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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태복음에서의 최후심판 비유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1 조회수1,752 추천수0 반대(0) 신고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와서,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된 것을 보고,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비유의 본문을 짚어가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원 비유를 재구성 해보자.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32b)는 마태오의 표현이 아니다. 마태오복음의 다른 대목에서는 (13,41-49,24-31) 심판받을 사람들을 모으고 갈라놓기 위하여 파견되는 것은 천사들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직접 심판받을 자들을 갈라놓고, 31절에 언급된 천사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

 

33절에서 양과 염소를 분리시킨다는 표현은 팔래스티나의 실제 목축 장면을 반영한다. 목자는 낮에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다가 저녁이 되면 둘을 갈라, 염소는 지붕이 있는 곳에 들여보내고 양은 밖에 그대로 둔다. 염소는 밤에 이슬과 찬 공기를 맞으면 몸에 해롭지만, 양은 오히려 신선한 밤공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말로 염소를 암양으로 옮길 수도 있어서 암양과 숫양의 분리로 이해하는 주석가도 있다. 이 경우는 우유를 짜기 위해 암양을 숫양에서 갈라놓는 것으로이해한다.

 

34절에 임금이라는 칭호가 나오는데,심판관인 사람의 아들을 임금과 연결시키는 곳은 이 비유뿐이다(40.45절에도 나온다.). 우선 예수께서 당신 자신에게 사람의 아들 칭호를 부여하셨을 리 만무하다. 이 칭호는 초대교회의 예수 재림 사상에서 나온 것인데, 예수께서 지상 생애 동안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묵시문학의 용어를 써가며 당신 자신의 재림을 언급하셨을 것 같지 않다.

 

더구나 당시 팔래스티나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어느 누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일반 대중 앞에서 스스로에게 임금이라는 칭호를 공공연하게 부여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34절의 임금은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오른편은 유다 전통이나 우리 관습에서도 좋은 쪽또는 올바른 쪽을 뜻한다. 따라서 오늘쪽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의인들임을 암시한다.

 

34절 후반부 임금의 말씀,“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에서 내 아버지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마태오의 편집 요소, 곧 그가 전승에 덧붙인 말마디이다. 마태오는 ,‘세상 창조 때부터를 저주받은 자들에게 내리는 벌과는 연결시키지 않았다.(41) 마태오가 보기에는 벌이 결코 하느님의 원초적인 계획에는 들어와 있지 않다. 하느님 편에서는 구원을 징벌보다 우위에 두신다.

 

이어지는 두 구절(35-36)은 여섯 가지 자선과 사랑의 행위를 열거한다. 굶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힌 상태는 물질적.신체적 어려움과 고통을 말한다. 이 여섯 가지 불행한 처지는 각각 여섯 가지 자비 행위, 곧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따뜻하게 맞이하고 입을 것을 주며, 돌보아주고 방문하는 행위와 만난다. 한편 고통받는 사람의 처지가 반드시 이 여섯 가지 상태로 한정될 필요는 없다. 이 비유를 대하는 독자는 여기에 덧붙여 정신적.영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처지도 염두에 두어야 마땅하다.

 

너희는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때 나를 도와주었다.”라고 말하는 임금에게, 의인들은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대접해 드렸느냐고 묻는다(37-39). 의인들의 반문에 다시 여섯 가지 딱한 처지와 그에 대한 여섯 가지 자선 행위가 반복된다. 예수의 원 비유에는 보상을 바라는 자비 행위의 개념이 배제된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고통받는 이웃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을 직접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의인들에게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하고 말한다. 여기서 형제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가리키는 마태오의 편지 요소이니, 예수의 원 비유를 재 구성하기 위해서 생략한다.

 

그렇게 되면여기 있는 사람은 곧 내 눈 앞에서 지금 고통을 당하는 내 이웃이다. 이웃데 대한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은 구원을 전제로 한 율법의 실천과 거리가 있다. 의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이웃 안에서 상처받기 쉬운 모습으로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은 악인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임금은 왼편에 있는 악인들을 심판한다(41). 유다 전통이나 우리 관습에서 왼편은 오른편과는 달리 안 좋은 쪽또는 올바르지 않은 쪽이다. 임금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선고한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곳에 들어가라.” 이들이 갈 곳은 오른편에 있는 이들이 갈 곳과는 달리,그들을 위해 미리 마련된 곳이 아니다. 그곳은 원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해둔 곳이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이 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기 위해 준비된 곳으로 가야 하는가? 그 이유가 42-43절에 나온다. 이 두 구절의 내용은 35-36절에 묘사한 여섯 가지 불행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36절의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주지 않았다.”로 줄인다. 자신들이 돌보아주던 불행한 이웃 안에서 허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의인들처럼,악인들도 자신들이 외면하거나 소홀히 했던 이웃이 바로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44 절에서 악인들은 임금에게 항변한다. 그런데 37-38절과는 달리 그들의 항변에는 일일이 자신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제일 마지만에만“(주님,주님께서 언제 ...하셨기에)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라는 변명을 붙인다.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기 위한 문필 기법일 수도 있고,악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감추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악인들의 항변은 사랑의 실천 없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의 항변을 대변한다. “당신께서 불행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던들, 우리가 절대로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악인들의 항변에 임금은 40절에서처럼 고통받는 이웃들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밝힌다(45). 고통받는 이웃과 임금의 동일화가 의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는 계기인 반면,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46). 임금의 대답은 마태 7,21-23을 연상시킨다. 앞 장에서 이미 인용한 이 대목은 마태오가 예수어록(루카 13,25-27.병행 참조)에서 따온 전승이다.

 

예수께서 최후심판의 비유를 담아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는 명백하다. 세상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에서 각 사람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인종이나 종교나 지성이나 부나 권력의 차이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있다. 최후심판 때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사실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나 미움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자신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와 사랑, 반대로 동료 인간에게 보내는 무관심과 미움은 그 행위가 어떤 이들으로 이루어졌든지 하느님께 직접 영향을 미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인간 안에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의 원 비유와 마태오의 해석을 나누어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최후심판의 비유는 지상의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전해주신 비유이다. 이 비유의 장엄함 분위기와 묵시적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마태오가 이 비유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비유는 마태오복음 전체의 윤리관을 충실히 반영하고 요약한다. 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한 비유의 메지지와 윤리관을 우리 현실에 어떻게 적용시키고 반영할 것인가?

 

첫째, 우리는 이 비유가 속해 있는 마태24-25장의 묵시론적 관점에 지목해야 한다. 묵시록은 하느님 편에서 본, 인간의 삶과 역사에 관한 견해이다. 이 세상에는 어찌하여 죄인들이 번영을 누리고 죄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잘못된 인간의 역사와 현실은 의롭고 공정하신 하느님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된다. 묵시론은 이 세상을 훼손시키는 악과 불의 앞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말고, 그것들이 자아내는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정의에 바탕을 둔 질서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와 악은 폭로되고 선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둘째, 마태오는 최후심판의 비유에서 전통적인 묵시론에 두 가지 수정을 가한다. 하나는 종말에 닥칠 심판의 정황을 자세하게 그리는 대신. 심판의 척도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앞에서 마태오복음 저자가 정의의 개념을 무척 중요하게 부각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정의는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인관과 세상을 구원하는 행위이고,인간 편에서 볼 때는 동료 인간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행위이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뒤틀린 세상과 역사가 질서를 회복하고 바로 설 수 있다.

 

우리로서는 이 유다 그리스도교적 정의 개념 안에 불교에서 강조하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연결시켜 고찰해볼 만 하다. 동료 인간에게 보내는 자비와 사랑을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연민이나 존중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질서가 인간 세사에 회복되고 세워진다. 마태오가 전통적 묵시론에 가한 또 다른 수정은 이 묵시록을 구원역사, 곧 구세사의 틀 안에서 표현하려는 것이다. 위에서 최후심판의 척도로 제시된 자비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분이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 자매들에게 봉사하시다가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떠난 지금, 정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질서와 회복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 안에서 구현된다. 마태오의 묵시록은 예수의 가르침(바오로의 가르침도 포함됨)을 계속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정 윤리로 보려는 신학사조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사람의 계명은 정의를 위한 소명과 분리될 수 없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인간 개개인의 구원보다 세상 전체의 의화에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셋째 마태오는 이 비유 안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앞에서 우리는 마캐오가 덧붙인 모든 민족들형제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각각 이방인들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마태오의 편집에 따르면, 최후심판 때 이방인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분리시키는 물질적. 신체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교회론적 전망은 선교에 뛰어든 교회가 고통을 당할 것임을 전제한다. 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되고 헐벗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고 외치는 모든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는 스스로 이 선교사명에 때문에 똑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들의 스승이 먼저 그런 길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저자는 지상의 예수께서 발설하신 이 마지막 비유 말씀 안에 묵시록적 전망을 통한 온 세상의 보편적 구원관, 구원론과 그리스도론의 연결, 진정한 제자됨과 정의와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근본 윤리 등 복음서 전체의 주요 가르침을 모두 담아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최후심판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라고 할 수도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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