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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23 조회수1,427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11월 23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과부의 렙톤 두 닢 (루카21,1-4)

2013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1독서<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14,1-3.4-5)

나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화답송 시편 24(23),1-2.3-4ㄱㄴ.5-6(◎ 참조)

◎ 주님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 주님의 것이라네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강 위에 굳히셨네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이들이 야곱이라네그분을 찾는 세대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복음 환호송(마태 24,42.44)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복음<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루카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묵시록14,1~3.4ㄴ~5)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다룬 전술한 내용(묵시록 12장과 13장)과 부조화를 이루는 듯한 내용들이 묵시록 14장의 초두에 등장한다. 묵시록 14장에서는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영광을 노래하는 내용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묵시록14,1-5).

 

그러나 이와같은 의외의 도입은 묵시록 6장 17절에서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라고 물은 후, 묵시록 7장 1-17절에서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을 묘사하고, 그들의 영광을 노래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즉 사도 요한은 이와 동일한 패턴으로 묵시록 12장, 13장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두 짐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을 묘사한 후, 14장에서 그토록 철저한 사탄의 핍박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보호하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묵시록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도 요한의 관심은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묵시록 14장은 하느님의 인장으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시온산에서 부르는 노래를 다룬 1~5절,  세 천사 전하는 대바빌론의 멸망 및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 경고를 다룬 6~13절,  또 다른 세 천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천사에 의한 마지막 수확(추수)과 심판을 다룬 14~20절로 구분한다.

 

본문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토 아르니온'(to arnion ; the Lamb)은 묵시록 13장 11절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아르니오'(arnio)즉 '땅에서 나온 뿔이 둘인 짐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은 명백히 묵시록 5장 6절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어린양 즉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신 바로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은 '아르니온'(arnion) 앞에 정관사 '토'(to)가 선행하고 있다는 점 뿐 아니라, 그가 서있는(헤스토스; hestos; stood) 곳이 바닷가 모래 위가 아닌(묵시록12,18), 시온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시온산(토 오로스 시온 ; to oros Sion)은  본래 예루살렘 동남쪽 산등성이 즉 키드론과 티로페이온(tyropeion) 골짜기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지만,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을 지배해 온 후로는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으며, 상징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낸다(시편2,6; 50,2).

 

따라서 구약의 묵시 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것을 새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이해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엘3,5 ; 이사24,23; 미카4,7).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히브12,22).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은 묵시록 7장 4절에서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보증하는 인장받은 자들의 수효이다. 이들은 결코 실수 차원에서 언급된 144,000 명이 아니다. 묵시록 7장 5~8절에 의하면, 이 수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뽑혀 12,000 × 12 = 144,000 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부터 산출된 144,000이란 수는 민수기 1장 19~46절에서 전투를 위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도합  603,550 명으로,본문에 언급된 144,000 명과는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아울러 묵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열두 지파에서 뽑힌 각각의 수는 12,000 명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 요한이 특별히 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상징적인 수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런내다.

 

실제로 144,000 은 12 × 12 ×1000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의 수를 곱하고,  거기에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수(1000)를 곱한 것으로서,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묵시록 7장 9절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144,000이라는 '무제한의 제한'의 수를 통해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내포한 동일한 개념, 즉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묵시록 14장 1절에서 이들은 승리한 천상 교회의 상징  곧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 14장 1절에 언급된 144,000은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각각 세말에 맹위를 떨칠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상징하는 두 짐승의 악랄하고도 흉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교회가 승리함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종국적으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서고야 마는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묵시록 7장 3절, 4절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거기에 언급된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힌 인장은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이다.

 

히브리 관념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름'으로 번역한 '오노마'(onoma)는 존재와 인격이란 의미를 창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인격에 동참한 자들, 곧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묵시록14,3).

 

'적혀' 로 번역된 '게그람메논'(gegrammenon ; written)은 '기록하다' 라는 뜻을 지닌 '그라포'(graph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자력으로 스스로 인을 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보증으로 해서, 그들에게 인을 치셨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이와같은 인장 받음의 효력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묵시록 7장 2절을 보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진 주체가 천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천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권위에 순명하고, 그분의 권위를 대행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십사만 사천명 곧 천상의 승리한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인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본절에서 '있었습니다' 로 번역된 '에쿠사이'(echusai)는 '소유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 have)의 현재 분사형이란 점 역시, 천상의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과 하느님의 이름을 현재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에게 경배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되게 갈라진다(묵시13,16.17).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속주 어린양의 소유로서 시온 산위에 서 있지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묵시14.10).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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