통해서 들려준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그때에 그 나라에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 내렸다. 마지막 시대에도 일곱(7)재앙이 올 것이다. 하느님의 증인인 이 말씀을 불순종하고 인간의 가르침대로 사는 이 세상이 마지막 일곱 재앙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이집트에 내린 10 재앙 중, 첫번째 재앙이 바로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두 올리브나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징한다.(즈카4:1~6, 11~14 참조) 또 두 촛대(등잔), 시편 119:105,130절의 말씀을 보면,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당신의 말씀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이들을 깨우쳐 줍니다."라고 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5:39)

이 하늘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 24:14)

그러므로 이 세상에 하느님 앞에 서있는 두 증인은 하느님의 말씀성경이다. 이 성경 말씀이 1260년의 종교 핍박의 시기 동안에 죽임을 당했다. 베옷을 입고 증거한다는 표현은 슬퍼서 부르짖는다는 표현이다. 중세기 때에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서있는 두 증인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제부터 또 한 가지 아주 흥미 있는 성경 예언을 보게 된다. 그것은 성경과 무신론 세력과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예언은 1260,(AD538-1798) 42달 동안 성전이 이방인의 발에 밟히는 시기가 끝나는 즈음에, 다시 말해서 교황권이 이방인들인 이교의 가르침을 들여와 교회를 타락시키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시기가 끝나고 교황권의 세력이 약화되는 시점에,  이제 마귀가 다른 세력을 일으켜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이 다른 세력이란 다름이 아닌 무신론 세력이다. 1260년의 핍박기간이 그 예언된 대로 끝나게 되었는데, 1798년도에 불란서의 나폴레옹 장군의 부하 버티어 장군이 바티칸에 가서 교황 비오 6세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고 거기서 죽게함으로 끝났다. 그럴 즈음, 1260년의 핍박이 거의 끝나는 즈음에, 불란서에서 유명한 불란서 혁명(1789-1799)이 나게 되었다.

그들은 종교를 다 폐쇄시켰고, 성경을 불에 태우며, 미신을 믿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을 다시 읽지 못하도록 (1793.11.26. 성경금지 법언 公布)법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1260년 동안의 베옷을 입고 외치는 시기), 지하(무저갱. 구렁)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묵시11:7,8) 의 예언의 표현이 얼마나 정확하게 들어맞았는가!

 

지하는 진리의 근거가 없는, 밑바닥이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17931126일 에 불란서는 성경을 없애고, 한 여인을 이성의 여신이라고 부르며 가마에 태워 시가지를 돌면서 축제를 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하였다. 그들은 종교의 핍박에 너무 지쳐서 이제는 정반대로 갔다. 종교 자체를 없이해 버리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경을 불태웠다. 그곳은 이집트와 같이 되었다. 파라오 왕이 하느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싸우고 하늘의 하느님을 무시한 것처럼 된 것이다.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1793.11.26.-1797.7.17.)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묵시11,9-10)

 

심판의 기준과 진리의 기준이 사라졌다. 그들은 그들을 견제하는 도덕과 진리의 원칙을 죽이고 축제를 하며, 그것이 자유인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일 반 후에 이 두 증인이 부활하였다. 예언 기간인 3년반 후에 부활한 것이다. 엘리야 시대, 즉 교회의 배도의 시대 동안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3년 반 후에야 비가 오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성경도 프랑스 혁명 정부가 3년 반 동안(1793.11.26.-1797.7.17.) 죽게 하였으나 3년 반 후에 부활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시인 볼테르는 말하기를, “앞으로 100년 안에 이 세상에서 성경은 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집이 성경을 인쇄하는 성서 공회가 되었다. 종교와 성경을 폐쇄시켰던 불란서 정부는, 성경의 일주일제도도 없애고 9일 동안 일하고 10일째 쉬는 10일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지치게 되었다. 성경 예언대로 프랑스 정부의 방침은 3년 반 후에 실패했다. 프랑스의 도덕이 땅에 떨어지자 국회가 다시 종교와 성경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법을 통과시켜서(1797.7.17) 성경이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성경 예언대로 정확하게 3년 반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때 큰 지진이 일어나 도성 십분의 일이 무너졌습니다. 그 지진으로 사람도 칠천 명이 죽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여 하늘의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묵시록11.13)

 

그 후로부터 세계적으로 성서 공회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세계 모든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선교사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이 부활하자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 성의 십분의 일이 지진으로 무너졌다는 말은, 프랑스는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 생긴 열나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성경은 프랑스를 그 성의 십분의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 도덕의 타락, 범죄의 급증으로 마치 지진으로 파괴되는 것처럼 프랑스 혁명 정부가 도산케 된 것을 말한다. “The Apocalypse of St. John”이라는 책 P. 183에 보면, "교회와 성경은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179311월 부터 17976월까지 3년 반 동안 죽임을 당하였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자 성경은 이전에 압박을 당했던 것만큼 존경을 받게 되었고 공개적으로 자유 개신교회의 공개적인 책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1260, 42달의 핍박 기간이 지난 다음에 이 세상에는 마귀가 만든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교황권의 핍박이 그치자,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신론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 무신론 세력이 세운 정치 이념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 사상은 프랑스의 농민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파리의 임시 정부의 주역이었던 농민들과 상인들의 사회주의 사상이 공산주의을 태동케 한 것이다. 1917년도에 일어난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은 바로 이 불란서 혁명의 사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공산주의가 무너져 내린 것을 우리 시대에서 목격하였다. 이제는 성경의 예언대로 교황권이 다시 그 세력을 구축하고 땅에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곧 짐승의 표의 핍박이 오는 것이다. 중세기 핍박이 지난 후에 이 세상에 일어난 무신론 세력들을 보라. 불란서의 혁명 이후, 19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벨하우젠의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학회가 생겨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비평하는 학문이 생기고, 니이체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신 신학을, 또 같은 시기에 다윈이 창조설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 후에 드디어 하느님을 부인하는 이념하에서 공산주의가 탄생했다. 이 모든 무신론 세력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무신론 세력이 인본주의 사상을 만들어 냈다. 인본주의 사상이란 하느님이 우리의 삶과 사상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 중심이 되게 하는 사상이다. 이 인본주의 사상은 오늘날 세상의 모든 교육 이념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늘날  그렇게도 비종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경 찾기(1260=42=삼년반)

다니엘7,25  12,7   묵시록11,2  11,3  12,6  12,14  13,5  (모두7군데- 7은 완전함을 뜻함)



* 비오 6세 제250대 교황, Pius VI<라>

1717년 12월 25일 에밀리아(Emilia)에 있는 체세나(Cesena)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Giovanni Angelo Braschi)는 페라라(Ferrara)에서 공부했고, 1735년에 체세나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삼촌의 영향으로 당시 페라라의 특사인 안토니오 루포(Antonio Ruffo) 추기경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1740년의 교황 선거에서 루포의 보좌관으로 활동했고, 루포가 오스티아(Ostia)와 벨레트리(Velletri)의 주교가 되자 그 교구를 대신 관리했다. 외교적 수완을 인정받아 1753년에 베네딕도 14세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1758년에 성베드로 대성전의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사제품을 받았다. 클레멘스 13세는 1766년에 그를 교황 궁무처 처장으로 임명했다. 클레멘스 14세는 그를 1773년 4월에 산 오노프리오(S. Onofrio) 성당의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수비아코(Subiaco) 아빠스좌 수도원을 맡겼다.

클레멘스가 사망했을 때 그는 수비아코에 있었다. 클레멘스 14세 사망 후 134일 동안 진행된 교황 선거에서 당시의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브라스키 추기경이 선출되었다. 그는 예수회를 해산시킨 클레멘스 14세의 소칙서를 완화해 줄 것을 기대한 친(親)예수회 측인사들과, 그가 클레멘스의 정책을 이행할 것이라 믿고 있던 반(反)예수회 측 인사들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유력한 인물이었지만 세속적이고 외모에 자신감이 넘쳤던 비오는 겉치레와 허례허식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 시대의 도전들을 감당할 능력은 없었다. 그는 친척들에게 상당한 수당을 챙겨 주고 조카 루이지(Luigi)를 위해브라스키 궁전(Palazzo Braschi)을 건축하면서 족벌주의를 부활시켰다. 예술을 종교적 영감의 원천으로 여긴 그는 예술의 후원자로 기억되기를 갈망했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제의실과 피오-클레멘티노(Pio Clementino) 박물관과같은 훌륭한 건물들뿐 아니라 도로와 거리를정비하는 데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러한 낭비, 특히 폰티노 습지(Agro Pontino) 배수 공사같은 대공사는 12년 동안 진행되었으나 완공되지 못한 채 교황청 재정만 파탄으로 몰고갔다. 그리고 그는 매립한 습지대 대부분의 보유권을 조카에게 넘겨주었다. 결실을 맺으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했지만, 그가 교황궁무처 처장일 때 처음 추진한 교황령의 경제개혁과 사회 기반 시설 개선을 위한 계획 자체는 훌륭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비오는 세속주의와 무신론뿐아니라, 교회를 통제하려는 각국 정부의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일단 비오의 전통적 권한에 대한 집착과 예수회 문제 처리 과정에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나폴리는 봉건적 충성을 거부하고 왕의 주교직 수여 권한을 요구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비오는 교회법적 서임을 보류하는 것이 보다 권위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제국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은 훨씬 더 급박했는데,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와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요제프 2세(JosephII, 1765~1790)는 요제프주의(Josephinism)를 표방했다. 이것은 교회가 모든 측면에서 국가에 종속되는 것으로, 완전한 종교적 관용, 영적영역에 교황의 개입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1781년 10월 요제프는 칙령으로 일부수도회들을 압박했고, 수도원을 교황이 아니라 교구 주교의 권한 아래 두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오는 1782년에 빈(Wien)을 방문했으나, 어떤 양보도 얻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방문으로 비오는 대중적 지지를 얻게되었고 요제프주의와 다른 개혁들의 진행을 저지하려는 의지를 더욱 강화했다. 1781년에 페브로니우스주의의 창시자인 혼트하임(J.N.von Hontheim, 1701~1790)에게 공식적으로 그사상을 철회할 것을 설득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사실 그 사상은 남부와 서부 독일에서 이미 널리 확대되고 있었다. 1786년에 비오가 뮌헨(München)에 교황대사관을 설립하려고 하자, 8월 25월 독일 대주교들은 독일 교회는 독일 주교들이 관리할 것이고 교황의 개입은 필요하지 않다고 통지했다.

요제프주의는 토스카나(Toscana)로 확산되었고, 요제프의 동생인 레오폴트 2세(Leopold II)대공(황제: 1790~1792)은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독립시키려 했다. 1786년 9월 스키피오 데리치(Scipio de Ricci) 주교가 주재한 피스토이아(Pistoia) 교회회의는 1682년의 4개조 갈리아 조항을 채택하고, 교황의 권위는 신자들의 동의에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한편, 주교들을 교황권한에서 면제시키면서 레오폴트 2세를 지지했다. 데리치의 개혁을 강력히 반대한 토스카나 주교들과 신자들에게 용기를 얻은 비오는데리치를 퇴임시키고, 1794년 8월 28일에 칙서 「아욱토렘 피데이(Auctorem fidei」에서 피스토이아 조항의 85개조를 단죄했다.

레오폴트2세가 시도한 네덜란드 개혁은 반란을 낳았고, 벨기에를 오스트리아의 통치로부터 일시적으로 독립시켰다. 한편 비오는 부르봉 왕실을 존중하여, 예수회원을 보호하려 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40~1786)와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에게 클레멘스 14세의 칙서를 적용하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1780년에자신의 왕국에 예수회 수련소 설립을 허가했다. 1783년에서 1784년 사이에 비오는 러시아에서 예수회를 존치시키는 방안을 비밀리에 승인했다.

프랑스혁명은 더 큰 위기였다. 프랑스 교회를 재조직하고 성직자를 국가의 공무원으로 삼는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Clergé, 1790. 7. 12.)에 대해 처음에는 반응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성직자들에게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하자, 비오는 1791년 3월 10일과 4월 13일에 그 헌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교황의 동의 없이 국가가 임명한 신임 주교의 서품은 신성모독이라고 선언했으며, 시민 선서를 한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정직시키고, ‘인권 선언’(Déclaration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1789)을 단죄했다.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다.

프랑스는 아비뇽(Avignon)과 콩타브네생(Comtat Venaissin)의 집단 거주지를 합병했고, 프랑스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비오는 프랑스에 대항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을 지지하고, 충성 서약을 거부한 성직자뿐 아니라 수많은 왕당파 난민을 받아들여 프랑스를 격분시켰다. 1795년에 비오는 에스파냐의 중재안을 일축하고, 1796년 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그는 공민 헌장과 혁명에 대한 단죄를 철회해달라는 프랑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볼로냐 정전협정에도 불구하고 비오는 나폴리와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을 시도했다.

그때 나폴레옹이 교황령을 침공하자, 비오는1797년 2월 19일 톨렌티노(Tolentino)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비오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귀중한 필사본들과 예술 작품들을 넘겨야 했으며, 교황령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화국을 인정하고 공화국에 복종할 것을 명하는 소칙서「파스토랄리스 솔리치투도(Pastoralis solliciTUdo, 1796. 7. 5.)」를 발표했다. 상황은 악화되었고, 프랑스의 장군 뒤포(L.Duphot)가 로마에서 폭동의 와중에 살해되자 나폴레옹은 교황령의 점령을 지시했다. 1798년 2월 15일 루이 베르티에(Louis Berthier) 장군이 로마에 입성했고, 로마 공화국이 선언되었다.

비오는 교황령의 수장에서 물러났다. 우선 시에나(Siena)로 물러나 있다가, 그 다음 몇달 동안, 측근들과 단절된 채 피렌체(Firenze)의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에서 살았다. 나폴레옹은 비오를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하려고 했으나 비오의 건강이 악화되어 생각을 접었다. 전쟁이 재발하자 비오는 1799년 3월 28일 피렌체를 떠나 토리노(Torino)를 경유하여 알프스산맥을 넘어 4월 30일 브리앙송(Briançon)으로, 7월 13일 발랑스(Valence)로 이송되었다. 그는 그곳 성채에서 죄수 신분으로 사망했고, 지역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시신은 1802년2월에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이장되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교황 중 한 명이지만 그가 사망하자 사람들은 성좌의 파멸이 마침내 이루어졌고, 교황직은 이제 끝났다고생각했다. 그러나 비오는 1797년 1월 13일과 1798년 11월 13일에 비상 시 차기 교황 선거개최에 관한 지침을 내려 두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