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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이 사제에게 - 신비체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 / 가톨릭출판사)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6 조회수1,285 추천수0 반대(0) 신고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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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옷타비오 신부를 통해 사제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  

("아들들아, 용기를 내어라!"에서/ 1999.10.30 교회인가/ 가톨릭출판사)

 




신비체


아들아, 나는 모든 사람을 향한 내 교회의 활동을 사목으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원리를 자진해서 굳건히 믿고 따르게 하려는 활동이니 말이다.

이 활동을 추진하고 지도하는 일은 엄밀히 말해서 교계 제도에 속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한 평신도들의 정당하고 필요한 협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나는 효과적인 사목 활동에 유익한 가르침을 이미 준 바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 13-14 참조 - 역주)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또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 역주)고도 했고, 또 너희는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는 누룩(마태 13, 33 참조; 루가 13, 20-21 참조; 갈라 5, 9 참조 - 역주)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만일 어떤 사제가 초자연적인 빛으로 빛나지 않는다면, 은총의 빛이 그 영혼을 투명하게 해서 누구든지 (위선이 아니라 충실성과 단순함이 들어 있는) 그 안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활동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을 그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예수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 역주). 그러나 그것은 잠재적인 승리이다. 모든 것이 내게 주어졌고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나의 완전한 승리는 세상 종말의 '최후 심판' 때라야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에 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앞에서, 하늘과 땅 앞에서, 나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사람이 된 하느님인 나는 내 신비체를, 곧 나와 하나인 내 교회를 실현했고 앞으로도 실현할 작정이다. 내 완전한 승리를 늦춘 진정한 이유는 이것이니, 그 완전한 승리에 내 신비체를 참여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머리'와 '몸'은 오직 하나일 뿐이다. 내 완전한 승리가 나의 '부활' - '승천'과 더불어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상히 여길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이 내 '강생의 신비'를 별로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갈바리아에서


나 예수는 인성과 깊이 결합하여 인성의 해방과 승리를 위해서 나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나는 나의 인성을 현세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인간적이고도 신적인 모든 사건과 결합시켰다. 따라서 신비로운 몸이지만 나의 참 몸인 교회는 나를 따라 갈바리아를 올라가야 나를 따라 영광에 들어갈 수 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마태 16,24 참조 - 역주)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다는 것은 응당 갈바리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강생과 수난과 죽음의 신비로 벌였던 싸움은 그 강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싸움이다. 그러나 원수가 다음 공세를 펼 때처럼, 일찍이 본 적이 없어서 거의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맹렬한 격전의 때도 있을 터인데, 그것이 이미 시작된 중이기도 하다.

그러니 영세자들에게 사탄과 세속과 육신이라는 호전적인 원수들과 언제나 싸움 중인 교회의 실상을 이해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목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르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법과 진리, 하느님의 신비들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도록 이끌어 가야 한다.

근본적인 전제도 없이 단지 조직만으로 이루어진 사목은 아무 소용이 없다! 드러난 사실들이 이 점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과 순례의 여정


너희가 후원하는 단체들은 메말라 가고 있고, 너희의 영화관들은 독을 퍼뜨리는 도구이며, 너희의 모임들에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말을 쓰는 경우가 꽤 많이 있다.

많은 단체들이 무너졌다. 이른바 제도적 사목이라는 것도 좌초 상태에 있다. 헛된 희망이라도 품어보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니, 물질주의적인 인생관만이 영적 빈혈증으로 심하게 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국건히 뿌리박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남녀 혼합 단체들도 이름만 그리스도교 단체일 뿐 실상은 이교도 집단이다. 지나친 자유와 유행을 따른 단정치 못한 복장, 육정을 자극하는 독서와 영화의 해로운 영향으로 그들 자신을 다스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이 제도적 사목의 결함이니,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 제어력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탄과 그 동맹자들과 맞서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민병대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또한 순례의 여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르게 살던 시절에는 이 단체들도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가 되어 버린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단체들이 흔히 악을 저지르는 기회가 되곤 한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1976년 6월 9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온갖 타락으로 썩어 버린 강물


나는 우선 현행 사목의 결함부터 분명히 지적하면서 사목 전반의 문제점을 직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지 않는 것은 지혜에 어긋나는 태도가 아니겠느냐고 응수하여라. 정확한 진단이야말로 항상 양심적인 의사의 일차적인 의무이니 말이다.

이와 같이, 내 교회를 돌보는 일이 맡겨져 있는 목자들과 사제들도 내 신비체를 괴롭히는 악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과감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이 이유가 그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다른 어떤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 교회에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악이 누적되었겠느냐?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다른 이유들은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중심적인 이유는 내가 지난 메시지들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사탄에 대항하는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에 있다. 사탄이야말로 악의 일차적인 원인이 아니겠느냐? 아담이 범죄한 후부터 인류에게 쏟아지는, 온갖 타락으로 썩어 버린 강물이 바로 사탄이니 말이다!

나의 이 집요한 주장을 네가 다시 반복하기 바란다. 귀머거리라 하더라도 알아들으려고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결국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는 어쩌다가 무심코 반복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반복하는 말이다.


내 '복음'에서도 어둠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루가 16, 8 참조 - 역주)고 하지 않았느냐? 복음 전체가 진리이다.

보아라, 어둠의 자녀들이 그들의 어두운 악행과 얼마나 일체가 되는지를! 그들은 밤낮으로 그것을 생활화하고, 그들의 악한 계획에 끊임없이 몰두한다. 그것을 위해 살고 일하며, 거기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보아라, 얼마나 용감하게 행동하는지를! 그들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요컨데, 그들은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휩쓸고 있는 빈혈증 같은 것에 걸리는 법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네 계획과 일체를 이룰 뿐이다. 이는 물론 진리와 자유와 정의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이 아니라 - 하기야 그들 가운데는 진정으로 그렇게 믿는 자들도 있긴 하지만 - 악과 불의를 쟁취하기 위한 계획인데도 말이다.


터무니없는 결과


이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흔히 그들의 일상 생활을 종교적인 문제와 심지어 사회적인 문제와도 별도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 그들의 인생 안에 포함되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된 신념을 삶의 토대로 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없이 비논리적이고 심각한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종교와 사업은 별개의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언제나 그들의 탓만은 아니다. 흔히 가정이나 교회에서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

이 그릇된 원칙에 따라서 도둑질이나 사기 행각이 생활의 습관처럼 된다. 그 결과 계속해서 훔치고 온갖 방식으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부당 이익을 취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고해거리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사제들의 영혼마저 흐리게 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사제들도 그런 것을 양심에 걸리는 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아들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봉헌자들이 이 세상 삶을 마친 후에 지옥에서, 혹은 무섭게 긴 세월 동안 연옥에서, 부당하게 가로채기를 한 죄값을 치러야 하는지 모른다! 직원들에게 급료를 주지 않았거나 공정하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사기를 쳤기 때문이고, 또 다른 부정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빈번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처럼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와 의무를 개인적인 다른 문제들과 별도로 떼어 놓은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부당한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쓰곤 하는, "한 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라는 말은 정녕 말도 안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어둠의 자녀들은 이토록 터무니없이 굴지 않지만, 빛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양자 택일의 문제


그리하여 영혼들은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도덕 관념조차 사라진 채 마음이 굳어져서, 마치 갑각류(甲殼類)처럼 회개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어떤 방식으로도 감동시킬 수 없을 만큼 중한 만성 빈혈증에 걸린 사람들, 시체처럼 굳어 버린 이 사람들을 어떻게 협력자로 삼고 싶어지겠느냐?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숙지시켜야 한다. 내가 분명히 말했듯이, 이해 관계와 목적이 상반되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태 6,24 참조 - 역주). 다시 말하면, 하느님이냐? 사탄이냐?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 영혼은 매일이 아니라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선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악한 것을 생각하고,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악행을 하는 것이 인간인 까닭이다.

사목의 문제는 따라서 구조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이다. 하느님과 사탄, 선과 악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1976년 6월 8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성삼위 하느님의 걸작


아들아, 중요한 점에 국한하긴 했지만, 내가 어떤 사제들을 원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너에게 말한 바 있다. 이제, 은총의 표지에 민감하고 주의 깊은 사제가 되도록 내가 양성하기를 원하는 방법에 대해서 네게 알려 주겠다. 이는 물론 사제의 동의가 없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때때로, 사제는 이 조형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넉넉하다. 이 활동은 사제를 공로와 덕행으로 풍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걸작이 되게 하기도 한다!

그런 사제 안에서는 성부께서 즐거워하시고, 성령께서도 즐거워하시면서 사제의 입술을 쓰셔서 영혼들에게 빛을 퍼뜨리는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그의 예수님도 그를 흐뭇해 한다. 그에게 은총을 폭포처럼 쏟아 줌으로써 그와 만나는 모든 영혼들에게 이 은총이 스며들게 한다. 예수는 그를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 되게 하여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기도의 힘과 고통의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한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의 모욕과 몰이해 속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들아, 내가 원하는 사제는 내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원하는 사제는 나를 향해 있으면서 그 자신을 나와 형제들에게 온전히 내어 놓아야 한다. 내가 아버지와 너희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모범을 따라서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메마른 사막


아들아, 그런데 내 교회 사정은 얼마나 거꾸로 돌아가고 있느냐!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제대로 할 줄을 모르고, 기껏해야 물질적인 기도나 한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성소는 없다. 사제가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게 하려고 내가 성소를 일으킬 수는 없지 않겠느냐?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많은 사제들이 나를 섬기는 대신, 마귀의 종이 되고 말았다.


참된 사제는 상당한 시간을 기도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제가 바로 나의 힘으로 강하게 되는 것은 오직 기도와 고통 덕분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끔찍이도 고통을 싫어한다.

내가 원하는 사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이 아닌 사제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헛된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나를 버리고 떠난 사제들에게 과연 믿음이 있었겠느냐? 또 남아있는 사제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큰 믿음을 가지고 있겠느냐?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원수'가 내 교회에 얼마나 끔찍한 황폐를, 얼마나 메마른 사막을 만들어 놓았는지!


내가 원하는 사제, 새로운 생명으로 정화될 내 교회의 사제는 그 자신 속에 사랑의 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지 않았느냐?(루가 13,49 참조 - 역주) 이 불이 화재를 일으킬 정도로 활활 타오른 것 외에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그렇기는커녕, 일부 목자들과 많은 사제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부풀어 있고, 그 때문에 이기심이 가득할 따름이다.

참된 사제는 목마른 사슴이 신선하고 맑은 물을 그리워 하듯이 밤이나 낮이나 나를 그리워 한다(시편 42,2 참조 - 역주).


너는 이 세대의 허다한 사제들이 나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아들아, 그들은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하고, 결혼을 꿈꾸고, 공연장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좋아한다. 술집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영화라면 부도덕한 것까지 다 좋아하고,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하느님보다도 온갖 부질없는 것과 편리한 것들에 대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을 만유 위에 모시지 않는다! 아무것이나 하느님 위에 올려 놓는 것이다!


용기가 없는 이들


그러면 주교들은 어떠하겠느냐? 그들 가운데는 자고 있는 이들이 있다. 설사 (실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도끼에 손을 댈 용기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수단이나 새로운 길을 찾는다. 하지만 새로운 길이란 것은 없다. 내가 알려 준 구속의 결실들 외에 다른 수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교들은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신중치 못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 번번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영혼들과 교회에 매우 큰 손실을 입히는 것이다. 교회를 맡아 관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건마는!

신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잠을 자고 있다. 단지 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관심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가장할 때가 많고, 아버지다운 신실함이 없으면서도 그런 아버지인 척 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또한,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주교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계산을 모르고, 높은 차원의 가르침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이기며,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지 않는다. 사랑은 삼킬 듯이 타오르는 불이요, 꺼지지 않는 불이다.

그들은 성바오로가 사랑에 대해서 쓴 글(1고린 13장 참조 - 역주)을 잘 읽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사도가 가르친 길과 정반대이거나 거의 반대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사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며 고통을 받아라!

(1975년 11월 28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또 하나의 길


아들아, 나는 많은 사제들이 잘못된 사제 생활관(生活觀)에 빠져 있기 때문에 누누이 그들의 회개를 촉구해 왔다. 그런데 모든 회개의 원칙은 겸손에 있다. 교만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 솟아 있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하느님께 도달할 정도로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많은 사제들이 교만 때문에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지옥에 떨어질 숱한 희생자들이 난다. 어떤 사람들의 의견은 이 단언과 일치하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여기에 있다. 너희가 들은 바로는 구원에 이르는 필수적인 길은 무죄와 회개라는 두 길이다.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길이 더 있다고 말하겠다. 이는 처음의 두 길보다 더 가깝지만 그만큼 안전한 길이니, 바로 '사랑'의 길이다.

무죄의 길에는 아기 천사 같은 이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죄를 짓기 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한 어린이들이다.
이 어린이들과 함께 다른 영혼들도 있는데, 이들은 내 은총의 자극에 항구함과 아낌없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화답함으로써, 도무지 악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지고 보호되어, 흰 눈처럼 티없고 찬란한 광채를 지니고 지상 여정을 끝낸 사람들로서, 낙원에서는 천상 합창단을 이루어,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 다음에는 정도는 다르지만 불행히도 죄의 혹독하고 쓰라린 체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회개의 길이 있다 :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죄를 지은 이들은 아주 많지만, 그들 모두가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를 너희는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다. 홀로 하느님 만이 인간 마음의 깊이를 모를 심연을 샅샅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인간도,설사 가장 심하게 길 잃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선과 악이 있는데 사람에 따라 그 비율이 다를 뿐이다. 하느님인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을 선물로 준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든지 그 은총을 받아들여 선용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제는 사제로서의 소명을 배반하지 않는 한 이를 모를 수 없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사제는 나의 공동 구속자가 아니냐? 사제 생활의 이 중요한 면을 모를 수 있느냐? 영혼들을 위해서 내가 받은 그 무한한 고통을 잊어버린 것이냐? 십자가에 달린 나를 이제는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되었다는 말이냐? 십자가의 길로 나를 따르지 않으면, 곧 내적이고 외적인 회개의 길로 나를 따르지 않으면, 사제로서의 영적 풍요함은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대체 모를 수 있느냐 말이다?
너무도 많은 사제들이 기회를 놓쳐서 행하지 못했던 선을, 다시 말해서 멸망한 영혼들의 수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사제들에게는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거룩하게 일하는 것이 정의와 사랑의 의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내 앞에 꿇어앉아 진지하게 양심 성찰을 하면서 내 음성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다......  그렇게 한다면 영혼 속에 흘러넘치는 빛을 받으련마는!

사랑의 길

이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길에 대해 할 말이 남아 있다. 이는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이고 특은을 받은 영혼들이 택하는 길이니, 다름아닌 '사랑'의 길이다.
이 길은 이 마지막 시대에만 영혼들에게 열린 길이 아니고, 앞에서 본 두 길과 같이 항상 있었던 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 길을 택했고, 이어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는 마지막 시대에 재발견된 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택하여 걸어갔는데, 아기 예수의 작은 데레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들아, 내가 희생 제물이 된 것은, 내가 아버지와 성령과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서로 하나가 되고 나와도 하나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랑에는 두 개의 차원이 있으니, 하느님께로 향하는 수직적 차원과 이웃에게로 향하는 수평적 차원이다. 이와 같이 내가 사랑해 온 것처럼 너희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이 너희 삶의 모든 활동의 절정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른 길을 벗어나게 된다.
사랑은 일치를 이루게 한다. 사랑은 굳게 결합시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일체로 결합된 삼위이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일치와 결합과 동등한 것이다.

영혼을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형제들과 하나 되게 하는 사랑은 나약한 인성의 불순물을 정화시키며 태우는 불이다. 나의 영은 사랑의 영이어서 (영혼들을) 뜨겁게 하고 밝혀 주고 생기있게 한다. 그리하여 영혼들 위에 드리워지는 인간적 나약의 그늘을 흩어 버린다.
그러나 사랑은 또한 시멘트와 섞인 쇳덩어리와 같은 힘이요 능력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물질의 성질이 융합되어 다만 하나의 견고한 덩어리로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부스러뜨리고자 하는 자들이 아무리 용써보아도 헛일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한데 섞이면 영혼들을 하느님께 결합시키고 영혼들끼리도 서로 결합시켜서 오직 한 덩어리가 되게 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실팍한 덩어리여서 악의 세력이 아무리 기를 써도 부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들아, 내 신비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겠는지를 마음 속에 그려보도록 하여라. 내 신비체는 모든 지체들이 머리와 결합하고 서로 뭉쳐서 강력한 한 덩어리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지상이나 지옥의 어떤 힘도 이를 뒤흔들 수가 없을 것이다.
장차 정화를 치르고 새로 태어날 교회는 아무도 부술 수 없고 흠집조차 낼 수 없는, 화강암처럼 단단한 '몸'이 될 것이다.....

이기심 따위는 억제해야 한다

힘주어 말하거니와 도끼에 손을 댈 필요가 있다.
여러 지역 교회들이 이 시대의 표징을 슬기롭게 해독(解讀)하고자 한다면, 사랑의 두 차원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다시 살펴보고 재조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은 이기심, 야심, 시샘, 질투 따위는 억제해야 할 때이다. 너희를 에워싸고 있는 구름 밖으로 나와서 옷의 먼지를 털어야 할 때이고, 마르크스적이건 자본주의적이건 물질주의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할 때이다. 둘 다 유독하고 몹시 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중독된 다수의 사제들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때이다. 멸망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느님께 도달함으로써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는 길, 또 내 사제들 및 봉헌자들 전체가 소명의 목적을 성취하는 길도 (이렇듯) 세 가지가 있고, 이 모두가 가치있고 훌륭한 길이다. 왜냐하면, 약간의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어느 길이나 항상 사랑이라는 본질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아, 이를 내 모든 사제들에게 알려라. 지체할 때가 아니다. 착한 사제들에게는 가장 미지근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자기를 봉헌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이들은 내 것이 아니라 사탄의 것인 세상의 간계와 유혹 속에서, 또 양심의 가책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무딘 양심이라 하더라도, 지고 싶지 않은 짐에 억눌릴 때면 고개를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다.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10월 5일)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내 교회의 선익을 위해 필요하니 말이다. .........

이제 너에게 강복하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다 받아써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일랑은 떨쳐 버려라.

(1976년 12월 1일 ①)


이 메시지를 네 동료들에게 전하여라. 그리고 어떤 반응이 일어나건 염려하지 말아라. 씨 뿌리는 착한 사람처럼 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 가운데서 단 한 톨만 좋은 땅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네 일과 고통이 허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네 동료들에게는 훌륭한 봉사를, 수많은 고통의 타격에 싸여 있는 나에게는 적으나마 기쁨을 안겨 주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아들아, 네게 강복한다. 나를 사랑하여라!

(1975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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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모든 연옥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특히 전세계로 퍼진 코르나19로 죽은 모든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한숨과 기도를 들어주시고, 국민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지도자들이 회개하여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아멘.

성령의 불길이 한반도에서 전세계로 퍼져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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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http://예수.kr ,  http://마리아.한국)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1,3)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시편1,3) 

♥장한상요셉, 양점상마리아, 장가브리엘,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들 (성인의 통공)♥ 

♥안토니오 비오, 릿다, 미카엘, 이 땅의 모든 사람들 (성인의 통공) 

미사신청 : 11월 1일~3일, 11월 7일, 11월 9일, 11월 30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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