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박기석 신부의 마르코복음 제18회 마르 4,21-29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1 조회수1,605 추천수2 반대(0) 신고


제18회 마르 4,21-29 박기석 신부의 마르코복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설 4,13-20절 말씀을 공부했죠. 이 장면에 이어서 지금 마르코복음 4,21-25절은 단절어 집성문이에요. 소위 말해서 예수님의 네 가지 토막 말씀. 그러니까 사실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얘기되었던 것들을 이렇게 모았다는 겁니다. 마르코가. 비유를 지금 4장에 모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각각 다른 상황에서 하셨던 말씀을 비유 다음에 이렇게 모아 놓았다는 거죠. 

 

마르코가 단절어를 이렇게 모아 놓아서 이 자리에 삽입한 이유는 그 안에서 전체를 흐르는 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어떤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문학 이론에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는 분석 보고가 있어요. 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의 흐름을 쫓아가는 방식으로 이 이론에 맞추면 지금 마르코의 편집 작업과 의도는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단절어 4편을 한 가지 맥으로 뚫어서 즉, 감춰둔 것, 숨겨놓은 것이 결국은 밝혀진다, 드러난다고 하는 그 한 가지 맥으로 연결해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정체가 반드시, 결국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여기에 담아 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메시아 비밀, 함구령 이런 것들 많이 강조했잖아요. 그러나 결코 못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 깨우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이 온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느님 나라가 실천되고 완성되도록,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마르코가 이렇게 예수님의 단절어 4개를 모아놓았다고 하는 것이죠. 지상에서의 예수님은 당신 신분을 감추셨지만 결국 그분은 등불이시기 때문에 세상을 비추게 마련이고 그분이 한동안 당신 정체를 숨기려 하신다 하더라도 결국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마르 4,21)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었던 등불의 종류는 올리브 기름을 담고 있는 작은 점토 그릇이었습니다. 기름 안에 담긴 천으로된 심지가 촛불 같이 불꽃을 내는 것인데, 함지에 해당되는 희랍어는 모디오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모디오스는 8-9리터 정도 되는 용량과 동시에 용기도 뜻합니다 .

 

이 희랍 말의 그 양이 좀 우리 말로 통상 함지 외 됫박이라는 말 쓰죠. 됫박으로 옮겨 왔는데요. 그러나 이것이 용기나 용량으로 뜻하기는 하지만 그리스 말에 비해서 그 양이 좀 작아요. 담고 있는 양이 좀 적습니다. 그래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함지가 더 나은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하간 함지 속에 등불을 감춰 놓았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빗을 밝히는 등불의 용도와는 맞지가 않지요. 그야말로 무의미한 겁니다. 세상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등불을 놓는 건대 함지 속에 집어넣으면 안 되죠.

 

이스라엘은 광야성 기후와 먼지, 바람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가능한 작게 만들어 놓고 그러다 보니 낮에도 실내는 어두컴컴해요. 그래서 그때 필요한 것이 결국 낮에도 실내를 환하게 하기 위해서 올리브 기름으로 방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런데 등불을 끌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바로 그을음이 생기는데, 그 그을음이 창문이 작기 때문에 환기가 되지 않아서 그을음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불편함을 막기 위해서 함지를 거꾸로 해서 등불 위에 덮는 식으로 등불을 껐던 거예요.

 

그런데 만일 방을 밝히기 위해 킨 등불을 아예 처음부터 함지 밑에 놓는다면 그건 상식이 통하지 않는 행동이지요. 끌 때만 함지를 덮어 놓으면 됐지 빛을 밝히기 위해서 켜 놓는 걸 왜 함지 속에 넣어 놓겠어요. 또한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것 역시 무의미합니다.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일은 오히려 매우 위험한 행동이에요. 잘못하다 화재가 일어나 집까지 태울 수 있지 않습니까?

 

방을 밝히고자 등경 위에 놓을 등불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그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아주 대답하기 쉬운 겁니다. 그런데 등불이라고 하는 표현은 사실 성경에서 보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와 모세 두 예언자를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집회 48,1) 예언자 엘리야의 말을 등불이라고 얘기하고 있죠.

신약성경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등불로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요한 5,35)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이 등불이라고 표현해 주고 있는 거죠. 그리고 율사를 일컬어서, 율법 학자들을 일컬어서 세상의 등불, 이스라엘의 등불, 환한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등불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됐는데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등불로 여기신 거 같아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도 하시잖아요. 여하간 이렇게 명확한 질문을 물으시면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게 중요합니다. 그분이 등불과 비교하신 것이 과연 무엇일까?

 

예수님은 질문의 대답이 분명한 그런 수사학적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언급된 첫 번째 질문 그대로 그 안에 하나의 단서가 놓여 있어요.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사실 우리 성경 번역은 '등불을 가져다'가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원문은 '등불이 오다'라는 표현이에요. 그렇다면 등불이 오다, 등불을 가져오다 이렇게 풀이하면 좀 덜 생소한데요.

 

여기서 '오다'라고 하는 말, 이것은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말씀 곧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말씀이 오다. 말씀을 가져오다가 아니라 말씀이 오다에요. 그러니가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말씀이 오신 것 이렇게 표현해야 더 정확한 의미라는 겁니다. 희랍어 문장이 그런 것인데 우리 번역상 가져다가로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우리가 오신 분을 막고 있다는 거죠.

 

등불을 침상 밑이나 함지 속에 넣어 놓는다는 것은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마르코는 아주 묘하게 또 예수님 자신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등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바로 당신을 통해 밝히 드러내시고 계신 거죠. 마치 등불이 빛을 밝혀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이런 역설적인 진술은 예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과는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밝게 드러 내려는 물품 그러니까 등불처럼 그런 물품 중 숨겨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러한 역설은 하느님의 다스림과 또 예수님의 지상 공적 직무에 적용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당신 정체성에 대해서 함구령, 그래서 대대적으로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래서 함구령을 많이 내리셨죠. 더러운 영에게도 그렇고, 병자에게도 치유해 주시면서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도래는 이렇게 신비라 말씀하셨어요.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

 

이것 자체가 그것에 대해서 숨기려고,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 안에서도 아주 짧게 언급하신 게 아닌가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숨김, 감추어진 것들에는 그만한 이유, 합당한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도록 그 모든 것들을 여기에 놓고 계십니다. 예수님이라는 등불이 함지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나중에 등경 위에 놓이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함지 속에 있다는 것이죠.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신비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나라의 시작과 그 나라의 다가옴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비유 속에 감추어진 신비가 일차적으로는 제자들에게만 계시됐지만 지금 4장에서 보면 결국에 가서는 모든 이에게 명백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 말씀을 지금 현재의 문맥 속에 배치함으로써, 편집적인 의도죠. 자기가 그토록 강조하는 메시아 비밀이 계속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장차 드러난다는 것. 걷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자, 들어보라라."(마르 4,3)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세 번째 반복되고 있어요. 예수님은 깊이 생각하도록 제자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초대는 이미 이전에 두 번이나 있었어요. 그때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주위 깊게 듣고 신중하게 살펴보라는 것이죠. 우리들의 깊은 내면 성찰을 요구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 들어라."(마르 4,24) 말 그대로 들은 것에 신경을 쓰라는 것인데 우리가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군중들이 아니라 우리는 따로 비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제자들이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분 주위에 함께 머물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에게만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가 가톨릭 신자, 그리스도 신자이기 때문에 한번 더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냥 단순히 씨 뿌리는 농부와 그렇게 수확을 거두는 농사의 이야기, 어떤 농업 신문에 풍년,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는 그런 정보, 소식 이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듣지 말고 일상이 일이 아니라 정말 참으로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깊이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지금 앞선 말씀에 대해서 더 연결시켜 주고 계세요.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내 말을 생각한 만큼, 생각한 그대로 너희들이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것이라는, 평가받을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피상적으로 수박 겉핥기 식으로 듣는다면 그 의미도 완전치 못하고 또 흝어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최선을 다해서 들으려고, 심혈을 기울여 이해하려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쁘게 응답하고자 한다면 그에 따른 수확을 거두고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도 거기에 더 보태어 받게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세요. 즉 나의 노력에 비해서 더 큰 수확을 거둔다는 것. 서른 배, 예순 배가 아니라 백 배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 백 배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이사악의 얘기를 제가 설명을 드렸죠.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받는 거예요. 서른 배, 예순 배는 나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백 배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수확을 거두는 것이라고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씀을 새기고, 새기고 마음에 새겨듣고 또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면 하느님이 거기에 은총을 보태서 더 많은, 우리의 기대 이상의 것을 더 주신다는 거죠. 일단 하느님의 은총부터 청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노력부터가 중요한 거예요.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서 기도만 하면 대학 갈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한 다음에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 이후의 것들을 더 보상받는 것, 응답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서 거저 주는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더 은총을 주시는 분, 더 보태어 주시는 분. 내가 한 것을 노력의 결과로 받는 것 이상 더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죠. 예수님께 주의를 모으는 이는 노력의 대가를 넘어서 더 큰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현재의 선행과 종말의 보상이 정비례한다는 종말론적 인과율을 연상케 하는 데요. 하지만 종말론적 인과율과 대조적으로 마르코복음은 현재의 선행보다 종말에 더 많이 받게 된다라고 하는 종말론적 은총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른 맥락,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다른 의견도 덧붙여 말씀하죠.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이것 역시 단절어입니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빈궁해진다. 혹은 돈이 돈을 번다. 이 말씀처럼 단순하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릴 수도 있어요. 지금 4,25절이.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 본다면 좀 다릅니다. 즉 이해가 이해를 자라나게 하고 무지가 더 큰 무지를 키워낸다는 말이 되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의 뜻을 속으로 더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듣게 되면 곧바로 잊어버리게 되는 거예요. "너희는 새겨 들어라."(마르 4,22)라는 말씀은 그래서 무게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현재의 영적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가서 더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모아 놓은 것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 종말론적 인과율이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개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의 가르침을 위한 영적 다짐을 이끌어 내기 위함인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본문의 상황에 맞춰 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25절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제자들과 그분의 둘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당신이 드러내고 계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고 못하고 있어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아니면 다른 것에 관심을 더 두어서 마음이 흐트러진다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그리고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기 위해서 세상 물질적인 것들, 이기적인 생각들과 씨름해야만 합니다. 숱한 좌절과 실패의 한복판에서 드러나지 않게 세워지고 있는, 눈에 보기에는 아무것도 움직이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죠. 그런 하느님 나라를 바라봐야 하고 그 나라의 신비를 다루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 즉 비유에 대해 설명되었던, 제자들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으로 중단되었던 예수님의 호수 설교가 이제 다시 연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해서 가르치시면서 또 한번 비유를 사용하시는 데요. 두 개의 비유 즉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보면 앞선 4,3절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다시 말해서 4,3-9절에 나오는 파종의 비유에서와 같은 표상이 지금 저절로 자라나는 씨와 겨자씨의 비유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밝혀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지금 그와 비슷한 비유를 연결해서 들려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감춰져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는 동안에 제자들에게만 계시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지금 여기서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마르코복음에서만 언급되는 이 비유에서 저절로 싹이 돋아 자라는 씨앗은 수확으로 그려지는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 설립까지 이어지는 그 신비의 비밀스러운 힘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이 바로 거두어 들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해요. 하느님 나라가 처음에는 비록 미미했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 마지막에는 엄청난 결과를 낸다는 것. 특히 수확 때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고방식은 종말론적 차원이 비유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되고야 만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마르 4,2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마치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함께 시작해요. 연이어 발생하는 일련의 상황, 사건들처럼 말씀하세요. 앞선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그렇고, 하느님 나라와 관련해서 먼저 씨 뿌리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5,27) 밤에 자고 일어나고 이런 형태의 농부의 일상생활을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데요. 이런 묘사는 해가 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시 해가 지는 것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생각했던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하루 계산법이에요. 즉 유다인들은 지금 우리와 달리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보았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4,27절의 내용은 특별한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일단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에 밤에 잘 자는 것 외에 특별히 다른 것을 더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 보죠.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 질문을 해요. 그가 농부였다는 거. 쌀쌀맞은 얼굴로 손을 들고 예수님께 따지는 겁니다. "농부가 얼마나 바쁜지 아세요?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일이 있는 줄 아십니까? 들판의 돌도 치워야 되고 밭도 갈아야 되고, 잡초도 제거해야 되고 엄청나게 일이 많습니다. 농부가 그냥 논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이 말에 일리가 있어요. 이스라엘 농사법은 이미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는 4-10월까지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11월 초순 비가 내릴 즈음에 밀이나 보리를 뿌리죠. 씨를 뿌리는데 먼저 씨를 뿌리고 비가 온 후에 땅을 갈아엎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요. 즉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먼저 밭갈이를 해서 잡초를 제거한 다음에 씨를 뿌리지 않고 우리처럼. 반대로 먼저 씨를 뿌린 다음에 밭갈이를 하는 거예요.

 

만약 정말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농부가 질문을 했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셨을 거 같아요? 복음에는 없는 상상이니까. 예수님은 아마도 맞장구를 치시면서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씨 뿌리고 나서 일이 더 많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일단 씨를 뿌리면 씨가 싹이 트고 자라는데, 그렇게 자라는 것은 당신의 일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지, 당신이 전혀 일을 안한다고 얘기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이 내 말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얘기하실 거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서 강조하는 것은 잠만 자는 농부의 게으른 태도를 지적하기 위한 게 아니에요. 농부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농부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싹이 트고 자라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농부는 씨앗에 관련된 생명의 시작과 성장이라는 그 놀라움을 잘 모른다는 거죠. 농부는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 낼 필요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더 명확해져요.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마르 4,28) 이 장면에서는 농부는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4,28절을 보면 농부의 역할이 없어요. 마르코는 이것을 대신 뭘로 표현하죠? '저절로'라는 단어를 쓰고 있죠. 이 성경에서 '저절로'라는 단어를 이해하려면 사도 12,10을 이해해야 됩니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사도 12,10) 여기에서 그들은 베드로와 천사입니다. 초기 교회에서 헤로데 임금이 교회를 박해할 때 야고보 사도가 순교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도들, 베드로 사도를 잡아들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어느날 나타나서, 그러니까 백성들 앞에 끌어 내기 전날 밤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탈옥시키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이 그러니까 탈출한 베드로가 마르코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가게 된 거죠. 이 마르코복음의 저자 마르코, 이 사도행전 12,10절에 연계되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베드로가 피신했다. 그 마르코를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마르코는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여기서 루카는 사도행전을 쓰면서 그 장면에 '저절로' 감옥의 문이 열렸다.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리는데 전기로 사람이 가서 센서로 열리는 게 아니라. 그 당시 감옥문은 자동문이 아니에요. 전기로 하는 자동문이 아닌데 하느님이 그 돌문을 열어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절로라는 표현은 하느님에 의해서라는 게 숨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코복음에서도 '저절로' 씨앗이 자라나서 영근다는 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농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지요.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 4,29) 예수님은 농부를 곡식을 수확하는 시점으로 다시 데려오고 있습니다. 28절에 없었던 농부를 29절에는 다시 농부를 데려 오지요. 씨만 뿌려놓고 사라졌던 농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농부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씨는 여전히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지요. 씨는 저절로 자라서 수확의 시간을 결정하는 때, 곡식이 익는 때는 농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씨가 정하는 겁니다. 영글어 익지 않으면 결코 수확을 할 수 없어요. 서둘러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 더욱 빨리 자라도록 조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더 그럴 수 없어요. 오늘날 같으면 유전자 조작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시기를 조절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생명공학이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요. 일단 곡식이 익으면 수확은 바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농부도 열심히 밭갈이 하고 기다려야 돼요. 씨가 자라고 싹이 트는 것은 하느님이 시간을 주어서 해가 비추고 비가 내리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자란다는 거지요. 그러나 다 익고 수확 때가 되면 그때 농부는 낫을 바로 들이댑니다.

 

이것이 지금 대조되고 있어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농부에 의해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등장한 농부의 행동이 사뭇 다르지요? 이제까지는 좀 느긋했는데 수확을 거둘 때는 즉각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잖아요. 신속하게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댑니다. 많은 경우의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대조인데 여기서도 긴 시간 동안의 성장과 곧 낫을 댄다는 표현이 서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농부의 행위와 저절로 자라는 씨를 합치면 농부는 씨를 뿌렸고, 씨는 싹이 터서 자랐고 그거에 관해서 농부는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모르고 있고, 씨는 저절로 자라서 열매를 맺게 돼요. 이제 다시 농부가 수확을 위해서 낫을 댄다는 겁니다. 결국 씨를 뿌렸다는 표현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거죠. 그런데 그 처음이 미미하게 보이고 어떻게 그렇게 가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완성되어진다.

 

그런데 그 완성되어질 때, 세상 마지막 날 농부가 적극적으로 낫을 대어 수확을 거두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판, 마지막 날에 최후위 결정을 내리신다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자라난 씨앗에 낟알이 영글면 농부가 수확을 한다는 것. 이것은 바로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씨가 자라서 낟알이 영글고 곡식을 베어 수확하는 시점이 오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정해진 시간에 분명히 완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돼요.

 

그래서 비유의 마지막 구절의 단어들도 바로 이런 완성의 때를 향해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이 본문 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일까요? 이 마지막 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진행형이에요. 그런데 언제 그렇게 완성이 되어서 하느님께서 낫을 댈지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유예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 유예의 시간이 어떤 시간이에요? 우리가 말씀에 응답하는 시간, 즉 회개의 시간입니다. 회개의 시간이 아직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보내느냐? 이 회개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것을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그 과정의 시간, 회개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답게 하느님께 즉각 응답해야 됩니다. 우리가 즉각 응답하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하느님이 즉각 낫을 댈 거예요.

 

수확 때 곡식으로써 하느님께 갈 것이냐, 아니면 버려질 것이냐?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가능성의 시간이 아직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실망하지 마시고요. 지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실패했어도,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또 오늘을 열심히 살아갔으면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가톨릭평화방송)

 

오늘의 정리

(마르 4,21-29)

주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믿음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본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특징

ㅡ 네 가지 토막 말씀이 모아진 단절어 집성문

ㅡ 숨겨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내는 사고방식을 지님

ㅡ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의 흐름을 쫓아가는 방식을 택함

예수님의 가르침

ㅡ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등불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 그대로 받아들인 삶을 살아야 할 것

ㅡ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씨앗을 생명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

 

https://cafe.naver.com/withbiblestudy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신부, 마르코복음, 씨뿌리는사람의비유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