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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11.1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19 조회수2,227 추천수5 반대(0) 신고

(대전교구 성지, 홍주순교성지)

2020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묵시 5,1-10

나 요한은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2 나는 또 큰 능력을 지닌

천사 하나가 큰 소리로,

“이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펴기에 합당한 자 누구인가?”

하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러나 하늘에도 땅 위에도

땅 아래에도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6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7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8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받으시자,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수금과, 또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10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복음 루카 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댄 애리얼리라는 행동경제학자가

실험을 하나 했습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합친 숫자만큼

현금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는 본인만 보고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해서 더 많은

 현금을 받아간다고 해도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 다시 실험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합친 숫자만큼

현금을 주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이 현금을 피실험자 이름으로

기부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거짓말 탐지기를

 설치해서 거짓말을 했는지를

확인해보겠다고 말합니다.
거짓말 탐지기를 설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실을 말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숫자 ‘6’이

두 번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짓말 탐지기에서

 ‘참’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거짓말을 해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나 자신을 위한 거짓만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독재자들의 거짓을 보십시오.

그들은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자신의 행동이 진리라는 착각에서

빠져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신들과

하느님이 만나는 거룩한 공간이었으니,

이곳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온갖 죄와 악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전을 정화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셨던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집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은 전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팔아 사람들을 더욱더 소외시키고

고통 속에 머물게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사라진 공간,

 이 사랑을 사라지게 한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인간의

 뻔뻔함과 거짓. 이 모든 모습에

주님께서는 우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더는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위해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인생의 보석들은 평소의

시간들 틈에 박혀 있습니다.

(유병욱)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는 용기

책을 꽤 많이 보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매하는 책도

상당히 많습니다. 인터넷 정보를

 모아서 책을 사지만, “괜히 샀다.”

라는 생각이 드는 책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읽으려

노력하지만, 읽는데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어느 날, 올해 읽은 책들을 적은

 독서 노트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없고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표시한

책들의 출판사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주로 문학적 깊이가 있는

 책들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책들을

어려워했고 또 힘들게 읽었더군요.

이는 저의 문학적 수준이 그만큼

낮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어도 문학적

수준이 올라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를 우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문학적 수준 문제가 아니라

좋아하는 장르가 달라서 그런 거야.”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책을 읽는

장르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단순히 문학적 수준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신부님께 말하길 잘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대전교구 성지, 홍주순교성지 성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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