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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일 뿐이다 (마태복음 25:31-4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1 조회수1,517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글방 2020.11. 22. 그리스도왕 대축일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일 뿐이다(최후의 심판)

(마태복음 25:31-46)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32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1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고린도후서 4:18)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찰나라는 거예요. 찰나는 명주실을 팽팽히 당겼을 때, 칼로 그걸 땅 끊으면, 그게 70찰나예요. 그러니까 한 찰나는 얼마나 짧은 거예요?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거예요. ‘잠시, 잠깐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불만을 갖죠. 이 인생이라는, 역사라는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희망이라는 건, 인생에 투입이 된 죄인으로서의 그 옛 자아를, 영원한 실체로 착각을 하고, 그 옛 자아가 속해 있는 그 과거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되고자 하는 미래의 지점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활주로! 그걸 희망이라 그래요. 모든 인간은 바로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죠. 따라서 그 인간의 희망이라는 건, 밝고 활기찬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인 거예요. 그러므로 인간의 희망은 성취되어져야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에 의해 부정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처럼 되었다고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 자신들이 죄인으로 폭로되는 현장을 감당해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죄인의 역할이 아닌, 의인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이렇게 착한 척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 義人은 하나도 없다 그랬고요. 모든 인간이 중에 잉태되고 태어난다, 그랬어요. 따라서 이 세상 속에서의 의인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믿음이 없는 자들은 모두 다 자신이 진짜 신인 줄 착각하며,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자신의 배를 우상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자신이 죄인으로 폭로가 될 때면, 열심 있는 종교행위나 착한 일! 선한 일 등으로 자신을 위장해서, 우리 인간도 이렇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위해 보인단 말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는 죽은 흙에 불과한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존재란 말이에요. 치유와 교훈을 받아야 되는 거란 말입니다. 역사와 인생은! 신앙생활은!

성도는 원래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진 사람들이지만,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는, 그 죄인들의 결국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체험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죄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물을, 절절하게 경험해야 하는 것이,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역사라는 상황극인 거예요. 인생이라는 상황극인 거예요.

그래서 성도가 이 땅에서 죄인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마치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율법 아래로 오신 것과 같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고난과 시험을 체험하지 않는게 없다, 그러잖아요? 그 예수님이, 죄인이 되셔서 죽어버리시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는 죄인으로 오게 되지만, 아울러 하느님으로부터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받게 돼요. 그 믿음이라는 건, 이 땅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죄인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성도들의 눈과 귀를 열어서, 그들이 원래 어떤 존재로 완성이 되어 있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게 믿음입니다.

그 성도의 완료 상황은, 자신의 열심과 노력이 아닌, 하느님의 열심과 그분의 작정에 의해 이루어진 거예요. 거기에 죽은 흙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들이 나기도 전에 이미 완료가 된 거기 때문에!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완료가 된 하느님나라의 현실을, 소망(所望)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8:24-25)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반드시, 나와야 할 게 참음이란 말이에요. 참음! 언제까지? 죽는 날까지 참아야 돼요. 죽는 날까지!

이제 왜 성경이 우리를 나그네라고 하는지, 이방인라고 하는지, 외국인이라고 하는지 잘 아시겠죠? 우리는 외국인이에요. 우리는 이 인생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죄의 본질과 하느님의 은혜를 배워서, 본질적 치유를 받고 원래의 나라! 하느님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하늘의 왕자님들과 공주님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예요. 외국인이에요. 이방인이에요. 그런데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나라의 왕자님들! 공주님들이 왜 이 지저분한 나라에서, 여기에서 대장이 되려고 그래요? 그게 성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성도의 인생일진대, 오늘 본문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구제(救濟)를 열심히 하자! 선행(善行)을 열심히 하자! 그래야 양이 된다, 그래야 양이 되어 천국 간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게 옳습니까? 하느님께서 죄인들에게 너희들 인생 속에서 구제와 봉사와 종교행위에 힘쓰지 않으면, 너희들은 염소가 되어서 지옥에 갈 거야!’라고 협박을 하신단 말이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역사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며,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어떻게 살 수밖에 없으며, 그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비교하여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배우고 가는 거예요. 이미 결정된 자들이!

그들이 이 역사 속에서 착한 일과 선한 일을 몇 개씩 하고 돌아왔는지는, 하느님의 관심 밖의 일이에요. 세상적 세계관에 의한 착한 일과 선한 일을 아주 많이 하고도,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신들을 향한 하느님의 은혜의 그 필연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너무 많잖아요? 우리가 세상적 관점으로,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서,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하고도,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 천국 갈 수 있어요? 못 간다 말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양과 염소의 비유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창조이전에 갈려 있어요. 양과 염소들은, 갈려진 상태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거예요. 양들은 역사의 주인공들로, 염소들은 엑스트라들로, 내려오게 되는 거예요. 주님은 그 현실을, 다른 곳에서도 비유로 똑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바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예요.

알곡과 가라지가 첨예하게 갈라져 있는데, 알곡이 불성실하여 가라지로 바뀌는 일이 없고, 가라지가 열심히 노력하여 알곡이 될 수 없어요. 끝까지 그 상태로 가요. 나중에 가라지만 뽑히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의 노력과 불성실함에 의해 그들의 신분이 절대 안 바뀐다니까요. 그 둘은 끝까지 자기의 신분대로 살아요. 그리고 결국에는, 가라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다 끝내고, 거두어져서 유황불로 들어간다 그래요. 그게 가라지들의 운명이에요. 그렇게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는 창조이전부터 갈라져 있어요. 그걸 무조건적 선택! 언컨디셔널 일렉션(Unconditional Election)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겪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미 하느님나라에서 완료가 된, 진짜 현실의 실제와 현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현실은, 지금 그들이 사는 일상이 아니라, 이미 완료가 된 하느님나라여야 하는 거예요. 그게 현실이에요. 우리의 현실은, 지금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의 현실은! 성도의 현실은 하느님나라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들은 못 보는 나라가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이미 결정이 되어서 역사 속으로 내려온 이들이, 이 땅위에서 선한 일을 조금 못했고,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조금 못 내어놓았다고 해서, 그들의 신분이 바뀔 수 있겠느냐고요? 그거 안 바뀐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비유의 내용이란 말이에요.

본문 34절과 41절을 보겠습니다. 34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양들에게 뭐라 그래요? 창조 때부터,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너희들을 위하여 예비 된 그 나라! 누구를 위하여? 너희들! 어떤 구별된 너희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되어있던 그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는 거예요. 완료형 동사란 말이에요. 이게! 41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저주를 받은! 완료예요. 이것도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예비 된 나라도 완료예요. 그러니까 저주를 받기로 예비 된 자들이 있고, 그들이 들어갈 나라! 지옥이 이미 예비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34절과 41절에 그 예비 된, ‘헤토이마조라는 단어가 완료형 동사예요.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미 창조이전에 완료가 되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존재들도 이미, 구별이 되어 있어요. 완료가 되어 있어요.

(로마서 9:10-11, 19-24)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이렇게 지옥에 들어갈 진노의 그릇과, 천국에 들어갈 자비의 그릇은, 이미 옹기장이의 마음속에서 다 결정이 되어 있는 거예요. 인본주의자들은 그걸 수긍하지 못해요. 왜 하느님이 우리 인간과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결정하느냐는 거예요. 그건 자기들이 원래 산 존재! 살아있는 존재라는 전제를 갖고 내놓는 불평이죠.

그런데 인간의 처음자리는 죽은 흙이란 말입니다. 죽은 흙이 무슨 불평을 하냐고요? 살아서 움직이고 숨 쉰다고, 그걸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걸 그냥 네페쉬!’ 죽었다고 이야기한다니까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죽은 자를 죽은 상태! 영원한 죽음! 지옥으로 던진다고 해서, 그게 무슨 잘못이냐 말이에요.

인간들은 하느님 앞에서 그 정도로 교만해요. 그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실체란 말입니다. 그게 무서운 죄예요. 그게! 다른 게 죄가 아니라, 그게 죄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양과 염소들의 행함은, 도대체 무엇을 교훈하기 위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일까? 먼저 예수님 오른편 양들을 한 번 보자 말이에요. 영원한 천국의 주인으로 세움을 입은 양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걸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벗었을 때 옷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외면하지 않고 돌봐주었다, 그래요. 목마름! 배고픔! 나그네! 벌거벗음! 질병! 감옥! 이게 다 뭡니까? 상징적으로?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대표적인 증상들! 예수님이 그거 성취하고 가신 거예요. 그거 해결하고 가신 거죠.

시장하셨던 예수님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고픔을 대신 가져가시고,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굶어 죽으시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말라비틀어진 나무, 십자가에 달리시는 거예요. 십자가와 하나가 되셔서, 예수가 죽으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공로로, 우리의 배가, 은혜로 가득 채워지는 거예요.

 

(요한복음 6:33-35) 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로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결이 되는 거예요. 벌거벗음도 마찬가지예요.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벌거벗게 된 아담!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는 지금 벌거벗고 사는 거예요. 이게 부끄러운 모습이란 말입니다. 죄인들의 모습이! 그 벌거벗게 된 아담의 부끄러움이 노아에게서 한 번 더 확인이 되죠. 벌거벗고 죄인의 모습으로 누어 있잖아요. 그걸 예수님이 살짝 덮는 거예요. 그게 셈의 지혜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져가시고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겨지는 거예요. 살짝 가려놓은 건, 그건 예의상 거려놓은 것이지, 다 벌거벗기는 거예요. 십자가 위에서는. 그리고 그분의 의로 우리에게 옷을 입혀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군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는 장면이 나오는 거예요. 자신을 죽이는 그런 존재들에게, 당신의 옷을 벗어주고 가시는 예수! 그래서 우리가 의 흰옷! 아마포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16-17) 16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마귀 들린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다른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그네들을 찾아오셔서, 그 나그네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우리는 원래 하늘 밖의 이방인이에요. 하늘의 나그네로 존재할 뻔한 자들이죠.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요.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래서 나그네예요. 우리는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당신이 그 나그네가 되시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나그네 됨을 가져가시는 거죠. 그리고는, 우리를 하느님의 가족! 나그네가 아니라, 하느님의 가족! 하느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시는 거예요. 나그네 됨은 자기가 가져가시고. ~

(에페소서 2:19) 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이게 가족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이 나그네 되심으로 인해서!

마지막으로 감옥에 있는 자들을 찾아 오셔서 그 감옥에 있는 자들을 건져내시고 위로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성경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살아야할 피조물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늘의 그 초월과, 하느님의 생명력과 단절된 채, 역사의 공간 속에 갇혀 있는 상태를, ‘휠라케, , 감옥이라 그래요. 그게 지옥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이에요. 하느님의 일반 은총이 쏙 빠지면 그냥 바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감옥이라고 번역이 되어 쓰인 거예요. 그 감옥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나오는 곳이 있죠?

(베드로전서 3:18-19)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게 휠라케예요. 감옥! 바로 그 갇혀있는, 지옥, 감옥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고 위로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 오른편의 양들이 행한 모든 일을, 완벽하게 먼저 해내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형제들의 목마름과, 형제들의 배고픔과, 형제들의 벌거벗음과, 형제들의 나그네 됨과, 형제들의 질병과, 형제들의 감옥을, 사랑과 은혜와 자비로 해결하고 위로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진정한 하느님의 어린양인 거예요. 그 어린양 안에서, 양들은 양이 되는 거지, 그들이 양의 자격을 갖추어서 양이 될 수 없어요. 그런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다.

우린 다 염소예요. 그런데 양이신 예수님이, 우릴 양 안으로 끌어당기시는 거예요. 그래서 양이 되는 거예요. 보좌 우편에 어린 양! 창조이전에 이미 그 하느님의 어린양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결정이 되어버린 하느님의 편애 속의 존재들이, 바로 성도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라는 양 안에서 양이 되는 거예요.

그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의 그 세계관이, 자기들은 죽은 흙에 불과하여, 전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혜로, 하늘의 의()를 거저 받은, 양들이 된 존재들에게서, 가장 처음 유발(誘發)이 되어 나오는 게 뭐겠어요? 자기부인이란 말입니다. 나는 아닌데, 예수 안에서 내가 양이 된 거구나.’ 자기부인이에요. 그러한 자기부인의 사고 속에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볼 때, 저주받은 자! 연약한 자! 죄인으로 그렇게 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잖아요? ‘우리는 괜찮은 존재들인데, 저 놈들은 뭔가 자기보다 못 난 존재라고 본게 바리새이들이잖아요? 그게 자기부인이 안 된 자들이, 하느님의, 신의 자리에서 본 세상이에요. 세계관이에요.

그들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밥도 안 먹었어요. 이들이 지극히 작은 자잖아요? 보세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 착한 인간들은, 지극히 작은 자들과, 밥도 함께 안 먹었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그들을 쫓아가고 있다니깐요. 우리는 잘났다는 거예요. 하느님나라의 법에 유권해석을 자기가 갖고 있어요. 이 못된 것들이! 유권해석은 하느님이 갖고 있어야 돼요. 하느님나라의 유권해석은 우리가 가질 수 없다니까요. 무슨 권리로 우리가 그 법을 해석합니까?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그런 자들과 같이 되지 않은 걸 감사했던 자들이에요. 이게 마귀란 말입니다. 독사의 새끼!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 그랬잖아요? 그게 마귀란 뜻이지 뭐예요

그렇다면 은혜의 복음을 아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세계관은 바로 그러한 연약한 모습이, 자신의 것이었음을 자각하는 거예요. 그거 내 거예요. 그리고 지금의 나의 모습인 거예요. 그게! 그런데 상대방의 그 약점을 지적함으로 해서, 자기의 약점을 가리는 거예요. 이 교활한 인간들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완료된 하느님나라를, 이미 선물해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감사밖에 나올 게 없어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더 깊이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삶의 목적이잖아요? 그 삶 안에서 착한 자가 되는 건 아무 소용없어요. 거기서 치유가 돼야 돼요. 배움이 있어야 돼요.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에 대한 앎이 있어야 된다 말입니다. 그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그게 자기부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드는 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내가 내 십자가 지고, 열심히 한 번 해 볼게! 이게 율법이라니까요. 원수 같은 남편! 원수 같은 마누라! 원수 같은 자식! 원수 같은 질병! 끝까지 짊어지고 난 참아볼 거야. 이게 율법이란 말입니다. 기특한 생각 같지만!

이렇게 자기 자신이나 이웃에게서 발견이 되는 인간의 연약함과 불가능함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 그가 예수의 형제인 그가, 예수의 그 십자가 삶에 동참하고 있구나!’라고 그 안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자를,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예수를 극진히 대접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양입니다.

본문 40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단서가 붙어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5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주님께서 배고픈지, 목마른지, 나그네, 병든 자, 벌거벗은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내 형제, 지극히 작은 자! 이게 성도의 본질이에요.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들은, 예수의 발자취를 쫓아서, 그렇게 자기를 비운, 연약한 자기부인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인 거예요.

반면에, 율법과 제사를 열심히 지키면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치 않았던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을 볼 때, 그들을 저주받은 자로 여겼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로 오신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전히 교회가 힘의 원리를 쫓고 있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예수님은 교회에서 살해당한다 말입니다. 이 간단한 걸 이해 못해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요! 이 간단한 걸!

무조건 커지면 그냥 성령의 은혜가 임했다 그러고. 하느님의 축복이 임했다 그러고. 아직도 그렇게 유치한 생각들을 한다 말입니다. 그게 힘이 최고라는 거 아녜요?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커져야 된다, 부해져야 된다, 성공해야 된다가, 힘의 원리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게 죄()라 그런다니까요. 그들이 지옥 간다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교회가 그걸 추구하느냐 말이에요. 있지요? 그죠.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혜의 복음 앞에서의 자기부인 없이, 자신들의 구제나 선행이나 종교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열심히 행하는 자들은, 절대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로 대접할 수가 없어요. 착한 일에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런 열매는 반드시 독()이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만들어진 과일이 맛과 향은 제철에 난 과일과 똑같죠. 여러분, 그 안에 독소가 포함되어 있는 거 아세요? 풋 과일의 꼭지 부분에 독소가 있는 거처럼, 제철에 나지 않은, 인공적인 환경과 온도를 만들어서, 그렇게 생산해낸 과일에는, 독이 들어있어요.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비슷한 열매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 없이! 은혜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건 하느님 앞에 올려 질 수 없는 과일이에요. 열매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비슷한 거 만들어 놓고 나는 다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들과 나는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과나무에 막 수박도 달려있고, 바나나도 달려 있고, 그래요. 보기는 좋은데, 못 먹어요. 그건 진짜 나무 아닌 거예요.

이렇게 양들이 행한 선행과 구제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것이어야 돼요.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자기부인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지극히 작은 자이신 예수님을 대접한다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 양과 염소의 비유를,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으로 거지로, 병든 자로, 나그네로 변장해서 사람들에게 찾아오시니까, 무조건 연약한 자들을 도와주다 보면, 불현듯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이 될 것이라는 그런 류의 해석은, 너무 동화적인 발상인 거예요. 그런 예화 듣고 얼마나 감동들 하셨어요? 옛날에! 지금은 어때요!

, 길가에 있는 거지를 집으로 데려다가 따뜻한 밥을 먹이고 목욕을 시켰더니, 그분이 예수로 화하면서 얘야, 네가 나를 이렇게 대접해주다니.’ 무슨 심청전입니까? 그러면 마음속에, 내가 그런 칭찬을 얻기 위해, 내가 하기 싫은 착한 일을 억지로 하는 걸, 자유라고 그래요? 그걸 짐이라고 하는 겁니다. 굴레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그랬어요. 그런데 왜 스스로 짐을 만들어 지십니까? 그래서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이 메시아에요. 왜 약한 민중을 돕다 보면, 그들이 나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예수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민중이 메시아예요. 그래서 민중신학이에요. 그건 마귀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착한 일을 열심히 하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대접하여, 천국에 가는 게 아녜요. 예수님의 은혜로만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예수님의 은혜로 가기로 결정된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속에서, 자기부인이 나오고, 그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착한 일이 나오는 거예요. 착한 일을 하다 보면, 예수님을 불현듯 만나, 천국에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 좀 제발 잘 구별하시란 말예요. 그래서 먼저 힘써 하느님을 알자, 야훼를 알자!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이후에 하란 말예요. 그 땐 하기 싫어도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 우편에 양들이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하고 의아해 하는 거예요. 그들이 예수를 믿고, 이 땅에서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동안, 오늘 본문에 나열된 그런 기특한 일을 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어요. 양들은 전부 그런 일을 한다가 공식이 아녜요.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수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한 자로 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일을 행한 자로, 평가를 받게 된 거예요. 따라서 그들이 세상에서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그들 안에 있는 예수의 행함이었기 때문에,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했나요?’라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했어!’하고 부끄러움을 덮어줘 버리는 게 은혜란 말입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덮어줌의 은혜!

반면에 이 세상에서 그런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양들은 어떻겠어요? 자칭 양? 그들이 염소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모두 자신의 의()의 마일리지에 차곡차곡 쌓아요. 그게 뭐라고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말이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착한 일! 기특한 종교행위를, 하나도 잊지 않아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자랑을, 어찌 하나라도 잊어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열심을 부리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게 마귀의 행사인 거예요. 그 착한 일은 마귀의 행사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다른 비유에서 그들을 이렇게 꼬집죠.

(루가복음 15:7) 7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게 이미 하느님께 돌아온 자들보다, 죄인 하나가 돌아올 때마다, 하느님이 더 기뻐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럼 계속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그러면 되겠네요. 하느님 기뻐하시게. 그런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자칭 의인 아흔아홉(99)! 걔네들은 지금 착한 일을 하고 있거든요. 세상적 가치관으로 볼 때, 그들은 기특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도 안 기뻐한다는 뜻이에요. 대신에 죄인 하나가 제가 죄인입니다.’하고 돌아올 때, 천군천사가 환호한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이게!

그런데 너무 착해! 회개할 것 없어, 자기들은요! 회개할 것 없는 아흔아홉(99)이에요! 그들은 염소예요. 지옥가요. 그러나 성부여 죄인입니다, 손들고 옵니다.’하고 오는 그 죄인 하나 그가 양인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것 깨닫고 오라고 이 역사 속에 던지신 건데, 전부 너무 착한 인간들만 모여 있는 거예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분명 하느님은 양과 염소를, 당신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놓으신 후에, 창조이전부터 예비 된 천국과 지옥으로 그들을 밀어 넣으셨어요. 그 동사들이 전부 완료형이라 그랬죠? 그렇다면 이 땅에서 염소들이 내어놓은 착한 일이, 그들의 염소 신분을 양으로 바꿀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지금 양과 염소를 이미 갈라놓고, 그들이 갈 곳을 정해주셨어요. 그리고 그리로 밀어 넣고 계세요. 그런데 염소들이, ‘저 세상에서 그렇게 착한 일 많이 했는데, 왜 우리보고 지옥에 가라그래이러고 있어요. ‘예수님! 나는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서 굶주리고 있고, 목마르고 있는 걸 보여줬다면, 언제든지 도와줬을 거예요.’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분명 그랬을 거예요. 착하게 살았으니까! 그런데 내 앞에 안 나타났잖아요, 예수님? 나타나지도 않고서, 왜 그거 안 했다고 나한테 이 난리를 피십니까? 나는 했단 말이에요.’ 그게 염소인 거예요. 양들은? 예수님이 그 모습이 되어 나타나셨다 할지라도,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의와 선은, 절대 그들을 향해 격발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양인 거예요. 염소들 보세요. 왜 나타나지도 않고 나한테 안 했다고 난리냐고? 나는 분명히 했을 거라고, 나타나기만 했으면. 나는 했을 거라고!’ 그게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예요. ‘이웃만 이야기해주세요. 내가 가서 사랑해버릴 테니까.’ 그게 바리새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는 그런 알미니안 주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구원받은 자들도 성도답게 살지 못하면, 중간에 탈락한다고요? 오늘 본문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나요? 아녜요. ‘저는 안 했는데요!’ 그런데도 , 너는 양이야. 너는 그것 못하니까 내가 덮은 거야. 그게 은혜라는 거야. 그게 구원이라는 거야.’

열 처녀 보세요. 다 자고 있었어요. 열 명이 다! 그런데 그 열 처녀의 비유의 첫 대사가 뭐냐 하면? ‘깨어 있으라.’예요. 다 자고 있었는데,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게 딱 발각이 되자마자, 하느님이 찾아와 버리는 거예요. 주인이 찾아와 버리는 거예요. 신랑이! 그리고 문 딱 잠가버리는 거예요. 다섯 처녀는 자다 말고, 신랑이 깨어서 들어갔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나도 자고 있었는데, 그냥 들어와 있어.’ 안에 미련한 다섯 처녀는 같이 자고 있었는데, 왜 쟤네들만 깨어갖고 들어갔느냐는 거예요. 하느님의 선택인 것입니다.

그게 은혜예요. 하느님의 소망! 하느님의 완료! 구원의 완료는 우리의 일상, 우리의 희망을 그렇게 폭격해 들어온다니까요. 인본주의는 하느님의 은혜 앞에서 그렇게 박살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 할 거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님의 은혜만 꼭 붙드세요.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영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돼요. 영원을 준비하는 삶은, 늘 하느님나라에 집중하여 사는 거예요. 선한 일을, 착한 일을 많이 내어놓으라는 뜻이 아니라, 늘 우리의 일상이 그것과 연결이 되어야 돼요. 실패했을 때는, 예수님 때문에 괴로워야 되고, 또 내 삶 속에서 그런 삶이 나왔을 때에는, 하느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이 나왔을 때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찬양이 되어야 돼요. 우리 안에서! 그게 민감하게,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에요.

이 비유가, 예수님의 마태복음 24장의 종말 말씀에 붙어 있는 거잖아요? ‘종말의 때가예수님이 죽 ~ 설명해주다가, 이 비유 네 개를 쫙 붙이는 거예요. 지혜로운 종의 비유! 달란트 비유! 열 처녀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거기가 쪽 붙어 있는 거예요.

주인이 떠났는데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바보같이 산거예요. 비효율성을 갖고. 신랑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기름을 왜 사놓습니까? 주인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그거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주인이 준 돈을 갖고 장사를 해요? 주인이 시킨 걸 그냥 하는 거예요. 그 은혜에 맡겨버리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냥 감사하시면서 살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불만족스러워하는 우리의 일상이, 잠시 우리가 거쳐 지나가는 삶에 불과하다면, 이게 우릴 그렇게 절망시킬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이미 믿음으로 바라보게 된, 우리의 그 현실! 완료된 하느님나라의 현실로, 매일 매일을 그냥 감사하게 사시면 돼요.

지금,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시원한 물 언제든지 마실 수 있잖아요? 언제든지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무 때나 수돗물 틀면, 따뜻한 물 나오잖아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3% 밖에 안 돼요. 적어도 그 안에 들어 있쟌아요? 그런데 뭘 망했다는 거예요, 그냥 세상에서 나는 이 정도가 되어야 되는데, 이 상태가 쪽 팔린다는 거죠.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의 세계관으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의 현실은, 이 잠깐 동안에 삶이 아닙니다. 하느님나라의 현실이, 진짜 우리 현실인 거예요. 우린 어떤 더러운 걸 내어놓아도, 그 양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하느님의 무지막지한 은혜와 그 사랑을, 제발 이해하세요.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냥 행복하게 누리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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